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성(城)을 향해 가는 길 [25]-마음에 사랑과 용서를※

미강2004.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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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마음에 사랑과 용서를


 

 

 꽃밭에 물을 주던 하연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안면이 있는 사람을 향해서는 절대로 짖지 않는 강인이

 

상현 곁에 바싹 붙은 채 걸음을 맞추고 있었다.

 

 

두 발로 걷는 사람 걸음에

 

놀랄 만큼 정확한 보폭으로 걷고 있는 강인이를 볼 때마다

 

하연은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끼곤 했더랬다.

 

 

 

정원에 놓인 테이블에서

 

오렌지 쥬스 한 잔과 함께 독서를 하고 있던 민혁은

 

책장 너머로 상현의 방문을 알고 있었지만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지!”

 

 

“좋아 보이십니다.”

 

 

“…다행이군! 방해하러 온 게 아니라면 뭔가 전달할 말이 있는 거겠지.”

 

 

 

그제야 손에 들고 있던 양장본 책을 내려놓으며

 

상현을 향해 시선을 옮기는 민혁이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거짓말처럼 평화로운 시간들을 보냈다.

 

 

팽팽한 긴장감도 없고,

 

바늘같이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도 없는데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안개같이 깔려 있던 어둠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은빛으로 빛나는 공기가 가득 차 있었다.

 

 

되도록이면 선글라스를 벗지 않던 상현조차

 

조심스럽게 선글라스를 벗어서 테이블에 내려  놓았다.

 

 

왠지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아서!

 

 

굳이 이유를 대라면 그것이 이유였다.

 

 

 

“…박길준 변호사가 면담을 요청해 왔습니다.”

 

 

박길준 변호사라는 말에 민혁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날 찾아와서 전해 줄 소식이 그것밖에 없나?

 

별로 유쾌하지 못하군.”

 

 

“…어제 새벽 두 시경, 이원영씨가 자택에서 사망했습니다.”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사인(死因)은 약물과다 복용이라고 합니다.”

 

 

“…약물 과다복용이라….”

 

 

 

마치 책의 한 구절을 읽듯, 무미건조한 말투였다.

 

 

죽었다고?

 

그 독기(毒氣)하나로 버티던 여자가?

 

알약 몇 알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었다고?

 

지금이라도 당장 손톱을 세우면서 달려들 것 같은데.

 

 

민혁은 자기도 모르게

 

테이블 위에 손가락을 톡톡, 치고 있었다.

 

 

뭔가 잘 풀리지 않거나,

 

고민거리가 있거나,

 

쉽게 이해되지 않을 때 늘 하는 버릇.

 

 

 

그래, 맞다!

 

그는 원영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늘 끼니를 거르는 상현을 위해

 

토스트와 주스 한 잔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있던 하연은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깊은 생각 속에서 빠르게 현실로 돌아온 민혁이

 

일어나서 하연의 손에 들린 쟁반을 대신 받아 들며 입을 열었다.

 

 

 

“…사망사실을 확인한 지 몇 시간 만에

 

나에게 면담을 요청해 왔다면 분명 그 면담은 필요한 거겠지.

 

약속 시간은?”

 

 

“편하실 대로 정하랍니다.”

 

 

“…좋아. 자네가 이 토스트로 허기를 달래는 동안,

 

나는 생각들을 좀 더 정리해 봐야겠군.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먹도록.”

 

 

 

결코 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나온 배려의 말이 아니었다.

 

 

그만큼 생각할 시간이 조금 길어질 지도 모르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까지 멍한 표정으로 굳어있는 하연의 어깨에 손을 댔다.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린 하연은

 

산책로를 향해 방향을 바꾸는 민혁의 뒤를 따라나섰다.

 

 

 

“강인아, 너도 외롭지? 나도 외롭다.”

 

 

상현은 컹, 하며 짧게 짖는 강인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을 향해 눈길을 던졌다.

