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내내 비가 오더니 토요일이 되자 하늘이 맑게 게었다. 오랜만에 우산없이 밖으로 나선 지우는 도착지 없이 무작정 길을 걸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옆을 스쳐지나갔고 그녀 또한 여러 사람들을 지나갔다. 하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왠지 외로워졌다. 혼자라는 외로움은 선후가 그녀를 배신한날 처음 느껴봤었다.
선후의 아파트 안은 사랑의 향기로 가득 차 있었고 따뜻했다. 오늘처럼 바깥은 무척 날이 좋아서 아파트 창문 너머로 노을이 저무는 하늘이 아름답게 보였었다. 그녀를 반기던 선후의 얼굴은 물론 밝지 않았었다. 딱딱하게 굳어진 그리고 땀에 젖은 몸을 일으켜 지우를 쳐다보던 그의 눈은 놀라움과 미안함 그리고 혼란스러움이 가득차 있었다. 그는 무슨말이라도 하려했지만 입술이 전혀 도와주지 않는듯 했었다. 리즈의 입가에는 보이지않을만큼의 작은 미소가 걸쳐져있었다. 그녀의 가슴에는 선후가 남긴 마크가 선명하게 보였었다. 지우는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현관문을 뒤로 했을때 계단아래로 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왔을때는 뉴욕시의 시끄러운 소음이 그녀의 귀를 가득 메웠었다. 길을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도로를 가득 체워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체 가만히 서있는 많은 차들. 모든것이 듣기 싫어졌다. 그 시끄러운 소움들 사이로 리즈의 얄미운 웃음소리가 들려오는것같았다. 어쩌다 자연스레 적이되어버렸던 그녀. 끝까지 나의 것을 빼앗으려 했던 그녀. 결국 그렇게도 원하던 선후를 가져가버렸었다.
얼마나 걸었던걸까. 한참을 걷다가 걸음을 멈춰 고개를 들어보니 커다란 아파트 상가가 보였다. 많은 간판들중에 이상하게 피아노학원이 눈이 띄었다.
“저기..”
학원 안으로 들어섰을때는 토요일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피아노가 하나씩 들어있는 연습실 안에서는 바이엘을 연주하는 소리도 들려왔고 모차르트의 소나타 소리도 들려왔다.
“네, 어떻게 오셨죠?”
적어도 40살은 먹었음직한 여성이 지우에게 물었다.
“저, 잠시 연습실 하나만 빌릴수 있을까요?”
“네?”
“잠시면 되요.”
피아노 건반 위에 두손을 올려놓았을때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하는건지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연습실문을 열어주던 원장은 의아한듯 지우를 유심히 쳐다봤었지만 그녀는 미소로 일관하며 아무말 없이 안으로 들어섰었다. 공기같은 무게로 조심스럽게 건반을 눌렀을때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자각하기도 전에 이미 가느다란 손가락은 검고 하얀 건반위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베토벤의 월광.
슬픈 달의 빛처럼 잔잔한 음악.
목구멍의 가장 윗까지 차고 올라왔던 눈물이 뺨을 적혀왔다. 손은 멈추지않고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고있었지만 눈물은 그만하라고 외치는것같았다. 슬펐나보다. 울고싶었나보다. 달의 빛은 지구에서 보면 너무 아름답지만 결국 빛의 근원지인 달은 차갑다. 밤을 환하게 해주지만 결국 마음을 가리는 짙은 안개일뿐. 너무나 행복했던 시작 그리고 수치스러웠던 끝. 결국 그것들만이 나의 첫사랑을 대변해주는 제목인것같다. 그래서 아쉽다. 내사랑은 이것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
“이렇게 나오시라고해도 괜찮은지 모르겠어요.”
백화점 앞에 서있던 서현이 지우가 나타나자 환히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요. 어차피 일요일이고 하는일도 없는데요.”
백화점 안으로 들어섰을때 모든곳이 사람들로 인해 북적거렸다. 정신없이 가격을 불러대는 점원들. 흥정을 하는것처럼 보이는 아주머니와 굉장히 난감하다는듯 계속해서 무언가를 설명하는 젊은 여자직원. 길을 가로막고 서며 이것저것 물건의 가격을 확인하고 만져보는 사람들.
“진아가요, 지우씨하고 준하도 초대했다고 꼭 오라고했어요. 오셔야해요?”
“그래요? 그럼 저도 진아씨 생일선물을 하나 사야겠네요, 나온김에.”
