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섬으로 향하던 배는 어느덧 항구에 도착했고 지우와 준하는 땅을 밟았다. 비가 온후 공기는 지우가 원했던데로 시원스럽고 깨끗했다. 숨막혀올듯한 답답함도 조금은 가셨고 햇살은 비가 언제왔었냐는듯 환했다.
“우리 메타세콰이어 길 걸어요.”
“무슨 길?”
지우는 웃으며 준하의 옷소매를 잡아 이끌었다.
가로수길에 들어섰을때 지우는 감탄을 했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준하도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격했다. 지우는 준하보다 앞서 걸으며 좌우를 돌아보았다. 사방이 하늘을 찌르는 나무들 뿐이었다. 가지는 앙상하고 잎도 많이 붙어있지는 않지만 그래서 그런지 더 시원해보이고 좋았다. 기둥은 무척 굵었고 키도 컸다.
“아까 무슨길이라고 했던거야?”
준하의 물음에 지우는 등을 돌려 거꾸로 걸으며 대답했다.
“메타세콰이어. 이 나무 이름이예요. 일명 살아있는 화석.”
알겠다는듯 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종일 뭐했어?”
“청소했어요. 그러고 잠이들었던거 같아요.”
“비왔었어. 알지?”
“네.”
햇빛에 반사되는 푸른 잎사귀들이 반짝거렸고 비가 내린 후라 민트향이 풍기는 공기냄새는 코끝을 자극시켰다. 지우는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물들었던 나쁜 부분들이 씻겨나가고 상처자국과 멍이 아물고. 눈물이 나올것같았다. 이렇게 아름다운곳에 있는데도 너무 평화스러워서 눈물이 흐를거같았다. 정말 나는 이상한 사람이야. 어떻게 평화스러워서 울고싶다는 생각을 하는거지. 여전히 거꾸로 천천히 걷고있던 지우는 준하를 쳐다봤다. 그도 주위를 둘러보며 걷고있었다.
“준하씨, 우리 자전거 타요.”
지우와 준하는 각자 자전거를 하나씩 타고서 가로수길을 달렸다. 아무리 달려도 뺨에 부딪히는 바람은 없었다. 뜨거운 태양아래 비가왔었던 흔적없이 말라버린 바닥위의 자전거는 무척 매끄럽게 달려갔다.
“야호!”
두 손잡이에서 손을 뗀 지우는 두 팔을 하늘 위로 뻗으며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그리고 천천히 양팔을 옆으로 일직선으로 뻗었다. 시티 오브 엔젤의 맥 라이온이 되는 기분으로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향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서 숨을 뱉어냈다. 준하는 뒤에서 행복해보이는 지우의 모습을 보며 미소지었다. 갑자기 불어온 더운 바람은 그녀가 입고있는 하얀 남방을 뒤로 펄럭였고 페달위에 멈춰있는 발과는 달리 자전거는 앞으로 쉬지않고 나아가고 있었다.
“This is so good!”
(너무 좋아!)
크게 소리를 외치며 그녀는 다시 손잡이를 잡고 힘차게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갔다.
자전거를 탄 후 가로수길을 수도없이 반복해서 걸어다녔다. 그들은 서로의 말을 아낀체 각자 자연에 심취해 있었다. 저녁식사를 맛있게 먹고서 선착장으로 향했다. 마지막 배에 올라타고 지우와 준하는 나란히 난간에 기대어 섰다.
“준하씨.”
“응?”
“오늘 즐거웠어요.”
“나도 즐거웠어. 참으로 오랜만에.”
“우리 처음으로 제대로 된 데이트한거 알아요? 맨날 만나면 밥만 먹었었는데.”
그랬나. 준하는 전혀 몰랐었다. 생각해보니 지우와 만날때는 항상 점심이나 저녁을 먹었던것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이렇게 즐겁게 놀았던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제껏 제대로 된 친구역할을 해주지 못했군.
지우의 집에 도착했을때는 벌써 12시가 다되는 늦은 시간이었다. 그녀가 틀어놓았던 라디오에서는 잔잔한 배경음악과 함께 DJ가 무언가를 읽고 있었지만 볼륨을 낮게 해놓아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차라도 한잔 하고 갈래요?”