 

 

언제나 그렇듯,

 

생각에 잠긴 민혁은 굳게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걸음 정도 떨어져서

 

일정하게 걸음을 맞추던 하연은 짧은 한 숨을 토해냈다.

 

 

약물 과다 복용이라니!

 

 

하연의 머릿속에 떨리는 손으로 약병을 붙잡던 그녀의 손이 떠올랐다.

 

 

그 때 말렸어야 했는데.

 

무슨 수를 써서든지.

 

약물에 의존하는 그녀의 나약한 의지를 비웃어서라도

 

상습적인 위로에 젖어든 그녀를 구해 냈어야 했는데!

 

 

수많은 알약과 캅셀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당신 탓이 아니야.”

 

 

여전히, 이 남자는 공기의 흐름 속에서도

 

머릿속에 뒤엉키는 생각들을 잘 읽어냈다.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하연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 하나가 똑 하고 떨어졌다.

 

 

민혁의 크고 따스한 손이 조그만 하연의 어깨를 감쌌다.

 

 

 

“…변호사를 만나봐야겠지?”

 

 

하연의 고개가 망설임 없이 끄덕여졌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아무런 조건 없이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건지.

 

 

민혁에게 용서라는 단어는

 

아직까지도 낯설게만 느껴지는 게 사실이었다.

 

 

촘촘하게 얽힌 생각들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죽었다….

 

다시 한 번 되뇌어 봐도 슬픔보다 먼저 찾아오는 허무함이 생소했다.

 

 

 

“좋아!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겠어.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만 묻지.

 

그 여자의 죽음에 눈곱만큼이라도 동정을 베풀 생각은 없어!

 

 

게다가 슬픔도 뭐도 아닌 미적지근한 느낌, 딱 질색이야!

 

그런데 내가 왜 만나봐야 하지?

 

당연히 만나봐야 할 의무는 없는 것 같은데.”

 

 

 

“…악연도…인연이니까.

 

악연은 끊어졌지만 아직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으니까.

 

그게 내 대답이에요.”

 

 

 

약 10초 동안,

 

민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고집을 보고 있었다.

 

 

그래, 예전에도 본 적이 있었지.

 

분명 이 여자는 알고 있는 것이다.

 

날 어떻게 다루는 지를.

 

 

 

하연은 마음속으로 자꾸만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기꺼운 마음으로 가 주길.

 

 

입술이 곡선을 그리려던 찰나,

 

남자는 휙 돌아서서 방향을 바꾸었다.

 

 

여전히 이 남자는 웃음에 인색했다.

 

좀 자주 웃어줘도 될 텐데.

 

 

 

“…그럼, 그 인연 확실하게 접고 와야겠군.”

 

 

“웃어 봐요. 방금 전에 보여주려던 웃음 말이에요.”

 

 

“그건 싫어!”

 

 

“왜요?”

 

 

“…희소가치가 없어지거든. 너무 자주 주게 되면.”

 

 

 

여전히 먼저 항복하고 마는 하연이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민혁의 등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음 짓는 그녀의 얼굴에 금빛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가 정원에 도착했을 때,

 

테이블에는 빈 주스잔과 접시 뿐 이었다.

 

 

뒤따라 온 하연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을 향해 그의 시선이 돌아갔다.

 

 

 

“…늦으셨군요.”

 

 

이미 차에 시동을 걸어놓고 대기중이던 상현이

 

그를 향해 던진 말이었다.

 

 

물론, 여유로운 미소도 함께.

 

 

 

☆★☆


 

 

 눈앞에 있는 돌계단을 보며

 

잔뜩 찌푸린 민혁의 인상이 펴질 줄을 몰랐다.

 

 

그의 곁에 서 있던 상현의 입에서 짤막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날 괴롭히는 걸 멈출 여자가 아니지!

 

망할 여자 같으니라구! 하필이면 이런 장소를!”

