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와 그 여자의 이야기 [11]

표류교실2004.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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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아휴, 선생님 수고하셨어요.”

“별말씀을요.”

 

아침 주부반 수업이 끝나고 주부들이 한명씩 지우에게 인사를 하며 교실을 나섰다.

 

“아직 시집안갔죠? 내가 중매서고싶은데.”

“괜찮아요, 어머님.”

 

조그맣게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좀 아쉬운데.”

 

정말로 아쉽다는듯 모든 주부들이 혀를 찼다. 그들이 쉽게 넘어가자 속으로 지우는 안도의 한숨을 사켰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아직도 며느리감 일위인가보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 친근하고 낯설지 않은 목소리. 설마..

지우는 사람들이 사라지던 쪽의 복도를 쳐다보다가 뒤로 돌아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후..오빠..”

 

변하지 않은 그만의 특유의 상쾌한 미소로 지우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예전의 눈썹까지 가리던 머리는 짧게 잘려나가고 산뜻한 스포츠머리였다. 깨끗한 하얀색 셔츠를 뒤로하고 겉에는 하늘색 계통의 폴로난방을 입고있었고 바지는 베이지색의 길이 잘 난 캐쥬얼바지였다.

 

“여기서 뭐하는거야?”

“여전하네. 전혀 안변했어. 2년만이지?”

 

움직이지 못하고 몸을 고정하고 있는 지우에게로 가까이 걸어오며 선후가 말했다. 지우는 더이상 입도 뻥끗 못하겠어서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그새 벙어리 되버린거야?”

“아니야, 그런거. 어떻게 알고 찾아온거야? 한국에는 언제왔어?”

“한가지씩 물어봐. 여기는 아버님께 여쭤봐서 알았고 한국에는 어제 저녁에 왔어.”

 

왜 다시 나를 찾은거냐고도 묻고싶었지만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무슨..일로 온건데?”

“아, 넌 아직 모르겠구나. 나 음반작업 들어갈거야. 녹음은 미국에서 했으면 했지만 뭐가 일이 잘 안되서 한국에서 하게됐어.”

 

결국 그는 그의 꿈을 하나씩 이루어가고 있던거였다. 모든것을 포기하고 잃어버린 그녀는 한국으로 온 이유는 그리 크지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커다란 희망을 갖고 한국으로 돌아온거였다. 그리고 결국 이곳은 그에게 있어서 집이었다. 미국에서 유학생이었던 그에게는.

 

“강선생님, 전화왔는데요?”

 

사무실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김 선생님이 말했다. 선후에게서 자리를 피해 사무실 문옆에 놓여진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여보세요?”

“나야, 준하. 수업중이야?”

“아니요. 방금 다 끝났어요.”

 

조금은 멀리 서있던 선후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왔다. 이러다가는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준하의 목소리를 다 듣게생겼다.

 

“그렇구나. 곧 점심시간인데말야.”

“지우야, 같이 점심이나 먹자.”

 

정말 다 들렸나보다. 선후는 준하에게도 다 들릴만한 큰 소리로 말했다. 심지어는 사무실안에 앉아있던 다른선생님들마저도 의아한 눈빛으로 선후와 지우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당황한 지우는 수화기를 손에 쥔채 가만히 서서 선후를 쳐다봤다.

 

“점심 같이 먹자고.”

 

그를 쳐다본건 다시 반복해서 말해달라는 의미가 절대 아니었다. 가슴이 답답해오기 시작했다.

 

“약속..있니?”

 

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그런거 같아요.”

“뭐, 그럼 어쩔수없지.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수화기를 내려놓은 지우는 막막한 표정으로 선후를 쳐다봤지만 그는 뭐가 문제냐는듯 어깨를 으쓱했다. 여전히 고집불통인 남자였다. 끈질기고 악착같은. [상실의 시대]라는 책을 선물로 주고는 훌쩍 떠나버렸던 남자. 그런데 도대체 왜 나를 다시 찾은거지.

 

 

 

칼국수를 먹자고하는 선후를 따라 예전에 준하와 함께 갔던 식당을 다시 찾아가게 되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선후는 맛있는듯 정말 잘먹었지만 지우는 너무 더워서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어느덧 혼자서 비워버린 물병에 그녀는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또다른 물병은 하나 더 달라고 해야할정도였다.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조차 구별이 되지 않았다. 날도 더운데 뭐가 좋다고 저렇게 먹는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혀 맵지도 않은데 왜 물만 마셔대.”

“더워서 그래. 덥지도 않아?”

“안더워. 한국 더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날씨 말고 칼국수 말야. 어쨌든 날도 덥기는 해. 더워죽겠는데 무슨 칼국수야.”

“드디어 우리 강지우 본래의 활발한 말투가 나오기 시작하는군. 아까는 전혀 아니었어. 아주 속으로 기어들어가더라.”

 

우리..강지우라고? 참으로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표현이었지만 조금은 멀게 느껴졌다. 그녀는 또다시 물을 들이켜마셨다. 에어콘도 없는 이 식당은 너무 더웠다. 그나마 선풍기가 돌아가고는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손으로 부채질을 한다고해도 더위를 시켜주지는 못했다. 선후는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는 물을 한잔 마셨다.

