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여~ 당신 아버지가 죽인 인혁당사건 8명의 유가족들의 피맺힌 한을 아는가?

그네200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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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정권의 ‘사법살인’ 더이상 묻어둘수 없다

박근혜여~ 당신 아버지가 죽인 인혁당사건 8명의 유가족들의 피맺힌 한을 아는가? 박근혜여~ 당신 아버지가 죽인 인혁당사건 8명의 유가족들의 피맺힌 한을 아는가?

△ 하재완씨 미망인 이영교씨. 김미영 기자

박근혜여~ 당신 아버지가 죽인 인혁당사건 8명의 유가족들의 피맺힌 한을 아는가? 박근혜여~ 당신 아버지가 죽인 인혁당사건 8명의 유가족들의 피맺힌 한을 아는가?[역사와 증언④] 인혁당 희생자 유가족들의 피맺힌 절규

유신시대 대표적 ‘사법살인’으로 불리는 인혁당 사건을 기억하는가. 대학가의 전국적인 반유신투쟁 조직이었던 민청학련의 배후조직으로 날조됐던 ‘인혁당’의 지도부라는 누명을 쓰고 8명의 민주인사들이 대법원의 사형확정 다음날 처형된 민주화운동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

 

정확히 30년 전인 1975년 4월 9일 서대문 교도소에서 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언도된 인혁당 사건(보다 정확히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연루자 8명에 대한 교수형이 집행됐다. 이들의 죄목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민청학련’을 조종해 국가를 전복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23명 가운데 도예종(삼화토건 회장), 여정남(전 경북대 학생회장), 김용원(경기여고 교사), 이수병(일어학원 강사), 하재완(자영업), 서도원(전 대구매일신문기자), 송상진(양봉업), 우홍선(한국골든 스탬프사 상무)씨가 이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특히 희생자들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던 여정남씨는 당시 경북대를 졸업한 신분이어서 석방되지 못하고 이들과 함께 처형됐다.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 및 인혁당 사건으로 수백명의 민주인사와 대학생들을 구속한데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여론이 들끓자 대학생들은 전원 석방했으나 민청학련 연루자중 대학원생이나 일반인, 그리고 인혁당 연루자들은 풀어주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평범한 남편이자 아버지였고, 충실한 가장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독재체제를 유지하려했던 박정희 정권은 국가보안법이라는 재갈을 물려 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이들은 1974년연행된 후 사형집행까지 1년여간 변호사 선임도 거부되는 것은 물론 가족들의 면회도 일체 허용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타와 몽둥이찜질, 통닭구이, 물고문, 전기고문 등에 시달리며 거짓자백을 강요받았고, 결국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죽어갔다.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저항시인’으로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김지하 시인은 감옥에서 이들로부터 잔혹했던 고문과 죄목이 전적으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날조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김지하는 석방된 뒤 동아일보에 ‘고행 1974’라는 연재물을 통해 인혁당 사건이 고문에 의해 날조된 것이라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 폭로로 김지하는 다시 구속돼 6년여를 차가운 감방에서 갇혀있어야 했다.

 

김지하의 폭로처럼 이들은 간첩이 아니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을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으로 규정하고 유신시대 대표적 ‘사법살인’으로 인정했다. 예상치 못했던 가족의 죽음, 그것도 억울한 누명을 쓴 죽음이라면 살아남은 자들의 분노는 오죽할까.

 

3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진상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고, 이들을 죽음으로 몰았던 권력의 후예들은 한 마디 사과도 없이 여전히 ‘떵떵’거리며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다면? 더구나 이 권력의 후예들이 국가권력에 희생된 사람들까지 과거사 규명에 포함하자는 주장에도 ‘딴죽 걸기’로 일관하고 있다면. 이들이 처형되던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는 인혁당 연루자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법적으로 끝난 일’이라고 싸늘하게 말했다.

 

◇ “박정희가 장난을 쳐도 지나친 장난을 친 거지.”