 

 

“외람된 말씀이지만, 죽은 사람을 향해서는 악담을 하는 게 아닙니다.”

 

 

 

박길준 변호사의 면담 요청은 간단했다.

 

 

「만약 이원영 그녀가 사망할 경우,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이민혁과 면담할 의무가 있고

 

약속 시간은 언제든지 상관없지만

 

약속 장소는 반드시 그녀가 정해 둔 장소에서 한다.」는 것이었다.

 

 

8년 전 사고로 인해,

 

무릎 관절을 심하게 다친 것에 걸맞게

 

서른 세 칸의 돌계단이라니!

 

 

빌어먹을!

 

 

죽어서까지 괴롭히는 취미를 버리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기라구, 이원영!”

 

 

 

으르렁거리며 거친 숨소리를 내뿜는 그가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상현은 그냥 잠자코 기다리기로 결정을 내렸다.

 

분명, 부축은 원하지 않을 테니.

 

아무리 힘겨워도

 

마지막 계단까지 혼자서 올라가려 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끓어오르는 분(忿) 때문인지는 몰라도,

 

예상했던 것보다는 덜 힘들었다.

 

 

가장 구석진 방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박길준 변호사는

 

그가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혁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변호사를 쭈욱 살펴보았다.

 

 

나이, 삼십 대 초반에서 중반 가량.

 

그 성질 급한 여자 곁에서 일하기 전에

 

한태서 곁에 있던 사람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의외로 점잖은 구석이 많아 보였다.

 

 

 

“굳이 이런 곳에서 만나 뵙길 청해서 죄송합니다.”

 

 

“…알긴 아는군. 날 만나자고 한 용건은?”

 

 

 

침착하게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변호사는

 

아무 말 없이 작은 녹음테이프 한 개와

 

서류봉투를 그에게 건넸다.

 

 

이게 뭐냐고 물어보는 대신

 

민혁의 손은 거침없이

 

서류봉투 속에 얌전히 들어있던 서류들을 꺼내 살펴보기 시작했다.

 

 

휘리릭, 휘릭, 하며 종이들이 넘어가는 소리만 들려오는 동안

 

박길준 변호사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았다.

 

 

삼분지 일가량을 훑어보던 그의 손길이 조금 늦춰졌다.

 

 

 

“…이걸 갖고 뭘 하자는 거지?”

 

 

“보시는 대로입니다.

 

이원영씨 소유 재산 및 지분과 경영권 등이

 

이민혁씨 앞으로 대습상속 (代襲相續)되는 것입니다.

 

이원영씨의 유언에 따라서 말입니다.”

 

 

“…내가 만약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회사 경영권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쉽사리 결정하시지는 않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이 테잎은 뭐지? 그녀가 나에게 유언이라도 남겼나?”

 

 

“내용은 저도 모릅니다. 그럼 전 이만.”

 

 

 

변호사 특유의 깔끔한 말솜씨로

 

모든 용건을 전달한 뒤에 조용히 문을 빠져나갔다.

 

 

다시 서류를 찬찬히 넘겨보던 민혁은 중간까지 보다가 확 덮어 버렸다.

 

 

 

 

‘죽어서까지 철저하게 내 발목을 물고 늘어지시겠다, 이건가?

 

옴짝달싹 못하게 날 다시 옭아  매다니!

 

내가 편하게 있는 꼴을 보기 싫어했었지.

 

그걸 깜박 잊고 있었군.

 

부동산과 동산을 포함한 재산까지 나에게 넘겼군.

 

 

내가 무지막지하게 감사하고 황송한 마음으로

 

그깟 알량한 재산을 받을 거라 생각했나? 천만에!

 

 

전혀 고맙지 않아! 불쾌하다고!

 

젠장할! 이 빌어먹을 여자야!

 

이따위 장난질을 쳐 놓고 비겁하게 발을 빼? 이런!’

