아파트 주차장에 한동안 묵혀두었던 차를 끌고서 밖에 나왔다. 핸들을 잡고있는 이 손길이 얼마나 어색하던지. 준하는 아직도 가죽냄새가 물씬 풍기는 핸들을 툭툭 쳐보았다. 그때 옆 창문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밖을 쳐다봤을때는 환히 웃고있는 지우가 보였다.
“오래 기다렸어요?”
문을 열고 자리에 앉으며 그녀가 물었다.
“아니, 별로.”
지우의 학원건물 앞에서 차를 세워놓고 기다리던 준하는 순간 지우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한듯 바라보았다. 전혀 그녀가 즐겨입지 않는듯한 옷차림이었다. 무릎까지 가리는 베이지색의 정장 투피스와 그리 굽이 놉지않은 검은색 구두. 그녀의 목에는 어둠속에서도 반짝거리는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가 있었다. 항상 봐왔던 찰랑거리는 생머리대신 웨이브가 잘 된 부드러운 머리결이 보였다. 가늘고 긴 그녀의 두 다리를 가려왔던 타이트한 청바지와 마른 상체를 더욱 아름답게 보여주던 짧은 반팔 티가 아닌 여성스런 의상을 보니 전혀 다른 사람을 대하는것 같았다.
“어서 가요. 좀 늦은거같은데.”
“어.”
고급스러우면서도 짙은 어둠이 깔려있는 바로 들어섰다. 하지만 어둠속에서도 옅은 빨간 조명이 조심스럽게 길을 내주고 있었다.
“어이! 김준하!”
그의 이름을 부르는 성운을 어둠속에서 발견하고 준하는 손을 들어보였다. 성운의 부름에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들고있던 잔을 들어올리며 환호성을 외쳤다. 지우는 최대한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준하의 옆에 붙어 걸어갔다. 성운은 일어나 준하와 지우를 옆에 앉혔다.
“이 자식! 죽은줄 알았다, 임마.”
코웃음을 친 준하는 말 대신 성운의 등을 살짝 쳤다.
“어? 강지우씨 맞죠?”
날 아는 사람도 있던가? 지우는 고개를 돌려 현식을 쳐다봤다. 어디서 본것같은데.
“저 기억안나세요? 준하랑 같이 병원하는데.”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준하녀석이랑 같이 나타날줄은 몰랐네요.”
그제서야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지우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다들 놀란듯 마시던 술도 손에서 내려놓고 지우를 쳐다봤다. 현식한테 인사를 할때부터 준하는 알아차렸다. 이 여자는 여우였다.
“아니, 이런 멍청한 녀석한테 이렇게 아름다우신 여자분이 있었다니!”
“복받았네!” ”힘들죠? 준하같은 꼴통 상대하시느라.”
왜 다들 나를 하나같이 멍청하고 꼴통이라고 하는걸까. 아예 불능이라고 하지 그러나.
준하는 한숨을 내쉬고는 옆에서 성운이 마시다 내려놓은 술잔을 들여올려 마셨다. 그의 말이라면 항상 지지않고 말대꾸하던 지우는 입을 가늘게 다물고는 사람들의 질문과 환호에 미소만 짓고있었다. 다들 하늘에서 천사가 하나 떨어진것 마냥 그녀를 애지중지했다. 친구들의 장난에 동참하던 성운을 지혜가 끌어내렸다.
“그만 하지?”
성운은 아내의 말이라면 하던일도 중도하차하고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하는 사람이었다. 가느다란 눈으로 노려보고있는 지혜의 모습에 성운은 자리에 제대로 앉았다. 그리고 옆에서 홀짝홀짝 술을 들이키고 있는 준하에게 나지막히 물었다.
“사귀냐?”
분명히 조용히 그에게만 한말이 맞는데 어떻게 다 들었는지 지우가 성운을 쳐다보며 말했다.
“네.”
환호성이 더 커지고 주위가 더 산만해졌다. 성운은 그 대답하나만으로도 행복한지 지혜의 술잔을 빼앗아 멍하니 지우를 쳐다보고있는 준하의 손에 쥐어진 술잔에 건배를 했다.
“드디어 너도 인간세계에 입성을 하는구나! 축하한다, 이 자식이아.”