한 2시간동안 차 운전만 했더니 목이 말랐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늦은게 걸렸다.
“시간은 괜찮아요. 한잔하고 가요. 그렇지않아도 오늘 청소해서 집이 깨끗하단 말이예요. 오늘 아니면 또 더러워져서 준하씨 절대 못들어가봐요.”
그녀의 말대로 집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실 정돈되어있다기 보다는 비워져있다는 표현이 훨씬 잘 어울렸다. 벽에 걸려있는 액자 하나가 집안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장식품인듯 보였다. 거의 모든생활은 바닥에서 이루어지는지 티비, 노트북, CD 그리고 심지어는 빨간색 시트가 씌워진 매트리스까지 모두 바닥에 있었다. 그래도 부엌이라고 보이는 조그마한 공간에 식탁이 있기는 했다.
“뭐가 많이 없죠? 썰렁하고.”
막상 집안에 들어서야 하니 어디에 앉아야할지를 몰랐다.
“그냥 이불위에 앉아도 되고 저쪽 벽에 등 기대고 앉아도 되요.”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는 말하고있지만 준하는 또다시 궁금해졌다. 어떻게 저 여자는 내가 입밖으로 말하지않아도 무엇을 말하고싶은지 다 아는거지.
“그런데 어쩌죠. 커피는 없고 녹차밖에 없는데. 괜찮겠어요?”
“어, 상관없어.”
뜨거운 물안에 녹차팩이 넣어진 컵을 두개 들고서 준하에게 다가왔다. 두개의 컵은 생긴것은 같았지만 색깔만 다른듯해보였다. 별다른 무늬는 없었고 파스텔 색깔만 지니고있었다. 그녀가 준하에게 내민 컵은 파란색이었고 그녀의 것은 노란색이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준하의 앞으로 지우는 이불위에 앉았다.
“준하씨는 이제 나를 어느정도 아는거같아요?”
컵을 양손으로 감싸안으며 지우가 물었다.
“글쎄…. 지우는 나를 어느정도 아는거같아?”
“글쎄요. 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안다고는 믿고싶네요. 그리고 당신은 정말 좋은 친구예요.”
왠지모르게 친구라는 단어가 싫게 들려왔다. 준하는 분명 그녀가 어휘선택을 잘못한거라 믿고싶을 정도였다. 왜..왜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걸까. 무엇때문에..그런걸까.
“우리 진실게임할래요? 한명씩 돌아가면서해요.”
“그럴까? 누구부터 할래?”
“가위바위보로 정하죠?”
사실 굉장히 유치한 게임이라 생각했다. 가위바위보도 하고. 하지만 지우와 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가위바위보를 했을때 준하가 이기자 기분이 나빠진 지우는 삼세판으로 하자며 다시 했지만 결국 세번 다 지우가 지고야 말았다.
“좋아요. 제가 먼저 하죠. 서로 궁금한거 물어보기로 해요.”
“좋아. 음..뭘 물어볼까? 첫사랑?”
조금은 김이 누그러든 녹차를 한모금 마시더니 지우는 입을 열었다. 무슨말부터 해야할까.
“첫사랑…. 대학다닐때 첫사랑을 만났었어요. 참 좋았었는데. 그런데 나는 사랑에는 정말 운이 없나봐요. 준하씨가 나보다 십년은 더 살았으니까 아직 세상 덜 살아본 내가 이런말 하면 웃기다로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예요. 같이 음대 다녔던 선배였어요. 그 사람하고 같이 이탈리아로 유학가려 했었는데 그 사람 혼자 보내고 헤어지자고 했었어요.”
무언가 하고싶은 말이 가슴속에 잔뜩 쌓여있는 느낌이었지만 힘들게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과의 추억을 나누고 싶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모든것을 밖으로 뱉어내고싶었다. 그러면 가슴속에 맺혀있는 알수없는 그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해서.
“행복했었어?”
준하가 물었다.
“한가지씩 물어보기예요. 이번엔 준하씨 차례에요. 준하씨 첫사랑은 어땠어요?”
“내 첫사랑….”
얼마전 태빈과 서현의 집들이에 갔던것을 기억해냈다. 서현은 굉장히 행복해보였다. 태빈도 그녀를 무척이나 사랑하는듯 보였다.
