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법

이미은2004.09.07
조회920

바다미: 우리 그럼 그 버스 정류장 앞에서 얼굴보고 갈까?

 

 

 

데미안: 흠.. 바다미가 왜 이러지..

 

 

 

바다미: 내가 또 앞섰나? 

       두번만 생각해도 데미안 레벨과 같아질텐데...

 

       그치?

 

 

 

 

데미안: 잘 모르겠다.

 

 

 

바다미: .......  뭘?

 

 

 

 

데미안: 그냥..

 

 

 

 

 

 

 

 

 

'잘 모르겠다'는 말을 너는 잊은 걸까?

 

 

 

내게는 등골에 서리가 내리는 공포영화를

 

 

 

꿈에서 다시 보는 것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내가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모르겠다'고 툭- 던지는 그 말이라는 걸.

 

 

 

 

 

 

아마 그 아이,

 

 

 

너의 베스트 프렌드가 MT를 다녀온 다음날이었던 것 같다.

 

 

 

4년 만의 재회라는 게 아직 믿어지지도 않던,

 

 

 

그래서 서로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 보다도

 

 

 

다시 만난 첫사랑에 대한 드라마틱한 환상에

 

 

 

하루하루가 무릅짚고 외줄타듯 

 

 

 

신기하고 불안하기만 하던 초창기 재회시절,

 

 

 

"지금 엠티 가", 하더니

 

 

 

다음 날 오후 1시가 되도록 전화 한 통 없었던,

 

 

 

여자친구로서의 원망이 고조에 달하고 있던 시간.

 

 

 

 

어떻게 하룻밤이 다 가도록 여자친구한테

메세지 한 번 안보낼 수가 있어,

 

 

 

아무리 그래도 전화 한 통 못해,

 

 

 

다그치는 나에게 그애는 고작 그 한마디를 했었다.

 

 

 

 

"잘... 모르겠다.................."

 

 

 

 

뭘 모르겠냐고.. 무슨 뜻이냐고..

 

 

 

그렇게 첫사랑과의 꿈만 같던 4년 만의 재회는

 

 

 

2주도 채 담아내지 못하고 얼룩으로 덮여 버렸었다.

 

 

 

 

 

 

 

한동안 가슴에 왕-왕- 멍울이 번져갔다.

 

 

 

그, 모르겠다는 말을 다시 너에게서 듣는 순간을

 

 

 

나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너에게도 내가 내 마음을 너무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다려 주어야 할 시간을 너무 다그쳐왔던 것은 아닐까.

 

 

 

 

 

하필이면 오늘은 복통, 편두통, 소화불량이

 

 

 

동시에 나를 덮치곤 하는,

 

 

 

생리 이틀째 날이었다.

 

 

 

고1 보충수업이 3시간이나 있는 날.

 

 

 

 

1단원, 국어가 걸어온 길 펴보세요,

 

 

 

국어가 걸어온 길, 시간의 흐름이죠.

 

 

 

꼭 알아둬야 될 이 단원의 전제, 

 

 

 

국어의 역사성이죠?

 

 

 

국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천한다, 라는 거예요.

 

 

 

거기 제목 밑에다 언어의 시대구분 필기하는 거랑

 

 

 

같이 적으세요..

 

 

 

노란색 분필을 집고 '고대국어'라고 쓸

 

 

 

'고'자를 채 쓰기도 전에

 

 

 

노란분필의 허리가 뚝- 하고는 부러진다.

 

 

 

흰 분필을 집고 '중세국어' 라고 쓸

 

 

 

'중' 자를 채 쓰기도 전에

 

 

 

흰 분필의 허리가 뚝- 하고는 부러진다.

 

 

 

 

 

 

 

너에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너두 노력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근데 잘 안되는 거지..,

 

 

 

자꾸 널 보내주어야 할 것 같다,

 

 

 

우리 며칠만 연락하지 말까,

 

 

 

나 이제 지쳤어, 니가 날 이렇게 힘들게 할 줄 몰랐어,

 

 

 

라고 생각하는 족족 집는 분필마다 맥을 잃고, 기력을 잃고

 

 

 

안개꽃 부수어놓은 듯 흐드러지는 분필가루가

 

 

 

눈 속에 따갑게 가시박힌다.