무엇을 사야할까. 지우는 진아라는 사람을 단 한번밖에 보지못했고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옆에 있는 서현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야할듯 싶다. 스카프 진열장을 발견한 서현은 자리에 멈춰서 자세히 살펴보기시작했다. 굉장히 예쁜 자줏빛 스카프였다. 모서리부분에 작게 장미꽃이 그려져있었고 굉장히 고급스러워보였다. 감촉만으로도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좋은데요?”
“그래요? 진아가 좋아하겠죠? 곧 가을도 오고 할텐데 좋을거같아요.”
서현은 생각보다 선물을 빠르게 고르게되어서 안심이었다. 무엇을 고를까 한참 고민하다보면 정처없이 무작정 큰 백화점안을 방황하게 되는수가 있다. 계산을 마치고 깔끔히 포장이 된 스카프를 받아든 서현은 지우와 함께 다시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아씨는 무엇을 좋아해요? 제가 그 분 취향을 잘 모르니까 뭘 사야할지도 모르겠어요.”
미간을 좁히며 지우가 말했다. 주위에는 값비싸고 눈에 끌리는 물건들이야 많았지만 정작 무엇을 사야할지는 모르겠다.
“글쎄요. 그 애는 선물이라면 다 좋아하는 스타일이라서요. 집안살림 보탬되는것도 좋아하고 자기 멋낼만한것도 좋아하구요.”
알겠다는듯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직까지도 무엇이 좋을지 감이 서지않았다.
결국 지우와 서현은 아이쇼핑을 하는것처럼 많은 상점을 그저 슬쩍 쳐다보기만 하고 지나쳤다. 에스컬레이터를 갈아타며 한층 한층 올라가다보니 결국 마지막 층까지 오게되었다. 마지막 층에는 별로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한곳에서는 침대나 큰 가구들을 팔고있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카페트를 팔고 있었다. 조금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니 하얀 백열등이 밝게 비추는 곳에 겔러리가 있었다.
“진아씨가 그림도 좋아할까요?”
겔러리 안으로 들어서며 지우가 물었다.
“그럴거예요. 액자 하나 해가면 좋아하겠네요. 그렇지않아도 이사해서 벽에 걸어놓은것도 없는데.”
드디어 찾았다는 안도감에 지우의 두 눈은 더욱 더 밝게 빛이 났다. 사진작가 이름별로 사진들이 플라스틱 틀안에 차곡히 쌓여있는 진열장으로 다가가 사진을 하나씩 넘겨보기 시작했다.
뜻밖이라는듯 진아는 입을 다물줄 몰랐다. 놀라움에서 정신을 차린 진아는 모든 사람들의 성화에 못이겨 포장을 뜯었다. 안에는 깔끔한 검은색 틀의 액자 안에 들어있는 사진이 있었다. 두 남녀가 열렬히 키스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Robert Doisneau의 작품이예요. 배경은 파리구요. 사진에도 써있지만 1950년에 찍어진 사진이예요.”
지우가 간단히 설명을 했다.
“저도 이 사진 많이 본적 있어요. 이 사진에 얽힌 이야기도 있다고 그랬던거같은데.”
재석이 진아의 옆에서 사진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지우의 옆에 앉아있던 준하도 유심히 사진을 들여다 보았다. 흑백사진안에는 북적한 도시의 모습이 그려져있었다. 사진작가는 아무래도 노천카페의 한 테이블에 앉아있었는듯 해보였다. 그리고 그의 앞을 지나가던 젊은 두 남녀가 열정에 가득 찬 사랑으로 두 입술을 부딪히고 있었다. 그들 주위에는 몇몇 사람들이 그들을 지나쳐 걸어가고 있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요. 이 사진이 찍히고 많은 세월이 흘러서 이 두 남녀를 다시 찾았는데 둘다 굉장히 늙어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있었다죠. 그런데 둘은 각자 다른 사람들과 결혼을 했었어요. 헤어졌었다고하더군요. 그리고 이 사진처럼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포즈를 다시한번 더 취했다고 해요.”
두 눈동자는 사진안의 아름다운 커플에게로 쏠린체 지우가 조용히 말했다. 모두들 로맨틱한 이야기에 빠져들어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진을 쳐다보고있었지만 준하만은 그녀의 옆모습을 쳐다보고있었다. 입술은 술술 이야기를 내뱉고 있었지만 왠지 눈빛은 깊어보였다. 자신이 하는 얘기와는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는듯 보였다.