“첫사랑은..고등학교때 시작했었어. 그런데 그 여자한테 있어서 나는 친구일 뿐이었고. 결국 대학교 들어갔을때 그 여자한테는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었어. 둘이 결혼도 하려했는데 그 남자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그래서 난..드디어 나한테 기회가 생겼구나..나도 이제는 그녀에게 마음을 보여줄수 있겠구나 생각해서 속초로 떠났던건데..또다시 그녀를 놓치고 말았어. 다른 남자가 나타났거든. 대학다닐때는 그 여자때문에 많이 방황도 하고 젊음을 허튼곳에 낭비하기도 했어. 몸도 망치고. 이 여자 저 여자도 만나봤지만 잊혀지지도 않았고. 내 첫사랑은..몇달전에 결혼했어. 그..속초에서 만난 남자랑.”
이상했다. 몇십년동안 묵혀놓은 오래되고 낡은 짐을 밖에 내버린듯 마음이 홀가분했다. 서현은 그렇게 쉽게 잊혀질만한 기억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런 느낌이 드는것은 무엇일까. 그녀를 사랑했던 긴 시간동안 항상 이런 기분을 느끼고 싶었었다. 끝내는 그녀를 완벽하게 정리하고 홀가분 기분이 들었으면 했었다. 그런데 숨기고 싶었던 첫사랑 이야기를 지우에게 풀어버리고 나서야 마음이 편해졌다.
지우는 준하가 그 여자가 누구라고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사람이 서현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아름다웠던 여자.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녀가 질투하는 여자.
“왜 피아노를 그만두고 의대갈 생각을 했던거야?”
준하가 이야기하는 사이에 녹차를 다 마셔버린 탓에 컵은 더이상 따뜻하지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컵을 바닥에 내려놓고 이불끝을 들어올려 무릎을 가렸다.
“간단해요. 피아노 치기싫어서. 제가 말했죠? 교수님 앞에서 피아노치다가 울었던적있었다구. 피아노는 그래요. 절 슬프게만 만들어요. 평생을 울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의사가 되는꿈은 어렸을때부터 갖고있던 꿈이예요. 제가 좀 욕심이 많다고 해야하나. 어렸을때는 피아니스트도 되고싶었고 의사도 되고싶었거든요.”
사실 준하는 조금 이해가 가지않았다. 피아노가 사람을 슬프게한다. 물론 어떤 곡을 연주하느냐에 따라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틀려질수도 있지만 지우는 피아노가 항상 그녀를 슬프게한다는 투로 말하고있었다.
“준하씨는 이제 새로운 사랑을 할수 있을거같아요? 첫사랑을 뒤로한체..?”
“글쎄..”
이상했다. 똑같은 주전자에서 끓였고 똑같은 시간에 컵에 옮겨 닮은 물이었는데 준하의 컵안에서는 여전히 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론 그는 아직도 차를 다 마시지않은 상태였다. 그녀의 컵은 식은지 오래인데.
“이제는 조금씩 시작할 수도 있을거같아. 정말 시간이 약인거같아. 그 약이 효능을 보이기까지는 굉장히 오래걸렸지만 말이야. 결국 허튼 약은 아닌듯 싶어.”
지우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제는 조금씩 그녀의 마음을 뚫어볼수 있을것만 같았다. 모든 감정을 하나로 만들어서 웃음으로 바꿔버리는 그녀였지만 이제는 조금씩 알수 있을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나아지겠지.
“왜 미국에서 도망치고싶었어?”
“아..”
설마 그가 그 말을 기억하고 있을줄은 몰랐다.
“의대도 가지않겠다 마음먹었고. 학교는 어떻게든 졸업했지만 직업으로 피아노치고싶은 생각은 없었고. 솔직히 폐인이 된 기분이었어요. 그러는 사이에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졌구요. 그곳에서 벗어나고싶었어요. 어차피 한국에서 꼭 한번 살아보고싶었었구요. 이때다 싶어서 그냥 와버린거예요.”
