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성(城)을 향해 가는 길 [24-②]-귀(歸:돌아가다):그대에게 주는 약속※

미강2004.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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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연은 빈 자리가 주는 허전함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급히 몸을 일으키던 하연은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줄기 소리를 듣고 나서야

 

짧은 안도의 숨을 쉬며 다시 자리에 누울 수 있었다.

 

 

나른한 잠기운을 떨쳐내고 옷 입기를 끝냈을 때,

 

젖은 머리카락을 한 민혁이 욕실에서 나왔다.

 

 

 

“…기분이 어떻지?”

 

 

 

살짝 달아올랐던 하연의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쩜 그런 질문을!

 

 

좋은 아침이라는 짤막한 아침인사를 건넸다고 해도

 

그의 눈을 어떻게 쳐다보나 고민하고 있던 하연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진지한 그의 표정을 가만히 응시하던 하연은

 

느낌 그대로를 말해 주었다.

 

 

 

“…당신 방에 있는 침대가 훨씬 더 푹신하고 편해요.”

 

 

 

그녀의 대답을 들은 민혁의 왼쪽 눈썹이 씰룩 올라갔다.

 

 

잠깐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어느 새 하연 곁으로 다가가

 

발갛게 달아오른 볼에 입을 맞췄다.

 

 

생채기는 남아 있었지만 부기는 거의 다 가라앉아 있었다.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힌 채로 손톱자국을 들여다보던 민혁이 말했다.

 

 

 

“…흉터라도 남게 되면 그 여자의 살가죽을 몽땅 벗겨서 소금에 던져 버리겠어!”

 

 

“으르렁거리지 말아요.

 

그것보다는 차라리 눈썹을 씰룩거리는 게 훨씬 보기 좋아요.”

 

 

그 말에 민혁의 눈썹이 또다시 씰룩 올라갔다.

 

 

그 모습에 배시시 웃음이 번지는 하연을 보며

 

민혁은 어깨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등 뒤로 모아 주었다.

 

 

그래, 그거면 충분해.

 

그 미소만큼은 세상 어느 것을 준다 해도 바꾸지 않아.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아주 적절한 질문이야!

 

우선 아침을 배불리 먹은 다음에 생각해 보도록 하지.”

 

 

 

두 사람 모두, 허기진 배를 채워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 날 아침 하연은

 

앞치마를 두른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상상에서는 그토록 힘들었는데.

 

 

오히려 묘하게 앞치마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능숙하게 스크램블 에그를 만드는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 또 한 조각의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아직도 웃음에 인색할지 몰라도,

 

진하연이라는 여자 앞에서 그는 놀랄 만큼 잘 웃었고

 

너무나도 웃음이 잘 어울렸다.

 

 

현관을 나서면서 하연이 말했다.

 

 

 

“…도대체 못하는 게 뭐 있나요?

 

요리까지 잘 하는 줄은 몰랐어요.”

 

 

“알잖아! 감정 표현 하는 거,

 

마음 드러내는 거, 웃는 거!

 

생각해 보면 나도 서투른 것투성이야.

 

또 있군, 낯간지러운 말 따위는 못하는 것도! 딱 질색이야!”

 

 

 

순식간에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 되어 버린 민혁의 뒤를 따라가던 하연은

 

건물 입구에서 대기 중인 상현과 눈이 딱 마주쳤다.

 

 

하연은 자기도 모르게 제대로 상현의 눈길을 피해 버렸다.

 

 

눈치 빠른 상현은 짙은 선글라스 속에서

 

의미심장한 눈길로 두 사람을 살폈다.

 

 

스르륵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단박에 잡아냈다.

 

 

슬그머니 번지려는 미소를 억지로 삼킨 뒤,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여전히 가벼운 목례를 하고서 차에 오른 하연은

 

타지 않고 서 있던 민혁을 향해 물었다.

 

 

 

“…나 혼자 가야 하나요?”

 

 

“뒤 따라 갈 거야! 약속하지.”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일이 없던 그였기에

 

하연은 엷은 미소로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편안한 자세로 기대앉은 그녀를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며 민혁이 입을 열었다.

 

 

 

“철야 근무를 하느라 피곤한 기색이 짙군.

 

제대로 처리 해 두었겠지?”

 

 

“물론입니다.

 

저야 늘 짧은 수면시간에 만족합니다만, 회장님께서는 괜찮으시겠습니까?”

 

 

 

상현의 의미심장한 질문에 민혁의 인상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금방이라도 쩡, 하며 얼어붙을 것 같은 눈빛을 던지며

 

얇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이미 내성(耐性)이 생겨서 적응이 되어 버린 상현에게 먹힐 리 만무했다.

