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그 후... <제 11 회> - 사랑의 기적

박준욱2004.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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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

이별, 그 후... &lt;제 11 회&gt; - 사랑의 기적

"지금 그 말... 정말... 그 말이 사실인가요...?"

 

 

나의 물음에 그 여자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나의 오해인 듯... 아니, 확실한 나의 오해였다.

 

난 그것도 모르고 그와 헤어졌다.

 

그보다 우선 내 앞에 앉아있는 그 여자는...

 

지금부터 대략 2시간 전이었다.

 

난 어느 때처럼 사무실에서 모니터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때 전화가 왔는지 책상 한 구석에 놓아 둔 휴대폰의 진동이 전해왔다.

 

외부 LCD화면에 '01X-9431-2764'란 낯선 번호가 나타났다.

 

전화번호로 보아하니 최소한 광고전화는 아닌 듯 했다.

 

전화를 받자 낯설지만 차분한 어느 여자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은 '이정연'이며 헤어진 그의 절친한 친구라고 했다.

 

헤어진 그의 친구들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지만 '이정연'이란 이름은 생소하게 느껴졌다.

 

아무튼 그녀는 헤어진 그에 대해서 긴히 할 말이 있다며 빠른 시일 내에 날 만났으면 한다

 

고 했다.

 

오늘...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그래서 난 그와 나는 이미 헤어졌으니 더 이상 내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필요는 없다

 

고 말할 생각했지만, 말 그대로 생각으로 그쳤다.

 

이미 헤어졌다 한들 괜한 호기심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점심시간을 이용해 시내의 어느 카페에서 그 여자와 대면했다.

 

얼굴을 보니 낯익었다.

 

그래!

 

올 겨울 정동진에서 우연히 보았던... 헤어진 그와 다정히 해변가를 거닐었던 그 여자였다.

 

그녀는 벌떡 자리에 일어나 내게 공손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정연이에요. 이렇게 선뜻 시간을 내줘서 고마워요."

 

 

 

이정연...?

 

전화로 그녀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그렇게 낯선 이름이었건만, 그녀를 마주하고 나서 그녀

 

의 이름을 다시 들으니 그녀의 이름 또한 나의 기억 어딘가에 있었다.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헤어진 그가 말하길...

 

자신을 오랫동안 좋은 감정으로 지켜보아 준 한 여자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비록 이기적이지만, 그런 그녀보다 나에 대한 마음이... 사랑이 자신에게 더 중

 

요하다는 생각 끝에 그 여자에겐 미안하지만 조금의 어떠한 마음도 줄 수 없이 위태로운 친

 

구관계를 유지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에 대한 그의 마음을... 사랑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헤어진 그에게 괜한 투

 

정을 부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닐 테고 점심시간도 그리 넉넉하지 않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 했다.

 

다급한 마음 때문인지 조금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무슨 말이죠? 헤어진 그에 대해 할 말이란 게."

 

 

 

그녀는 나의 물음에 답하기는커녕 오히려 반문했다.

 

 

 

"그를 많이 사랑했나요...?"

 

"아시다시피 이미 그와 헤어진 상태고, 아무리 지난 일이었다 한들 그건 그와 나 사이의 일

 

인데 굳이 그런 것까지 말하고 싶지 않네요. 어서 본론이나 말씀해주세요."

 

 

 

그녀는 슬쩍 비소(誹笑)를 띄었다.

 

 

 

"좋아요. 그렇게 재촉하니 서론은 접어두고 바로 말씀드리죠."

 

 

 

그리고 그녀는 주문한 오렌지 주스를 조금 들이키곤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난 헤어진 그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르고 있었고, 더구나 헤어

 

진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오해하고 있었다.

 

이렇게 뒤늦게나마 깨닫지만, 내가 헤어진 그를 사랑하며 그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들은 그

 

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던 것이다.

 

난 다시, 지금까지 그녀에게 들은 말이 사실인지 반문했다.

