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와 그 여자의 이야기 [16]

표류교실2004.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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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횡단보도를 건너 반대편에 도착한 지우는 준하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앞에 서있어도 준하는 전혀 아는척을 할 생각조차 없는지 다만 무섭게 두 눈을 부릅뜨고 선후를 노려볼 뿐이었다. 선후는 준하를 바라봤다. 혹시 이 사람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의 마음이 그에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스스로를 속이고 싶었던 것일까.

지우는 마치 그들 세명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가 다른 곳과 무척 틀린 것 같았다. 팽팽한 분위기와 그녀의 앞에 서있는 두 남자가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 상황. 서로를 소개시켜줘야하는지 생각해봐도 도저히 그녀는 할 엄두가 서지 않았다.

그때 갑작스럽게 선후의 왼쪽뺨으로 주먹이 날라왔다. 세게 날라간 준하의 주먹에 선후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올리고 준하를 노려봤다.

 

“당신이 뭔지 모르겠지만, 정말 불쾌하군.”

 

따끔하게 아파오는 손등을 다른 손으로 감싸며 준하가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너무 놀라서 멍하게 선후와 준하를 번갈아 보고 있던 지우의 손을 잡아 이끌며 차로 걸어갔다.

 

 

 

분명 저녁을 먹으러 간다고 했었는데 왠지 가는 길로 봐서는 아니, 운전을 하고있는 준하의 표정으로 봐서는 전혀 밥먹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방향은 확실히 준하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준하씨.”

 

대답이 없는 그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역시나 차는 준하의 아파트 앞에서 멈췄다. 통로 바로 앞의 자리에 과격하게 주차하고는 먼저 차에서 내린 그는 지우의 문을 열었다.

 

“내려봐.”

“싫어요. 왜이러는지 알아야 내릴거예요.”

 

분명 선후와 있었던 모습때문에 화가 났으리라. 하지만 지우는 그것을 준하의 앞에서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아니, 내리고서 아는게 더 나을거야. 내려.”

 

전혀 내릴 기색이 없자 준하는 지우의 팔을 잡아당겨 아파트 안으로 들어섰다. 아까 그 남자도 이렇게 그녀의 가녀린 팔을 잡았었지.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의 피부에 남아있을 그 남자의 흔적을 자신의 손자국으로 지워버리고 싶었다.

예전하고 전혀 달라진것 없는 거실이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볼세도 없이 지우는 준하에 의해 강제적으로 쇼파에 앉아야했다.

 

“왜 이러는거예요. 평소답지않게.”

 

단 한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기에 약간 당황스러웠다. 물론 선후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아무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에도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에 준하가 이유없이 화를 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기 위해 전혀 감정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지도 않은 남자인데, 그래서 화를 낼 이유도 없지 않나?

 

“미안.”

 

그의 공간에 들어와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안정이 되었는지 곧바로 화가 풀리는듯 했다.

 

“나도..나도 내가 왜이러는지 모르겠어.”

 

그녀를 앉혀두고 앞에 서있는 준하는 인상을 찌푸리며 바닥을 쳐다봤다.

 

“그렇다고 나한테 화풀이를 하면 어떡해요.”

“당신때문이야.”

“나때문이라구요?”

“그래, 그 남자랑 당신이랑..”

“질투같은거 하는 사람인가보죠?”

“질투같은거 수없이 느껴봤지만 아까 그 남자만큼은...”

 

지우의 눈빛이 반짝였다. 드디어 이 남자가 깨달음의 단계에 이르렀나보다. 다른 남자와 키스하는것을 목격하고 나니까 조금은 번떡이는게 있나보지?

 

“아무튼 기분 나빴어. 그 남자 흔적 남는다는게.”

 

지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준하의 앞에 서서 그의 두 어깨위에 손을 올렸다.

 

“뭘까. 헷갈려 요새는. 이 감정이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는지..아닌지..”

