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시작된 중년에 찾아오는 우울증이에요. 머리가 큰 자식들은 서서히 자기 곁을 떠날 때가 되었고, 이민생활을 혼자서 헤쳐 온 자신은 마침내 혼자서 남게 된다는 위기감이 들었죠. 또한 24년간 피땀 흘려서 모은 재산이 사건과 세무조사에 얽혀서 하루아침에 날아가게 되었으니 억울한 생각만 들었어요. 나중에 자세한 과정이 서술되겠지만 캔디는 500알의 수면제와 양주 한 병을 통째로 마시고 자살을 시도했어요. 딸에 의하여 곧바로 발견된 캔디는 병원에 실려 갔고, 기적적으로 15일 만에 깨어났어요. 캔디는 살아남은 것이 또 억울해서 엉엉 울었어요. 그 후유증까지 겹친 우울증 때문에 귀국하여서 한국생활에 적응하는 문제가 더욱 어렵게 느껴졌고 자연히 방구석에 쳐 박혀 지내는 날이 많아졌어요. 캔디 오빠와 올케는 고민했어요. 될 수 있으면 밖으로 끌어내어서 한국생활을 배우게 하려고 노력했는데, 이것이 캔디에게는 큰 심적 부담이 된 것이에요.
하필이면 왜 복날이었는지 모르겠어요.
소도시에서 오빠는 제법 큰 건축사업을 하고 있어서 그 지역에서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지에요. 또한 올케는 제법 잘 나가는 갈비집을 운영하고 있어요. 오빠는 복날 아침에 친척하고 동네 사람들과 함께 개 잡아 먹으러 가자고 캔디를 끌고 나갔어요. 넓은 개울에 수십 명이 앉아서 개고기를 나누어 먹으니 캔디는 기겁했어요. 그곳에는 어렸을 적에 같이 놀던 오빠 친구들과 남자동창들이 많이 모였는데, 모두가 캔디만 주시하고 있었어요. 소주잔이 캔디에게 자꾸 전달되었고 거절할 수 없는 위치에서 캔디는 무척 곤혹을 치렀어요. 미국에서는 파티를 하면 삼삼오오 모여서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는데, 이곳에서는 죽도록 술만 마셔대고 또한 그 술잔을 자꾸 옆사람에게 돌리며 자꾸 마시라고 하니, 호의를 보이는 술잔이 거의 강요에 가까운 행동으로 캔디의 눈에는 비쳤어요.
무엇보다도 미국에서 혼자 살던 이혼녀가 귀국했다는 자신의 처지가 머리에 걸렸어요.
그것은 자기를 쳐다보는 뭇 남자들의 시선 때문이었어요. 이상한 호기심을 보이는 축축한 눈빛이 얼굴에 스쳤지만 캔디는 지긋이 미소만 지었어요. 그것은 미국생활에서 단련된 표정이에요. 경험한 사람은 알겠지만 미국에서는 절대로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거든요. 특히 남의 나라에 빌붙어 살아야 하는 동양인에게는 절대로 지켜야 할 표정관리에요. 항상 빙긋한 웃음을 잃지 않는 캔디에게 술이 거나해진 오빠 친구들은 자꾸 농담을 던졌으며 무의식중에 캔디의 입에서 툭 튀어 나오는 영어발음을 들으면 무척 재미있다는 얼굴로 웃어대곤 했어요. 오빠는 그런 시련을 일부러 캔디에게 주었던 것이에요. 어차피 한국사회란 이런 것이라고 알려주려 했겠죠.
사실 캔디의 머리는 영어로만 이루어졌다고 봐야 해요. 거리에서 한글로 된 간판을 보면 그 뜻이 한 눈에 안 들어오기 때문에 간판을 영어로 해석해야 비로소 그 뜻을 알 수 있을 정도에요. 그러니 넋을 놓고 있다가 툭 날아온 누구의 질문에 대답하면 곧바로 영어가 튀어 나가는 것이죠. 이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미국에서 살다 왔다고 잘난 척 하는 것이라고 여기기도 했을 것이고, 캔디는 사람들의 그런 심중을 한눈에 읽었어요. 그러니 더욱 우울해질 수밖에 없었어요. 성깔이 있는 만큼 우울증도 심하게 오게 마련이에요. 캔디는 한국이란 나라가 한없이 어렵게 느껴졌고, 그 날 밤에는 꼬박 밤을 새우며 지냈어요. 어떻게 한국사회에 적응해야 할지 막막했고 과연 자신이 한국에서 생존할 수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던 것이죠.
캔디의 방에는 심심풀이로 쓰라고 올케가 따로 마련해 준 컴퓨터가 있어요.