 

헤어진 그에 대해 내가 너무나 많은 것을 오해한 사실에 대해서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시 묻겠어요. 그 말이 정말 사실인가요...?"

 

"그래요, 사실이에요."

 

 

 

그녀의 말은 강경하다 못해 차갑게까지 느껴졌다.

 

내가 헤어진 그를 오해한 것은 분명 사실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레 심장이 빠르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애써 그런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려 반쯤 남아있는 물 컵을 단숨에 비워도 봤지만, 그다지

 

도움은 되지 않았다.

 

우선 심장의 고동이라도 줄이기 위해... 애써 그녀에게 당혹스런 내 마음을 들키기 싫은 탓

 

에 잠시 머뭇거리다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주절거렸다.

 

 

 

"어... 근데...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나요?"

 

 

 

나와는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그녀의 말이 맞다.

 

내가 한 말은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았다.

 

요즘같이 정보화 시대에 전화번호 따위 정도야 간단히 알아낼 수도 있으니깐 말이다.

 

이제서야 떠오른 생각이지만, 그녀가 내게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그 의도가 무엇인지 더 중

 

요한 점이고 궁금했다.

 

 

 

 

"그럼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죠? 혹시 그 애가 정연씨한테 자신에 대한 오해

 

를 풀어달라고... 그렇게 말해달라고 부탁이라도 했나요? 아니면 그의 친구니깐 그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고 다시 그 애와 사랑이라도 하길 바라는 건가요? 제가 듣기론 정연씨도 그

 

애를 많이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순간 그녀는 나의 말이 우습기라도 하듯 피식거렸다.

 

 

 

"정말 그를 사랑하긴 했나요?"

 

"뭐라고요?!"

 

 

 

되도록 이성적으로 대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도 잠시 나도 모르게 발끈했다.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는 내가 그쪽을 만난다는 사실도 모를 거예요. 아니, 상상조차 할 수 없겠죠. 그쪽이 오

 

늘로써 그에 대한 오해가 풀려서 다시 그와 사랑을 시작하든 그렇지 않든 이젠 아무 상관이

 

없어요. 사실... 전 내일 영국으로 유학을 가게 됐어요. 그래서 전 단지, 나 자신보다 더 사랑

 

한... 사랑했던 그를 위해서 무엇이든 해주고 떠나고 싶었어요. 그러니 그에 대한 오해라도

 

풀어주고 싶었어요. 지금도 그는 그쪽과 사랑은 끝날지언정 오해라고 풀고 싶은데 그런 용

 

기가 없어 속앓이만 하고 있죠. 물론 그쪽의 입장에서 나의 입장을 비추어 본다면 제가 지

 

금 아주 이기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이렇게 생각해주세요. 그래도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인데 행여나 잘못된 오해로 사랑했던 추억마저 원망하고 지워버린다는 건...

 

아뇨, 그만하죠. 아무튼 이렇게 불쑥 연락해서 이렇게 시간을 내줘서 미안하고 고마워요. 그

 

럼 먼저 일어날게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려 발걸음 했다.

 

난 어떠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우두커니 앉아 머리 속을 헤집고 다니는 상념에 빠져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서너 발자국 가더니 잠시 걸음을 거두고 등을 돌렸다.

 

 

 

"참! 이 말을 잊었네요...!"

 

 

 

다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잠시 상념에 빠져 나왔다.

 

그녀는 다시 내 쪽으로 한두 걸음 다가 와서는 말을 이었다.

 

 

 

"멜로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들이라 할지라도 온갖 오해로 불신을 낳

 

고 그 불신이 쌓여 서로 아픈 이별을 하게 되죠.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막힌 우연으로 모든

 

오해가 풀어지고 다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다는 식의 틀에 박힌 내용들을 많이 보셨을 거

 

라 생각해요. 그런 기막힌 우연이야말로 현실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랑의 기적이라

 

할 수 있죠. 그런데 그 남자는 아직도 미련하게 그 사랑의 기적이라도 기다리는 듯 그쪽을

 

잊지 못한 채 가슴앓이만 하고 있어요. 그런 그를 보며 난 아주 미련스럽단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론 그쪽이 부럽네요. 그럼..."

