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하긴 하지만 어느덧 초록빛이나 따스한 햇살이 느껴지는 봄날이었다. 하연은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고 서점에서 책도 고르고 차를 마시며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전화를 하고 올라갈까 잠시 고민하던 하연은 태윤을 놀라게 해줄 생각에 무작정 태윤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아직 시간은 5시 즈음. 하연이 들어서자 비서가 놀라며 일어섰다.
"사모님, 오셨어요? 이사님 지금 손님 와계신데...."
"손님요? 예. 그럼 여기서 잠시 기다릴께요."
하연은 회색빛 쇼파에 앉아 신문을 뒤적이며 손님이 나오길 기다렸다. 안절부절 못하는 비서의 태도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하연은 오랜만의 외출에 콧노래까지 부르며 태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잘 가라."
오랜만에 듣는 태윤의 차갑고 뚝뚝 떨어지는 말투에 하연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태윤의 사무실 문이 열리며 진한 향수내음과 함께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모습이 드러내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지 바깥쪽 창을 향해 서있는 태윤의 등이 닫히는 문 사이로 잠시 보였다. 잠시 표정이 흔들리던 곤주는 천천히 하연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네요. 제가 기도한대로 짧은 행복의 달콤함은 충분히 누리고 계신가봐요."
하연의 곤주의 눈길이 자신의 배에 머무는 것을 보며 본능적으로 자신의 배를 두 손으로 가렸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되요. 시간도 좀 있는 것 같은데 잠시 나가서 얘기나 좀 할까요?"
곤주는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먼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하연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비서에게 말을 건냈다.
"저 왔다고 말하지 마세요. 있다가 제가 직접 연락할께요."
"오랜만이예요. 임신하셨다구요, 축하해요."
회사 근처 커피숍에서 마주 앉은 두 사람은 한동안 창밖을 내다보며 말이 없었다. 결혼식장에서 보고 처음 만난 곤주는 예전보다 살이 좀더 빠져서 얼굴선이 약간 날카로워보였다.
작년 이맘때 처음 재회했을 떄보다는 입꼬리에 걸리는 웃음이나 분위기가 더욱 어두워보였다. 곤주의 마른 몸을 보니 하연은 기쁨이가 생각나 자신도 모르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너는 잘 지냈니? 좀 마른 것 같다."
하연의 말에 곤주가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시니컬한 표정으로 웃었다.
"별로 잘 지내지 못해요. 저 결혼해요."
"결혼?"
잔뜩 긴장하고 있던 하연은 곤주의 입에서 흘러나온 뜻밖의 말에 놀라 되물었다. 곤주는 깜짝 놀라서 눈까지 동그랗게 뜬 하연의 모습에 웃으며 담배를 빼물었다.
"뭘 그렇게 놀라요? 내가 태윤오빠를 이제 포기하는 것 같아서?
틀렸어요. 나 태윤오빠 포기하지 않아. 가질 수 없다면 망가뜨려버릴꺼니까."
섬득한 곤주의 눈빛에 하연은 흠칫 놀랐다. 아직도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것일까? 또 아버지와 같이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태윤오빠네 칠 때 우리도 그정도 각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타격을 많이 입었어요. 예상대로 고전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원상복귀해버리더군요. 역시 우리 아버지는 사업에 소질이 없어요."
"..............................."
"그래서 좀더 힘이 센 사람의 도움을 받기로 했죠. G그룹 후계자와 결혼해요.
오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빠를 되찾기 위해서, 아니면 부셔버리기 위해서 나를 파는 거예요."
하연은 이제 새하얗게 질려서 곤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존재만으로도 아름다운 그녀의 태윤에 대한 무시무시한 집착이 그녀를 괴물로 만들고 있었다.
뭐라 하연이 곤주에게 말을 건내기 전에 하연의 전화벨이 울렸다. 태윤이었다. 하연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일찍 집에서 나갔다며..."
"아... 지금 회사 근처에 와있어. 앞에서 만나자."