진아가 여전히 사과를 깎으며 앞에 앉은 지우에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가만히 진아를 응시하고있던 지우는 느닷없는 공세에 조금 당황했지만 그래도 진아의 유머스러운 말투에 살짝 웃었다.
“친구예요. 친구아니면 뭐 더 나은 관계가 있을까요?”
있다. 연인. 지우도 분명히 그 사실은 알고있지만 전혀 모르는것처럼 오리발부터 먼저 내밀었다.
“애인있잖아요. 그리고 둘이 정말 잘 어울려요.”
서현이 가스렌지 앞에 서서 ‘삐익’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주전자를 들어올려 물을 커피잔에 부으며 말했다.
“글쎄요. 준하씨하고 있으면 꼭 줄다리기 하는 기분마저 들어요. 밀고 당기고. 서로 마음이 같은거같으면서도 어떻게 보면 아닌거같아서 서로가 마음을 확인해보려고 하고. 모르겠어요, 아직은. 준하씨 마음 다 열지 않은거같아서요.”
마지막 말에 진아와 서현의 눈이 마주쳤다. 서현은 곧바로 시선을 피했지만 진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우는 그 짧은 시간안에 서현의 떨리는 눈동자를 알아차렸고 진아의 한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전혀 모르는척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걱정하지말아요. 준하씨도 이제는 변했으니까. 그리고 준하씨, 확실히 지우씨한테 관심있어요.”
어째서냐는 물음이 담긴 시선으로 진아를 쳐다봤지만 대답은 엉뚱하게도 서현에게서 들려왔다.
“준하가 저한테 소개시켜준 여자친구는 지우씨가 처음이예요. 물론 이제까지 다른 여자친구들도 좀 있었다고해도 지우씨만큼 오래가지도 않았구요. 또 준하를 오래봐온 사람으로써 아는건데, 많이 평온해졌어요, 준하.”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평온해졌다는 부분에서는 이해가 가지않았다. 준하를 처음 만난 날부터 준하는 그녀에게 아무런 위기감이나 불안함 따위는 주지않았었기 때문에.
쇼파에 앉은 세 남자가 있는 거실은 무척 조용했다. 멀리 떨어진 부엌에서는 조그마한 사람의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들이 있는곳은 정적만이 가득했다. 재석과 태빈마저도 조심스럽게 준하를 쳐다보며 서로 눈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정도였다.
“아, 서현씨 그림 전시회 또 한다는 소리가 들려오던데?”
침묵을 깨고 재석이 태빈에게 물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진아씨가 그러던가요?”
“그렇죠, 뭐. 결혼을 하더니 서현씨가 영감이 막 솟아오르나 봅니다?”
태빈과 재석은 마주보며 털털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순간 준하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것을 발견한 태빈은 속으로 미소를 삼켰다. 이제는 이 남자도 날 용서해줬으면 좋겠다. 지은의 몫까지 나를 미워하겠노라고 무거운 다짐을 한것은 알지만 이제는 더이상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사랑을 하면 그렇게 되겠죠.”
따뜻한 눈빛으로 준하가 말했다. 순간 재석은 전혀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고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순간에 사람이 180도 변하기는 굉장히 힘들겠지만 그래도 조금씩 태도의 변화를 보이고있는 준하였다. 그리고 그의 말투도 더이상 비꼬는 투가 아니었다. 정말 사랑이 주된 요인이라는듯 인정하는 투였다.
“준하씨도 사랑을 하는가 봅니다, 그러면?”
재석이 기분좋게 웃으며 나지막히 놀려대듯 물었다. 준하의 눈썹 끝이 살짝 올라가고 잠시 생각에 빠지는 눈치였다.
“글쎄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사랑이 뭔지 잘 몰랐던거같기도 하고 사랑이 뭔지 확실히 알고는 있었는데 그 개념이 틀려져버린거같기도하고.”
순간 준하는 스스로에게 놀라서 바닥으로 향했던 두 눈을 더 크게 떴다. 지금 내가 무슨 헛소리를 하고있는거지. 경계태세를 늦추고 있었던것 같은 생각에 불안함이 그를 덮쳐왔다.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이야기 [14]
[14]
일주일 내내 비가 오더니 토요일이 되자 하늘이 맑게 게었다. 오랜만에 우산없이 밖으로 나선 지우는 도착지 없이 무작정 길을 걸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옆을 스쳐지나갔고 그녀 또한 여러 사람들을 지나갔다. 하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왠지 외로워졌다. 혼자라는 외로움은 선후가 그녀를 배신한날 처음 느껴봤었다.