“박정희가 장난을 쳐도 지나친 장난을 친 거지. 간첩의 누명을 쓰고 죽어간 남편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명예회복 되어야 해. 내가 죽기 전에 꼭 이것만은 할 거야.”

 

김진생(76·송상진씨 미망인), 이영교(70·하재완씨 미망인), 신동숙(75·도예종씨 미망인) 씨는 대구 ‘삼총사’다. 남편의 죽임이 이들을 한 뜻으로 뭉치게 만들었다. 정확히 30년 전 인혁당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뒤 이들은 친자매처럼 서로를 의지하고 격려하며 살아왔다.

 

그동안 이들이 흘린 눈물이 오죽하겠으랴만, 이들의 표정은 밝았다. “유신시대 억울한 죽음을 당한 남편의 명예회복이 가능할 것 같아.”

 

박근혜여~ 당신 아버지가 죽인 인혁당사건 8명의 유가족들의 피맺힌 한을 아는가? 박근혜여~ 당신 아버지가 죽인 인혁당사건 8명의 유가족들의 피맺힌 한을 아는가?

△ 송상진씨 미망인 김진생씨. 김미영 기자

그렇다고 결과를 낙관만 할 수는 없다. 과거청산에 대한 논쟁이 친일의 범위나 방법, 민주화운동 혹은 간첩·용공 등을 놓고 여야의 힘겨루기가 계속되면서 그 본질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볼 때는 박근혜가 뻔뻔스럽게 하는 말 죄다 괘씸하지. 남편을 죽인 원흉이 자기 아버지인데, 사과는 커녕 재판결과에 따라 희생됐다는 그런 막말을 할 수 있어?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안하지.” (김진생 씨)

 

“근혜가 지금까지 만원버스를 타봤겠어? 등록금이 없어 울어본 적이 있어? 집 없는 설움이나 배고픔을 얼마나 알겠어? 그런 사람이 야당 대표에 앉을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어. 아니, 이런 사실을 하나도 모른 채 근혜만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더 속상하지.” (이영교 씨)

 

이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그만큼 모진 세월의 풍파를 남편 없이 홀로 세상과 싸우며 살아왔기 때문일 테다.

 

◇ “‘간첩가족’ 누명 벗기 위해서라도 진상규명·명예회복 돼야”

조그마한 사업을 하던 남편과 5남매가 단란한 생활을 누리던 이영교 씨의 가정에 풍파가 몰아친 것은 1974년, 목욕을 간다며 집을 나선 남편 하재완 씨가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그 뒤 이씨는 남편의 소식을 신문을 통해 접했다. 남편이 간첩으로 몰렸지만, 죄가 없기 때문에 ‘풀려날 것’이라는 희망으로 1년여를 버텼지만, 남편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것은 75년 대법원 사형확정 판결 때였다.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지만, 남편은 당당했어. 마치 나를 보고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표정이었거든. 10분 정도 판결문이 낭독된 뒤 남편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더군. 그래도 그렇게 빨리 사형이 집행될 줄은 몰랐지. 면회 가다가, 그 소식을 들었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

 

이씨는 남편이 떠난 뒤 전자제품 외판원 등을 하며 혼자 3남2여를 키웠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기관원들의 감시나 생활의 고초보다 더 무서웠던 것은 주위의 눈총이었다. 동네 아이들은 4살짜리 막내아들을 ‘간첩자식’이라며 새끼줄에 목을 매어 끌고다니다 나무에 묶어 놓고 총살하는 시늉을 하며 놀았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던 둘째 딸아이의 소풍날에는 반 아이들이 몰려와 ‘간첩의 딸’이라며 도시락에 개미를 넣고 돌팔매질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혼자 나무 밑에 숨어서 도시락을 까먹었다고 하더라고. 소풍 때 먹는 김밥 맛은 알아서.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속상했는지… 그 때 결심했어. 차라리 내가 죽어 남편의 누명을 벗길 수 있다면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고, 두 언니(김진생씨, 신동숙씨)들과 함께 진상규명 운동에 뛰어들었지.”