 

 

 

그녀는 짧은 목례를 하고는 다시 내게 등을 돌려 점점 멀어져 갔고, 복잡한 심정들만이 성

 

큼 다가올 뿐이었다.

 

 

 

나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미 늦었잖아.

 

정연씨로 인해 너에 대한 오해가 풀어졌다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다시 사랑할 순 없잖아.

 

내가 너한테 한 짓을 잊은 거니?

 

내가 얼마나 네게 모질게 했니?

 

넌 자존심마저 버리고 날 붙잡고 애원이나 했으면서...

 

왜 바보같이...

 

나 같은 여자 쉽게 정리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는 거니?

 

왜 바보같이...

 

진작 내게 말은커녕 귀뜸도 해주지 않은 채 모든 힘든 현실을 너 혼자만 지닌 채 겪어야만

 

했니?

 

내게 말해줬으면... 귀뜸이라도 해줬으면 비록 네게 많은 도움이 될 수 없지만... 나를 위한

 

너의 행동 전부를 이해할 순 없지만 최소한 지금 이 순간에도 네 곁에 있을 수도 있잖니?

 

 

 

헤어진 그를 향한 많은 한탄 섞인 물음만을 마음속으로만 되새길 뿐이었다.

 

헤어진 그를 만나 물어볼 것도 아니면서 자꾸만 되새겨 지는 물음에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카페 내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었다.

 

잠시동안은 헤어진 그를 향한 물음이나 헤어진 그에 대한 상념들을 묻어둔 채 다시 회사로

 

돌아가 오후 업무를 시작하긴 했다.

 

그러나 쉽사리 손에 일이 잡힐 리가 없었다.

 

점심도 먹지 못했는데 그에 따른 허기짐도 느낄 수 없었다.

 

아니, 느낄 겨를이 없이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거나 혹은 멍하니 상념에 잠기

 

다 퇴근 시간을 맞이했다.

 

그런데 오늘은 주영이와 약속이 있는 관계로 퇴근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시내

 

의 어느 약속 장소로 향했다.

 

원래 계획 대로면 서로의 직장생활 때문에 서로 자주 만나지 못하니 같이 쇼핑도 하고 간만

 

에 영화도 관람할 생각이었지만, 막상 주영이를 만나자 눈치 빠른 주영은 모든 계획을 취소

 

하고 나를 어느 술집으로 이끌었다.

 

주영에겐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표정이나 행동, 말투까지 숨긴다고 신경 썼는데...

 

그래도 처음엔 서로의, 혹은 다른 친구들의 안부나 서로의 직장생활 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

 

이 대화의 전부였다.

 

그러다 테이블에 놓여진 술병의 술의 양이 점차 줄어들고 우리의 몸에도 취기가 어느 정도

 

올라서야 오늘 점심시간에 '이정연'이란 여자를 만난 사실, 그리고 아무리 주영이가 친한 친

 

구지만, 말하지 않았던 헤어진... 아니, 사랑했던 그와 헤어진 정황과 이유부터 그것이 나의

 

오해였다는 사실 전부를 주절댔다.

 

내 얘기를 들은 주영은 모두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구나..."

 

 

 

난 주절대는 바람에 말라버린 입안을 얼음물로 축이고는 다시 말했다.

 

 

 

"근데 내가 그 애를 오해한 사실에 대해서는 명백한 내 잘못이지만, 그래도 난 그 애를 완

 

전히 이해할 순 없어. 굳이 그랬어야 했는지...? 아니면 내게 귀뜸이라도 해 줄 수 있는 거잖

 

아. 내가 남도 아니고 사랑이라 했으면서..."