뚫어져라 노려보는 곤주의 눈빛을 바라보며 하연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었다. 전화를 끊는 하연을 보고 곤주가 차갑게 말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마음껏 즐겨보라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태윤오빠가 미친 듯이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동안 뱃속의 아이나 키우며 그저 눈물짓는 일밖에 할 수 없겠지."
"........넌 사랑이 뭔지 몰라. 태윤과 내 아이 내가 지킬꺼야."
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곤주를 내려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곤주가 경고했던 일들이 시작되었다. 집에도 돌아오지 못할 만큼 태윤이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하연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잠시 태윤을 보러 회사에 들르거나 피곤하고 힘든 가운데서도 자신에게 웃어주는 태윤을 생각하며 눈물짓는 일 밖에는....
"꽃배달 왔는데요."
숨막힐 것 같은 나날들 중 어느 오후, 하연은 자신에게 배달되어 온 검은 장미꽃다발을 받았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그 숨막힐 듯한 향기에 어지러워하며 하연은 카드를 펴보았다.
[저와 결혼할 사람이 언니에게 관심있어하네요. 어쩌면 태윤오빠가 저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을 얻게 될지도 모르니 나오겠어요?]
간단한 약도와 함께 시간, 장소가 간략히 적혀있었다. 하연은 창백해진 얼굴로 아랫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저녁 7시. 피곤에 찌든 얼굴로 집으로 돌아온 태윤은 텅빈 침실을 보며 의아한 듯 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번 울리더니 이내 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야? 나 집에 왔는데..."
"오늘 일찍 오는 거였어? 나 미라 잠깐 만나러 나왔어. 2-3시간 안에 갈께."
"내가 데리러 갈까? 헤어질 떄 전화해."
"아니야. 알아서 갈께요. 피곤할 텐데 좀 쉬고 있어. 있다봐."
묘하게 흥분되어 있는 듯한 하연의 목소리를 자신의 피곤기 탓으로 돌린 태윤은 옷을 갈아입자마자 침대에 쓰러져 노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어서와요."
안내에 따라 차이나 레스토랑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룸으로 안내받은 하연은 입구에 서있는 검은 정장 차림새의 남자들을 보며 겁먹지 말자고 몇번을 다짐했다.
방으로 들어서자 검은색 차이나풍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비녀로 틀어올린 곤주와 검은색 정장을 잘 차려입은 날카롭게 생긴 30대 초반의 사내가 앉아있었다.
사내의 매서운 눈매나 곤주의 차가운 표정에 하연은 핸드백의 끈을 꼭 쥐었다. 당장 태윤이 잠들어있을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지만, 하연은 불안하게 의자 끝에 걸터앉았다.
"흠... 윤이사의 취향이 이랬었군요."
한시간여의 식사동안 침묵과 관찰을 견디어 낸 하연은 금세라도 쓰러져버릴 것만 같았다. 송글송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던 땀은 이제 이마에도 맺혀있었다.
"자리가 많이 불편하신가? 많이 들지도 않고 안색도 좋지 않아보이는데.."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하는 사내의 옆에 앉은 곤주가 하연을 보며 말했다.
"식사 입에 맞았어요? 임산부는 잘 먹어야하는데..."
무엇이라 말하고 싶은데 혀가 꼬이는 것처럼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식은땀 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떨려왔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건가요? 충분히 기다렸으니 이제 얘기하세요."
하연은 온힘을 짜내어 떨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얘기? 그저 당신이 궁금했을 뿐이요. 내 사랑스러운 약혼녀의 연극에 동참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연극? 하연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랫배를 콕콕 쑤시는 통증이 일자 하연은 거칠게 의자를 잡아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 가보겠어요."
문손잡이를 잡던 하연은 거칠게 올려붙이는 곤주의 손에 쓰러졌다.
"가기는.. 본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구."
"고마워요, 약혼자님. 이제부터는 단 둘이 있고 싶은데요."