“당신이 생각하는 그 감정..맞아요. 나도..나도 그 감정..갖고 있으니까.”

 

아무리 키가 큰 지우라지만 준하의 귓가에 그녀의 숨결이 닿기 위해 발꿈치를 살짝 올렸다. 그리고 나지막히 말했다.

 

“그리고 그런 흔적, 당신이 지워주면 되잖아요.”

 

두 눈을 지그시 감은 따뜻한 그녀의 입술이 준하의 마른 입술과 겹쳐왔다. 그녀의 등을 두 손으로 감싸안아 자신에게 더욱 잡아 당겼다. 부드럽게 그리고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갈망하듯 절실하게 그녀를 찾았다. 준하의 두 뺨을 맞잡고 지우는 그의 보이지 않는 더욱 깊은곳을 향해 나아갔다. 숨을 헐떡거리며 서로에게서 살짝 떨어졌을때는 그들도 모르게 어느새 지우는 쇼파에 앉아 등을 바짝 대고 있었고 준하는 그녀의 두 다리를 가운데 두고 쇼파위에 올라가 탄탄한 가슴으로 그녀를 밀고 있었다. 지우는 부드러운 그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겼다. 버거운 숨을 내쉬며 준하는 앞에 보이는 여자를 쳐다봤다. 이 여자가 나를 숨넘어가게 할 정도야. 이런 순간 이런 기분 모두 헷갈린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이제는 조금씩 그 헷갈림이 한가지 길로 모아지는듯 하다.

 

“사랑해요, 준하씨.”

 

눈으로는 확인할수 없을만큼의 깊은 곳으로 가슴 한뭉큼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가슴에 놓여진 공간이라는 것이 머리끝으로 솟아올라 공기 밖으로 날아가버리는 기분이었다. 조금은 촉촉히 젖은 눈빛으로 그리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지우가 말했다. 준하는 그녀의 고백에 대한 아무런 답변도 할수없었다. 다만 고개를 가볍게 끄덕일 뿐이었다.

 

 

 

“나랑 있을때는 무조건 금연인거 잊었어?”

“아, 그렇지.”

 

준하의 따가운 말투에 성운은 피고있는 담배를 곧바로 재떨이에 눌렀다. 하지만 아쉽다는듯 입맛을 다셨다.

 

“김준하, 너 내일 제주도 가는거지? 교수님께서 널 많이 보고싶어하셔.”

“어. 갈까 생각중이야.”

“와라, 꼭. 그리고 그렇지않아도 니 진단서는 잘 받았다.”

 

대학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성운은 준하에게 일어났던 시끄러운 에피소드를 고스란히 듣게 되었었다.

 

“선배가 많이 놀랬었어. 물론 너 탓이 아니라는거 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어.”

 

골수염 환자 얘기로군.

 

“어때 꼬마는.”

“성장하기에는 좀 무리가 될거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할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봐야지. 안됐잖아, 어린나이에.”

 

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일이 있은후 그 꼬마아이가 계속 꿈자리를 설쳤다. 눈물이 맺힌 커다란 두 눈으로 그를 정면으로 마주보고있는 꿈을 몇번이고 꿨었다. 하지만 이제 그만 할때도 된듯하다. 성운과 준하의 선배이자 대학병원 과장이 놀랬을만큼 큰 일이기도 했다. 준하는 전혀 표정없는 얼굴로 성운을 마주봤다.

 

“괜찮은거지?”

“뭐가.”

“너 자신을 탓하지 말라는 소리야.”

“안해. 그런거.”

 

재떨이에서 아직도 연기를 조금씩 내놓고 있는 담배꽁초를 보니 입안이 떨떨해졌다. 힘들게 끊은 담배였는데 옆에 있는 누군가가 피기시작하면 스스로를 자제하기가 힘이 들어진다. 참자는 말을 계속 되내이며 재떨이에서 시선을 옮겼다.

 

“뭔가 소유욕을 느낀다면 그게 사랑인거냐?”