 

◇ “한나라당은 불법 집단이야. 보안법이 그렇게 좋으면 잡혀가서 맛 봐봐!”

박근혜여~ 당신 아버지가 죽인 인혁당사건 8명의 유가족들의 피맺힌 한을 아는가? 박근혜여~ 당신 아버지가 죽인 인혁당사건 8명의 유가족들의 피맺힌 한을 아는가?

△ 도예종씨 미망인 신동숙씨. 김미영 기자

도예종씨 미망인 신동숙씨는 남편이 간첩으로 유명을 달리한 뒤 정신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아직도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고문당한 상처 때문에 고통을 호소하기도 한다. 날이 안 좋으면 몸이 굳어져서 이불 속에서 한참을 뒤척이다 일어나야 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운이 좋은 편이었지. 그나마 대한노인회 사무국장으로 일할 수 있었으니까. 장사도 해보려고 했지만 성격상 못하겠더라고. 일을 그만둔 96년부터는 남편 구명운동에 매진했고.”

 

하지만 혼자 살고 있는 그는 음식을 제대로 해먹는 일이 거의 없다. 밥 숟가락을 드는 일 조차 남편에게 미안하기 때문이다.

 

신씨는 남편의 재판현장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린애들 재판놀이였지. 재판형식만 따랐지 장난친 거였어. 남편은 법대로 해도 죽을 만한 짓은 하나도 안했어. 박정희처럼 무기를 갖고 있던 것도 아니었고, 정권을 뺏으려고 한 적도 없었으니까. 죽어도 못 잊어. 주검도 못봤는 걸.”

 

그의 입술은 떨렸다. 그만큼 힘들었다는 방증이다. 그는 인혁당 사건이 있은 뒤 한 집에서 살았는데도 이웃과 전혀 교류하지 않았다. 반상회도 나가지 않았다. 빨갱이 집이라고 엉뚱한 트집을 잡아서 당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윤보선 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집권기간 동안 인혁당 8명을 죽인 것이 내 정치사에서 가장 큰 오점이라고 말했다고 하더라고. 그게 국가보안법이 한일협정으로 나라를 팔아먹고, 박정희 개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악용됐다는 증거 아니겠어? 진실을 밝혀야 하는 당위성도 여기에 있는 거고.”

 

그에게 있어 국가보안법 존치를 부르짖는 한나라당은 난폭한 불법 집단일 뿐이다. “박근혜 역시 김정일을 만나고 왔으니, 감옥에 가야 해”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 깊은 분노가 배어 있다. “국가보안법이 그렇게 좋으면, 잡혀가서 보안법 맛 봐야 해. 하루 빨리 진실이 알려져 대구 시민들이 박정희와 박근혜에 대한 본질을 깨달았으면 하는 것이 바램이야.”

 

그는 박정희의 경제발전 공로 역시 인정하지 않았다. “박정희 때문에 경제발전 한 것 아니지. 젊은 사람들을 월남에 총알받이로 보내서, 굴욕적인 한일협정으로 얻은 대가였을 뿐이었어.”

 

◇ “억울해서… 억울해서… 죽지 않고 살아왔지.”

“한복 바느질하며 3남매를 키웠어. 있던 재산 다 팔아먹고, 간첩자식 놀림 받는 아이들 때문에 이사도 셀 수 없이 다녔어. 그래도 꿋꿋하게 버텼지. ‘중앙정보부의 과잉 충성으로 내가 이 자리에 와서 유감’이라고 말한 대법원에서의 남편의 마지막 모습 때문이었어.”