지우는 이제 더이상 진실게임같은걸 하고싶지 않았다. 이제 더이상 그에게 질문하고 싶은것도 없었고 알고싶은 것도 없었다. 천천히..서로를 알아가는것이 더 나은 방법일것같았다. 잠시 시계를 쳐다봤을때 어느덧 시간은 2시를 향해 달려가고있었다.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우가 고개를 돌려 시계를 쳐다보다 준하도 똑같이 시계를 쳐다봤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가야겠다. 늦었어.”
말은 이렇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지우가 가지말라고 붙잡아줬으면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문을 열기전에 준하가 고개를 돌려 뒤에 서있는 지우를 쳐다봤다.
“오늘 뭐할거야?”
“오늘은..일요일이죠? 글쎄요. 가야할데가 좀 있어요.”
“어디?”
그녀가 어디를 가는지 궁금해졌다. 그가 갈수있는 곳이라면 함께 가고싶었다. 아니, 갈수 없는곳이라도 무작정 따라가고 싶었다.
“어디면 뭐하려구요. 집에 가서 늦잠이나 푹 자세요.”
그녀는 아예 어서 가라는 투로 현관문을 열었다. 어이가 없어서 준하는 웃음이 나왔다. 들어오라고 한때는 언제고 이제는 아주 쫓아내는군.
“운전이라도 해주게. 어디 가는데?”
“고모댁이요. 전주 옆이래요. 여기서 오래걸린다는데 그냥 고속버스타고가면 되요.”
전주라면 여기서 3시간 30분정도는 걸리는 거리였다. 친구들과 무주리조트는 가본적이 있지만 전주에 가본적은 없었다.
“같이 가자. 어차피 나 심심해서 죽을거야. 운전기사라도 해주지, 뭐.”
“그럴필요까지는 없는데.”
정말 그럴필요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있었다. 드디어 이 남자가 조금씩 마음을 여는것 같았다. 준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려니 더 가고싶은 오기가 생기는듯 했다. 어차피 일요일에 집에 있어봤자 하는것도 없었다. 차라리 드라이브를 하러나가는게 더 효율적이었다.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이야기 [9]
[9]
남이섬으로 향하던 배는 어느덧 항구에 도착했고 지우와 준하는 땅을 밟았다. 비가 온후 공기는 지우가 원했던데로 시원스럽고 깨끗했다. 숨막혀올듯한 답답함도 조금은 가셨고 햇살은 비가 언제왔었냐는듯 환했다.
“우리 메타세콰이어 길 걸어요.”
“무슨 길?”
지우는 웃으며 준하의 옷소매를 잡아 이끌었다.
가로수길에 들어섰을때 지우는 감탄을 했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준하도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격했다. 지우는 준하보다 앞서 걸으며 좌우를 돌아보았다. 사방이 하늘을 찌르는 나무들 뿐이었다. 가지는 앙상하고 잎도 많이 붙어있지는 않지만 그래서 그런지 더 시원해보이고 좋았다. 기둥은 무척 굵었고 키도 컸다.
“아까 무슨길이라고 했던거야?”
준하의 물음에 지우는 등을 돌려 거꾸로 걸으며 대답했다.
“메타세콰이어. 이 나무 이름이예요. 일명 살아있는 화석.”
알겠다는듯 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종일 뭐했어?”
“청소했어요. 그러고 잠이들었던거 같아요.”
“비왔었어. 알지?”
“네.”
햇빛에 반사되는 푸른 잎사귀들이 반짝거렸고 비가 내린 후라 민트향이 풍기는 공기냄새는 코끝을 자극시켰다. 지우는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물들었던 나쁜 부분들이 씻겨나가고 상처자국과 멍이 아물고. 눈물이 나올것같았다. 이렇게 아름다운곳에 있는데도 너무 평화스러워서 눈물이 흐를거같았다. 정말 나는 이상한 사람이야. 어떻게 평화스러워서 울고싶다는 생각을 하는거지. 여전히 거꾸로 천천히 걷고있던 지우는 준하를 쳐다봤다. 그도 주위를 둘러보며 걷고있었다.
“준하씨, 우리 자전거 타요.”
지우와 준하는 각자 자전거를 하나씩 타고서 가로수길을 달렸다. 아무리 달려도 뺨에 부딪히는 바람은 없었다. 뜨거운 태양아래 비가왔었던 흔적없이 말라버린 바닥위의 자전거는 무척 매끄럽게 달려갔다.