 

뜬금없는 말에 성운은 이상한 눈빛으로 준하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런 시선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듯 앞에 앉아있는 친구란 녀석은 차가운 냉커피만 들이켰다.

 

“글쎄, 소유욕하고 사랑은 엄연히 틀리지 않나.”

“지혜씨한테서 소유욕 안느꼈어?”

“그거 안느끼면 미친놈이게. 느꼈지 당연히. 근데 그게 도가 지나치면 병이 될수가 있어. 의처증같이.”

 

전혀 무관심인듯 자신과는 관계없는 질문이었다는듯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에 성운은 더욱 재미있어졌다.

 

“왜, 지우씨한테서 소유욕이 막 느껴지냐.”

 

준하는 살짝 코웃음을 치고 고개를 들어 친구를 쳐다봤다.

 

“그런거같다.”

“오, 꾀나 솔직해졌는걸? 예전에는 너 비밀이 산더미였잖아.”

“그랬나.”

 

대학생일때도 인기가 많았던 준하였다. 누구한테든지 매너가 좋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었다. 물론 그런 그였기에 친구들은 어떻게해서든 미팅을 나갈때 그를 넣어야만했다. 그들이 폭탄이 되고 준하가 킹카가 된다해도 킹카의 친구라고 하면 조금은 용서가 되기 때문이다. 아마 친구들 사이에서 총각딱지를 제일 먼저 뗀 녀석도 저 녀석일거다. 하지만 왠일인지 그는 단한번도 한 여자를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만나질 못했다. 우리들은 여성편력이 대단하다며 놀려대고는 했지만 준하는 그것에 관해서는 항상 노코멘트를 일관했고 우리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건지 알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여자가 따로 있었던건지 아니면 그저 바람기일뿐인지.

 

“결혼해라. 무척 좋다.”

“어?”

“결혼하니까 좋다구. 마누라 있다는거 자체가 좋다. 너도 해, 임마. 너 나이가 몇이냐? 33년동안 솔로했으면 됐다. 아, 지우씨랑 하면 되겠네. 괜찮은 여자던데.”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하는군. 물론 지우가 괜찮은 여자인건 안다. 하지만 결혼이라니. 결혼이라는 단어는 생각하지 않은지 오래다. 지우를 떠올리면 복잡한 심정만 떠오르지 결혼이란 단어는 그중에 있지 않다.

 

“단 한번보고 괜찮은지 안괜찮은지 어떻게 알아?”

“알수 있어. 사람들은 겉모습만으로도 자신의 속을 조금은 보이게 되어있거든. 물론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건 나쁜거라지만 그래도 겉만 보고도 그 사람의 내면이 어떻게든 보이게 되어있어. 그리고 내가 본 지우씨는 좋은 사람이야.”

 

좋은사람? 결혼? 아마 지우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지루할 일은 없을것같다. 하지만 왠지 겁부터 먼저 나는것은 무엇일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발을 내밀던 준하는 앞에 서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서 걸음을 멈춰야했다. 오랫동안 기다렸는듯 조금은 지루해 하는 표정과 아무런 느낌이 없는듯 차가운 눈빛을 지닌 남자가 준하를 발견하자 어깨를 똑바로 폈다.

 

“안녕하세요.”

 

선후의 인사에 조금은 당황스러운 준하는 살짝 고개를 숙여봤다.

 

“무슨 일이시죠?”

“저 기억하시나 보군요.”

“네, 당연히.”

 

어제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아직까지도 머릿속 한곳에 저장되어 있는 별로 기분좋지 않은 기억이었다.

 

“절 잘 찾아오셨군요.”

“학원 건물 바로 앞에 있어서 찾기 쉽던 걸요.”

 

알수없는 무거운 공기가 그들 사이를 체우고 있었고 준하는 조금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 뭣때문에 이렇게 긴장하고 가슴 조려야 한다는건가.

 

“무슨일이시죠?”