 

 

 

민혁은 신경질적으로 서류들을 챙겨든 뒤,

 

테잎을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제법 빠른 속도로 내려 온 민혁은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던 상현에게 서류뭉치들을 떠안겨 버렸다.

 

 

 

“…이게…다 무엇입니까?”

 

 

“그 마녀 같은 여자가!

 

끝까지 나를 엿 먹일 속셈이었던 거야! 젠장할!

 

소름끼칠 정도로 정확하고 빈틈없이 내 발목을 묶어 버렸더군.

 

 

비열하게 뒤통수치는 게 취미라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만약 내 앞에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목뼈를 분질러 버리는 건데!”

 

 

 

성난 맹수처럼 서성이던 민혁은

 

차에 타자마자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테잎을 쓰윽 들이밀었다.

 

 

반투명한 회색 테잎이 기분 나쁠 정도로 싫었다.

 

저 속에는 또 뭐가 들어 있을 런지!

 

 

 

아무런 이름조차 붙어있지 않은 테잎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상현이 그것을 카오디오에 넣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볼륨을 높였다.

 

몇 초간의 정적이 지나간 후,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내가 죽었다고 안심하지는 마.

 

만약 영혼이라는 게 있다면, 반드시 네놈을 데리고 갈 테니.

 

편히 사는 꼴은 절대로 못 보거든.”

 

 

 

잠깐 틈을 둔 사이, 민혁이 코웃음을 치며 냉랭하게 말했다.

 

 

“웃기는 소리! 그대로 끌려갈 나도 아냐!”

 

 

“…참 이상하지? 죽음을 예상한 순간,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 떠오르다니 말이야.

 

딱 한 사람 뿐 이잖아. 안 그래?

 

그리고 조금 아쉬워.

 

네놈 얼굴에 떠오른 고통의 빛을…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 짜릿함도 이젠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단 한 번만이라도 네놈의 목을 손톱으로 후벼파 보는 건데.

 

마지막으로 그 느낌이라도 갖고 갈 수 있게.”

 

 

 

“…그 전에 내 손에 목뼈가 부러지겠지.”

 

 

 

“내가 준비한 선물은 어땠어?

 

꽤 기분이 더러울 거야.

 

그 생각을 하니까 우울한 기분이 좀 낫네.

 

여기까지 걸어오면서…한 번쯤 궁금해 한 적 없어?

 

 

내가 왜 그토록 네놈을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을 했는지.

 

뭐, 궁금하지 않았다고 해도 상관없어.

 

내 마음이니까!”

 

 

“…궁금할 이유도, 필요도 없어!”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호호호호홋….”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녹음 테잎을 듣고 있던 상현은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

 

 

도대체 그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분명 이 웃음소리에는 적응할 수 없으리라.

 

 

소름끼칠 듯 장송곡처럼 울리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어느 순간 뚝, 끊겼다.

 

 

 

“난 네놈이 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았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워!

 

온 몸의 핏방울을 바짝 말려놓으리라, 결심했었지.

 

이민혁, 잘난 체 하지 마!

 

네놈이 뭐든지 다 알고 있다고? 흥!

 

천만에! 웃기는 개소리!

 

네놈은 이혁준의 아들이야!”

 

 

 

“그 사실은 새삼스럽게 상기시키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지!”

 

 

“…그리고 난, 이혁준의 딸이 아니야!”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되었던 민혁의 눈동자가

 

일순간 심하게 요동쳤다.

 

 

상현도 선글라스가 답답한 듯 확 벗어 버렸다.

 

 

마치 당혹스러운 순간을 즐기는 것처럼

 

테잎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말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진세죽와 이혁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이원영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필요도 없는 것인데!

 

 

 

당당히 호적에 오른 그 여자와는 달리

 

자신은 태어난 지 몇 년이 지난 뒤에야

 

겨우 호적에 오를 수 있지 않았던가.

 

 

정확히 5분 뒤, 거짓말처럼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내가 넘겨 준 서류뭉치 중에서

 

네 번째 묶음 86페이지를 한 번 펼쳐 보는 게 어때?”

