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와 그 여자의 이야기 [12]

표류교실2004.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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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수업이 모두 끝나고 시계를 보자 7시였다. 짐을 챙기기 위해 지우가 사무실에 들어섰을때는 다음 수업준비를 하고있는 선생님들과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 선생님들이 몇몇 보였다.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온 그녀는 모처럼 준하의 병원으로 직접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기억도 나지않을만큼 오래시간전에 ?그래봤자 겨우 한달정도 되었지만- 가보고는 전혀 들여다보지 않은곳이었다.

3층까지 올라가야하는데 더워서라도 계단을 이용하고싶지는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한 1분도 되지않아 ‘땡’하는 소리와 함께 3층에서 문이 열렸다. 하지만 이렇게 더운데 계단을 이용하고싶은 사람이 있었나보다. 그녀가 병원문을 열으려 손을 뻗을때 계단을 뛰어올라온 남자가 그녀를 밀치고 먼저 병원에 들어섰다. 그 사람이 밀치면서 벽에 부딪힌 지우는 얼굴을 찌푸리며 팔을 움켜잡았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접수데스크를 사이로 왼쪽에는 현식이 하는 신경외과가 있었고 오른쪽으로 준하가 하는 정형외과가 있었다. 급히 병원으로 들어섰던 남자가 로비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사람들을 재치고 먼저 준하의 진료실에 뛰어들어가려하자 간호사들이 붙잡았다.

 

“김준한가 하는 자식 나오라 그래! 어? 나오란말야!”

“어머, 왜이러세요.”

 

이제 갖 20살 중반이 된 여자간호사 두명이 매달려봤지만 화가 난 40살쯤 먹어보이는 남자를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엄청난 소란에 준하가 하얀가운을 입은 전형적인 젊은 의사의 모습으로 진료실에서 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너야? 너가 김준하야?”

“네, 그렇습니다만.”

“젊은 의사놈이 미쳤어? 너 미쳤어? 어?”

 

전혀 무방비상태였던 준하를 벽에 밀치면서 남자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지우는 그 광경에 너무 놀라 막고싶어도 두 발이 말을 듣지않았다. 다만 한 손으로 다물어지지않는 입을 막고 있을뿐이었다. 이제는 신경외과 진료실 문까지 열리고 현식이 뛰어나왔다.

 

“무슨일이야? 무슨일이예요, 이간호사?”

“모르겠어요, 선생님.”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준하의 멱살을 잡으며 흔드는 남자는 현식이 아무리 애를 써도 손을 놓을 생각조차 하지않았다.

 

“책임져, 이자식아. 이 돌팔이 의사놈아! 책임 지란말야!!”

“저, 이 손놓으시고 차근차근 말씀하시죠.”

 

전혀 반론을 하지않고 가만히 당하고만 있는 준하를 대신에 현식이 급히 말하며 계속해서 남자의 몸을 준하로부터 떼어내려했다.

결국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나서야 그 남자의 손에서 힘이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준하를 때리고 싶은데 무척 힘들게 참는지 움켜진 주먹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준하를 한번 노려보더니 먼저 준하의 진료실로 들어갔다.

 

“괜찮은거예요?”

 

그 무서운 남자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조금 안심이 된 지우가 준하에게 달려들며 물었다. 준하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꾸겨진 가운 카라를 똑바로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야,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용히 잘 해결해. 큰일 되지않게.”

 

현식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저 사람이 뭣 때문에 온건지는 대충 짐작이 가.”

 

뜻하지 않은 말을 남겨둔채 그 화난 남자가 으르렁 거리고 있을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지우는 진료실 문앞에서 팔짱을 끼고 섰다.

 

“괜찮을거예요. 의사를 하다보면 이런일 가끔있어요. 아마도 오해때문에 빚어진 일일거니까 걱정마세요.”

“그래도 아까는 정말 무서웠어요.”

 

입술이 파르르 떨려왔다. 준하의 얼굴이 주먹에 세차게 날아갈까봐 조마조마했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지 딱딱한 표정으로 그에게 덤벼드는 남자의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던 준하였다. 자신이 무엇을 해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던간에 스스로를 믿는다는 강한 자신감이 얼굴에 묻어나있었다.

 

 

 

한 20분쯤 시간이 흐르자 조금은 가라앉은 하지만 눈물을 흘렸었는지 붉어진 눈으로 남자가 진료실에서 나왔다. 그의 뒤에서 따라나온 준하는 접수데스크에 앉아있는 이 간호사에게 말했다.

 

“진단서, 이분한테 드리세요.”

 

수심이 가득찬 얼굴로 의자에 앉아 기다리던 지우의 얼굴도 쳐다보지않은체 굳은 표정으로 다시 진료실안으로 들어가버린 준하는 8시가 다 되어서야 밖으로 다시 나왔다. 병원이 문을 닫는 시간은 원래 7시 30분이었기에 환자도 더이상 없었고 간호사들도 퇴근을 했고, 지우와 함께 준하를 기다리던 현식마저도 집에 간 상태였다. 홀로 로비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지우를 발견한 준하는 놀란듯 쳐다봤다.