 

 

 

 

 

 

 

 

 

데미안, 너도 이렇게 아프니.

 

 

 

나를 생각하면 너도 이렇게 가슴이 아프고

 

 

 

그래서 자꾸만 지우고 싶은데 따가워서 지울 수도 없니.  

 

 

 

 

 

 

 

 

사랑할 때는 그랬었다.

 

 

 

보내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면 슬프고 눈물이 나고.

 

 

 

그런데 너를 보내주어야 한다고 종일 생각한 하루에는

 

 

 

슬프고 눈물이 나지 않고,

 

 

 

억지로 숟가락으로 퍼다 담은 음식물이

 

 

 

여지없이 식도를 역류하려 든다.

 

 

 

눈알은 하루종일 분필가루를 먹은 듯이

 

 

 

따갑고 아득한 통증 속에 허우적거린다.

 

 

 

이미 산산조각이 나서 이도 맞지 않는 저들끼리

 

 

 

억지로 꿰매져 있는 양

 

 

 

머릿살이 미친듯이 푸석거린다.

 

 

 

지워야지, 생각하지 말아야지,

 

 

 

빠른 걸음으로 걷고,

 

 

 

다 차지도 않은 이면지함을 정리하고,

 

 

 

집까지 가지도 않는 만원버스를 타고,

 

 

 

귀밑에 조그맣게 붙여놓기만 좋아하던 취향도

 

 

 

밤톨 두어개 들어갈 만큼 큰 구멍이 뚫린

 

 

 

링 귀걸이로 바꿔 매달아 놓는 동안에도

 

 

 

틈틈이 가슴께로 곤두박질치는 아픔,

 

 

 

역력한 아픔.

 

 

 

 

 

 

 

 

 

너무 아팠다.

 

 

 

어제 로데오 거리의 온갖 남성 정장집을 

 

 

 

돌아다니며 너의 정장을 골라주면서

 

 

 

자켓만 걸쳐보는데도 나를 그저 웃을 수 밖에 없게 하던,

 

 

 

너에게 숨겨진 '남성'의 고백에

 

 

 

내가 얼마나 수줍었었는데..

 

 

 

까만색에 짙은 스트라이프가 이쁜지

 

 

 

네이비 계열의 톤에 밝은 스트라이프가 이쁜지

 

 

 

나에게만 선택해달라고 하는

 

 

 

나에게만 이쁘냐고 묻던, 내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이

 

 

 

얼마나 곱고 고마웠는데..

 

 

 

 

 

 

 

데미안,

 

 

 

어떡하니..

 

 

 

눈을 뜨는 순간부터 다시 눈을 뜨는 순간까지

 

 

 

도무지 한 순간도 네가 잊혀지지 않아.

 

 

 

미안해,

 

 

 

너는

 

 

 

이렇게나 너에게 빠져있는 날 원한게 아니지..

 

 

 

 

 

 

 

오늘은 수업에 들어가자마자

 

 

 

중세국어의 훈민정음 본문을 부터 판서해야겠다.

 

 

 

훈민정음 첫번째 줄에 "나랏말쌈이 듕귁에 달아" 에서

 

 

 

'듕귁'은 '중국'을 한자 원음에 가깝게

 

 

 

발음하려고 의도한 표기예요,

 

 

 

이런 걸 무슨 표기라고 하죠?

 

 

 

동국정운식 표기,

 

 

 

이상음 표기라고 하죠.., 라고 할 때 즈음

 

 

 

그냥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제처럼 그제의 어제처럼 물어봐 줄래..?

 

 

 

 

 

'오늘 저녁 메뉴

는 뭐야..?'   

 

 

 

 

그럼

 

 

 

나도 아무렇지 않게 대답할 수 있게.

 

 

 

 

 

'오늘 저녁 메뉴는

산채비빔밥, 오늘따

라 비빔밥 색깔이 넘

예쁜 거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