"네가 원하신다면..."
곤주의 잔인한 표정에 사내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하연은 두려움에 떨며 뒤로 물러났다.
".......이러지마!!!!! 안돼!!!!!"
곤주의 머리에 꽂혀있는 비녀만큼이나 날카로운 구두의 굽이 하연에게로 내려왔다. 비명을 지르는 하연의 위로 수없이 쏟아지는 거친 발길.
"잘난 척 하지마. 가질 수 없다면 다 부셔버리겠다고 분명히 말했어!!!!!"
"하연아!!!"
잠이 들었던 태윤은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꿈 속에서 하연이 눈물 떄문에 눈도 뜨지 못한채 자신을 부르며 저 멀리서 오는데 아무리 가까이 가려해도 발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흠칫 놀라며 이마에 가득 맺힌 땀을 훔쳐내던 태윤은 요란하게 울려대는 벨소리에 흠칫 놀라며 전화를 받았다.
"네, 윤태윤입니다...........뭐? 어디야? 하연이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요즘 회사일이 너무 바빠서 짬을 낼 겨를이 없어요. 죄송합니다.
이제 왕자님과의 로맨스도 결말을 향해 꺾였습니다. 이제부터 우울하고 슬픈 이야기가 계속 될 것 같은데 그래도 꾸준히 응원해주세요.
왕자님과의 로맨스 [17] 검은 장미
"엄마 나 갈께요."
"그래, 태윤이가 데리러 오기로 했지? 조심해서 가라."
입덧이 좀 가라앉아 혈색도 좋아지고 보기 좋을 만큼 통통해진 하연이 어머니에게 손을 흔들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하아~ 춥다."
3월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입김이 나올 만큼 쌀쌀했다. 하연은 하얀 니트 모자에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살며시 배를 쓸어보았다. 이제 살짝 나오기 시작한 배. 기쁨이가 가끔 발로 툭툭 차대기도 해서 매일 신기해하는 나날들이었다.
아파트 입구 쪽에서 휭하니 달려오는 검은색 스포츠카를 보며 하연은 걸음을 내딛었다. 문을 열고 차에 오르며 하연은 말을 건냈다.
"왜 이제 왔? 어? 태민아?"
날씨 탓인지 두꺼운 꽈배기 니트에 청바지를 입은 태민이 운전대에 기대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형 오늘 회사에 일이 많아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대. 나보고 대신 다녀오랬어."
하연의 얼굴에 금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곤주 아버지 때문에 엄청난 타격을 받았던 회사가 겨우 본궤도에 오르려할 때였다. 간신히 어려움을 헤쳐나왔나 했더니 경쟁회사인 G그룹이 물량공세며 자금문제 등등으로 압박해왔다.
"........피곤하지 않어? 나 신경쓰지 말고 서재가서 편하게 해."
밤마다 자다가 태윤의 일하는 소리에 자주 하연은 깼다. 자신 때문에 불도 약하게 켜고 일을 하는 태윤이 하연은 못내 안스러웠다.
"괜찮아. 나야말로 미안해. 얼른 자. 조금만 해놓고 잘께."
그러면서도 침대로 다가와 하연의 머리를 쓸어주며 미안하다고 말하는 태윤이었다.
임산부 요가교실에 가는 내내 하연은 어두운 창밖을 닮은 어두운 표정이었다. 태민은 그런 하연의 옆얼굴만 내내 보다 말을 건냈다.
"걱정하지마. 형이랑 아버지랑 누나 아버지랑 대단하신 분들이잖아. 괜찮을꺼야."
"그렇겠지?"
하연은 괴고있던 팔을 풀며 걱정스레 말했다. 태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 근심어린 하연의 얼굴을 보며 태민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음.. 이제 와?"
하연이 뒤척이다 잠이 든 그날 밤, 태윤은 새벽에 되어서야 들어왔다. 하연은 부스스 눈을 뜨며 태윤을 맞았다.
"깼어? 늦어서 미안. 씻고 잘께. 계속 자."