 

“미안. 정신이 없었어. 당신이 있다는걸 잊어버렸어.”

 

병원의 모든 불을 끄려는듯 스위치로 손을 뻗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지우에게 조용히 말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아요. 준하씨는 괜찮아요?”

“뭐, 괜찮다면 거짓말이고 안괜찮다면 좀 과장이고.”

 

밖으로 나왔을때는 전보다 더 어두웠다. 차에 올라탄 준하는 잠시 시동도 걸지않고 안전벨트도 하지않은체 멍하니 앞에 놓인 핸들을 쳐다봤다.

 

“당신이 오늘 저녁사주겠다고 그랬는데. 어쩌지. 밥대신에 술사줄수 있어?”

 

빈속에 술을 먹는다는게 조금은 걸렸지만 솔직히 그녀도 이 상황에는 밥이 먹어가지 않을것같았다.

 

“좋아요, 술먹어요. 좋은데로 안내하세요.”

 

 

준하와 지우는 둥그런 조그마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지우는 잘 익어가고 있는 삼겹살을 뒤집었고 준하는 홀로 술잔을 천천히 비우고 있었다. 무슨일이 있었던걸까. 너무 궁금했지만 차마 먼저 물어볼수가 없었다. 준하는 계속 아무런 말도 하지않은체 술잔만 비워나갔다.

 

“이래서 의사 떼려치고 싶었던 적이 또 있었지. 하지만 이건 의료사고는 아니야, 절대로.”

“오진이었어요?”

 

그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자 지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무슨 일이었는데요?”

“이제 4살쯤 먹은 아이인데, 나한테 처음왔을때는 그 애 엄마가 놀이터에서 놀다가 넘어져서 다쳤다면서 데리고 왔었어. 보니까 발목이 부어있기는 하더라고. 엑스레이를 찍었지만 별 이상이 없어서 단순히 삐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조금 있다가 다시 온거야. 그때는 더 부어있었고 삔것과는 관련이 없어보일정도였어. 그래서 약을 처방해주기 시작했지. 세번째로 찾아왔을때는 더 악화가 되어있어서 아무래도 뭔가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거든. 다른 약을 처방해주고 나서 내가 혼자 유추해보기 시작했어. 혹시 골수염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다음에 그 환자가 오면 더 큰병원으로 가서 CT 촬영해보라고 말을 하려했어. 그런데 그 아이 아버지가 오늘 찾아와서 그런거야.”

 

잔에 남은 작은 한 방울 마저 툴툴 털어내자 지우가 새로 잔을 채워줬다.

 

“대학병원가서 CT 촬영해보니까 골수염이더래. 그런데 그게 악성이어서 성장판에까지 번졌다고. 그 사람은 내가 처음부터 잘못 진찰해서 생긴일이라고 달려든거야. 하지만 나는 개인병원을 하는사람이고 대학병원이나 가지고있는 대단한 기계들은 없다고. 겨우 엑스레이정도로 해결보는데, 골수염은 엑스레이만으로는 나타나지않아. 그리고 애 엄마가 놀이터에서 놀다가 다쳤다고하면서 왔는데 처음보자마자 ‘이거 골수염입니다’ 이러면 나보고 미쳤다고하지 맞다면서 맞장구치겠어?”

 

지우는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하기전까지는 조금 마음만 상했을뿐 여전히 가슴은 단단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나보다. 속에 응어리진것들이 한데 뭉쳐있었던거다. 단 한번도 그녀앞에서는 이렇게 숨이 막힐정도로 안타까운 이야기는 하지 않았던 그라 지우의 마음이 더 아팠다. 힘들어하면서 동시에 화가 나 있는 그의 모습. 무슨 위로의 말을 해줘야할지 모르겠어서 대신에 잔을 가득 체워줬다. 이러면 그녀의 위로의 마음이 그에게 닿을 것같아서.

 

 

 

준하의 집에 들어온 지우의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그녀보다 무거운 준하를 업어야 한다는게 보통 쉬운일이 아니었다. 방이 4개나 있는 집이었는데 준하의 침대가 있는 방을 찾기위해 쓸모없는 방문을 2개나 열어봐야했다. 그를 침대에 떨어트리듯 내려놓고 침대 끝에 걸터앉아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조금 숨을 돌리고 시계를 봤을때는 벌써 1시가 넘어서고있었다. 아무래도 이 사람 차를 하룻밤 빌려야할듯 싶다.

 

“가지마.”

“…….”

 

준하가 자리에서 일어난 지우의 손목을 세게 붙잡았다. 그녀가 돌아봤을때 준하의 두눈은 멀쩡하게 떠있었다. 술에 취하지 않은 사람처럼 정신이 맑아보였다.

 

“아까 그 남자 누구였어?”

“…….”

 

아직도 여전히 혀는 돌아가있다. 제대로 정신이 돌아온것은 아니었군.

