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와 그 여자의 이야기 [6]

표류교실2004.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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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7월의 후반부로 들어서기 시작하자 날씨는 겉잡을수 없을 정도로 더워졌다.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전쟁이 시작되는듯 했다. 날은 더워질수록 나무는 줄기차게 파래졌다. 서울시내에 듬성 듬성 인도에 늘어선 나무들 마져도 잎이 무성해지고 아름다운데 한적한 시골에 늘어선 가로수는 어떨까. 가로수안에 갇혀있는 상상만으로도 시원해졌다.

준하는 진료실안 책상에 앉아 환한 백열등을 뒤로한체 걸려져있는 까만 엑스레이를 훑어보았다.

 

“뼈에는 별 이상은 없습니다. 금이 간거같지는 않네요. 붓기도 곧 빠질겁니다.”

 

의자에 앉아있던 할머니는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들의 손에 도움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하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구, 감사하네 젊은 의사양반. 내가 어쩌다 계단에서 다리를 접지르는 바람에. 쯧쯧. 늙긴 늙었나봐.”

“무슨 말씀이세요. 젊은 사람들도 다들 가끔 그러는데.”

“고맙네.”

 

할머니는 고맙다는 말을 계속해서 되내이며 아들과 함께 진료실을 나섰다.

엑스레이를 걷어내어 책상위에 올려놓은 준하는 멍하니 자리에 앉았다. 구입한지 이제 여러달 되어가는 이 의자에서는 아직도 가죽냄새가 풍겨왔다. 아직도 길이 들여지지않은듯 편하지만은 않았다. 창문 밖으로 지우가 있을 길건너 영어학원이 보였다.

 

 

 

“아이구, 우리 윤주 잘했어요! 어머, 그럼 이 귀여운 강아지는 뭐라고 하지?”

 

책에서 강아지가 그려져있는 페이지를 들어올리며 지우가 물었다.

 

“Puppy!”

“우와, 우리 윤주 잘하네!”

 

지우는 윤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6살정도로 보이는 윤주는 선생님한테서 칭찬받은것이 무척 좋은지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자, 그럼 우리 현성이가 해볼까? 음..뭘 물어볼까?”

 

천직같아보였다. 역시 이 여자는 수술방하고는 어울리지않았다. 아이들 사이에서 저렇게 웃으며 행복하는 모습이 더 어울렸다. 교실은 아이들만을 위한듯 예쁘게 꾸며져있었다. 벽은 캐릭터 그림이 잔뜩그려진 벽화로 가려져있었고, 책상과 의자들은 모두 아이들의 몸집에 맞게 작았다. 준하는 교실의 커다란 창문밖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고있었다. 어느덧 수업이 끝날 시간이 다가왔는지 몇몇 아이들은 가방을 어꺠에 매기시작했고, 지우는 자그마한 비닐봉지를 열어보더니 아이들에게 사탕을 하나씩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에는 사랑이 베어있었다. 교실문이 열리고 준하의 옆으로 아이들이 뛰어나갔다.

 

“잘가! 내일 보자!”

 

지우는 교실 문턱에 서서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어? 여긴 무슨 일이예요?”

 

그제서야 준하를 발견한듯 지우가 놀라서 물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가르칠때 쓰던 교제를 가슴에 품고있었다.

 

“그냥. 점심시간이고 해서.”

 

지우는 시계를 보았다. 벌써 12시였다. 역시 여름방학이 시작하고나니 아침부터 오후까지 정신없이 일을 하는것같다. 손에 들고있던 교제를 교실에 놓았다.

 

“같이 점심 먹을라구요?”

“응. 괜찮아?”

“좋죠, 뭐. 계산은 준하씨가 해요. 난 지갑 안가져갈테니까.”

“그러지, 뭐.”