음악을 즐겨하는 캔디는 인터넷 카페에서 음악을 골라들으며 눈감고 한없이 앉아 있곤 했어요. 몸과 마음이 점점 지쳐갔어요. 문밖만 나서면 다른 나라 같으니 캔디의 방문은 항상 잠겨 있었어요. 그토록 자신을 억울하게 만든 미국이 내가 살 땅인가 하는 생각만 들었어요. 미국에서 나올 적에 귀국을 만류하면서 자기와 같이 결혼하자는 한국남자친구도 생각났어요. 오빠와 올케가 은근히 재혼을 권하는 오빠 친구도 있는데, 어렸을 적에 자기에게 연애감정을 표현했던 사람이에요. 재산도 많다고 하지만 캔디는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하기 위하여 귀국한 것이 아니고 홀로서기 위해서 나온 것이에요. 어려운 자신의 처지를 면하기 위하여 몸을 팔 듯 결혼한다는 자체는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이죠. 캔디는 술 취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어요.
"흥, 돈이 뭔데?"
그렇게 밤을 꼬박 새우다보니 벌써 아침이 되었어요.
비몽사몽 책상 앞에 앉아있던 캔디의 귀에 전화벨소리가 들렸어요. 아침에 울리는 전화는 캔디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했어요. 왜냐하면 미국에 있는 자식들에게서 오는 전화였거든요. 벌떡 일어나서 거실로 나온 캔디는 수화기를 들었어요.
"마미, 나야."
올해 20살이 된 아들에게서 온 전화였어요. 영어로 서너 마디가 오락가락 하더니 별안간 캔디의 얼굴이 일그러졌어요. 눈물이 펑펑 쏟아지면서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캔디는 되풀이 하고 있었어요. 아들이 오토바이 경주에 출전했는데, 오토바이의 속력을 높이면서 언덕을 달려서 점핑하는 순간에 한국으로 떠난 엄마의 얼굴이 아들의 눈에 별안간 보였다는 것이었어요. 그 순간에 핸들을 꽉 잡은 손에서 힘이 풀리면서 그만 곤두박질쳤고, 다리가 부러진 채 병원에 실려 왔다는 말이었어요.
"I am sorry my baby. I am sorry."
캔디는 수화기에 대고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엉엉 울었어요. 혼자만 잘 살겠다고 한국에 나온 못 된 엄마가 된 느낌이었어요. 병원에서 아픈 몸을 뒤척이며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들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으니, 고향땅이 서럽기만 했던 것이에요. (계속)
캔디 이야기 3.
캔디 이야기 3.
캔디는 지금도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어요.
미국에서 시작된 중년에 찾아오는 우울증이에요. 머리가 큰 자식들은 서서히 자기 곁을 떠날 때가 되었고, 이민생활을 혼자서 헤쳐 온 자신은 마침내 혼자서 남게 된다는 위기감이 들었죠. 또한 24년간 피땀 흘려서 모은 재산이 사건과 세무조사에 얽혀서 하루아침에 날아가게 되었으니 억울한 생각만 들었어요. 나중에 자세한 과정이 서술되겠지만 캔디는 500알의 수면제와 양주 한 병을 통째로 마시고 자살을 시도했어요. 딸에 의하여 곧바로 발견된 캔디는 병원에 실려 갔고, 기적적으로 15일 만에 깨어났어요. 캔디는 살아남은 것이 또 억울해서 엉엉 울었어요. 그 후유증까지 겹친 우울증 때문에 귀국하여서 한국생활에 적응하는 문제가 더욱 어렵게 느껴졌고 자연히 방구석에 쳐 박혀 지내는 날이 많아졌어요. 캔디 오빠와 올케는 고민했어요. 될 수 있으면 밖으로 끌어내어서 한국생활을 배우게 하려고 노력했는데, 이것이 캔디에게는 큰 심적 부담이 된 것이에요.
하필이면 왜 복날이었는지 모르겠어요.
소도시에서 오빠는 제법 큰 건축사업을 하고 있어서 그 지역에서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지에요. 또한 올케는 제법 잘 나가는 갈비집을 운영하고 있어요. 오빠는 복날 아침에 친척하고 동네 사람들과 함께 개 잡아 먹으러 가자고 캔디를 끌고 나갔어요. 넓은 개울에 수십 명이 앉아서 개고기를 나누어 먹으니 캔디는 기겁했어요. 그곳에는 어렸을 적에 같이 놀던 오빠 친구들과 남자동창들이 많이 모였는데, 모두가 캔디만 주시하고 있었어요. 소주잔이 캔디에게 자꾸 전달되었고 거절할 수 없는 위치에서 캔디는 무척 곤혹을 치렀어요. 미국에서는 파티를 하면 삼삼오오 모여서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는데, 이곳에서는 죽도록 술만 마셔대고 또한 그 술잔을 자꾸 옆사람에게 돌리며 자꾸 마시라고 하니, 호의를 보이는 술잔이 거의 강요에 가까운 행동으로 캔디의 눈에는 비쳤어요.