 

송상진씨의 미망인 김진생씨는 ‘억울함’을 오기 삼아 지금까지 꿋꿋하게 버텨왔다. 자살도 하고 싶었지만 남편의 누명을 자신이 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과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24시간 형사들이 문 앞에서 지키고 있어도, 사람들이 ‘간첩가족’이라고 손가락질 하며 욕해도, 집 담벼락에 ‘간첩의 집이다. 잡아 죽여라!’라고 낙서를 해도 버틸 수 있던 힘이었다.

박근혜여~ 당신 아버지가 죽인 인혁당사건 8명의 유가족들의 피맺힌 한을 아는가? 박근혜여~ 당신 아버지가 죽인 인혁당사건 8명의 유가족들의 피맺힌 한을 아는가?

△ 하재완씨 미망인 이영교씨. 송상진씨 미망인 김진생씨. 도예종씨 미망인 신동숙씨. 김미영 기자



“억울해서… 억울해서 죽지 않고 살아왔지. 민간법정이 아닌 군법정에서 민간인을 재판한다는 것이 말이 돼나? 재판정에서 변호사도 없는 피고인의 말을 막는 것이 제대로 된 법정이야? 대법원 판결 즉시 재심을 청구하려 했는데, 바로 사형이 집행됐더라고. 말이 재판이지, 학살이지. 상식을 벗어난 재판이기도 하고. 2002년 재심을 청구해 놓았는데, 빨리 가부 결정이 났으면 해.”

 

의문사위가 정보부 조작이라는 입장을 밝혔지만, 인혁당 관련 희생자들의 희생자들은 여전히 명예회복이 안 된 상태다. “민청학련에 가담한 이해찬씨가 총리가 되고 유인태가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됐어. 간첩이 아니었다는 거지. 남들은 명예회복이 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과거청산이 포괄적으로 이뤄지면 가능하지 않겠어?”

 

이들 삼총사는 97년부터 본격적으로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뛰어들었다. 2002년에는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검찰은 국가기관인 의문사위의 법적 지위를 문제 삼으면서 재심에 반대하고 있어 현재까지 표류상태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도 명예회복을 청구했지만 여전히 심사 중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은 열린우리당에서 추진하는 ‘과거청산’과 검찰과 법원 등 사법부의 ‘과거사 고백’이다. 박정희 유신체제의 대표적 사법 피해사례로 꼽히는 ‘인혁당 사건’의 유족들이 30년간 흘려온 피눈물을 닦아줄 시점은 과연 언제일까.

 

“우리가 죽기 전에 밝혀져야지. 그래야 저 세상에서 남편을 만나도 부끄럽지 않지. 지금까지 힘들게 살아온 보람도 있는 거고.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고, 법의 정의가 바로서는 그날이 빨리 오기를 바랄 뿐이야. ”

박근혜여~ 당신 아버지가 죽인 인혁당사건 8명의 유가족들의 피맺힌 한을 아는가? 박근혜여~ 당신 아버지가 죽인 인혁당사건 8명의 유가족들의 피맺힌 한을 아는가?

■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1974년 북한의 지령을 받아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민청학련’을 조종해 국가를 뒤엎으려 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을 말한다. 당시 23명이 구속돼 15명이 무기징역을 받았고 이 가운데 도예종, 여정남, 김용원, 이수병, 하재완, 서도원, 송상진, 우홍선 등 8명이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려진 뒤 불과 17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돼 ‘사법살인’ 의혹을 받아왔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도예종씨 등 23명이 인혁당 재건위를 결성, 북한의 지령을 받아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비상식적인 사형집행을 비판하며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기도 했으며, 국제 엠네스티도 이 사건을 군사정권의 대표적 인권유린 사건을 기록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도 2002년 9월12일 이 사건을 ‘정권안보를 위한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으로 인정했다. 의문사위는 당시 “중정은 도예종씨 등 23명에 대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인민혁명당 재건위를 구성, 학생들을 배후 조종하고 국가전복을 꾀했다고 발표했지만 위원회 조사 결과 이를 입증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으며 혐의는 모두 고문에 의한 피의자 신문조서와 진술조서 위조를 통해 조작됐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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