잠결에도 태윤의 얼굴이 피곤과 걱정으로 가득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하연은 욕실로 들어가는 태윤의 어깨를 보며 일어나 앉았다. 따뜻한 것이라도 한잔 가져다주자는 생각에 하연은 숄을 두르고 맨발로 아랫층으로 내려갔다.
코코아를 들고 올라온 하연은 샤워기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방안 탁자에 앉았다. 그때 태윤의 전화벨 소리가 양복 주머니에서 울렸다. 하연은 잠시 망설이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지만 곧 벨소리는 끊어졌다.
수신자를 확인해보려다 탁자에 올려놓은 하연은 이내 들려오는 메세지 도착소리에 태윤의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오늘 반가웠어요. 앞으로 자주 보게 될꺼예요. 잘자요.]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플립을 세게 닫았다. 메세지에 이어서 뜬 발신자의 이름. 류곤주.
"안잤어?"
머리를 털며 나오는 태윤이 하연에게 말을 건냈다.
"응? 응. 이거 한잔 마시고 자라고..."
하연은 고개를 흔들며 코코아잔을 태윤에게 건냈다.
"아랫층까지 내려갔다왔어? 세상에, 너 실내화 또 안신고 간거야? 발 차운거 봐."
하연의 발을 자신의 뺨에 대었다가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던 태윤은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면서 하연의 차가운 발을 녹이는데 열중했다. 하연은 태윤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말없이 저었다.
그런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태윤이 그럴리 없다고...
"회사로 잠깐 나올래? 오늘 옷 사러가자. 임부복 봐놓은 거 있다면서."
"요즘 많이 바쁜 거 아냐? 괜찮아?"
"그래도 우리 하연이가 제일 중요하지. 있다 같이 밥먹고 옷도 사고 하자. 오늘은 좀 일찍 나가면 되지 뭐."
"그래, 그럼 6시쯤 갈까?"
"음.. 좋아. 내가 5시에 차 보낼테니 집에서 기다려요. 있다봐."
회사일이 조금 진정되었는지 출근한 태윤이 전화를 해왔다. 오랜만에 밖에서 보는 것이라 하연은 설레여하며 옷을 골랐다. 준비를 다 하고 시간을 보아도 아직 시간은 3시였다.
"벌써 나가니? 태윤이가 있다 차 보낸다고 하던데..."
"오늘 날씨도 좋고 하니까 서점이나 들렸다가 가려구요. 좀 답답하기도 하고.. 다녀오겠습니다."
쌀쌀하긴 하지만 어느덧 초록빛이나 따스한 햇살이 느껴지는 봄날이었다. 하연은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고 서점에서 책도 고르고 차를 마시며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전화를 하고 올라갈까 잠시 고민하던 하연은 태윤을 놀라게 해줄 생각에 무작정 태윤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아직 시간은 5시 즈음. 하연이 들어서자 비서가 놀라며 일어섰다.
"사모님, 오셨어요? 이사님 지금 손님 와계신데...."
"손님요? 예. 그럼 여기서 잠시 기다릴께요."
하연은 회색빛 쇼파에 앉아 신문을 뒤적이며 손님이 나오길 기다렸다. 안절부절 못하는 비서의 태도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하연은 오랜만의 외출에 콧노래까지 부르며 태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잘 가라."
오랜만에 듣는 태윤의 차갑고 뚝뚝 떨어지는 말투에 하연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태윤의 사무실 문이 열리며 진한 향수내음과 함께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모습이 드러내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지 바깥쪽 창을 향해 서있는 태윤의 등이 닫히는 문 사이로 잠시 보였다. 잠시 표정이 흔들리던 곤주는 천천히 하연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네요. 제가 기도한대로 짧은 행복의 달콤함은 충분히 누리고 계신가봐요."
하연의 곤주의 눈길이 자신의 배에 머무는 것을 보며 본능적으로 자신의 배를 두 손으로 가렸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되요. 시간도 좀 있는 것 같은데 잠시 나가서 얘기나 좀 할까요?"