 

 

 

이번엔 남아있는 술잔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주영은 비워있는 내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네 말을 듣고 보니 나도 너처럼 그 애를 완전히 이해할 순 없어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것

 

같아. 사실 나도 남자친구랑 아무리 서로 아끼고 사랑한다해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때론

 

심하게 다투는 경우가 있어. 물론 나말고 다른 연인들도 내 경우처럼 아무리 서로가 사랑한

 

다한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다투고 그럴 거야. 물론 다투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근데

 

어쩌면 그게 당연한 것인지도 몰라. 오죽하면 남자는 화성인, 여자는 금성인이라는 말이 있

 

잖아. 그만큼 남자와 여자는 같은 인간이라 해도 전혀 다른 부류란 거지. 그럼 방법이 없는

 

거냐? 글세, 나도 솔직히 완벽한 방법은 모르지만, 누가 그러더라? 남녀 서로에 대해서 이해

 

하지 말고 그 차이 자체를 인정하라고.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상대방을 자신에게 맞추

 

어 이해하고, 이해시키려 하지 말고 상대방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사랑이

 

아닐까? 솔직히 네가 그 애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없다를 떠나서 그 애는 널 위해서...

 

널 그만큼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잖아."

 

 

 

주영의 말을 유심히 듣고 보니 어쩌면 지난 날 그를 사랑하면서 난 내 방식에 비추고, 맞추

 

어 그를 이해한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이해의 한계에 부딪혀 그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처음부터 그의 모든 것을 이해해서 사랑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만큼 그가 내게 보여준 마음이 진심이었기 때문에 그를 사랑했는데...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이 퇴색된 것이 아니라 그를 향한 나의 마음이 '사랑'보단 나의 이기적

 

인 감정이 더 지배적이었던 같았다.

 

애초에 내가 그에게 좀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좀 더 애정이 있었다면 지금쯤 그와 나는...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 텐데...

 

갑자기 주영이 가득 담긴 술잔을 내밀었다.

 

 

 

"마시자!"

 

 

 

나도 얼른 잔을 들어 살짝 술잔을 부딪히곤 이번엔 반쯤만 삼켰다.

 

반면 이번엔 주영이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는 나직이 말했다.

 

 

 

"그래서 이제 어떡해 할거니...?"

 

"응? 뭘?"

 

"내가 보기엔 오늘 그 일로 그 애에 대한 미련이 다시 생긴 것 같은데? 어쩌면 처음부터 그

 

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네 말이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아. 확실히 미련인지는 모르겠지만... 글세... 어떡해해

 

야 하지? 하긴 지금 와서 어떡해 한다고 한들 변하는 건 없잖아."

 

"그건 모를 일이지. 네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따라서 변할 수도 있겠지. 설사 네가 어

 

떤 선택이나 행동을 한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널 비난한 사람은 없잖아."

 

 

 

문득, 그야말로 망언이 나의 귀속에서 속삭였다.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우리... 다시, 사랑할 순 없을까...?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계속 숨기고 감춰야 했던 나의 본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정연'이란

 

여자의 말대로 지금에서야 뒤늦게 그 '사랑의 기적'이란 것을 바라고 있다는 것은 내심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He...]

이별, 그 후... &lt;제 11 회&gt; - 사랑의 기적

 

지난 12월에 응시한 시험의 쓰디쓴 '불합격'이란 결과에 대해 완전히 수긍했다.

 

그렇다고 좌절하거나 포기하지는 않기로 했다.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도전하기로 했고, 부모님께도 나의 그런 뜻과 함께 그에 따른 다짐

 

을 말씀드리니 흔쾌히 승낙하셨다.

 

그래서 모자란 과목을 보충하기 위해 학원을 등록했고 집 근처에 위치한 독서실에도 등록했다.

 

물론 그에 해당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긴 했지만, 부모님께서 선뜻 지불해 주셨다.