 

 

쉽사리 들켜버린 하연에게 뭐라고 하는 대신

 

신랄한 비난의 화살이 모조리 상현을 향해 날아갔다.

 

 

 

“자네의 업무 능력이 나보다 떨어지는 까닭이 뭔지 아나?

 

바로 그 쓸데없는 호기심 때문이야!

 

자신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일에

 

괜히 신경을 기울이는 건 아무런 득이 되질 않아!

 

게다가 앞으로 내가 할 일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굉장히 불쾌하지!

 

그 불쾌한 기분 고스란히 받고 싶지 않으면 조심해!”

 

 

 

“…서류 여기 있습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처리되어 있을 겁니다.”

 

 

 

두툼한 서류봉투를 건네는 상현의 몸짓은

 

말 그대로 상사를 대하는 태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연이 타고 있던 차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줄곧 제자리에 서 있던 민혁은

 

상현이 건넨 서류봉투를 단단히 움켜쥐고 걸음을 옮겼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내내 엄습하는 가벼운 흥분감이 주위를 감쌌다.

 

 

때때로 적당한 흥분감은 깊은 곳에 숨어 있던 호전성을 끄집어내기도 하는 법.

 

 

약속장소에 도착한 민혁의 표정은 오히려 담담했다.

 

마치 고요한 연못처럼.

 

언제라도 작은 조약돌 하나에 파문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예약 하셨습니까?”

 

 

“크리스탈 룸이 어디지?”

 

 

 

크리스탈 룸이라는 단어 하나에 정중하던 남자의 눈동자가

 

조금 커지다가 다시 되돌아갔다.

 

 

정중한 말 대신 공손한 행동으로 그를 안내한 남자는

 

소리도 내지 않고서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문 안으로 들어서던 민혁은

 

테이블 한 쪽에 놓인 물잔이 이미 절반 넘게 비어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날 왜 보자고 했지?”

 

 

오픈 시간에 맞추어 약속장소에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원영의 목소리 끝이 갈라져 있었다.

 

 

짙은 남빛 스카프로 머리부터 목덜미까지 감쌌지만

 

초조한 기색은 절대로 가려지지 않았다.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원영의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간다 싶더니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민혁 앞에 놓인 물잔을 집어 들었다.

 

 

 

“…만약 그 물을 끼얹는다면 난 이곳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생각이야.

 

단 한 마디도!”

 

 

 

허공에 뜬 그녀의 손길이 주춤하더니 조용히 내려갔다.

 

 

아주 잠깐 이었지만 노르스름한 불빛에

 

그녀의 파리한 낯빛이 고스란히 드러나 버렸다.

 

 

이미 아침에 하연으로부터 그녀의 상태를 간단히 전해 듣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눈자위에 깔린 검푸른 기색은 충분히 놀라운 것이었다.

 

 

신경질적으로 물잔을 집어 들고 남아있던 물을 마시던 그녀를 향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마름도 일종의 부작용이라고 하더군.

 

그런 식으로 자신을 괴롭힐 이유라도 있는 건가.”

 

 

“…상관하지 마! 날 보자고 한 용건이나 말 해!”

 

 

 

민혁은 대답대신 옆에 놓아 둔 서류봉투를 그녀에게로 쓰윽 밀었다.

 

그것을 보는 원영의 눈빛은 어지럽게 엉키기 시작했다.

 

 

이 놈이 도대체 또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야!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의심이 도무지 한 방향으로 모아지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저 여유 만만한 표정이라니!

 

예전부터 속을 알 수 없는 교활한 놈이었으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모든 법적 절차는 이미 끝내둔 상태지.

 

저런, 눈앞에 두고도 뭔지 모르면 쓰나.”

 

 

“이게 도대체 뭐야?”

 

 

“이 따위 의미 없는 싸움, 지겨워 졌어!

 

흥진그룹 경영권에 대한 모든 권한은

 

이원영 앞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서류들이지!

 

 

그렇게 가지려고 발악을 하고,

 

포악을 부렸으니까 어디 한 번 잘 갖고 놀아 보라고!

 

단, 앞으로 내 인생에 걸리적거리지 마! 그게 다야.”

 

 

 

흥진그룹 경영권 포기를 선언하는 민혁의 목소리는

 

마치 1 더하기 1은 2라는 간단한 덧셈 공식 하나를 말하는 것 같이 들렸다.

 

 

그렇다고 해서 수많은 직원들의 생계가 달려 있고

 

더 나아가서는 국가 경제를 책임지는 흥진그룹을

 

무책임하게 내던지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되었다.