준하는 조금은 술기운이 올라오는듯 얼굴이 달아오르는것을 느꼈다. 하지만 두눈만은 멀쩡히 초롱초롱했다. 그는 분명히 지우를 마주보고있었다. 술김에 그런걸까. 입가에 미소를 걸친채 바로 옆에서 그를 바라보는 그녀는 너무 아름다웠다. 심지어 서현마저 잊어버리게 할만큼. 서현..젠장..서현…. 그는 지우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술을 들이켰다. 잊은 줄알았는데 이런때 다시 생각나는건 또 뭐지. 이제는 더이상 지우를 쳐다볼수가 없었다. 미안해서 그런걸까.
“야, 술 그만마셔. 술도 못하는 주제에.”
성운이 술잔을 빼앗으려 했지만 준하의 힘이 더 셌다.
“제 술 엄청 늘었던데, 그동안?”
현식이 테이블에 놓여진 안주를 집어먹으며 아무렇지도 않은듯 성운에게 대꾸했다.
“쓸데없는 레스토랑이나 하더니 그렇지. 사업하니까 머리가 지근지근 아펐지? 그니까 술을 막 퍼마셨겠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알아서 상상하고 추측하며 말하는 성운이었지만 준하는 틀렸다고 말해주지도 않은체 가만히 앉아있었다. 비워진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쇼파에 등을 대고 편안히 앉았다. 가만히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지우를 쳐다봤다. 친구들의 관심은 아직도 끊이질 않고있었다. 그녀에게 술을 권하고있었지만 그녀는 술을 못한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무슨 일 하세요?”
“영어강사해요.”
“아, 그러세요? 어째 선생님같은 분위기가 풍기더라구요.”
수줍은 미소를 띄며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여자한테 저런 모습도 있었나..하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준하는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고보니 왠지 아까부터 지우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하며 찝쩍대는 저 자식이 맘에 안든다.
“야, 너 지금 지우 꼬시는거야?”
호탕하게 한번 웃으면서 공격하는 준하의 모습에 성운이 나섰다.
“야, 이희철. 그만해라. 지우씨 준하 애인이래잖아.”
“에이, 아닌거같은데?”
이제는 정말 술에 취한거 같다. 양주는 정말 이길 자신이 없다. 몇잔만 마셔도 온몸에서 힘이 빠져버리고 몽롱해진다. 준하는 보란듯이 무릎에 가지런히 올려놓고있던 지우의 손을 잡아 올렸다.
“사귀니까 데리고왔지. 아님 할일 없이 그냥 장식용으로 달고오냐?”
집으로 돌아갈때가 되었을때는 준하가 술에서 거의 깨던참이었지만 지우는 그가 운전을 하게 내버려둘수는 없었다. 결국 그에게서 키를 빼앗은 지우는 잠시 잠에 들었던 준하가 눈을 떴을때는 운전석에서 운전을 하고있었다.
“사귀는거 아니니까 장식용으로 나 달고간거였어요?”
“어?”
잠때문에 아직 정신이 덜 깨인 준하는 무슨 얘긴지 알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 지우는 화난 목소리가 아니었다. 기분이 좋은듯 환한 목소리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두눈과 마주쳤을때 가슴이 시려왔다. 겉모습은 미소를 짓고 환할 망정 속은 상해있는 얼굴. 말하지않아도 표현하지않아도 그녀의 얼굴만으로도 알수있었다.
“아니라는거 알잖아. 술김에 그냥 한소리야.”
관자놀이가 지근지근 아파왔다. 내가 언제 그녀가 장식용이라는 그런 말도 했었나. 기억도선명하지않고 흐릿흐릿할 뿐이었다. 그래도 분명 그런 얘길했으니까 지금 저러고 있는거겠지.
“휴. 아니라는거 알아요. 같이가자고 한거는 나니까.”
“여기 근처에서 잠깐 커피좀 마시고 가자. 그래야 술이 좀 깰꺼같아.”
“이 시간에 문연 카페가 어딨어요. 집에 가서 마셔요. 아, 집이 어디예요?”
황당해서 지우를 쳐다봤다. 내 집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도로만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는건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현식씨가 어디라고 대충 설명은 해줬는데, 나 아직 서울지리 잘 모른다구요. 아..열받아.”
“열받으니까 뭐 시원한 냉수라도 마시고 다시 집찾자고.”