 

이미 대학을 졸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께 금전적으로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다소 죄

 

송스러운 마음이 있었지만, 그로 인하여 나의 의지는 더욱 굳어지긴 했다.

 

이제 남은 3개월간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을 넘어 반드시 합격해야 할뿐이었다.

 

그런 의지와 목표에 맞게 자연스레 나의 하루일과는 너무나 단순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학원수업을 수강하고 2차 시험인 체력검사를 위해 헬스클럽에서 2시

 

간 정도 운동을 한다.

 

그리고 한 시간쯤 운동으로 인한 피로를 낮잠으로 휴식을 대신하고, 다시 집 근처에 있는

 

독서실에서 밤 10시까지 공부를 하는 것으로 나의 하루를 정리했다.

 

가끔 친구들과의 만남이나 모레 유학을 가게 되는 정연이를 배웅하는 일 등과 같이 특별한

 

사정이 생겨 부득이하게 계획에 차질이 있을 수야 있겠지만, 아직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아

 

서 일까?

 

지금까지 특별한 사정이나 무리 없이 계획대로 실행했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주어진 계획대로 행하다보니 막 밤 8시가 넘은 시간엔 독서실에서 공부

 

를 해야 했다.

 

독서실이란 그 장소의 성격답게 너무나 고요해 적막함마저 감돌았다.

 

그 가운데 간혹 들려오는 책장 넘기는 소리, 시계의 시침이 돌아가는 소리, 필기구로 책이나

 

연습장에 긁적거리는 소리, 그리고 아주 가끔씩 들려오는 휴대폰의 진동이 고작이었다.

 

하물며 공부에 지쳐 잠들어 버린 것일까?

 

하여튼 몇몇 책상에 엎드려 자는 사람들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루고자

 

하는 꿈이나 목표를 위해 오직 책상 위에 펼쳐진 책들만을 주시할 뿐이었다.

 

정말 여러 미디어매체에서 떠들어대는 경쟁시대라는 말이 절로 실감이 날 정도였다.

 

나도 이들과 같이 나의 꿈과 목표를 위해 한쪽에는 책을, 다른 한쪽에는 연습장을 펴고는

 

마구 써가며 공부했지만, 두 시간동안 그리 편치 않은 의자에 앉아 있었더니 전신이 결린

 

듯 했다.

 

그러나 막 다른 과목을 공부하려던 참이었기에 잠시 10분 정도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시간을 알기 위해 시계 대신 책상 위에 놓아 둔 휴대폰을 들고 혹시나 다른 사람들에게 방

 

해가 될세라 발뒤꿈치까지 들고 휴게실로 갔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로 득실거렸다.

 

그래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어느 정도 꽃샘추위가 물러가서 인지 약간의 쌀쌀함 정도를 느낄 뿐이었고, 휴게실과는 달

 

리 허공으로 담배 연기를 뿜어대는 서너 명의 남자들을 제외하곤 꽤 한적했다.

 

난 원체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터라 그냥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만 연신 맞으며 봄비라

 

도 촉촉이 내리려는지 먹구름만 가득해 오늘따라 유난히 시커먼 밤하늘만 망연히 바라봤다.

 

그러던 중 휴대폰을 들고 있던 손에 진동이 전해져 왔다.

 

휴대폰 외부 LCD화면을 보니 생소한 전화번호가 나타났다.

 

내가 사는 이곳의 지역번호까지 나타나는 것을 보니 휴대전화가 아닌 일반전화인 듯 했다.

 

내겐 이렇게 생소한 번호로 걸려올 전화가 없을뿐더러 혹시 광고 전화는 아닐까하는 마음에

 

우선 폴더를 열어 전화를 받기로 했다.

 

바로 낯익은... 차분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혹시 공부하는데 방해한 건 아니니?"

 

 

 

정연이었다.

 

 

 

"아냐, 막 쉬고 있었는데, 뭐. 근데 집 전화로 했어?"