 

 

 

더운데 칼국수를 먹자고 하는 이 여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아니. 이 더운 여름에 칼국수를 파는 이 식당은 또 뭐란말인가. 냉면은 고사하고 더운데 칼국수를 먹자니. 그녀 혼자서 먹으라고 하고 준하는 냉면을 시키려고했다. 하지만 꼭 그도 같이 먹어야한단다. 정말 알수없는 고집덩어리였다. 후후 불어가며 지우는 맛있게도 먹었다. 에어콘도 없는 이 좁은 식당에서는 그나마 선풍기가 잘 돌아가고있었지만 더위를 식힐수는 없었다. 등이 땀으로 축축해지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지우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후다닥 다 먹고는 마지막 남은 뜨거운 국물마저도 원샷으로 처리했다.

 

“와. 너무 맛있어요. 그렇죠, 준하씨?”

“뭐, 그런대로.”

 

준하는 더워서 어찌할바를 몰랐다. 시원한 냉수를 들이켜마셔봐도 쉽게 가시지않는 더위였다.

 

“겨울에 먹는 칼국수도 맛있지만 여름에 먹는것도 나쁘지는 않다구요.”

 

나쁘지는 않지만 분명 좋지도 않다. 그는 계속해서 물을 마셨다.

 

“매웠어요? 그럴일은 없는데.”

“더웠어. 더워죽겠어. 다음부터는 겨울에나 칼국수 먹자구.”

 

겨울이라. 지우는 순간 웃음이 나오는것을 참느라 힘들었다. 겨울까지도 나를 만나겠다는거야, 지금? 많은 발전이다. 그는 자기가 그 말을 했다는것을 의식하지도 못한체 계속해서 물만 마시고있었다.

 

“날 겨울까지도 만날거예요?”

 

방금 마시고있던 물을 쏟을뻔했다.

 

“뭐?”

“방금 그랬잖아요. 다음부터는 겨울에나 칼국수 먹자구.”

“아..”

 

그런말을 했었군. 준하는 침묵이 대답인것마냥 대답을 하지않았다. 그런 반응이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아니면 별 관심없는지 지우는 미소를 띈채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이렇게 나를 빤히 쳐다보면 내 속을 다 들여다볼줄 안다는걸까. 하지만 준하는 아무리 지우를 뚫어지게 쳐다봐도 그녀의 속마음을 알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무슨 느낌을 갖고있는지. 슬퍼도 행복한것처럼 화나도 기쁜것처럼 행동하는 그녀에게서 무엇이 진실인지 어떻게 알수있단말인가.

 

“퇴근은 몇시나 해?”

“오늘은 5시면 다 끝나요. 왜요?”

“어, 오늘 저녁에 친구가 초대를 했거든. 같이 갈까 해서.”

“또 동창회 같은거예요?”

 

지우는 준하를 만난지 얼마되지 않았을때 그의 의대동기생모임에 갔던것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러고보니 벌써 그를 안지도 조금은 오랜시간이 흘렀다. 7월이 시작할때쯤 만났고 벌써 7월이 끝나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달라진것은 하나도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도 바뀌어간다지만 한달이라는 시간은 그러기에 역부족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와의 관계는 솔직히 말해서 친구사이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해서 애인사이같지도 않았다. 그와는 단한번도 집에서 전화통화를 해본적도 없다. 꼭 직장동료인 것 마냥 이렇게 점심이나 같이먹고, 아니면 점심먹는 도중에 저녁약속을 해서 저녁을 같이 먹고. 딱히 데이트라고 할만한 것도 하지않았다. 그와 나는 무슨 사이일까. 친구라고 하기에는 가깝지 않고 애인이라고 하기에는 그가 나를 사랑하지는 않는거같다. 나는 시작해버린거 같지만.

 

“아니, 그런건 아니고. 결혼한 친구가 있는데 뒤늦게나마 집들이를 하겠다고 해서 말야.”

“그런데 나도 가도 되는거예요?”