 

“누구였어. 전화로 다 들렸었어.”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까. 예전 남자친구였다고? 아니면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고민하고 있는 사이 준하는 괴로운듯 인상을 쓰며 얼굴을 침대에 파뭍었다. 고통이 조금 가셨는지 눈을가늘게 뜨며 더 힘이 들어간 손으로 지우의 손목을 잡았다.

 

“가지마..”

 

다시 두눈이 천천히 감겼다. 하지만 그의 손은 그녀를 놔줄 생각을 하지않았다. 하는 수 없이 들고있던 핸드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지우는 그가 깰까봐 조심하며 침대위로 올라갔다. 그의 옆에 눕자 손목을 붙잡은 그의 손에서 힘이 조금씩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지우는 그의 머리를 두손으로 감싸안았다. 향기로운 샴푸냄새가 맡아졌고 상쾌한 스킨냄새가 풍겨왔다. 조금씩 준하의 두 팔이 그녀의 허리를 조여왔다.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그녀의 허리에 두팔을 감아 꼭 붙들어 놓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준하는 잠이 들수있었다.

 

 

 

잠결에 목이 마른 준하는 눈을 떴다. 그는 지우의 품안에 안겨있었다.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은체. 목은 급하게 물을 찾고 있었지만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항상 술을 마시면 곧바로 필름이 끊기는 그였지만 전날밤 일만은 뚜렷하게 기억이 났다. 침대위 시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품에 안겨있는 준하가 움직이는게 느껴진 지우는 눈을 뜨고 그를 마주봤다.

 

“잘 잤어요?”

“덕분에.”

 

자리에서 일어난 준하는 그들이 이불조차 덥지 않은체 어젯밤과 같은 모습으로 잠이 들었다는것을 깨달았다. 침대에는 주름조차 잡혀있지 않아서 아무도 누워있지않은듯 보일정도였다. 한손으로 눈을 비비며 그는 아파오는 관자놀이를 눌러보았다. 지우는 어색하게 일어나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않은체 침대의 끝에 걸터 앉았다. 뭐라 할말이 없었다. 저녁에 그의 옆에 누울때는 전혀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렇게 밝은 아침 그를 마주보려니 힘들었다. 길게 풀어진 머리를 만지작 거리다가 손으로 빗질을 하며 핸드백에서 꺼낸 끈으로 묶었다.

 

“출근해야할텐데 기다려. 같이 가자. 화장실 거실에도 하나 있는데 써도 괜찮아. 나는 여기 화장실에서 샤워 좀 해야겠어.”

 

자리에서 일어난 준하는 침대방과 옆방을 연결해주는 작은 통로에 있는 화장실로 향하며 입고있던 와이셔츠를 벗었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던 지우는 그의 넓은 등을 보았다. 단단한 근육과 보기좋게 그을린 피부. 화장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샤워기에서 시원스럽게 흘러나오는 물소리가 들렸다.

 

 

 

말끔히 세수를 하고 가볍게 화장을 고친 지우는 거실 쇼파에 앉았다. 그녀의 집처럼 꾀 살림살이가 없는 집이었다. 그래도 티비는 바닥에 놓여져 있지 않았고 씨디들도 길을 가로막으며 쌓여져있진 않았다. 굉장히 오디오 시스템이 잘되있는 거실이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천장의 양 끝쪽에 스피커가 부착되어 있었다. 바닥은 광택이 빛나는 마루였고 벽지는 옅은 갈색톤이 묻어나는 흰색이었다.

 

“아직 7시 30분이네. 시간 많이 남았지?”

 

방에서 나오며 준하가 물었다. 그의 머리는 아직 다 마르지 않아서 물기가 조금 남아있었다.

 

“아침 먹고 싶어요?”

“아니, 아직도 속이 좀 거북해서 아무것도 못 먹을거같아.”

“나도 마찬가지예요. 속이 거북한 파트 빼고는.”

 

가만히 거실 한가운데에 서있던 준하가 지우의 옆 쇼파에 앉았다. 그가 스쳐지나가는 공기속으로 스킨냄새와 바디로션 냄새가 흩날렸다.

 

“그렇게 빈속에다가 술먹었는데도 괜찮은가봐요?”

“견딜만해.”

 

아침에 눈을 떴을때처럼 할말이 없어졌다. 왜이렇게 민망한걸까. 그저 서로의 품에 안겨 잔것밖에 없는데 그를 똑바로 쳐다볼수가 없다. 그건 준하도 마찬가지인듯 슬슬 그녀의 눈을 피하고있다. 술에 취했던 그가 물어봤던 말이 생각났다. 전화에서 들려오는 사람이 누구였냐는 질문. 왜 다시 물어보지 않는걸까. 정말 어제 나를 붙잡았던것은 술김에 그랬던거였을까. 그가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느낀 묘한 감정은 그냥 내가 지어낸 거짓이었던것일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아니면 이제 기다리지않아도 되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