礎律(초율) 9화

피바다2004.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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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은혜를 어찌 갚으오리까. 소녀는 늘 전하께 은혜를 입기만하옵니다"

 아화는 제공의 술잔에 직접 담근 청송주(靑松酒)를 한 잔 따라올리며 방금 전 일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에이,지아비가 색시 챙기는 건 당연한건데 뭘 새삼스럽게..이쁜 색시 얻은 죄지 뭐"

 제공은 그저 싱글벙글하며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성인식에서 돌아온 제공의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은 더 자라 그의 흰 어깨 위에서 눈부시게 물결치고 있었고 남성미와 여성미를 동시에 완벽하게 조화시킨 그의 아름다움은 역사에 영원히 남을 정도였다. 여성으로써 빠질데 없는 미를 과시하는 아화와 신비한 아름다움을 지닌 제공이 함께 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둘을 모시는 시종들은 두 사람의 아름다움으로 방안이 절로 밝아지는 기분까지 느꼈다.

 " 즉위식을 치르셨단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아화가 다시 제공의 잔을 채우며 넌지시 말을 꺼냈다.

 제공은 성인식을 치르고 돌아온 뒤 천제의 연회가 끝나는대로 서둘러 즉위식을 거쳐 남방성 증장천왕의 보위에 올랐다. 여전히 젊고 기력이 넘치는 선대 증장천왕이 막 성인식을 치른 젊은 아들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지나치게 서둘러 은둔에 들어간 일로 인해 여러 소문이 무성했지만 누구도 제공이 왕위를 물려 받은데 대해선 불안이 없었다. 제공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안달하는 여성들에게는 천하의 나쁜 놈일지언정, 가녀린 외모와는 달리 그는 명실공히 천계 제일의 장군으로 수많은 무공을 세웠고 그 누구도 제공을 적으로 돌리고 싶어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지략가이며 정치가였다. 소문이었지만 천제가 종종 성인식을 치르지도 않았던 어린 제공을 몰래 불러들여 정치적인 고민을 함께 나눈다는 이야기까지 떠 돌았으니 그는 어릴때부터 될 성 푸른 나무였던 셈이다.

 " 안그래도 나 맘 상했다고. 즉위식때 왜 오지 않았던거야? 아화의 빈 자리를 보면서 나 내내 기분이 별로였다구"

 "용서하세요"

 아화는 제공의 투정에 사뿐히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제공은 계속 투덜댔지만 실제로는 충분히 아화를 이해하고 있었다.

 대귀족들만이 참여한 왕위계승식에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기녀가 올 수 있을리 없었다. 아화가 비록 고위계급에 친구가 많고 배짱이 남다른 여자였지만 스스로 제공의 얼굴에 먹칠 할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 어찌 참석할 수 있었겠는가. 제공도 초대장을 직접 전하면서 아화가 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소녀 고귀하신 전하께 드릴 건 이것 밖이오니, 너그럽게 받아주시어요"

 말을 마친 아화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중을 들던 다른 기녀들은 물러났고 남은 건 제공과 아화, 가야금을 타는 악사뿐이었다.

 아화는 춤을 추기 위해 사뿐히 옷자락을 들어올렸다.

 " 그만 두어라"

 제공이 진지한 얼굴로 그녀의 다음 동작을 중지시켰다.

 "전하...받아주시어요. 소녀 전하께 바치고 싶나이다"

 "보고 싶지 않아."

제공은 완고하게 말했다. 그러더니 대뜸 벌떡 일어나,

 " 감히 내 앞에서 무슨 춤이야? 춤하면 제공을 따라올 자가 어딨다구. 안그래?"

 하며 익살스러운 춤을 추는 바람에 아화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고 결국 제공의 능청스러운 고집에 져서 춤을 거두었다.

 제공의 농담과는 달리 아화의 춤은 극치의 무 (舞)로 통할 정도였다. 구름 위를 걷는 선녀처럼 가벼운 몸짓 속에 깊이가 담긴 춤사위는 극소수만이 볼 수 있었음에도 천계 전역에 소문이 자자했다. 한 번 그녀의 춤을 보고 난 사람들이 그 황홀함을 못 잊어 다시 보기 위해 안달을 하는 반면, 제공은 아화의 춤을 보는 것이 싫었다.  

 제공이 아화의 마음을 얻어 친구가 되던 날, 아화는 제공 앞에서 처음으로 춤을 추었다. 그러나,극치로 통한다는 그녀의 춤을 보면서 제공은 슬플 따름이었다. 아화는 그 춤을 추며 비극적이었던 그녀의 과거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며 추는 그녀의 춤을 보며 제공은 가슴이 저렸고 그 후 다시는 그녀에게 춤을 요구하지 않았다. 춤을 추면서 그녀는 몇 번이고 죽었고 다시 살아났다. 제공은 그 춤 속의 슬픔을 전해 받았던 것이다. 제공은 그녀에게 춤을 추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바탕 제공의 장난이 끝나고 다시 자리에 앉았을 때 제공은 푸른 비단에 쌓인 상자를 내 밀었다.

 아화는 의아한 눈으로 제공을 쳐다봤고 ,

 " 아화에게 주려고 가져왔어. 열어봐"

 아화가 비단을 풀어헤치고 상자를 열었을 때 제공의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색을 고스란히 닮은 옥팔찌가

 한 쌍 들어있었다.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옥팔찌에 비해 폭이 유난히 두껍지만 얇게 세공하여 그다지 무겁지 않은 팔찌였다.

 " 전..하..."

 아화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제공을 바라보았다.

 제공은 미소를 띄며 길게 내려와 손등까지 덮은 아화의 소매를 걷어내고  왼쪽 손목을 어색하게 감고있는 기존의 금팔찌를 풀어냈다. 아화는 흠칫했지만 제공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손목에 남은 상처를 손끝으로 잠깐 어루만졌다.

 그리고 제공은팔찌와 함께 미리 준비해 온 연녹빛 얇은 비단으로 그녀의 흉터를 먼저 돌려 감아주고 옥팔찌를 끼워주었다.

 아화는 조용히 제공의 손놀림을 보고 있었고 마침내 제공이 다 끝낸 뒤,

 " 아화는 손이 참 예뻐. 그런데 흉터 때문에 매일 긴 소매만 찾으니까...손까지 가려지잖아. 이러면 이제부턴 예쁜 그 손을 내 놓고 다닐 수 있을거야"

 아화는 감격한 젖은 눈으로 제공을 한 번 바라보고는 웃었다.

 " 전하는 어째서 소녀같은 것에게 이토록 마음을 쓰시옵니까? 그 때도 죽게 내버려 두실 것을 왜 소녀를 살리시...."

 " 어허, 이 마누라야! 술 떨어졌잖아!"

 제공은 아화의 말을 끊으면서 짐짓 큰 소리로 외쳤다.

 아화는 일부러 제공이 그런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말을 멈추고 새로운 술을 준비하러 사람을 보냈다.

 아화는 제공이 준 옥팔찌가 얼마나 가치로운지 알고 있었다. 한동안 제공이 옥을 생산하는 토굴에 매일 같이 찾아가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제공은 아화에게 줄 팔찌를 직접 세공하러 다녔던 것이었다. 아화는 고귀한 신분의 제공이 어째서 하찮은 자신에게 그토록 친절한 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공이 그녀를 살아가게 만들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