 

 

어줍잖게 경영을 한다면 언제든지 또다시 빼앗아 올 수 있다는 전제 하에,

 

훼방꾼 없는 앞으로의 삶을

 

거래 조건으로 내걸고 있는 것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길로 서류들을 넘겨보던 원영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뭉치들을 집어 던짐과 동시에

 

민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불행히도, 그녀보다 민혁의 동작이 훨씬 재빨랐다.

 

 

“…내가 예전에 알려주지 않았던가!

 

언제든지 이 손에 조금만 힘을 주면 목뼈 하나 부러뜨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라고 했을 텐데!”

 

 

 

새빨갛게 타오르던 원영은

 

온 힘을 다해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던 민혁의 손을 깨물었다.

 

 

이빨이 파고들면서 만든 상처에서 핏방울이 금새 배어나왔지만

 

상처를 들여다보는 대신에 그녀의 뺨을 사정없이 올려붙였다.

 

 

쿵, 하며 벽에 부딪힌 그녀가 나뒹굴었다.

 

 

 

“…손톱이 짧다는 게 아쉬운 순간이군.”

 

 

감정 없는 표정으로 손을 들여다보며

 

툭 던지듯 말하는 민혁이었다.

 

 

그를 향해 서늘함이 뚝뚝 묻어나는 어조로 짧고 간명한 질문을 던졌다.

 

 

 

“…무슨 속셈이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민혁은 한쪽 구석에 주저앉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원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핏발 선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 위해

 

살짝 몸을 낮췄다.

 

칼날 같은 그의 눈빛을 마주보던 원영의 기가 한 풀 꺾였다.

 

 

 

“불쌍하군. 계산?

 

그래, 살아가면서 계산은 반드시 필요하지.

 

하지만 때때로 명확한 수치의 확률보다 정확한 게 있는 법이야.

 

그건 바로, 감(感)이지!

 

무질서하고 무모해 보이지만 치우치는 대로 행하는 선택은 정확해.

 

 

넌 아주 오래 전부터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지.

 

쉴 새 없이 굴러가는 머릿속에서!

 

한태서를 선택한 것도

 

남들이 찾아내지 못한 확률을 알아냈기 때문이지!

 

 

좋아, 그 점은 인정하겠어.

 

하지만! 언제나 부족한 게 있었거든.

 

나에겐 타고난 감이 있었지만 너한테는 없어!

 

무서울 만큼 철저하지만 그건 영리함으로 위장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아!”

 

 

 

“…아, 아니야! 어디서 그 따위 헛소리를!”

 

 

그 순간 원영의 고개가 다른 쪽으로 훽 꺾였다.

 

살갗이 질러대는 비명소리가 섬뜩하게 실내를 울렸다.

 

 

연달아 뺨을 두 대씩 맞은 원영은 더 이상 고개를 치켜들지 않았다.

 

 

대신 바닥을 짚고 있는 그녀의 손목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으로

 

감정표현을 대신했다.

 

 

 

“…승패는 벌써 오래전에 결정 나 있었던 거야!

 

승(勝)쪽에 서 있는 건 나야!

 

네 것을 모조리 빼앗아 봤는데, 그 기분 참 더럽더군.

 

 

작게나마 어둠 속에서 보낸 시간들을 보상해 줄 거라고 생각했던 건

 

나의 착각이었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쓸데없는 짓을 하면서 시간 낭비 하는 거야!

 

이 쓸데없는 짓에서 손떼겠어!”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을 떨구던 그녀를 등 뒤로 한 채,

 

망설임 없는 발걸음을 옮긴 그는 비로소 해방감을 느꼈다.

 

 

밖으로 나온 그를 반기는 건 한 조각의 서늘한 바람과

 

어느 새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상현이었다.

 

 

 

“…일은 잘 끝내셨습니까?”

 

 

“끝냈지! 아주 잘!”

 

 

“…이제 어디로 가실 예정입니까?”

 

 

“멍청하긴!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비밀의 성으로 가야지!”

 

 

 

짧게 목례를 하며 뒷좌석 문을 열어주는 상현을 향해

 

민혁은 처음으로 웃음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의 입술은 더 이상 어색한 곡선을 그리고 있지 않았다.

 

 

돌아갈 것이다!

 

행복이 시작된 곳으로!

 

마침 그의 머릿속에 배시시 웃는 어떤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너무나 시기적절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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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열병은 누구나 겪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의 기억이든 앞으로 다가설 미래든 어느 누구에게나 사랑의 감정은

 

가슴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이제 가을비라고 해야 하나요? 빗줄기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에

 

쭈뼛거리며 또 한 편의 글을 남겨두고 물러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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