커피를 한잔 마셔야 꼭 술이 깬다. 그리고 지금 이상태로 계속 차에 있으면 속이 거북해서 언제 일을 칠지도 모르는일이었다. 준하의 표정을 보고서 왠지 심각하다는 느낌을 받은 지우는 그가 설명해주는 방향대로 차를 몰고서 한 카페앞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문을 일찍 닫지않는 카페인지 12시가 되도록 열려있었다. 원두커피를 시킨 준하는 쇼파안에 몸을 깁숙히 맡긴채 잠시 잠이 들었다.
“준하씨, 커피나왔어요.”
지우는 주문한 아이스커피를 스트로우로 마시며 준하를 깨웠다. 커피를 한잔 마시자 잠에서 덜깬것같이 멍하던 준하의 정신이 바로 돌아왔다.
“레스토랑 했었어요? 그것도 속초에서 했다면서요?”
친구들한테서 다 들었나보다. 하지만 술에 실컷 취해있던 그는 친구들이 그런 얘기를 했던것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멀쩡하다 생각했었는데 많이 취해있었나보다.
“어.”
정말 짧고 간결하네. 지우는 들리지않을만큼의 작은 한숨을 내쉬고 아이스커피를 한숨에 다 마셔버렸다. 긴 컵안에는 얼음만이 남아있었다.
“전문의 따자마자..병원 나왔었어.”
왜그랬냐고 묻고싶었지만 이제 그만 물어보라는듯 준하의 얼굴은 딱딱했다.
“한국에는 왜 온거야? 단순히 영어가르치고 온건 아닐테고.”
“왜요? 영어가르치는 일이 뭐 어때서요. 그래서 왔을수도 있죠.”
아이스커피를 다 마신게 아쉬웠는지 그녀는 남아있는 얼음까지 씹고있었다.
“전공도 영어아니잖아.”
“어떻게 알아요. 아닌지 그런지.”
뾰루뚱해진 표정으로 입술을 앞으로 쭉내밀고는 죄없는 얼음을 스트로우로 쿡쿡 찔러댔다. 서로를 너무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다는 사실이 내심 마음에 들지않았다. 하지만 이 남자는 자진해서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말할 위인은 못됐다. 그의 눈 주위에 검은 반달이 생겨있었다. 많이 피곤해보였다. 아침에 출근해서 밤에 퇴근하는 개인병원 의사가 뭐가 그렇게 피곤한 일일까. 혼자 사는 노총각이라 제대로 뭘 안해먹고 사는건가. 그래도 처음 그녀가 진료받으러 갔을때보다 살이 더 빠졌거나 하는건 아니었다.
“무슨 전공했는데?”
“나도 의대가려했었어요.”
심드렁하게 별거 아니라는듯 지우가 말했다. 그녀는 또다시 얼음을 씹었다.
“그랬어? 그런데?”
“안갔죠, 뭐. 의대들어가는 시험은 합격하긴 했었는데, 그냥 안갔어요.”
이 여자가 멍청하다고 생각한적은 없었다. 겉으로만 봐도 똑부러진게 공부도 잘했을법하다. 아주 삼박자가 딱 맞아 떨어지는 여자였다. 미모. 머리. 성격. 아, 성격부분에서는 좀 생각을 해봐야겠다.
“왜? 시험 합격하기도 힘들다던데, 미국에선.”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의대 안간것에 대한 후회가 없어보였다.
“쓸모없는 일이라는걸 깨달았거든요.”
“뭐가? 사람 고치는 일이?”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안에서 씹고있던 얼음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얼음을 컵에서 꺼냈다. 얼음이 혀에 닿아 녹아들때 스며드는 차가움이란. 의대시험을 위해 죽어라 공부할때마다 잠이오면 이렇게 얼음을 씹어먹고는 했었는데. 알고보면 참 허무한 선택이었다. 공든 탑을 스스로 무너뜨려버렸다. 친구들은 나보고 미쳤다, 정신나갔다며 나무랬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도 엄마만 살아있었더라면 그녀는 의사가 되어있었을지도 모르는일이다.
“시험점수가 발표되기 전에..엄마가 돌아가셨어요. 심장마비였는데. 내가 아무리 CPR을 했어도..”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얼음이 더 먹고싶어졌다. 입안에서 다 녹아버린 얼음은 온데간데 사라져버렸고 컵안에 가득 담겨있던 얼음들도 없었다.