 

두번째 질문이다. 보이지도 않는 인내심을 끄집어내며 답답함을 참았다.

 

“어떤 분인가 보고싶어서 와봤습니다.”

 

싸우려는게 아니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건지. 중세시대 칼싸움이라도 떠올리고 있었나보다. 전혀 전투적이게 보이지 않는 선후의 모습에 긴장이 풀린 준하는 얼굴 근육을 풀었다.

 

“어떤가요? 그쪽이 본 저는.”

 

그쪽이라고 자신을 칭하는 소리를 듣고 선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름을 모르니까 쉽게 그쪽이라고 하는건지 아니면 비꼬는 투인건지.

 

“저는 유선후라고 합니다.”

“김준하입니다.”

 

서로 가벼운 악수를 하고 준하는 그를 자신의 진료실로 안내했다. 아직 점심시간이 조금 남아있어서 그런지 현식이나 간호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열어진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버스의 소음과 가느다란 바람에 흔들리는 가로수 소리가 들려왔다. 소독냄새가 물씬 풍기는 진료실안에 들어선 선후는 준하가 앉은 책상 옆의 조그마한 의자에 앉았다. 준하는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꾀 멋있어 보였다. 여름사이에 그을렸는지 피부는 짙은 갈색이었고 아래로 향한 눈동자를 가리는 속눈썹은 길었다. 이목구비도 뚜렷한 편이어서 남자다운 면이 부각되는 편이었다.

 

“지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을때는 장난이었거니 했어요. 내가 귀찮아서 지어내는 거짓말일쯤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제 지우를 낚아채가시는 모습보니까는 확실히 거짓말이 아니었더군요. 주먹도 꾀나 강했고.”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고 있는 저 남자의 속마음이 뭔지 알수가 없었다. 또다시 이런 불편함을 느끼는것이 싫었다. 태빈과도 항상 이런식이었는데 또다시 생전 처음 보는 남자와 이래야 한다니.

 

“난 상대방이 싫다면, 그래요, 질질 끌지 않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그 사이에 껴서 방해꾼이라는 낙인 찍히고 싶지도 않고. 굵고 간결해야죠. 어차피 지우가 절 떠났던건 내 잘못이었으니까. 지우..행복하게 해주세요.”

 

사랑을 포기하는 선후의 모습을 보려니 준하의 마음 한곳이 시려왔다. 아니, 저 남자는 지금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 뿐이다. 자신과는 정 반대되는 사람을 보고 있는 느낌에 가슴이 뭉클해져왔다. 지은과 그는 전혀 이러지 못했었다. 쉽게 놓아주는 방법을 몰랐고 단지 잡고 있는 방법만 알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잡고 있는채로 지은은 떠나버렸고.

 

“속으로는 아프고 힘들어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잘 웃어요. 그게 몇년동안 저랑 지내면서 터득한거라고 할까. 최근에 지우를 보니 몇년전의 제 모습을 다시 보는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그리고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지우, 피아노 전공했다고 해도 피아노 치는거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끔은 울려고 일부러 치기도 해요. 베토벤 월광 같은걸로. 그리고..”

“더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말을 끊는 준하의 모습을 보며 선후는 살짝 미소를 지어봤다.

 

“선후씨가 하나하나 설명해주지 않아도 내가 스스로 다 시간이 가면 차차 알게될거니까요. 어차피 사람이 사람을 알아가는건 서로가 노력해야하는 일이지 제 3자가 설명해줘야 하는건 아니니까요.”

“맞는 말이군요.”

 

준하의 입가에 미소가 걸쳐졌다. 선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같이 일어선 준하는 손을 내밀었다.

 

“별로 좋은 인연으로 만난건 아닌듯 하지만 그래도 반가웠어요.”

 

의외라는듯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선후는 어렵지않게 준하의 손을 잡아 악수를 했다.

 

“아, 저 이번 주말에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냥 알아두시라구요, 그것정도는.”

 

문으로 향하던 선후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