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와 그 여자의 이야기 [17]

표류교실2004.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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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현식이 저녁을 사겠다고 자청을 해서 모두들 옆 골목길에 있는 유명한 고깃집으로 향했지만 준하는 오후에 연락해서 약속을 한 서현을 만나기 위해 자리에서 빠졌다. 카페에 도착하고 주차한 차를 뒤로한체 건물안으로 들어설때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서현의 모습이 보였다. 계단을 오르던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결혼을 하고서 더 여성스러워지고 아름다워진 그녀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저 여자를 사랑했었는데. 그것도 아주 미치도록. 그렇지만 이제는 그 모든게 거짓말이었다는듯 조금씩 사랑이 지워지고 있는듯 하다.

서현의 앞에 앉으며 환히 웃을수 있던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일부로 진실한 마음을 숨기려 짓는 거짓된 웃음이야 셀수없이 많았지만 이렇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반가움은 없었던듯 하다.

 

“아, 미안. 기다리다가 먼저 마시고 있었어.”

 

잔을 내려놓으며 서현이 말했다.

 

“괜찮아. 키위쥬스주세요.”

 

주문을 하고서 얼마지나지않아 그의 앞에 놓여진 녹색빛깔의 음료를 보니 문득 잊어버리고 있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주위를 잠시 둘러봤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그를 잡아세우며 시간이 있냐고 물었던 지우와 갔던곳은 이곳이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었고 지우는 지금 그와 같이 키위쥬스를 시켰었다.

 

“오랜만이야, 너랑 이렇게 만나는거.”

“남편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

 

농담하듯 준하가 물었다.

 

“태빈씨 안그래.”

 

웃으며 준하는 빨대를 물었다.

 

“아, 기쁜소식이 있어.”

 

빨갛게 상기 된 얼굴로 준하를 쳐다보며 서현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잔뜩 반짝이는 두 눈으로 정말 대단한 일인것 마냥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 임신했어.”

“정말? 정말이야?”

“응. 어제 태빈씨랑 같이 병원에 갔었거든.”

“축하한다.”

 

예전같았다면 그녀가 임신했단 소식을 듣고 이렇게 행복했을까. 과거의 사랑을 잊지않고 지금까지도 그것에 숨막힐정도로 아파하고 있었더라면 그녀의 새로운 행복에 같이 기뻐해줄수 있었을까. 아마 질투심과 고통에 짓눌려 숨소리조차 낼수 없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모든게 다 행복하고 신비로울뿐이다.

 

“나, 너 사랑했긴 했던걸까.”

 

준하가 나지막히 말했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며 서현이 쳐다봤지만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왜 갑자기 그런생각이 드는건데?”

“글쎄..”

“지우씨를 사랑하게 되니까 지금 감정이 진짜인건지 아니면 예전의 것이 진짜였던건지 헷갈리는거야?”

“그런것같기도..”

“둘다 진짜였을꺼야. 내가 이런 말하는게 좀 이상하긴 하지만말야.”

 

잠시 그녀를 쳐다봤다. 진지한 눈빛에 보이는 따뜻함에 편안해져왔다. 정말 둘 다 진짜 사랑이었을까. 왠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다. 서현을 사랑했던것이 꼭 한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처럼 여겨지는 기분에 자신이 헛것이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우씨..좋은 사람이야.”

“응. 알고있어.”

“나 말이지. 하늘에 있는 그 누군가에게 감사해. 왜냐면 너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니까. 나 항상 너에게 미안했었어. 해줄수 있는것도 없었고 니가 원하는 걸 돌려줄 수도 없었어. 나는 나만의 방법으로 너를 사랑해왔던거야. 이해할 수 있겠어?”

 

조금씩은 알아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완벽하게 알수는 없지만 그래도 조금씩은. 그래서 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학원 건물을 나섰을때 선후를 발견했다. 그와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감히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수가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마음한 구석에서는 “강지우, 너 지금 화나 있어!” 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스쳐지나가자 아니나 다를까..선후가 곧 뒤쫓아왔다.

 

“지우야. 할 얘기가 있어.”

 

뒤를 돌았을때 선후는 매고있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나 이번 주말에 돌아가. 녹음도 다 끝났고, 잠시동안은 돌아가 있을 생각이야.”