 

"응. 왜?"

 

"아니, 휴대폰에 너 이름이 안 나타나고 생소한 번호가 나타나서 말이야. 모레 유학 간다고

 

휴대폰은 벌써 정지시킨 거니?"

 

"아니, 배터리가 바닥나서..."

 

"그랬구나. 그보다 진짜 네가 유학 간다는 사실이 조금씩 실감이 나려고 그래."

 

"섭섭해...?"

 

"그럼... 당연한 거 아니니?"

 

"다행이네..."

 

"뭐가?"

 

"그 동안 나 혼자만의 감정으로 네게 많은 부담만 안겨준 탓에 내가 떠나게 되면 기뻐할 줄

 

알았거든."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니? 물론 부담도 되긴 했지만, 네가 좋은 친구이자 좋은 여자

 

란 걸 아니깐 정말로 섭섭하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이라도 해주니깐 고맙네."

 

"진심이야!"

 

"어쩌면 나는 네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 여자와 헤어지게 한 이유중의 하나가 될 수 있는

 

데... 그래도 날 좋게 생각한다는 게 그리 이해가 잘되지 않아서..."

 

"또 그 얘기니? 자꾸 지난 얘기는 왜 하는 거니? 특히 요즘 들어서 더 하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정말 진심이고... 처음 그녀와 헤어졌을 때는 너를 포함해 모든 것들이 원망

 

스러웠지만, 결국은 내 사랑이 부족했던 거였어. 그러니 너 잘못도... 누구 잘못도 아냐. 그냥

 

내 잘못이지."

 

"여전히 자기 비하는 여전하구나."

 

"네가 그런 얘기만 안 하면 나도 내 자신을 비하하진 않겠지."

 

"미안해... 자꾸 네가 원치 않은 얘기만 해서. 근데 그 얘기에 관해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을게."

 

 

 

그녀의 말에 괜히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 묻고 싶은 게 뭐니?"

 

"다름이 아니고... 그 애가 널 얼마나 많이 사랑했다고 생각하니?"

 

 

 

역시나 나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한 물음이었다.

 

난 잠시 머뭇거렸다.

 

정연의 말에 쉽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사실 지난 날, 헤어진 그녀는 내게 있어서 짝사랑의 대상이었다.

 

처음엔 단순한 학과친구로 내 마음을 숨기며 지내다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던 5월의 어느

 

날,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내 마음을... 내 사랑을 고백했다.

 

그것이 헤어진 그녀와 나의 사랑의 시발점이었다.

 

물론 사랑을 하면서 너무나 행복했지만, 마음 한편으론 불안한 감정도 없지 않았다.

 

항상 그녀 주위에는 그녀를 좋아하는... 나보다 더 멋지고, 더 잘난 남자들이 많았기에 내가

 

아무리 그녀를 많이 사랑한다 한들 나의 가난하고 초라한 사랑은 언제나 위태롭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녀가 날 진심으로 사랑했는지... 아니, 그녀에게 '사랑'이란 감정 섞인 표현을

 

받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게다가 마치 유치한 3류 영화에서처럼 그녀와 나 사이를 갈라놓게 하기라도 하듯 그녀에 관

 

한 좋지 않은 소문들은 순간적이나마 나를 향한 그녀의 사랑조차 의심케 했다.

 

이렇듯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이 초라하고 부족한테 나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오죽했을까?

 

 

 

"글세...?"

 

 

 

고작 그것이 정연의 물음에 대한 최소한의 답이었다.

 

 

 

"글세라니? 그 말은 그만큼 자신이 없다는 거니?"

 

"아마도..."

 

 

 

이번에도 최소한의 답만을 말할 뿐이었다.

 

정연은 연이어 말했다.

 

 

 

"넌 왜 그렇게 내 자신에 대해 자신이 없니? 내가 보기엔... 물론 다른 친구들이 보기에도

 

그녀는 널 많이 사랑했다고 생각해. 오늘도... 아니, 그렇게 느껴졌고."