선후의 아파트 안은 사랑의 향기로 가득 차 있었고 따뜻했다. 오늘처럼 바깥은 무척 날이 좋아서 아파트 창문 너머로 노을이 저무는 하늘이 아름답게 보였었다. 그녀를 반기던 선후의 얼굴은 물론 밝지 않았었다. 딱딱하게 굳어진 그리고 땀에 젖은 몸을 일으켜 지우를 쳐다보던 그의 눈은 놀라움과 미안함 그리고 혼란스러움이 가득차 있었다. 그는 무슨말이라도 하려했지만 입술이 전혀 도와주지 않는듯 했었다. 리즈의 입가에는 보이지않을만큼의 작은 미소가 걸쳐져있었다. 그녀의 가슴에는 선후가 남긴 마크가 선명하게 보였었다. 지우는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현관문을 뒤로 했을때 계단아래로 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왔을때는 뉴욕시의 시끄러운 소음이 그녀의 귀를 가득 메웠었다. 길을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도로를 가득 체워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체 가만히 서있는 많은 차들. 모든것이 듣기 싫어졌다. 그 시끄러운 소움들 사이로 리즈의 얄미운 웃음소리가 들려오는것같았다. 어쩌다 자연스레 적이되어버렸던 그녀. 끝까지 나의 것을 빼앗으려 했던 그녀. 결국 그렇게도 원하던 선후를 가져가버렸었다.
얼마나 걸었던걸까. 한참을 걷다가 걸음을 멈춰 고개를 들어보니 커다란 아파트 상가가 보였다. 많은 간판들중에 이상하게 피아노학원이 눈이 띄었다.
“저기..”
학원 안으로 들어섰을때는 토요일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피아노가 하나씩 들어있는 연습실 안에서는 바이엘을 연주하는 소리도 들려왔고 모차르트의 소나타 소리도 들려왔다.
“네, 어떻게 오셨죠?”
적어도 40살은 먹었음직한 여성이 지우에게 물었다.
“저, 잠시 연습실 하나만 빌릴수 있을까요?”
“네?”
“잠시면 되요.”
피아노 건반 위에 두손을 올려놓았을때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하는건지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연습실문을 열어주던 원장은 의아한듯 지우를 유심히 쳐다봤었지만 그녀는 미소로 일관하며 아무말 없이 안으로 들어섰었다. 공기같은 무게로 조심스럽게 건반을 눌렀을때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자각하기도 전에 이미 가느다란 손가락은 검고 하얀 건반위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베토벤의 월광.
슬픈 달의 빛처럼 잔잔한 음악.
목구멍의 가장 윗까지 차고 올라왔던 눈물이 뺨을 적혀왔다. 손은 멈추지않고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고있었지만 눈물은 그만하라고 외치는것같았다. 슬펐나보다. 울고싶었나보다. 달의 빛은 지구에서 보면 너무 아름답지만 결국 빛의 근원지인 달은 차갑다. 밤을 환하게 해주지만 결국 마음을 가리는 짙은 안개일뿐. 너무나 행복했던 시작 그리고 수치스러웠던 끝. 결국 그것들만이 나의 첫사랑을 대변해주는 제목인것같다. 그래서 아쉽다. 내사랑은 이것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
“이렇게 나오시라고해도 괜찮은지 모르겠어요.”
백화점 앞에 서있던 서현이 지우가 나타나자 환히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요. 어차피 일요일이고 하는일도 없는데요.”
백화점 안으로 들어섰을때 모든곳이 사람들로 인해 북적거렸다. 정신없이 가격을 불러대는 점원들. 흥정을 하는것처럼 보이는 아주머니와 굉장히 난감하다는듯 계속해서 무언가를 설명하는 젊은 여자직원. 길을 가로막고 서며 이것저것 물건의 가격을 확인하고 만져보는 사람들.
“진아가요, 지우씨하고 준하도 초대했다고 꼭 오라고했어요. 오셔야해요?”
“그래요? 그럼 저도 진아씨 생일선물을 하나 사야겠네요, 나온김에.”
무엇을 사야할까. 지우는 진아라는 사람을 단 한번밖에 보지못했고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옆에 있는 서현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야할듯 싶다. 스카프 진열장을 발견한 서현은 자리에 멈춰서 자세히 살펴보기시작했다. 굉장히 예쁜 자줏빛 스카프였다. 모서리부분에 작게 장미꽃이 그려져있었고 굉장히 고급스러워보였다. 감촉만으로도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좋은데요?”