“야호!”
두 손잡이에서 손을 뗀 지우는 두 팔을 하늘 위로 뻗으며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그리고 천천히 양팔을 옆으로 일직선으로 뻗었다. 시티 오브 엔젤의 맥 라이온이 되는 기분으로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향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서 숨을 뱉어냈다. 준하는 뒤에서 행복해보이는 지우의 모습을 보며 미소지었다. 갑자기 불어온 더운 바람은 그녀가 입고있는 하얀 남방을 뒤로 펄럭였고 페달위에 멈춰있는 발과는 달리 자전거는 앞으로 쉬지않고 나아가고 있었다.
“This is so good!”
(너무 좋아!)
크게 소리를 외치며 그녀는 다시 손잡이를 잡고 힘차게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갔다.
자전거를 탄 후 가로수길을 수도없이 반복해서 걸어다녔다. 그들은 서로의 말을 아낀체 각자 자연에 심취해 있었다. 저녁식사를 맛있게 먹고서 선착장으로 향했다. 마지막 배에 올라타고 지우와 준하는 나란히 난간에 기대어 섰다.
“준하씨.”
“응?”
“오늘 즐거웠어요.”
“나도 즐거웠어. 참으로 오랜만에.”
“우리 처음으로 제대로 된 데이트한거 알아요? 맨날 만나면 밥만 먹었었는데.”
그랬나. 준하는 전혀 몰랐었다. 생각해보니 지우와 만날때는 항상 점심이나 저녁을 먹었던것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이렇게 즐겁게 놀았던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제껏 제대로 된 친구역할을 해주지 못했군.
지우의 집에 도착했을때는 벌써 12시가 다되는 늦은 시간이었다. 그녀가 틀어놓았던 라디오에서는 잔잔한 배경음악과 함께 DJ가 무언가를 읽고 있었지만 볼륨을 낮게 해놓아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차라도 한잔 하고 갈래요?”
한 2시간동안 차 운전만 했더니 목이 말랐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늦은게 걸렸다.
“시간은 괜찮아요. 한잔하고 가요. 그렇지않아도 오늘 청소해서 집이 깨끗하단 말이예요. 오늘 아니면 또 더러워져서 준하씨 절대 못들어가봐요.”
그녀의 말대로 집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실 정돈되어있다기 보다는 비워져있다는 표현이 훨씬 잘 어울렸다. 벽에 걸려있는 액자 하나가 집안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장식품인듯 보였다. 거의 모든생활은 바닥에서 이루어지는지 티비, 노트북, CD 그리고 심지어는 빨간색 시트가 씌워진 매트리스까지 모두 바닥에 있었다. 그래도 부엌이라고 보이는 조그마한 공간에 식탁이 있기는 했다.
“뭐가 많이 없죠? 썰렁하고.”
막상 집안에 들어서야 하니 어디에 앉아야할지를 몰랐다.
“그냥 이불위에 앉아도 되고 저쪽 벽에 등 기대고 앉아도 되요.”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는 말하고있지만 준하는 또다시 궁금해졌다. 어떻게 저 여자는 내가 입밖으로 말하지않아도 무엇을 말하고싶은지 다 아는거지.
“그런데 어쩌죠. 커피는 없고 녹차밖에 없는데. 괜찮겠어요?”
“어, 상관없어.”
뜨거운 물안에 녹차팩이 넣어진 컵을 두개 들고서 준하에게 다가왔다. 두개의 컵은 생긴것은 같았지만 색깔만 다른듯해보였다. 별다른 무늬는 없었고 파스텔 색깔만 지니고있었다. 그녀가 준하에게 내민 컵은 파란색이었고 그녀의 것은 노란색이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준하의 앞으로 지우는 이불위에 앉았다.
“준하씨는 이제 나를 어느정도 아는거같아요?”
컵을 양손으로 감싸안으며 지우가 물었다.
“글쎄…. 지우는 나를 어느정도 아는거같아?”
“글쎄요. 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안다고는 믿고싶네요. 그리고 당신은 정말 좋은 친구예요.”
왠지모르게 친구라는 단어가 싫게 들려왔다. 준하는 분명 그녀가 어휘선택을 잘못한거라 믿고싶을 정도였다. 왜..왜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걸까. 무엇때문에..그런걸까.
