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이 잘 맞아서 그런지 해인은 본격적으로 도서관에 들어 앉아 동훈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과제를 하다가 정신을 차리니 점심때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점심때라는 걸 깨닫고 나니 갑작스레 밀려오는 배고픔에 허덕여 동훈을 졸라 밥을 먹으로 나왔다.
"그래 그럼 뭐 먹을래?"
"오올~ 사주는 거에요?"
"간만에 공부 열심히 하니까 그 기념으로 사줄게."
"크크크.. 그럼, 난 오늘 돈가스 정식!"
"어? 정말?"
"비싸다고 내빼기 없기에요!"
"아니.. 그게 아니라 학교 밖에 나가서 사줄라고 했지.. 밖으로 나가서 먹자. 매일 먹고 앞으로 2년은 더 먹을 식당 밥인데.."
"어..그래도.... 그냥 학교 밥 먹어도 괜찮아요."
"씁! 길해인! 아까 이 오라비의 벌을 받겠다고 하지 않았어?"
"..웅.... 그럼 사양안할게요. 미천한 소녀 벌을 받아야 하겠지요?"
"그래, 가자."
해인은 자신을 신경써주는 동훈의 마음이 고마워서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뭐든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탓에 학교에서 먹어도 충분 했지만 오전의 일을 신경 쓰고 있는 동훈이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차마 끝까지 거절하지 않고 대신 밖에서 해인이 무척이나 좋아하는 일본식 돈가스를 먹기로 했다.
"베니건스나 TGI 가두 괜찮은데... 이걸로 괜찮아?"
"에이~ 오빠두 참.. 지갑에서 돈이 숨 좀 쉬게 해달래요? 이것보다 더 후한 벌을 주려구.."
"흠.. 이게 아직 정신을 못차렸나? 그래 돈이 숨 좀 쉬게 해달란다. 그 김에 하나 더 시켜주마. 팍팍 먹어라!"
"아니아니!! 괜찮아요 오빠! 헤헤헤."
"쿡쿡.. 그래. 잘 먹어라."
"네~."
동훈 덕에 좋아하는 일본식 돈가스를 실컷 먹고 나니 아까보다는 기분이 좀 좋아진 듯 했다. 점심을 먹고 후식으로 설레임까지 얹어주는 동훈에게 감사의 표현으로 해인표 애교를 떨어주었더니 여태까지 귀여운 것~ 하고 말하는 듯 했던 동훈의 표정이 뭐 씹은 듯 바뀌면서 황급히 책을 들고 수업에 들어간다며 가버렸다.
물론 곧바로 수업이어서 간 것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하필이면 그때 그런 얼굴을 하고 뛰어가는 동훈을 보니 웃기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그리고 고맙기도 한 마음에 푸하하- 웃으면서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그럼 작업 좀 들어가 볼까~'
동훈이 없는 동안 정리를 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과제 마무리에 들어갔지만 동훈이 책을 챙겨가고서 비어버린 자리를 맡아놓는 것을 깜박한 사이에 들어앉은 낯익은 얼굴 때문에 들고 있던 펜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씨.."
하필이면 떨어진 펜이 그 자리로 굴러가버린 건지....
이어폰을 끼고 한창 책을 읽던 그가 고개를 들자, 아니나 다를까 그 남자는 다름아닌 선우였다. 학교내에서 얼굴 한번 볼래도 보기 힘든 그가 어째서 도서관에 그것도 자기 바로 앞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건지....
어제부터 시작되는 우연아닌 우연에 해인은 눈가가 뜨거워지려고 했다.
'하늘도 참 무심하지.. 한번 보게 해달라고 빌 때는 머리카락 하나도 보기 힘들더니....'
마음을 접으려고 노력중인 지금은 왜이렇게 눈에 자주 띄는지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굳어지는 얼굴 근육을 움직여 억지로 웃으며 인사했다.
"어.. 공부하는 거야?"
"응.."
그도 해인을 보자 놀란 건지 어떤 건지 의외라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펜을 건네주다가 순간 짜증스럽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해인은 그의 눈빛이 '아직도 날 따라 다니는 거냐..' 고 묻는 것 같아서 자신이 먼저 앉아있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책상 위에 놓아두고 간 책을 뒤척이며 폈다.
이제와서 그에게 그런 종류의 오해따위 사고 싶지 않았다. 잊을려고 노력하는데.. 길다면 긴 그 동안의 짝사랑 이제 끝내고 싶은데.. 이런식의 마주침은 그녀의 가슴에 상처만을 남길 뿐이었다.
한참동안 책에 시선을 고정시키고서 공부하는 척 책장을 넘기다가 흘낏 선우를 바라보니 그는 신경도 안쓰는 듯 다시 이어폰을 끼고서 책을 보고 있었다.