곤주는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먼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하연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비서에게 말을 건냈다.
"저 왔다고 말하지 마세요. 있다가 제가 직접 연락할께요."
"오랜만이예요. 임신하셨다구요, 축하해요."
회사 근처 커피숍에서 마주 앉은 두 사람은 한동안 창밖을 내다보며 말이 없었다. 결혼식장에서 보고 처음 만난 곤주는 예전보다 살이 좀더 빠져서 얼굴선이 약간 날카로워보였다.
작년 이맘때 처음 재회했을 떄보다는 입꼬리에 걸리는 웃음이나 분위기가 더욱 어두워보였다. 곤주의 마른 몸을 보니 하연은 기쁨이가 생각나 자신도 모르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너는 잘 지냈니? 좀 마른 것 같다."
하연의 말에 곤주가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시니컬한 표정으로 웃었다.
"별로 잘 지내지 못해요. 저 결혼해요."
"결혼?"
잔뜩 긴장하고 있던 하연은 곤주의 입에서 흘러나온 뜻밖의 말에 놀라 되물었다. 곤주는 깜짝 놀라서 눈까지 동그랗게 뜬 하연의 모습에 웃으며 담배를 빼물었다.
"뭘 그렇게 놀라요? 내가 태윤오빠를 이제 포기하는 것 같아서?
틀렸어요. 나 태윤오빠 포기하지 않아. 가질 수 없다면 망가뜨려버릴꺼니까."
섬득한 곤주의 눈빛에 하연은 흠칫 놀랐다. 아직도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것일까? 또 아버지와 같이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태윤오빠네 칠 때 우리도 그정도 각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타격을 많이 입었어요. 예상대로 고전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원상복귀해버리더군요. 역시 우리 아버지는 사업에 소질이 없어요."
"..............................."
"그래서 좀더 힘이 센 사람의 도움을 받기로 했죠. G그룹 후계자와 결혼해요.
오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빠를 되찾기 위해서, 아니면 부셔버리기 위해서 나를 파는 거예요."
하연은 이제 새하얗게 질려서 곤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존재만으로도 아름다운 그녀의 태윤에 대한 무시무시한 집착이 그녀를 괴물로 만들고 있었다.
뭐라 하연이 곤주에게 말을 건내기 전에 하연의 전화벨이 울렸다. 태윤이었다. 하연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일찍 집에서 나갔다며..."
"아... 지금 회사 근처에 와있어. 앞에서 만나자."
뚫어져라 노려보는 곤주의 눈빛을 바라보며 하연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었다. 전화를 끊는 하연을 보고 곤주가 차갑게 말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마음껏 즐겨보라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태윤오빠가 미친 듯이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동안 뱃속의 아이나 키우며 그저 눈물짓는 일밖에 할 수 없겠지."
"........넌 사랑이 뭔지 몰라. 태윤과 내 아이 내가 지킬꺼야."
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곤주를 내려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곤주가 경고했던 일들이 시작되었다. 집에도 돌아오지 못할 만큼 태윤이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하연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잠시 태윤을 보러 회사에 들르거나 피곤하고 힘든 가운데서도 자신에게 웃어주는 태윤을 생각하며 눈물짓는 일 밖에는....
"꽃배달 왔는데요."
숨막힐 것 같은 나날들 중 어느 오후, 하연은 자신에게 배달되어 온 검은 장미꽃다발을 받았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그 숨막힐 듯한 향기에 어지러워하며 하연은 카드를 펴보았다.
[저와 결혼할 사람이 언니에게 관심있어하네요. 어쩌면 태윤오빠가 저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을 얻게 될지도 모르니 나오겠어요?]
간단한 약도와 함께 시간, 장소가 간략히 적혀있었다. 하연은 창백해진 얼굴로 아랫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저녁 7시. 피곤에 찌든 얼굴로 집으로 돌아온 태윤은 텅빈 침실을 보며 의아한 듯 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번 울리더니 이내 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야? 나 집에 왔는데..."