“물론.”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준하와 지우는 철저한 경비원을 지나 아파트 로비안으로 들어섰다. 서울에서 상류층 사람들만 산다는 호화스러운 새 아파트였지만 왠지 로비라고 불리워지는 이곳을 보니 꼭 호텔같았다. 일층에는 역시 평범한 아파트와는 달리 여러 종류의 상가들이 들어와있었다. 밖으로 나가서 장을 보지않아도 될만한 크기의 슈퍼마켓이있었고 팬시문구점, 사우나 등 많은것들이 있어서 자급자족하는 조그마한 사회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차를 타고 이곳으로 출발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준하는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긴장을 한듯한 표정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화가 나 있는 것 처럼 보였다. 30층에 도착하자 문이 열렸다. 준하는 현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를 생각조차 못하는 것 같았다. 하는 수없이 그 대신에 지우가 손을 뻗었지만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에 현관문이 열리고 어떤 남자가 보였다.

 

“어서와요.”

 

문을 연 남자는 깔끔하고 시원스러운 짧은 머리와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얼굴을 하고있었다. 살짝 세겨져있는 쌍커플 밑으로 까만 눈을 가리는 긴 속눈썹이 있었다. 짙은 눈썹과 곧은 콧날 그리고 매력적인 입술을 갖은 남성스러운 준하와는 달리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지우가 그들을 반겨준 이 남자를 판단하고 있을때 잠시 쳐다본 준하는 그야말로 폭발직전의 화산처럼 보였다. 집주인을 보고서 반갑다는 인사는 하지도 않고 적개심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고있었다. 이 사람이 친구아니었나..? 집안으로 들어서자 얕은 된장찌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냄새가 어디서 나는 걸까 하고 두리번 거릴때 그 남자가 인사를 했다.

 

“임태빈입니다. 처음뵈요.”

“강지우예요. 그런데 초인종도 누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시고 문 열으셨네요?”

“아래에서 미리 연락을 해둬서요.”

“그렇군요.”

 

태빈은 준하가 데리고 온 여자를 신기하게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서현을 사랑했던 김준하가 맞다면 왠지 이 여자에게 끌릴것 같지는 않았다. 겉모습만으로도 서현과 전혀 성격이 달라보였다. 물론 아름다운 여자이기는 했다. 하늘하늘한 검은 정장 바지는 끝이 넓게 펴져있어서 그녀의 긴 다리가 더 길어보였고 하얗게 드러난 목에는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가 있었다. 태빈은 지우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마쳤다.

 

“준하왔어요?”

 

앞치마를 두른 서현이 부엌에서 나오며 태빈에게 물었다.

 

“응, 여보.”

 

지우를 처음 봤음에도 불구하고 서현은 전혀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준하의 옆에 서있는 지우에게 다가간 그녀는 반가운듯 활짝 웃으며 앞치마에 쓰윽 닦은 가느다란 손을 내밀었다.

 

“이서현이예요. 어서와요.”

“강지우예요.”

“제가 지금 된장찌개를 하고있는데 냄새가 좀 많이 풍기죠?”

“좋은데요? 맛있을거 같아요, 냄새만 맡아도.”

 

지우는 항상 스스로가 예쁘다고 생각해왔지만 같은 여자가 봐도 서현은 정말 아름다웠다. 하나로 묶은 긴 검은 생머리가 등뒤를 가리고 있었고, 화장을 한듯 안한듯 얼굴은 하얗고 깨끗했다. 그리고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부엌에서 저 아름다운 여자가 나왔을때 반짝거리던 준하의 눈이란. 적개심도 분노도 모두 사라지고 따뜻하게만 보이던 눈동자. 어떤 남자든 이서현이라는 이 여자한테 반할만 했다. 지우는 고개를 돌려 살짝 준하의 옆모습을 봤다.

이 남자는..저 여자를..사랑하는거야?

 

“앉으세요.”