무엇보다도 미국에서 혼자 살던 이혼녀가 귀국했다는 자신의 처지가 머리에 걸렸어요.
그것은 자기를 쳐다보는 뭇 남자들의 시선 때문이었어요. 이상한 호기심을 보이는 축축한 눈빛이 얼굴에 스쳤지만 캔디는 지긋이 미소만 지었어요. 그것은 미국생활에서 단련된 표정이에요. 경험한 사람은 알겠지만 미국에서는 절대로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거든요. 특히 남의 나라에 빌붙어 살아야 하는 동양인에게는 절대로 지켜야 할 표정관리에요. 항상 빙긋한 웃음을 잃지 않는 캔디에게 술이 거나해진 오빠 친구들은 자꾸 농담을 던졌으며 무의식중에 캔디의 입에서 툭 튀어 나오는 영어발음을 들으면 무척 재미있다는 얼굴로 웃어대곤 했어요. 오빠는 그런 시련을 일부러 캔디에게 주었던 것이에요. 어차피 한국사회란 이런 것이라고 알려주려 했겠죠.
사실 캔디의 머리는 영어로만 이루어졌다고 봐야 해요. 거리에서 한글로 된 간판을 보면 그 뜻이 한 눈에 안 들어오기 때문에 간판을 영어로 해석해야 비로소 그 뜻을 알 수 있을 정도에요. 그러니 넋을 놓고 있다가 툭 날아온 누구의 질문에 대답하면 곧바로 영어가 튀어 나가는 것이죠. 이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미국에서 살다 왔다고 잘난 척 하는 것이라고 여기기도 했을 것이고, 캔디는 사람들의 그런 심중을 한눈에 읽었어요. 그러니 더욱 우울해질 수밖에 없었어요. 성깔이 있는 만큼 우울증도 심하게 오게 마련이에요. 캔디는 한국이란 나라가 한없이 어렵게 느껴졌고, 그 날 밤에는 꼬박 밤을 새우며 지냈어요. 어떻게 한국사회에 적응해야 할지 막막했고 과연 자신이 한국에서 생존할 수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던 것이죠.
캔디의 방에는 심심풀이로 쓰라고 올케가 따로 마련해 준 컴퓨터가 있어요.
음악을 즐겨하는 캔디는 인터넷 카페에서 음악을 골라들으며 눈감고 한없이 앉아 있곤 했어요. 몸과 마음이 점점 지쳐갔어요. 문밖만 나서면 다른 나라 같으니 캔디의 방문은 항상 잠겨 있었어요. 그토록 자신을 억울하게 만든 미국이 내가 살 땅인가 하는 생각만 들었어요. 미국에서 나올 적에 귀국을 만류하면서 자기와 같이 결혼하자는 한국남자친구도 생각났어요. 오빠와 올케가 은근히 재혼을 권하는 오빠 친구도 있는데, 어렸을 적에 자기에게 연애감정을 표현했던 사람이에요. 재산도 많다고 하지만 캔디는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하기 위하여 귀국한 것이 아니고 홀로서기 위해서 나온 것이에요. 어려운 자신의 처지를 면하기 위하여 몸을 팔 듯 결혼한다는 자체는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이죠. 캔디는 술 취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어요.
"흥, 돈이 뭔데?"
그렇게 밤을 꼬박 새우다보니 벌써 아침이 되었어요.
비몽사몽 책상 앞에 앉아있던 캔디의 귀에 전화벨소리가 들렸어요. 아침에 울리는 전화는 캔디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했어요. 왜냐하면 미국에 있는 자식들에게서 오는 전화였거든요. 벌떡 일어나서 거실로 나온 캔디는 수화기를 들었어요.
"마미, 나야."
올해 20살이 된 아들에게서 온 전화였어요. 영어로 서너 마디가 오락가락 하더니 별안간 캔디의 얼굴이 일그러졌어요. 눈물이 펑펑 쏟아지면서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캔디는 되풀이 하고 있었어요. 아들이 오토바이 경주에 출전했는데, 오토바이의 속력을 높이면서 언덕을 달려서 점핑하는 순간에 한국으로 떠난 엄마의 얼굴이 아들의 눈에 별안간 보였다는 것이었어요. 그 순간에 핸들을 꽉 잡은 손에서 힘이 풀리면서 그만 곤두박질쳤고, 다리가 부러진 채 병원에 실려 왔다는 말이었어요.
"I am sorry my baby. I am sorry."
캔디는 수화기에 대고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엉엉 울었어요. 혼자만 잘 살겠다고 한국에 나온 못 된 엄마가 된 느낌이었어요. 병원에서 아픈 몸을 뒤척이며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들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으니, 고향땅이 서럽기만 했던 것이에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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