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6. 한순간 난 원더우먼이 되었다

무늬만여우공주2004.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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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들은 지 할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아빠를 닮은게 아니라 할아버지를 더 닮은 것이다.

우리 어머님은 눈이 크고 눈썹이 짙은 강한 인상을 주는 미인이다. 그런데 자식 셋이 다 어머님 쪽을 많이 닮아 랑이나 시누나 아주버님이나 그냥 길거리 지나가도 형제 자매인지 안다.

시누가 어느집에 피아노 레슨을 해주러 갔더니 그 집에서 누구 동생 아니냐고 물어볼 정도로 닮았다. 셋다 선이 굵은 미남 미녀다.

아버님은 젊을 적 사진을 보면 진짜로 탤런트가 울고 갈 정도로 미남이다. 근데 세상 사는게 힘드셨든지 아님 원래 그렇게 뚝딱거리고 공사하는걸 즐겨서 그러셨는지 도무지 잘 생긴거가 표가 안나신다. 그래도 자식 셋 중에서 랑이 아부지를 젤루 많이 닮았는데 안닮아도 되는 그 불같은 성질까지 빼닮았다.

큰집 조카는 할머니를 빼닮았다. 그래서 어머님은 첫손주에다 장손주요 당신을 쏙 빼닮은 조카를 편애하셨다. 7개월 차로 나온 우리 아들은 아기가 생긴지 얼마 안된 집에 생겨서 그케 환영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야말로 떡두꺼비같이 잘생긴 조카는 누가봐도 우량아에 인물이 훤했다.

우리 아들은 아버님을 닮아서 눈이 찍 찢어져 위로 올라가고 겸자로 억지로 세상에 나온 애답게 얼굴이 못난이였다. 어머님은 대놓고 편애를 하셨는데, 그 이유를 쟤는 재롱을 부리니 이쁘고 우리 아들은 아직 갓난쟁이라 덜이쁘다고 하셨다. 그럼서 하시는 말씀이

"봐라, 생긴거도 쟤가 훨씬 이쁘잖냐."

"네에 그렇네요. 어머님"

겉으론 씨익. 웃었지만, 어디 그게 그런가. 나야 내 속으로 난 내 새끼가 훨씬 이쁘징.

아버님은 그게 안타까우셨는지 아님 당신을 많이 닮아서인지 우리 아들을 더 이뻐하시는거 같았다. 백구라는 한인 촌이 있는데 거기에 가셨었는데 내 아는 아줌마가 아버님보고 "윤희 할아버지 아니세요?" 그케 물어봤다고 엄청 좋아하셨드랬다.

조카는 뭔가 깡깡거리며 큰소리가 나는걸 좋아했다. 그래서 분유 깡통을 수저로 내리치며 노는걸 좋아했는데 난 정말 그 소리가 정신머리가 없게해서 너무 싫었다. 더군다나 아가 젖물려 재워놓으면 그 옆에와서 깡깡거리며 깡통을 치는데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걸 뺏어서 다른 데 갖다놓으면 어머님은 아가 잘 노는데 왜 뺏냐고 도로 손에 쥐어주곤 하셨는데 그럴 때면 내가 다른 데로 피신을 가는게 상책이었다.

아들은 무럭무럭 자라서 보행기 타는거 선수권자가 되었다.

거실이 타일인데다 너무 넓어서 한번 발을 구르면 속도가 무지 빠르게 굴러갔다. 아들은 그 속도감을 즐기는 보행기 매니아가 되었다. 그 타는 모습이 너무 재밌어 보여서 가끔 나도 올라타서 발을 구르며 놀 때도 있었다.

우리 방엔 아주 오래된 독일제 전축이 있었는데 골동품이었다. 소리가 썩 괜찮게 나와서 음악을 좋아하는 랑이 애지중지하는 거였는데 거기 안에는 랑이 어렸을 적부터 모아온 전축판이 많았다. 퀸, 스콜피언스, 키스, 등등 내가 잘 모르는 가수들꺼가 엄청 많았는데 아들은 기어가서 전축문을 열고 그 판 알갱이를 꺼내는걸 좋아했다. 그거 한번 꺼내놓으면 다시 껍데기와 알멩이를 맞추어 놓는다는게 여간 힘들고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방에 잠깐 갔는데 아들이 보행기를 밀며 쫓아왔다. 거긴 카페트로 되어 있어서 보행기를 밀고 다니기가 수월치 않은 곳인데 손바닥 모양 이빨 발육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좋아라 쫓아왔다. 보행기 탄 채로는 전축 문이 안열리니 아들은 낑낑 거리며 그걸 열려고 애썼다. 그때 밑에서 벨이 울렸다. 우체부가 왔나부다.

그 때 살던 집은 삼층집이었는데 일이층은 공장으로 세를 주고 삼층에 살림집이 있어 거기서 살았었다.
일층 현관에서부터 계단이 삼층까지 나 있는데 대리석 계단이 살짝 원을 돌며 내려간다.
삼층이라 층계의 거리가 꽤 된다. 게다가 아르헨티나 집들의 구조 특징은 천정이 높다는 것이다. 새로 지은 건물들은 현대식으로 지어서 구조가 낮지만 대부분의 집들은 천정이 무지 높았다. 그 집도 그래서 그 층계의 길이가 꽤나 길었다.

현관에 내려가려면 그 층계를 막아놓아야 했다. 아들이 보행기를 밀고 다니니 떨어지지않게 아버님이 간이 문을 튼튼하게 만들어 놓으셨다.
아이를 거실로 밀어다 놓고 뛰어내려가 우체부가 가져온 것들을 받고 싸인을 하고 있었다.

쿵!

순간 난 머리가 쭈빗 섰다.
보행기가 옆과 밑이 속이 빈 쇠로 되어 있었는데 그 쇠가 대리석 계단에 한 번 부딪힌 소리같은거다. 내가 분명히 막아놓고 왔는데 이게 웬일인가 말이다. 살짝 사이가 벌어지긴 했지만 아기가 그걸 밀 힘이 없을텐데...

뒤를 돌아보았다.
보행기가 한번 더 탕~!! 소리를 내며 돌층계에 부딪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아들은 보행기 탄채로 거꾸로 공중에 붕 떠 있었다.
아기가 죽을지도 모를 상황에 심장이 멎는거 같았다.

그 계단을 어떻게 뛰어 올라갔는지 난 기억도 안난다. 어쨌든 난 그 계단을 삼분의 이를 뛰어 올라가 아이를 받았다.
아이는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보행기는 탕탕 소리를 내며 저 아래까지 한참이나 굴러내려갔다. 계단이 대리석인 관계로 보행기는 거의 작살이 났다.

아이는 그제서야 울음을 터뜨렸다.
가만히 나도 울음이 나오려는걸 참고 안아주었다.
손도 다리도 떨렸지만 아기가 살아난 것에 난 너무 감사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아이를 감싸고 달랬다.

지금도 난 그 계단을 어떻게 그렇게 빨리 뛰어올라 갔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기적같은 일이 내게 벌어졌던거다. 한순간 난 원더우먼이 된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