“우리 진실게임할래요? 한명씩 돌아가면서해요.”
“그럴까? 누구부터 할래?”
“가위바위보로 정하죠?”
사실 굉장히 유치한 게임이라 생각했다. 가위바위보도 하고. 하지만 지우와 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가위바위보를 했을때 준하가 이기자 기분이 나빠진 지우는 삼세판으로 하자며 다시 했지만 결국 세번 다 지우가 지고야 말았다.
“좋아요. 제가 먼저 하죠. 서로 궁금한거 물어보기로 해요.”
“좋아. 음..뭘 물어볼까? 첫사랑?”
조금은 김이 누그러든 녹차를 한모금 마시더니 지우는 입을 열었다. 무슨말부터 해야할까.
“첫사랑…. 대학다닐때 첫사랑을 만났었어요. 참 좋았었는데. 그런데 나는 사랑에는 정말 운이 없나봐요. 준하씨가 나보다 십년은 더 살았으니까 아직 세상 덜 살아본 내가 이런말 하면 웃기다로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예요. 같이 음대 다녔던 선배였어요. 그 사람하고 같이 이탈리아로 유학가려 했었는데 그 사람 혼자 보내고 헤어지자고 했었어요.”
무언가 하고싶은 말이 가슴속에 잔뜩 쌓여있는 느낌이었지만 힘들게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과의 추억을 나누고 싶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모든것을 밖으로 뱉어내고싶었다. 그러면 가슴속에 맺혀있는 알수없는 그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해서.
“행복했었어?”
준하가 물었다.
“한가지씩 물어보기예요. 이번엔 준하씨 차례에요. 준하씨 첫사랑은 어땠어요?”
“내 첫사랑….”
얼마전 태빈과 서현의 집들이에 갔던것을 기억해냈다. 서현은 굉장히 행복해보였다. 태빈도 그녀를 무척이나 사랑하는듯 보였다.
“첫사랑은..고등학교때 시작했었어. 그런데 그 여자한테 있어서 나는 친구일 뿐이었고. 결국 대학교 들어갔을때 그 여자한테는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었어. 둘이 결혼도 하려했는데 그 남자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그래서 난..드디어 나한테 기회가 생겼구나..나도 이제는 그녀에게 마음을 보여줄수 있겠구나 생각해서 속초로 떠났던건데..또다시 그녀를 놓치고 말았어. 다른 남자가 나타났거든. 대학다닐때는 그 여자때문에 많이 방황도 하고 젊음을 허튼곳에 낭비하기도 했어. 몸도 망치고. 이 여자 저 여자도 만나봤지만 잊혀지지도 않았고. 내 첫사랑은..몇달전에 결혼했어. 그..속초에서 만난 남자랑.”
이상했다. 몇십년동안 묵혀놓은 오래되고 낡은 짐을 밖에 내버린듯 마음이 홀가분했다. 서현은 그렇게 쉽게 잊혀질만한 기억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런 느낌이 드는것은 무엇일까. 그녀를 사랑했던 긴 시간동안 항상 이런 기분을 느끼고 싶었었다. 끝내는 그녀를 완벽하게 정리하고 홀가분 기분이 들었으면 했었다. 그런데 숨기고 싶었던 첫사랑 이야기를 지우에게 풀어버리고 나서야 마음이 편해졌다.
- 오빠도 이제는 알기시작했어. 서현언니..보내야 한다는거. 이제는 멈춰야한다는거. -
지은의 목소리가 어디에선가 들려왔다. 그녀가 떠나기전 찾아와 했던 말들이.
지은아. 아무래도 나는 너가 그말을 할때..이미 서현을 보내줬었는지도 몰라. 깨닫지만 못했을뿐.
지우는 준하가 그 여자가 누구라고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사람이 서현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아름다웠던 여자.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녀가 질투하는 여자.
“왜 피아노를 그만두고 의대갈 생각을 했던거야?”
준하가 이야기하는 사이에 녹차를 다 마셔버린 탓에 컵은 더이상 따뜻하지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컵을 바닥에 내려놓고 이불끝을 들어올려 무릎을 가렸다.