 

서현이 부엌으로 돌아가자 태빈이 쇼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리에 앉은 지우는 집안을 둘러봤다. 맞은편에는 커다란 평면 티비가 벽에 붙어있었고 옆에 탁자에는 서현과 태빈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 예쁜 액자들 안에 담겨져 있었다.

 

“진아씨하고 재석씨는 아직 안왔네요?”

“네. 그렇지않아도 곧 도착한다고 전화왔어요.”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인 준하는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않았다. 그는 아예 지우가 옆에 있다는것 마저 잊어버린 사람같았다.

 

“실례지만 무슨일을 하세요?”

 

태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례긴요, 괜찮아요. 전 영어강사해요.”

“그렇군요.”

“조그마한 아이들에서부터 주부반까지. 재미있어요, 의외로.”

 

한시도 얼굴에서 미소를 잃지 않는 지우는 굉장히 밝은 성격의 소유자라고 태빈은 생각했다.

 

“그럼 영어를 굉장히 잘하시겠군요. 부럽네요.”

“생활이었는데요, 뭐.”

 

무슨 뜻이냐는듯 태빈이 눈빛으로 물어왔다.

 

“아, 전 미국에서 살았었어요. 어렸을때부터.”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왔나보네요.”

 

자리에서 일어선 태빈은 현관으로 나갔다. 똑같이 자리에서 일어난 지우는 여전히 앉아있는 준하를 내려다봤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사랑하는 여자가 결혼해서 집들이를 한다니까 화가 난걸까. 그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때문에 저렇게 인상을 쓰고있는걸까. 이럴거였으면 뭐하러 온건지. 아니, 뭐하러 나는 데리고 온건지.

 

“인상 좀 펴요.”

 

그제서야 준하는 지우를 발견한듯 그녀를 올려다봤다.

 

“어?”

“왜그래요, 도대체? 내가 무안해지잖아요. 그리고 나는 여기에 있는 사람 아무도 모른다구요, 준하씨말고는. 그럼 나좀 신경써줘야 하는거아니예요? 사전지식도 없이 이렇게 와버리니까 내가 얼마나 난감한줄 알아요? 차에서 친구가 누구냐고 물어보니까 가면 알거라고 정떨어지게 말이나하고. 이러는게 어딨어요? 나는 뭐하러 데리고 온거예요, 도대체? 이번에야 말로 장식용으로 달고 나온거예요?”

 

정말 화가난것같았다. 그녀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항상 환하게 웃고만 있던 그녀의 눈마저도 화가 나있었다. 순간 준하는 지우에게 미안해졌다. 잠시 혼자만의 감정에 충실하느라 데리고 온 지우의 존재마저 잊어버렸다. 이러면 안되는거였는데.

 

“미안해.”

“어휴, 된장냄새가 아주 진동을 하네.”

 

거실로 들어서던 진아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거렸다. 진아가 지우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누구?”

 

태빈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지우라고 합니다. 처음뵈요.”

 

태빈이 대답을 하기전에 지우가 먼저 인사를 하며 진아에게 다가갔다. 가인을 안고 들어선 재석 또한 태빈이 처음에 그랬던것처럼 신기한 눈빛으로 준하와 그녀를 번갈아 쳐다봤다.

 

“준하씨하고 같이 왔나보군요? 반가워요. 최진아예요.”

“윤재석입니다.”

 

가인으로부터 징징대는 귀여운 소리가 들려왔다. 자기를 소개 안시켜줘서 화났다는듯 두팔을 흔들어댔다.

 

“아, 얘는 가인이. 내 딸이예요.”

 

진아가 웃으며 말했다.

 

“안녕? 아이구, 이쁘게 생겼네!”

 

가인의 손을 잡고 가볍게 악수를 하며 지우가 말했다. 지우는 가인이 너무나 예뻤다. 커다란 눈망울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귀여운 얼굴이란.

 

“다들 저녁먹어요!”

 

진아와 재석이 온것을 알아차린 서현이 부엌에서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