 

그는 비행기 티켓과 씨디 한장을 내밀었다. 지우는 받아들 생각도 하지못하고 무엇이냐는 의심적은 눈빛으로 그를 마주봤다.

 

“비행기 티켓이야. 말해두겠지만 이건 내가 끊은게 아니라 니 아버지께서 직접하셔서 나에게 부탁하신거야. 아버님은 니가 돌아오길 바라셔. 어차피 약속했던 기간도 지났고 말야. 그러니까 우선 받아.”

 

받지 않으려고 피하는 그녀의 손을 간신히 잡아 티켓을 쥐어줬다.

 

“씨디 발매하기도 전에 너한테 제일 먼저 주는거야. 어차피 피아노곡들만 있어서 너가 안들을지도 모르겠다. 또 울거 아냐. 하지만 말야, 지우야. 언젠가는 너에게도 피아노가 고통만이 아니라 행복이 될수도 있을거라 믿어.”

 

별다른 거부감없이 씨디를 받았다. 선후가 주는 모든것을 받아들자 대신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한 덩어리가 빠져나가버린 기분이었다. 모든것이 다 끝났다는 듯 얕은 신호음이 어디에선가 들려오고 있었고 긴장이 풀려졌다.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는 선후의 눈빛너머로 이미 많은 것을 터득한 지우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은 또다시 미소로 그 모든것을 가리고 있는것이었다.

 

“티켓을 버리고 싶다면 너가 사랑한다는 사람한테서 확신을 들어봐. 그러면 돼.”

“응.”

“그리고..널 한때 많이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

 

8월이 끝나가는 무렵, 가을을 알리는 가느다란 바람이 불어왔다. 그 공간속에서 선후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마주잡은 그의 손은 무척 따뜻했다. 옛날에 항상 그녀의 피부사이로 뚫고 들어오던 그 따뜻함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안녕.”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 앉아 비행기 티켓을 열어보았다. 정말 너무도 하시지. 앞으로 3일이라니.

 

“shit.”

(젠장)

 

정말인지 가차없으신 분이다. 3일후에 떠날거라 해도 집을 어떻게 다 정리하느냔 말이다. 전혀 내 생각은 안해주시는군. 하지만 아버지의 말씀을 어겼다가는 할아버지께서 직접 전화를 하실지도 모르는 일이다. 할아버지와의 전화통화는 그야말로 언어로 하는 전쟁일테니 왠만하면 피하는게 좋았다.

현관에 서서 집안을 둘러보았다. 어둠속에서 세세하게 모든것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공허한 집안은 굉장히 썰렁했다. 아무래도 정리할것은 많이 없을것같다. 하지만 왜 아버지에게 가지않겠다고 말을 할 생각을 안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스스로 내뱉은 말이 있기 때문일것이다. 분명 아버지께 3달을 약속받았고 벌써 그 시간은 빠르게도 지나가버렸다. 확실하지도 않은 미래에 모든것을 걸만큼 용기가 많지는 않다. 그리고 한국이 모국인것만은 확실하지만 그녀가 속하는 곳은 이 곳에는 없었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 말씀대로 미국으로 돌아가 대학원에 진학하는게 오히려 더 이득있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선후의 말대로 언젠가는 피아노가 행복이 될수도 있을테니.

불을 켜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티비 위에 올려져있는 무선전화기를 들어올렸다. 전화번호를 다 누르고 신호음을 오랫동안 들어야했다. 아무래도 집에 없는것같아 끊으려하는데 그제서야 신호음이 끊겼다.

 

- 여보세요. -

“자고 있었어요?”

- 아니야. 방금 들어왔어. -

 

준하의 목소리는 그리 밝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피곤해서 그런건지 아니면 고민이 있는건지는 알수 없었다.

 

“내일 만날수 있어요?”

- 내일? 어쩌지. 세미나 있어서 잠시 제주도를 다녀와야해. 왜. 무슨일 있어?-

“아니요. 그런건 아니예요. 그러면 내일 모레는 괜찮아요?”

- 어. -

“좋아요, 그럼.”

 

전화를 끊고 잠시 고개를 숙여 한숨이 내쉬었다. 그에게 작별을 고할 날이 왔구나. 하지만 그 전에 꼭 들어보고 싶은 말이있다.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