礎律(초율) 6화

피바다2004.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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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미산으로 떠났던 다섯은 무사히 의식을 마치고 모두 천계의 문양을 몸에 얻어 돌아왔고 그들을 축하하는 축제가 전계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열렸다.

  그 후, 천계는 다시 평화롭고 권태로운 일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설무랑은 아침 일찍 성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성인식에서 돌아온 후, 천제가 여는 파티에도 참여하지 않은 그에게 아버지 지국천은 천계의 가장 훌륭한 제 4대 성산(聖山) 중 하나인 촉룡산을 선물했는데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설무랑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 곳에서 보내곤 하였다.

  " 왕자 전하, 지국천왕께서 납시었습니다"

 설무랑을 모시는 시녀가 조용히 일러주었다.

 곧 지국천이 혼자 설무랑의 방에 들어왔고 시중을 드는 단 한 명의 시녀는 지국천의 명령을 받들어 조용히 물러 나 둘만 남게 되었다. 설무랑이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둘이 함께 한 시간인 셈이었다.

  지국천은 침들게 입을 열었다.

 " 어디...아픈 곳은 없느냐?"

 설무랑은 등을 돌리고 선채 절대 아버지를 쳐다보지 않다가

 " 큭..큭...큭.....하하하..하하"

 갑자기 쉴 새 없이 웃음을 터뜨리며 눈물까지 찔끔거렸다.

  "하하하. 뭐하자는 겁니까, 전하? 하하..하하.."

 좀처럼 설무랑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굉장한 코메디를 보고 있는 듯.

  간신히 설무랑이 웃음을 멈추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무슨 짓이에요? 설마 이제와서 아버지 노릇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맙소사"

 지국천은 아무 말도 못했고 설무랑은 주섬주섬 바랑을 꾸린 뒤 어깨에 둘러맸다.

 "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싶어 소원대로 죽어드릴까도 했었는데, 그것도 뜻대로 안되더라구요"

 설무랑의 표정은 사심없이 착한 아이같은 표정이었지만 그 말 속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죽는 것도 안되고...그러다보니 그 때부터는 혈육의 정을 스스로 끊어버린 훌륭한 아버지께 딱 그만큼의 양만큼만 갚아주고 싶기도 했고...그런데 결국 그 정도도 안되겠다 싶었죠"

 설무랑은 씩 웃으며 가슴의 앞 섭을 풀어 상체를 드러냈다.

 그의 가슴은 무참한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그가 여태 당했던 고통의 생생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수십번도 더 죽었고 다시 살아났지요. 결론은 이거에요"

 설무랑은 마침 어디선가 날아든 나비 한 마리를 움켜 쥔 채 손에 힘을 주었다. 축 늘어진 나비 한 마리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 당신이 자식마저 버리면서 지키고자 한 것-천계의 파멸이 내가 내린 결론이야. 흥미로울테니 지켜보라고. 내가 천계를 어떻게 짓밟아버리는지 말야"

 그는 다시 옷섶을 여미고 지국천을 스쳐지나가며 마지막 한 마디를 전했다.

 " 아마 당신 스스로 내 숨통을 끊어놓지 않았던 걸 죽도록 후회하게 될 거야. 그리고...앞으로 좀 보지 말자고. 피차 좋을 거 없잖아?"

 

 수백년 동안 주인에게 버려 진 곳이었다는 게 의심스러울 정도로 제황성 북쪽에 위치한 초율의 왕자궁은 깨끗하게,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었다. 정원도, 대리석 계단도, 심지어 침실도...달라진 곳도 없었고 오히려 먼지 한 톨없이 반질반질 윤이 났다.

 게다가 음산할 정도로 인적이 없다는 것도 예전 그대로라 초율은 마치 짧은 여행에서 돌아온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유일하게 자신을 늘 반기던 유모가 없었다. 초율은 왕자궁에 오자마자 지저분하고 엉망인 자신의 모습에 신경도 쓰지 않고 곧장 유모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

 백발이 성성하던 그 녀.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자신을 맡아 평생을 길러 준 그녀가 없었다. 한 번도 유모에게 좋은 소리한 적 없었고 늘 난폭하고 멋대로 그녀를 다루었지만 , 그 날은 유모가 없는 것이 이상하리만치 허전했다. 초율은 유모의 낡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여자..새하얀 드레스에 창백한 피부를 가진 그 여자는 자장가를 부르며 방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아주 느린 걸음으로 무엇인가를 찾아다니던 그 여자가 초율을 향해 서서히 몸을 돌린다.

 어느 새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간 초율은 잔뜩 겁에 질려 그늘진 탁자 아래 몸을 숨기고 떨고 있다. 그 여자의 붉은 눈동자와 달빛에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을 보고 더욱 움츠려든채 초율은 벽에 몸을 붙엿다.

  여자가 초율을 발견했다.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 올 수록 그녀의 흰 드레스가 피로 물들어 갔고 초율은 기어이 비명을 지르며 울부 짖었다.

 "오지마! 오지마아!!"

 그리고 여자는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린다.

 "헉..헉...."

 초율은 땀에 젖어 가뿐 숨을 내 쉬며 깨어났다.

 그는 조심스레 자신의 양 손을 들어 손바닥을 살폈다. 꿈 속의 그 여자가 흘린 피가 왠지 자신의 손을 적시고 있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의 손은 깨끗했다.

 어릴 적 자신을 밤마다 괴롭히던 그 꿈이 왜 이제서야 다시 찾아와 괴롭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현실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은발과 붉은 눈동자의 그 여자.

 두려움과 함께 지독한 그리움을 불러 일으키는 그 여자. 초율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두 다리 사이에 머리를 묻은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누구야...제발 꺼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