“그래요? 진아가 좋아하겠죠? 곧 가을도 오고 할텐데 좋을거같아요.”
서현은 생각보다 선물을 빠르게 고르게되어서 안심이었다. 무엇을 고를까 한참 고민하다보면 정처없이 무작정 큰 백화점안을 방황하게 되는수가 있다. 계산을 마치고 깔끔히 포장이 된 스카프를 받아든 서현은 지우와 함께 다시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아씨는 무엇을 좋아해요? 제가 그 분 취향을 잘 모르니까 뭘 사야할지도 모르겠어요.”
미간을 좁히며 지우가 말했다. 주위에는 값비싸고 눈에 끌리는 물건들이야 많았지만 정작 무엇을 사야할지는 모르겠다.
“글쎄요. 그 애는 선물이라면 다 좋아하는 스타일이라서요. 집안살림 보탬되는것도 좋아하고 자기 멋낼만한것도 좋아하구요.”
알겠다는듯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직까지도 무엇이 좋을지 감이 서지않았다.
결국 지우와 서현은 아이쇼핑을 하는것처럼 많은 상점을 그저 슬쩍 쳐다보기만 하고 지나쳤다. 에스컬레이터를 갈아타며 한층 한층 올라가다보니 결국 마지막 층까지 오게되었다. 마지막 층에는 별로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한곳에서는 침대나 큰 가구들을 팔고있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카페트를 팔고 있었다. 조금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니 하얀 백열등이 밝게 비추는 곳에 겔러리가 있었다.
“진아씨가 그림도 좋아할까요?”
겔러리 안으로 들어서며 지우가 물었다.
“그럴거예요. 액자 하나 해가면 좋아하겠네요. 그렇지않아도 이사해서 벽에 걸어놓은것도 없는데.”
드디어 찾았다는 안도감에 지우의 두 눈은 더욱 더 밝게 빛이 났다. 사진작가 이름별로 사진들이 플라스틱 틀안에 차곡히 쌓여있는 진열장으로 다가가 사진을 하나씩 넘겨보기 시작했다.
진아는 서현이 건내준 선물의 포장을 뜯으며 혹시 이상한거 사온거 아니냐며 계속해서 서현을 흘겨봤다. 자줏빛 스카프가 나오자 탄성을 지르며 촉감을 느껴보았다.
“이거 정말 이쁘다! 고마워.”
기뻐하는 진아의 얼굴을 보자 좋은듯 서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우는 쇼파옆에 기대어 서있는 갈색종이로 포장이 된 커다란 액자를 진아에게 건내주었다.
“별로 대단한건 아닌데, 그래도 좋아하셨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준비하시지 않았어도 됐는데.”
뜻밖이라는듯 진아는 입을 다물줄 몰랐다. 놀라움에서 정신을 차린 진아는 모든 사람들의 성화에 못이겨 포장을 뜯었다. 안에는 깔끔한 검은색 틀의 액자 안에 들어있는 사진이 있었다. 두 남녀가 열렬히 키스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Robert Doisneau의 작품이예요. 배경은 파리구요. 사진에도 써있지만 1950년에 찍어진 사진이예요.”
지우가 간단히 설명을 했다.
“저도 이 사진 많이 본적 있어요. 이 사진에 얽힌 이야기도 있다고 그랬던거같은데.”
재석이 진아의 옆에서 사진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지우의 옆에 앉아있던 준하도 유심히 사진을 들여다 보았다. 흑백사진안에는 북적한 도시의 모습이 그려져있었다. 사진작가는 아무래도 노천카페의 한 테이블에 앉아있었는듯 해보였다. 그리고 그의 앞을 지나가던 젊은 두 남녀가 열정에 가득 찬 사랑으로 두 입술을 부딪히고 있었다. 그들 주위에는 몇몇 사람들이 그들을 지나쳐 걸어가고 있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요. 이 사진이 찍히고 많은 세월이 흘러서 이 두 남녀를 다시 찾았는데 둘다 굉장히 늙어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있었다죠. 그런데 둘은 각자 다른 사람들과 결혼을 했었어요. 헤어졌었다고하더군요. 그리고 이 사진처럼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포즈를 다시한번 더 취했다고 해요.”
두 눈동자는 사진안의 아름다운 커플에게로 쏠린체 지우가 조용히 말했다. 모두들 로맨틱한 이야기에 빠져들어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진을 쳐다보고있었지만 준하만은 그녀의 옆모습을 쳐다보고있었다. 입술은 술술 이야기를 내뱉고 있었지만 왠지 눈빛은 깊어보였다. 자신이 하는 얘기와는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는듯 보였다.