“간단해요. 피아노 치기싫어서. 제가 말했죠? 교수님 앞에서 피아노치다가 울었던적있었다구. 피아노는 그래요. 절 슬프게만 만들어요. 평생을 울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의사가 되는꿈은 어렸을때부터 갖고있던 꿈이예요. 제가 좀 욕심이 많다고 해야하나. 어렸을때는 피아니스트도 되고싶었고 의사도 되고싶었거든요.”
사실 준하는 조금 이해가 가지않았다. 피아노가 사람을 슬프게한다. 물론 어떤 곡을 연주하느냐에 따라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틀려질수도 있지만 지우는 피아노가 항상 그녀를 슬프게한다는 투로 말하고있었다.
“준하씨는 이제 새로운 사랑을 할수 있을거같아요? 첫사랑을 뒤로한체..?”
“글쎄..”
이상했다. 똑같은 주전자에서 끓였고 똑같은 시간에 컵에 옮겨 닮은 물이었는데 준하의 컵안에서는 여전히 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론 그는 아직도 차를 다 마시지않은 상태였다. 그녀의 컵은 식은지 오래인데.
“이제는 조금씩 시작할 수도 있을거같아. 정말 시간이 약인거같아. 그 약이 효능을 보이기까지는 굉장히 오래걸렸지만 말이야. 결국 허튼 약은 아닌듯 싶어.”
지우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제는 조금씩 그녀의 마음을 뚫어볼수 있을것만 같았다. 모든 감정을 하나로 만들어서 웃음으로 바꿔버리는 그녀였지만 이제는 조금씩 알수 있을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나아지겠지.
“왜 미국에서 도망치고싶었어?”
“아..”
설마 그가 그 말을 기억하고 있을줄은 몰랐다.
“의대도 가지않겠다 마음먹었고. 학교는 어떻게든 졸업했지만 직업으로 피아노치고싶은 생각은 없었고. 솔직히 폐인이 된 기분이었어요. 그러는 사이에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졌구요. 그곳에서 벗어나고싶었어요. 어차피 한국에서 꼭 한번 살아보고싶었었구요. 이때다 싶어서 그냥 와버린거예요.”
지우는 이제 더이상 진실게임같은걸 하고싶지 않았다. 이제 더이상 그에게 질문하고 싶은것도 없었고 알고싶은 것도 없었다. 천천히..서로를 알아가는것이 더 나은 방법일것같았다. 잠시 시계를 쳐다봤을때 어느덧 시간은 2시를 향해 달려가고있었다.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우가 고개를 돌려 시계를 쳐다보다 준하도 똑같이 시계를 쳐다봤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가야겠다. 늦었어.”
말은 이렇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지우가 가지말라고 붙잡아줬으면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문을 열기전에 준하가 고개를 돌려 뒤에 서있는 지우를 쳐다봤다.
“오늘 뭐할거야?”
“오늘은..일요일이죠? 글쎄요. 가야할데가 좀 있어요.”
“어디?”
그녀가 어디를 가는지 궁금해졌다. 그가 갈수있는 곳이라면 함께 가고싶었다. 아니, 갈수 없는곳이라도 무작정 따라가고 싶었다.
“어디면 뭐하려구요. 집에 가서 늦잠이나 푹 자세요.”
그녀는 아예 어서 가라는 투로 현관문을 열었다. 어이가 없어서 준하는 웃음이 나왔다. 들어오라고 한때는 언제고 이제는 아주 쫓아내는군.
“운전이라도 해주게. 어디 가는데?”
“고모댁이요. 전주 옆이래요. 여기서 오래걸린다는데 그냥 고속버스타고가면 되요.”
전주라면 여기서 3시간 30분정도는 걸리는 거리였다. 친구들과 무주리조트는 가본적이 있지만 전주에 가본적은 없었다.
“같이 가자. 어차피 나 심심해서 죽을거야. 운전기사라도 해주지, 뭐.”
“그럴필요까지는 없는데.”
정말 그럴필요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있었다. 드디어 이 남자가 조금씩 마음을 여는것 같았다. 준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려니 더 가고싶은 오기가 생기는듯 했다. 어차피 일요일에 집에 있어봤자 하는것도 없었다. 차라리 드라이브를 하러나가는게 더 효율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