 

 

“…여기 있습니다.”

 

 

 

재빠른 동작으로 네 번째 묶음 86페이지를 펴서 건네는 상현이었다.

 

 

서류를 받아 든 민혁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앞에서 확인 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제껏 눈으로 확인된 것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어 왔던 그였다.

 

 

86페이지부터 시작되어 94페이지에서 끝을 맺는 서류들은

 

이원영 그녀가 입양아였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온 몸에 힘이 빠지며 허탈해 하는 순간,

 

재미있어 죽겠다는 투로 그녀가 말했다.

 

 

 

“…내가 아무리 버둥거려도 바뀌지 않는 사실이지! 어때?

 

제대로 뒤통수 맞은 느낌이?

 

그게 네놈을 증오한 나의 이유야!

 

 

내 어머니는 네놈을 볼 때마다 비참함을 곱씹고 또 곱씹었지.

 

어느 날 갑자기 네놈을 데리고 온 순간

 

나에게 날벼락이 떨어졌지.

 

 

넌 내 친딸이 아니다!

 

미안하다는 말도, 이해하라는 말도 한 마디 없이. 그걸로 끝!”

 

 

 

잠깐의 틈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민혁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작은 글씨들을 읽고 또 읽을 뿐.

 

 

 

“난 반문했어.

 

이렇게 될 거라면 차라리 날 데려오지 말지!

 

왜 데려왔을까?

 

끊임없이 생각한 내가 얻은 답이 뭔지 알아?

 

 

삶이 꼭 자기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다!

 

그게 내가 얻은 답의 전부였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면,

 

한 번 만들어 보고 싶었어! 내 것으로!

 

 

하루아침에 난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으로 전락했고,

 

네놈은 애지중지 아끼는 친아들이 된 거였지!

 

 

지금쯤, 내 어머니의 불임 기록도 보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 기록은 벌써 봤지.”

 

 

 

“하루하루를 독기로 버텼어.

 

발악하지 않으면 난 꼼짝없이 버림받을 테니까!

 

하지만 결국 인정받은 건 네놈이었어!

 

 

인정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고 죽이려 했었지.

 

그렇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끼진 않아!

 

 

곰곰이 생각해 봤거든.

 

네놈과 나의 입장이 바뀌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나보다 더 했을 걸.

 

안 그래? 인정하겠지?”

 

 

 

“…인정하지.”

 

 

“…이것으로…난 지옥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구원을 받는 셈이지.

 

 

마지막으로…그 사고 속에서 살아남아 준 걸 감사하고,

 

또…미안했어.

 

이민혁! 이렇게 되면 역전인 거 맞지?

 

최후의 승리는 내 거라고!

 

절대로 양보 못 해!

 

 

나 없는 삶, 한 번 소름끼칠 만큼 행복하게 살아 봐.”

 

 

 

테잎 속 목소리가 끝이 났다.

 

 

하지만 끝난 뒤에도 묵묵히 듣고 있었던 상현이나

 

아직까지 서류를 손에 들고 있던 민혁이나 입을 열지 않았다.

 

 

상현은 핸들에 달린 윈도우 리모콘으로 차창을 모두 열었다.

 

 

활짝 열린 차창에서 이따금 불어 들어오는 바람과

 

밝게 비추는 햇살 외에는 침묵 뿐 이었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앉아있던 민혁이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죽을 때를 앞두면 마음이 약해진다고 하더니.

 

그 말을 오늘 증명한 셈이군.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면죄부를 쟁취하는군.

 

이번만큼은 내 역전패를 인정하겠어!”

 

 

 

“마지막까지 후려치고 가는군요.

 

어떠십니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과를 들은 느낌이?”

 

 

“…그다지…유쾌한 경험은 아닌 듯 해.”

 

 

 

상현은 선글라스를 다시 쓰며 창문을 닫았다.