"오늘 일찍 오는 거였어? 나 미라 잠깐 만나러 나왔어. 2-3시간 안에 갈께."
"내가 데리러 갈까? 헤어질 떄 전화해."
"아니야. 알아서 갈께요. 피곤할 텐데 좀 쉬고 있어. 있다봐."
묘하게 흥분되어 있는 듯한 하연의 목소리를 자신의 피곤기 탓으로 돌린 태윤은 옷을 갈아입자마자 침대에 쓰러져 노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어서와요."
안내에 따라 차이나 레스토랑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룸으로 안내받은 하연은 입구에 서있는 검은 정장 차림새의 남자들을 보며 겁먹지 말자고 몇번을 다짐했다.
방으로 들어서자 검은색 차이나풍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비녀로 틀어올린 곤주와 검은색 정장을 잘 차려입은 날카롭게 생긴 30대 초반의 사내가 앉아있었다.
사내의 매서운 눈매나 곤주의 차가운 표정에 하연은 핸드백의 끈을 꼭 쥐었다. 당장 태윤이 잠들어있을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지만, 하연은 불안하게 의자 끝에 걸터앉았다.
"흠... 윤이사의 취향이 이랬었군요."
한시간여의 식사동안 침묵과 관찰을 견디어 낸 하연은 금세라도 쓰러져버릴 것만 같았다. 송글송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던 땀은 이제 이마에도 맺혀있었다.
"자리가 많이 불편하신가? 많이 들지도 않고 안색도 좋지 않아보이는데.."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하는 사내의 옆에 앉은 곤주가 하연을 보며 말했다.
"식사 입에 맞았어요? 임산부는 잘 먹어야하는데..."
무엇이라 말하고 싶은데 혀가 꼬이는 것처럼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식은땀 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떨려왔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건가요? 충분히 기다렸으니 이제 얘기하세요."
하연은 온힘을 짜내어 떨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얘기? 그저 당신이 궁금했을 뿐이요. 내 사랑스러운 약혼녀의 연극에 동참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연극? 하연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랫배를 콕콕 쑤시는 통증이 일자 하연은 거칠게 의자를 잡아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 가보겠어요."
문손잡이를 잡던 하연은 거칠게 올려붙이는 곤주의 손에 쓰러졌다.
"가기는.. 본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구."
"고마워요, 약혼자님. 이제부터는 단 둘이 있고 싶은데요."
"네가 원하신다면..."
곤주의 잔인한 표정에 사내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하연은 두려움에 떨며 뒤로 물러났다.
".......이러지마!!!!! 안돼!!!!!"
곤주의 머리에 꽂혀있는 비녀만큼이나 날카로운 구두의 굽이 하연에게로 내려왔다. 비명을 지르는 하연의 위로 수없이 쏟아지는 거친 발길.
"잘난 척 하지마. 가질 수 없다면 다 부셔버리겠다고 분명히 말했어!!!!!"
"하연아!!!"
잠이 들었던 태윤은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꿈 속에서 하연이 눈물 떄문에 눈도 뜨지 못한채 자신을 부르며 저 멀리서 오는데 아무리 가까이 가려해도 발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흠칫 놀라며 이마에 가득 맺힌 땀을 훔쳐내던 태윤은 요란하게 울려대는 벨소리에 흠칫 놀라며 전화를 받았다.
"네, 윤태윤입니다...........뭐? 어디야? 하연이는?"
이제 왕자님과의 로맨스도 결말을 향해 꺾였습니다. 이제부터 우울하고 슬픈 이야기가 계속 될 것 같은데 그래도 꾸준히 응원해주세요.
내일 꼭 한편 더 올릴게요. 추천과 답글 많이 부탁드려요~![왕자님과의 로맨스 [17] 검은 장미](https://bbs.nate.com/img/mark/theme_icon_14.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