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와 그 여자의 이야기 [5]

표류교실2004.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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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에는 왜왔어?”

“도망쳐야했거든요, 미국에서.”

 

아직도 다 마시지않고 잔에 조금 남아있는 원두커피는 식지도 않았는지 계속해서 김을 피우고있었다. 그 김에 실려 지우는 진한 원두향을 맡았다. 너무 아름다웠다. 보이지도 않고 만질수도 없지만 향이란 것은 너무 아름다웠다.

 

“무슨 큰 범죄라도 진것같이 말하네.”

 

준하의 말에 지우는 대꾸대신에 연신 미소를 짓고있었다. 저 미소뒤에는 뭐가 있을까 궁금했다. 전혀 화나지 않은것처럼 속상하지 않은것처럼 저렇게 미소는 짓고있지만 실제 마음은 그렇지 않겠지. 미소가 일종의 자기방어일까. 하지만 무기로 사용되든 방패로 사용되든 그녀의 미소는 너무 예뻤다. 꼭 줄리아 로버츠를 보는것같았다.

 

“이제 내 얘기 많이했으니까 준하씨얘기도 좀 해봐요.”

“어?”

 

뜬금없이 화살이 그에게로 쏘여졌다. 당황한 준하는 어떻게 피해갈까 고민했지만 저 여자앞에서는 아무리 궁리해서 답안이 떠올라도 실행하지 못할거 같았다.

 

“글쎄..내 얘기라…. 뭐가 알고싶은데?”

“속초에는 왜 갔었어요?”

 

정곡이 찔린듯이 가슴 한 가운데가 아파왔다. 속초에 간 이유야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왠지 지우에게 말하고싶지 않았다. 서현에게 말하지 못했던것처럼 지우에게도 말할수 없었다. 거짓말이라도 해볼까했지만 거짓말조차 하고싶지않았다.

 

“대답하기 싫구나? 그럼 다음에 꼭 말해줘요. 음..가족은 어떻게 되요?”

“부모님 두분 다 계시고 누나 한명 있어.”

“그렇군요.”

“어. 당신은?”

“전 외동딸이예요.”

 

조용한 피아노 선율이 어디에선가 들려왔다. 아주 늦은 시간이었지만 카페안에는 여전이 사람들이 있었다. 젊은 남녀가 서로를 마주보며 앉아있는 테이블이 있었는데 서로 사랑을 속삭이는듯 아주 비밀스러워보이고 행복해보였다. 낯익은 음악이었다.

 

“나도 이거 칠줄 아는데.”

 

손으로 턱을 괸채 밖을 바라보던 지우가 조용히 말했다. 밖은 너무나 어두웠다. 짙은 어둠이 깔린 새벽. 붉은 가로등만이 빛을 내고있었다. 달마저도 구름에 가려졌는지 하늘도 어두웠다.

 

“캐논이구나. 편곡된거네.”

 

놀란 눈으로 준하를 쳐다봤다. 편곡된것까지 안다니. 곧 캐논이 끝나고 다른 피아노음악이 들려왔다. 시작부터 감미로운 음악이었다. 왠지 피아노를 치는 사람의 손가락이 무척이나 가느다랗고 섬세할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음악은 뭔지 알아요?”

“Lake Louise Ⅱ 유키 구라모토.”

“와우.”

 

너무 신기해하는 지우의 표정에 준하는 웃음이 나왔다. 저 여자는 이제까지 음악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만 만나왔나보다.

 

“이상하게 이 음악만 들으면 추워져요. 겨울인거같아서. 그런데 또 동시에 따뜻해요. 모닥불이 바로 옆에있는거같아서.”

 

항상 밝던 그녀의 눈동자가 굉장히 슬퍼보였던거같다. 잠시나마 그랬다.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유리에 반사되어 보였다. 정말 음악에 심취에 있는듯 그녀는 고개를 돌릴생각조차 하지않는듯 했다.

 

“준하씨는 이런 피아노곡 들으면서 울어본적 있어요?”

 

그제서야 고개를 돌리고서 준하를 쳐다봤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많이 있었어요. 대학다닐때 교수님앞에서 피아노를 치다가도 울어버린적이 있어요.”

“음대다녔구나. 피아노 전공.”

“줄리아드. 들어갔을때는 꿈을 이룬듯 너무나 행복했어요. 하지만 더이상 피아노치는 것이 행복이 아니더라구요. 칠때마다 이상하게 슬픈 음악만 치게되고 감수성이 굉장히 예민했을때였어요, 그때가. 사춘기가 늦게 왔던건지..”

 

피아노 소리만 들으면 슬퍼지는 여자인듯 했다.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피아노의 선율은 그녀를 더욱 멀게 느껴지게 했다. 이제껏 알아왔던 사람이 아닌것처럼 전혀 본적이 없는 사람처럼. 여전히 그녀의 턱을 괴고있는 손을 쳐다봤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굉장히 길었다. 역시 수술방에서 수술할 사람의 손은 아니었다. 포기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희고 고운손이 칼을 잡는것은 신에게 반항하는것과 같은 짓이다.

 

“음악을 들을때 슬퍼지는건요. 음악 선율이 너무 슬퍼서 그런게 아니예요. 평온하고 잔잔하고..그러면 슬퍼요. 너무 아름답고 부드럽고 평화스러우면...그러면 슬퍼져요.”

 

한 남자가 나에게 했던말을 고스란히 준하에게 하고있었다. 잊혀지지 않는 사람..아니, 이제는 잊은 그 사람이 나에게 했던말. 지우는 숨이 막혀왔다. 술도 안취했는데 궁상맞게 울순 없다. 그것도 준하앞에서.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이로 아랫입술을 물었다.

 

“나보고 친구해달라고 해서 고마워.”

 

준하가 조용히 말했다.

준하의 목소리에 흐르려던 눈물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어느새 옆에있는것 만으로도 내 인생에 커다란 무언가가 되버린것같은 남자.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녀의 눈물을 순식간에 말려버렸다.

 

“뭘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준하씨 아니었으면 지금 이시간에 집에서 티비 체널만 실컷 돌려보다 잠들었겠죠, 뭐.”

 

다시 원래대로의 미소를 띄며 말했다.

 

“아니, 뭐랄까. 말라버린 땅에 촉촉히 비가 내리는 기분이야.”

 

나는 사랑을 시작해버린 기분이예요...

지우가 가슴속으로 되내었다. 차마 준하에게는 들어낼수 없는 말을.

 

“고맙네요. 내가 준하씨 삶에 활력소가 된다니.”

 

정말이었다. 한번도 그 어느 여자로부터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심지어는 서현으로부터조차 이런 느낌을 받지못했다. 한 여름에 내리는 비처럼 습기가 가득하고 그렇지만 그 비를 맞으면 더운 기온도 사라지고 시원해지는것 같은 묘한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