 

“자, 밥도 다 먹었고. 뭐할까?”

 

나 원 한심해서. 지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는 뭘해. 나 수업있어. 또 들어가봐야해.”

“바쁘구나?”

“어.”

“그럼 언제 또 볼까, 우리?”

“왜 날 찾아온거야?”

“오빠가 우리 지우도 못찾아와?”

 

이제는 선후의 저런 미소도 지긋지긋하다. 모든것을 가려버리는 저 방패. 오래전에는 그 방패를 없애지못해서 그의 미소만으로 모든것을 대신해왔지만 어느덧 그 미소뒤에 다른것이 있다는것을 터득하고부터는 더이상 보기싫어졌다. 위선적이고 가식적일뿐이었다.

 

“나 더이상 오빠의 우리 지우 아니야. 나 오빠랑 끝났어. 그리고 동기유발은 오빠였고.”

 

순간 미소가 사라지고 선후는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이제껏 보여왔던 밝은 모습은 정말 연기였을 뿐이라고 지우는 생각했다. 이 남자는 더이상 예전처럼 그녀에게 행동할 수 없을거였다.

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후를 내려다 보며 차갑게 말했다.

 

“음반작업 잘해. 그리고 나 더이상 찾지마.”

 

계산대에서 그녀가 먹은 것만 계산하고 나왔다. 전혀 슬프지 않은데 눈물이 고여 눈앞이 얼룩지는것같았다. 기억하고싶지 않은 아픈 추억들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이 느낌이 너무 싫었다.

학원 건물에 도착했을때 일층 페스트푸드점 창문 너머로 홀로 앉아 햄버거를 먹고있는 준하가 보였다. 지우는 한숨을 내쉬면서 페스트푸드점의 문을 밀었다. 차가운 에어콘 바람이 하얗게 들어난 그녀의 가느다란 팔을 스쳐지나갔다.

 

“아까는 미안했어요.”

 

준하의 앞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어? 여기는 무슨일이야. 놀랬잖아.”

 

생각치도 못한 지우의 등장에 순간 먹던 햄버거가 얹히면서 그는 기침을 했다. 놀란 지우는 자리를 그의 옆자리로 옮겨 등을 쳐주며 콜라를 손에 쥐어줬다.

 

“괜찮아요?”

“어. 좀. 정말 놀랬어. 인기척 좀 내.”

“미안해요.”

 

그녀는 걱정스러운듯 그를 쳐다봤다. 곧 괜찮아졌는지 그는 다시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그가 수화기너머로 들리던 목소리가 누구냐고 물어주기를 바랬지만 준하는 꼭 그 일을 모두 잊어버린듯 아무런 내색도 하지않았다. 뭐라고 설명이라도 하고싶었다. 그것이 구차한 변명이 된다하더라도 준하가 마음대로 상상하고 결정내리는것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먼저 입을 열어서 그 사람이 누구였다고 설명할 필요는 없는듯 싶었다. 변명하는것보다 더 구차해질테니.

 

“오늘 저녁은 내가 밥 살게요. 아까 내가 바람맞혔으니까.”

“정말 우리는 밥먹을때만 만나는거같아.”

 

우리라고..? 그는 알기나 할까. 처음으로 나와 자신을 하나로 뭉쳐서 우리라고 표현했다는것을. 전혀 알지못하는듯했다. 지우는 무척 행복했다. 그의 매혹스러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지극히 단순한 ‘우리’라는 말에 행복해졌다.

 

“뭔가 다른 효율적인것을 해보는건 어때?”

“밥먹는거 말고도 더 효율적인게 있어요? 하루 세끼 밥먹는게 알고보면 얼마나 힘들다구요. 그래도 준하씨랑 먹으니까 세끼 챙겨먹는건데.”

“지우도 그래?”

“네?”

“나도 원래 밥 잘 안챙겨먹는 편이거든. 지우랑 어쩌다 만나면 밥을 먹게되서 하루 세끼는 꼬박 체우게 됐어. 원래 귀찮아서 이 햄버거도 안먹을까했는데. 그 사이에 항상 점심먹는게 기들여져버려서 내 위가 간사해진거있지.”

“간사해진게 아니라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거겠죠.”

 

준하와 지우는 서로를 마주보며 소리내어 웃었다. 햄버거를 모두 먹은 준하는 트레이 위에 쓰레기들을 얹었다.

 

“들어가봐야죠?”

“응. 당신도 들어가봐야지?”

“네. 가죠?”

 

준하와 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쓰레기를 모두 처리한 다음 밖으로 나갔다. 나가자 마자 보이는 횡단보도 앞에서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잠시 바라봤다. 얼마전까지만해도 빨간불이었던 신호등이 신호를 바꿨다.

 

“가봐야겠다.”

“저녁에 만나자구요!”

 

횡단보도위를 걸어가는 준하의 등에 대고 그녀가 소리치자 알겠다는듯 준하가 한쪽 팔을 들어올려 흔들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