“엠뷸런스에 엄마가 실려갈때 나는 내 두손을 바라보고서는 몸을 떨었어요. 엄마를 살려내지 못했다는게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이야기 [4]
[4]
아파트 주차장에 한동안 묵혀두었던 차를 끌고서 밖에 나왔다. 핸들을 잡고있는 이 손길이 얼마나 어색하던지. 준하는 아직도 가죽냄새가 물씬 풍기는 핸들을 툭툭 쳐보았다. 그때 옆 창문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밖을 쳐다봤을때는 환히 웃고있는 지우가 보였다.
“오래 기다렸어요?”
문을 열고 자리에 앉으며 그녀가 물었다.
“아니, 별로.”
지우의 학원건물 앞에서 차를 세워놓고 기다리던 준하는 순간 지우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한듯 바라보았다. 전혀 그녀가 즐겨입지 않는듯한 옷차림이었다. 무릎까지 가리는 베이지색의 정장 투피스와 그리 굽이 놉지않은 검은색 구두. 그녀의 목에는 어둠속에서도 반짝거리는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가 있었다. 항상 봐왔던 찰랑거리는 생머리대신 웨이브가 잘 된 부드러운 머리결이 보였다. 가늘고 긴 그녀의 두 다리를 가려왔던 타이트한 청바지와 마른 상체를 더욱 아름답게 보여주던 짧은 반팔 티가 아닌 여성스런 의상을 보니 전혀 다른 사람을 대하는것 같았다.
“어서 가요. 좀 늦은거같은데.”
“어.”
고급스러우면서도 짙은 어둠이 깔려있는 바로 들어섰다. 하지만 어둠속에서도 옅은 빨간 조명이 조심스럽게 길을 내주고 있었다.
“어이! 김준하!”
그의 이름을 부르는 성운을 어둠속에서 발견하고 준하는 손을 들어보였다. 성운의 부름에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들고있던 잔을 들어올리며 환호성을 외쳤다. 지우는 최대한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준하의 옆에 붙어 걸어갔다. 성운은 일어나 준하와 지우를 옆에 앉혔다.
“이 자식! 죽은줄 알았다, 임마.”
코웃음을 친 준하는 말 대신 성운의 등을 살짝 쳤다.
“어? 강지우씨 맞죠?”
날 아는 사람도 있던가? 지우는 고개를 돌려 현식을 쳐다봤다. 어디서 본것같은데.
“저 기억안나세요? 준하랑 같이 병원하는데.”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준하녀석이랑 같이 나타날줄은 몰랐네요.”
그제서야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지우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다들 놀란듯 마시던 술도 손에서 내려놓고 지우를 쳐다봤다. 현식한테 인사를 할때부터 준하는 알아차렸다. 이 여자는 여우였다.
“아니, 이런 멍청한 녀석한테 이렇게 아름다우신 여자분이 있었다니!”
“복받았네!”
”힘들죠? 준하같은 꼴통 상대하시느라.”
왜 다들 나를 하나같이 멍청하고 꼴통이라고 하는걸까. 아예 불능이라고 하지 그러나.
준하는 한숨을 내쉬고는 옆에서 성운이 마시다 내려놓은 술잔을 들여올려 마셨다. 그의 말이라면 항상 지지않고 말대꾸하던 지우는 입을 가늘게 다물고는 사람들의 질문과 환호에 미소만 짓고있었다. 다들 하늘에서 천사가 하나 떨어진것 마냥 그녀를 애지중지했다. 친구들의 장난에 동참하던 성운을 지혜가 끌어내렸다.
“그만 하지?”
성운은 아내의 말이라면 하던일도 중도하차하고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하는 사람이었다. 가느다란 눈으로 노려보고있는 지혜의 모습에 성운은 자리에 제대로 앉았다. 그리고 옆에서 홀짝홀짝 술을 들이키고 있는 준하에게 나지막히 물었다.
“사귀냐?”
분명히 조용히 그에게만 한말이 맞는데 어떻게 다 들었는지 지우가 성운을 쳐다보며 말했다.
“네.”
환호성이 더 커지고 주위가 더 산만해졌다. 성운은 그 대답하나만으로도 행복한지 지혜의 술잔을 빼앗아 멍하니 지우를 쳐다보고있는 준하의 손에 쥐어진 술잔에 건배를 했다.
“드디어 너도 인간세계에 입성을 하는구나! 축하한다, 이 자식이아.”