 

길 위를 부드럽게 움직이는 차체의 흔들림을 느끼며

 

민혁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마음 한 구석에서 피어오르던 느낌의 색이 점점 짙어졌다.

 

 

그녀는 아주 오래 전부터 죽음을 준비해 왔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름대로의 면죄부까지 준비한 뒤,

 

지옥에 떨어질 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접은 채

 

치밀하게 죽음의 시나리오를 진행시킨 게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

 

 

죽음이 찾아오길 맥 놓고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의 손으로 죽음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약물 치사량 같은 건 줄줄 외우고도 남을 여자니까.

 

 

 

어쨌든 분명한 건,

 

뒷맛이 매우 씁쓸하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그녀가 알지 못하고 떠난 게 남아 있었다.

 

인생에 있어서

 

승(勝)과 패(敗)를 가르는 것만큼 쓸데없는 짓이 없다는 사실 하나.

 

 

 

“…동해 쪽으로 방향을 바꿔.”

 

 

“알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동해에는 무슨 일로…?”

 

 

“소름끼칠 만큼 행복한 인생이라는 걸 한 번 살아보려고.”

 

 

 

그제야 상현의 머릿속에 정인이 일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하루 종일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창 밖을 바라보며 했던 혼잣말이었지만

 

날카로운 민혁이 그 말을 놓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악셀레이터를 밟아 속력을 내며 상현이 말했다.

 

 

 

“…왜 하필이면 동해입니까? 파도소리는 서해에도 있는데.”

 

 

“자네라면 저물어가는 인생도 아쉬운데 해가 지는 서해를 택하겠나,

 

해가 떠오르는 동해를 택하겠나?”

 

 

 

아…! 역시!

 

늘 한 가지 결정에 앞서 수십 가지를 먼저 생각해 버리는 민혁이었다.

 

 

백미러를 조정하던 상현은

 

그의 얼굴에 언뜻 스치던 슬픔을 읽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마음도 약해지지만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도 약해지는 법.

 

 

전 같으면 깊은 곳에 숨겨두었을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문득 어디선가 짙은 향수냄새가

 

바람결에 섞여 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에게 늘 뿜어져 나오던 숨 막힐 듯한 장미 향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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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다섯번째 이야기가 [비밀의 성(城)을 향해 가는 길]의 마지막입니다..

 

어떠셨나요?

 

어찌보면 너무나 뻔한 결말 같기도 해서

 

이렇게 글을 올리는 제가 부끄럽기만 합니다.

 

저물어가는 여름날의 끝자락에 서서

 

고즈넉이 찾아드는 가을바람을 느껴볼 준비는 되셨나요? 

 

 

에필로그는 다음 주 월요일 즈음에 조용히 올려두겠습니다.

 

완결 끝에 에필로그를 남겨두는 제 마음, 이해 하시려나요?

 

 

그리고 갑작스러운 결말 끝에 한 가지 좋은 소식 알려드릴께요.

 

[그대를 가슴속에 저장하는 방법]이 종이책으로 출간되었다고 합니다.

 

'눈과 마음' 출판사에서 묶여졌구요, 이곳에 올렸던 이야기들을 좀 더 군더더기 없이

 

다듬어서 한 권으로 태어났답니다. 일종의 소장본이라고 하면 될까요? ^^

 

아직 저도 책을 받아보지는 못하고, 출간 소식만 전해 들었습니다.

 

※비밀의 성(城)을 향해 가는 길 [25]-마음에 사랑과 용서를※←요게 책 표지랍니다. 유현에게 큰 의미로 다가서는 웨딩드레스가 표지에 들어갈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표지 예쁜가요? ^-^

 

 

에필로그 기다려 주시고, 이원영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다시 한 번만 깊이 생각해 주세요.

 

처음부터 끝까지 저를 많이 울린 인물이랍니다.

 

그럼 이만 물러갑니다~ 후기는 에필로그에 남길께요~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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