 

"나야말로 그렇게 생각해주니깐 고맙네. 그런데 지금에서야 너희들이 그렇게 느꼈다한들 변

 

하는 건 아무 것도 없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내가 말하지 않았니? 사랑의 기적 말이야..."

 

"넌 또 유치하게 그 기적타령이니?"

 

 

 

정연에게 괜한 핀잔을 줬지만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좀 전에도 말했지만, 네가 그녀를 그렇게 열렬히 사랑했듯이 그녀 또한 너를 많이 사랑했

 

을 거라 생각해. 그러니 그 사랑의 기적이 일어난다면... 너에 대한 오해가 풀어지고 너의 진

 

심을 알게 된다면 그녀가 다시 내게로 돌아오지 않을까? 왜냐면 너처럼 그녀도 널 사랑했으

 

니깐..."

 

 

 

계속 듣자하니 정연의 말은 너무나 어의가 없었다.

 

기적 따윌 믿는 비현실적인 그녀의 생각에서부터 어떻게 그녀가 내 진심을 알며... 또 어떻

 

게 오해가 풀어지는지 도무지 그녀의 말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연아, 지금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도통 네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미안하지만, 나도 지금은 그렇게 밖에 얘기할 수 없네."

 

 

 

여전히 그녀가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애써 이해하려고 생각하고 생각하지만...

 

다시 정연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내가 너무 시간을 많이 뺏은 것 같네. 괜히 미안한 걸."

 

"괜찮아. 대신 다신 그런 이상한 얘기는 하지마. 괜히 머리만 복잡해지니깐."

 

"미안해... 지금은 어쩔 수 없네."

 

 

 

또 뭐가 어쩔 수 없는지...?

 

하여튼 그렇게 정연과의 통화를 끝내고 다시 독서실 안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침묵만이 가득했다.

 

난 내 자리로 돌아가 이전과는 다른 책을 펴고는 좀 전처럼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암기하

 

기 위해 오른 편엔 연습장을 펴놓고는 마구 써가며 암기하기 시작했다.

 

원체 내 머리가 나빠서일까?

 

아무리 써가며 암기해 보지만, 그다지 잘되지는 않거나 암기했던 것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내 머릿속만 더 헤집고 다닐 뿐이었다.

 

 

 

정말 나는 머리가 나쁜가 보다.

 

하긴, 그러니 사랑했던 여자조차 멍청하게 보내버렸지.

 

그토록...

 

그렇게 사랑했으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저어 다시 피어나는 자책감을 떼어버리고자 했다.

 

그런데 떼어버리기는커녕 오히려 정연이 말했던 그 '사랑의 기적'이란 말이 순간 떠올랐다.

 

게다가 나도 모르게 연습장에 '사랑의 기적'이라고 반복하며 긁적이고 있었다.

 

정연의 말대로 우연이든 기적이든 간에 헤어진 그녀가 내 진심을 알아주고 오해가 풀려 그

 

녀가 다시 내게로 돌아온다면 그보다 더한 기쁨이 있을까?

 

하지만 그건 너무나 당연한 허상일 뿐이다.

 

정연의 말대로 사랑의 기적이라도 일어난다면 모를까?

 

근데 기적?

 

그것도 사랑의 기적?

 

난 어느새 그 헛된 망상에 사로 잡혔다.

 

 

 

이미 끝난 사인데...

 

그저 하나의 추억거린데...

 

 

 

공부한답시고 책 펴놓고 앉아 지난 사랑에 아직도 얽매이는 내 자신이 한심스럽게까지 느껴

 

졌다.

 

난 좀 전까지도 연습장에 긁적이던 '사랑의 기적'이란 단순한 단어와 조사(助詞)의 조합을

 

이리저리 긁적이며 지워 버렸다.

 

 

 

기적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일어나길 바라는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