준하는 조금은 술기운이 올라오는듯 얼굴이 달아오르는것을 느꼈다. 하지만 두눈만은 멀쩡히 초롱초롱했다. 그는 분명히 지우를 마주보고있었다. 술김에 그런걸까. 입가에 미소를 걸친채 바로 옆에서 그를 바라보는 그녀는 너무 아름다웠다. 심지어 서현마저 잊어버리게 할만큼. 서현..젠장..서현…. 그는 지우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술을 들이켰다. 잊은 줄알았는데 이런때 다시 생각나는건 또 뭐지. 이제는 더이상 지우를 쳐다볼수가 없었다. 미안해서 그런걸까.
“야, 술 그만마셔. 술도 못하는 주제에.”
성운이 술잔을 빼앗으려 했지만 준하의 힘이 더 셌다.
“제 술 엄청 늘었던데, 그동안?”
현식이 테이블에 놓여진 안주를 집어먹으며 아무렇지도 않은듯 성운에게 대꾸했다.
“쓸데없는 레스토랑이나 하더니 그렇지. 사업하니까 머리가 지근지근 아펐지? 그니까 술을 막 퍼마셨겠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알아서 상상하고 추측하며 말하는 성운이었지만 준하는 틀렸다고 말해주지도 않은체 가만히 앉아있었다. 비워진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쇼파에 등을 대고 편안히 앉았다. 가만히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지우를 쳐다봤다. 친구들의 관심은 아직도 끊이질 않고있었다. 그녀에게 술을 권하고있었지만 그녀는 술을 못한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무슨 일 하세요?”
“영어강사해요.”
“아, 그러세요? 어째 선생님같은 분위기가 풍기더라구요.”
수줍은 미소를 띄며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여자한테 저런 모습도 있었나..하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준하는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고보니 왠지 아까부터 지우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하며 찝쩍대는 저 자식이 맘에 안든다.
“야, 너 지금 지우 꼬시는거야?”
호탕하게 한번 웃으면서 공격하는 준하의 모습에 성운이 나섰다.
“야, 이희철. 그만해라. 지우씨 준하 애인이래잖아.”
“에이, 아닌거같은데?”
이제는 정말 술에 취한거 같다. 양주는 정말 이길 자신이 없다. 몇잔만 마셔도 온몸에서 힘이 빠져버리고 몽롱해진다. 준하는 보란듯이 무릎에 가지런히 올려놓고있던 지우의 손을 잡아 올렸다.
“사귀니까 데리고왔지. 아님 할일 없이 그냥 장식용으로 달고오냐?”
집으로 돌아갈때가 되었을때는 준하가 술에서 거의 깨던참이었지만 지우는 그가 운전을 하게 내버려둘수는 없었다. 결국 그에게서 키를 빼앗은 지우는 잠시 잠에 들었던 준하가 눈을 떴을때는 운전석에서 운전을 하고있었다.
“사귀는거 아니니까 장식용으로 나 달고간거였어요?”
“어?”
잠때문에 아직 정신이 덜 깨인 준하는 무슨 얘긴지 알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 지우는 화난 목소리가 아니었다. 기분이 좋은듯 환한 목소리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두눈과 마주쳤을때 가슴이 시려왔다. 겉모습은 미소를 짓고 환할 망정 속은 상해있는 얼굴. 말하지않아도 표현하지않아도 그녀의 얼굴만으로도 알수있었다.
“아니라는거 알잖아. 술김에 그냥 한소리야.”
관자놀이가 지근지근 아파왔다. 내가 언제 그녀가 장식용이라는 그런 말도 했었나. 기억도선명하지않고 흐릿흐릿할 뿐이었다. 그래도 분명 그런 얘길했으니까 지금 저러고 있는거겠지.
“휴. 아니라는거 알아요. 같이가자고 한거는 나니까.”
“여기 근처에서 잠깐 커피좀 마시고 가자. 그래야 술이 좀 깰꺼같아.”
“이 시간에 문연 카페가 어딨어요. 집에 가서 마셔요. 아, 집이 어디예요?”
황당해서 지우를 쳐다봤다. 내 집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도로만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는건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현식씨가 어디라고 대충 설명은 해줬는데, 나 아직 서울지리 잘 모른다구요. 아..열받아.”
“열받으니까 뭐 시원한 냉수라도 마시고 다시 집찾자고.”