진아, 서현 그리고 지우는 부엌의 식탁에 둘러 앉았다. 진아는 정성스럽게 사과를 깎았고 서현은 커피를 탔다.
“정말로 그냥 친구예요? 내 눈은 못 속인다구요.”
진아가 여전히 사과를 깎으며 앞에 앉은 지우에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가만히 진아를 응시하고있던 지우는 느닷없는 공세에 조금 당황했지만 그래도 진아의 유머스러운 말투에 살짝 웃었다.
“친구예요. 친구아니면 뭐 더 나은 관계가 있을까요?”
있다. 연인. 지우도 분명히 그 사실은 알고있지만 전혀 모르는것처럼 오리발부터 먼저 내밀었다.
“애인있잖아요. 그리고 둘이 정말 잘 어울려요.”
서현이 가스렌지 앞에 서서 ‘삐익’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주전자를 들어올려 물을 커피잔에 부으며 말했다.
“글쎄요. 준하씨하고 있으면 꼭 줄다리기 하는 기분마저 들어요. 밀고 당기고. 서로 마음이 같은거같으면서도 어떻게 보면 아닌거같아서 서로가 마음을 확인해보려고 하고. 모르겠어요, 아직은. 준하씨 마음 다 열지 않은거같아서요.”
마지막 말에 진아와 서현의 눈이 마주쳤다. 서현은 곧바로 시선을 피했지만 진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우는 그 짧은 시간안에 서현의 떨리는 눈동자를 알아차렸고 진아의 한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전혀 모르는척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걱정하지말아요. 준하씨도 이제는 변했으니까. 그리고 준하씨, 확실히 지우씨한테 관심있어요.”
어째서냐는 물음이 담긴 시선으로 진아를 쳐다봤지만 대답은 엉뚱하게도 서현에게서 들려왔다.
“준하가 저한테 소개시켜준 여자친구는 지우씨가 처음이예요. 물론 이제까지 다른 여자친구들도 좀 있었다고해도 지우씨만큼 오래가지도 않았구요. 또 준하를 오래봐온 사람으로써 아는건데, 많이 평온해졌어요, 준하.”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평온해졌다는 부분에서는 이해가 가지않았다. 준하를 처음 만난 날부터 준하는 그녀에게 아무런 위기감이나 불안함 따위는 주지않았었기 때문에.
쇼파에 앉은 세 남자가 있는 거실은 무척 조용했다. 멀리 떨어진 부엌에서는 조그마한 사람의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들이 있는곳은 정적만이 가득했다. 재석과 태빈마저도 조심스럽게 준하를 쳐다보며 서로 눈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정도였다.
“아, 서현씨 그림 전시회 또 한다는 소리가 들려오던데?”
침묵을 깨고 재석이 태빈에게 물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진아씨가 그러던가요?”
“그렇죠, 뭐. 결혼을 하더니 서현씨가 영감이 막 솟아오르나 봅니다?”
태빈과 재석은 마주보며 털털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순간 준하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것을 발견한 태빈은 속으로 미소를 삼켰다. 이제는 이 남자도 날 용서해줬으면 좋겠다. 지은의 몫까지 나를 미워하겠노라고 무거운 다짐을 한것은 알지만 이제는 더이상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사랑을 하면 그렇게 되겠죠.”
따뜻한 눈빛으로 준하가 말했다. 순간 재석은 전혀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고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순간에 사람이 180도 변하기는 굉장히 힘들겠지만 그래도 조금씩 태도의 변화를 보이고있는 준하였다. 그리고 그의 말투도 더이상 비꼬는 투가 아니었다. 정말 사랑이 주된 요인이라는듯 인정하는 투였다.
“준하씨도 사랑을 하는가 봅니다, 그러면?”
재석이 기분좋게 웃으며 나지막히 놀려대듯 물었다. 준하의 눈썹 끝이 살짝 올라가고 잠시 생각에 빠지는 눈치였다.
“글쎄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사랑이 뭔지 잘 몰랐던거같기도 하고 사랑이 뭔지 확실히 알고는 있었는데 그 개념이 틀려져버린거같기도하고.”
순간 준하는 스스로에게 놀라서 바닥으로 향했던 두 눈을 더 크게 떴다. 지금 내가 무슨 헛소리를 하고있는거지. 경계태세를 늦추고 있었던것 같은 생각에 불안함이 그를 덮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