커피를 한잔 마셔야 꼭 술이 깬다. 그리고 지금 이상태로 계속 차에 있으면 속이 거북해서 언제 일을 칠지도 모르는일이었다. 준하의 표정을 보고서 왠지 심각하다는 느낌을 받은 지우는 그가 설명해주는 방향대로 차를 몰고서 한 카페앞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문을 일찍 닫지않는 카페인지 12시가 되도록 열려있었다. 원두커피를 시킨 준하는 쇼파안에 몸을 깁숙히 맡긴채 잠시 잠이 들었다.
“준하씨, 커피나왔어요.”
지우는 주문한 아이스커피를 스트로우로 마시며 준하를 깨웠다. 커피를 한잔 마시자 잠에서 덜깬것같이 멍하던 준하의 정신이 바로 돌아왔다.
“레스토랑 했었어요? 그것도 속초에서 했다면서요?”
친구들한테서 다 들었나보다. 하지만 술에 실컷 취해있던 그는 친구들이 그런 얘기를 했던것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멀쩡하다 생각했었는데 많이 취해있었나보다.
“어.”
정말 짧고 간결하네. 지우는 들리지않을만큼의 작은 한숨을 내쉬고 아이스커피를 한숨에 다 마셔버렸다. 긴 컵안에는 얼음만이 남아있었다.
“전문의 따자마자..병원 나왔었어.”
왜그랬냐고 묻고싶었지만 이제 그만 물어보라는듯 준하의 얼굴은 딱딱했다.
“한국에는 왜 온거야? 단순히 영어가르치고 온건 아닐테고.”
“왜요? 영어가르치는 일이 뭐 어때서요. 그래서 왔을수도 있죠.”
아이스커피를 다 마신게 아쉬웠는지 그녀는 남아있는 얼음까지 씹고있었다.
“전공도 영어아니잖아.”
“어떻게 알아요. 아닌지 그런지.”
뾰루뚱해진 표정으로 입술을 앞으로 쭉내밀고는 죄없는 얼음을 스트로우로 쿡쿡 찔러댔다. 서로를 너무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다는 사실이 내심 마음에 들지않았다. 하지만 이 남자는 자진해서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말할 위인은 못됐다. 그의 눈 주위에 검은 반달이 생겨있었다. 많이 피곤해보였다. 아침에 출근해서 밤에 퇴근하는 개인병원 의사가 뭐가 그렇게 피곤한 일일까. 혼자 사는 노총각이라 제대로 뭘 안해먹고 사는건가. 그래도 처음 그녀가 진료받으러 갔을때보다 살이 더 빠졌거나 하는건 아니었다.
“무슨 전공했는데?”
“나도 의대가려했었어요.”
심드렁하게 별거 아니라는듯 지우가 말했다. 그녀는 또다시 얼음을 씹었다.
“그랬어? 그런데?”
“안갔죠, 뭐. 의대들어가는 시험은 합격하긴 했었는데, 그냥 안갔어요.”
이 여자가 멍청하다고 생각한적은 없었다. 겉으로만 봐도 똑부러진게 공부도 잘했을법하다. 아주 삼박자가 딱 맞아 떨어지는 여자였다. 미모. 머리. 성격. 아, 성격부분에서는 좀 생각을 해봐야겠다.
“왜? 시험 합격하기도 힘들다던데, 미국에선.”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의대 안간것에 대한 후회가 없어보였다.
“쓸모없는 일이라는걸 깨달았거든요.”
“뭐가? 사람 고치는 일이?”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안에서 씹고있던 얼음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얼음을 컵에서 꺼냈다. 얼음이 혀에 닿아 녹아들때 스며드는 차가움이란. 의대시험을 위해 죽어라 공부할때마다 잠이오면 이렇게 얼음을 씹어먹고는 했었는데. 알고보면 참 허무한 선택이었다. 공든 탑을 스스로 무너뜨려버렸다. 친구들은 나보고 미쳤다, 정신나갔다며 나무랬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도 엄마만 살아있었더라면 그녀는 의사가 되어있었을지도 모르는일이다.
“시험점수가 발표되기 전에..엄마가 돌아가셨어요. 심장마비였는데. 내가 아무리 CPR을 했어도..”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얼음이 더 먹고싶어졌다. 입안에서 다 녹아버린 얼음은 온데간데 사라져버렸고 컵안에 가득 담겨있던 얼음들도 없었다.
“엠뷸런스에 엄마가 실려갈때 나는 내 두손을 바라보고서는 몸을 떨었어요. 엄마를 살려내지 못했다는게 너무 충격적이어서...”
여전히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꼭 남의 이야기를 하는것처럼 무관심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