해인은 그가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않기를 바랬으면서도 막상 정말로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자 섭섭해지는 자신이 너무 우스웠다.
'바보같이.... 혼자 흥분하고 그래.'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고서 책을 바라보면서 딴 생각에 젖어 있는 데 갑자기 어깨를 툭툭- 치는 느낌에 고개를 들어보니 선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왜..?"
"잠깐 나가자."
"응..? 응..."
따라오라며 손짓하는 선우를 쫒아 도서관 내에 있는 휴게실로 들어갔다. 선우가 먼저 자신에게 말을 걸어 나오라고 한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에 마음을 정리한다고 마음 먹은 뒤였어도 두근 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먼저 의자에 앉은 선우를 보고 어디에 앉아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선우의 맞은 편 한칸 옆 자리에 앉아서 그를 바라보았다. 예전 같으면 그의 옆에는 여자들로 우글우글 해서 해인이 앉을 자리 조차 없었겠지만 오늘따라 휴게실에는 해인과 선우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이 단 한명조차 없었다.
"열쇠.. 언제 갖다 놓은 거야?"
"응.. ? 음....3달 쯤..전에?"
"...왜 말 안했어?"
"아..깜박 했어. 열쇠.. 찾았니? 미안.. "
"..아냐."
원체 둘 사이에 대화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던 터라, 아무데서나 말 잘하는 해인이었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막막하기만 했다. 게다가 상대가 이제 마음을 정리하려고 한 근 2년간의 짝사랑 상대이니...... 말 한마디 하는 게 너무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이렇게 아무 말도 안하고 뻘쭘하게 앉아 있다가 자리로 돌아가는 것도 우스운 것 같아서 억지로나마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입을 열었다.
아마도 선우를 쫒아다니는 여자애들을 말하는 듯 했다. 적어도 학교에서는 해인때문에라도 선우를 쫒아오는 애들이 많지 않았는 데 최근들어 해인이 선우를 포기했다는 말이 돌기 시작하면서 예전의 그 극성맞은 여자애들이 다시 선우를 쫒아다니는 듯 했다. 연예인은 아니지만.. 선우 정도라면 충분히 여자애들이 따라다닐 만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불쑥 도서관엘 오다니.. 어지간히 귀찮았으면 한학기에 한번 올까 말까한 도서관에 이렇게 왔을까 싶어 괜히 웃음이 나와서 자신도 모르게 장난스럽게 말을 뱉고 말았다.
말을 하고 보니 상대는 평소 같이 놀던 사람이 아니라 선우라는 사실을 깨닫고서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원체 잘난 인생을 살아와서 그런지 자신을 조금이라도 우습게 얘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성질부터 버럭 내는 선우의 성격대로라면 기분 나쁨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쏘아보며 화를 낼 게 분명했기 때문에 해인은 아무 생각없이 한 말실수에 가슴이 덜컹 했다.
마음을 정리한다고는 했지만..이런 말 실수로 그의 뇌리에 남고 싶지는 않은데....
"......그거, 좋은 뜻이냐?"
한참을 뚫어져라 해인을 바라보던 선우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놀란 해인이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지만 그다지 화난 기색이 없는 걸로 보아 굳이 신경쓰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응, 좋은...뜻이지."
해인이 더듬 더듬 대답하자 선우는 피식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덩달아 일어난 해인을 두고서 자판기에 돈을 넣고 오렌지 쥬스 2캔을 뽑아 건네주었다.
"자, 좋은 뜻의 말을 해준 답례다."
"..어? ... 어..."
정말 의외인 선우의 행동에 해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적어도 그가 화가 난 것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어디.. 아파?"
그래도 뜻밖의 상황에 머리가 마음대로 돌아가버린 탓일까, 의도하지 않게 해인의 입은 자꾸만 움직여버렸다.
"..뭐?"
"..아..아니.....갑자기 안하던 행동을 다 하고... 웃기잖...아.. 하하하."
"......"
이번에는 눈에 띄게 굳어버린 선우의 얼굴을 보자 해인은 자신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을 만큼 저주했다. 언제부터 선우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이가 되었다구..!! 게다가 이렇게 말해버리면 그동안 내숭 떨었던 것도 다 들킬지도 모르는데....!!!!
정말이지 선우와의 기억의 끝은 조용히 혼자서 잊어 가고 싶어서 '더 이상 입을 열지 말아야지..' 하면서 두번 세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금방 풀어질 성격이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여태동안 선우 앞에서 그 내숭을 떨 수 있었는 지.. 새삼스레 얼마전 까지의 자신의 행동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내가 평소하고 다르냐?"
"...아니 뭐, 꼭 그렇 다는 건 아니고.."
"그럼? 뭔데? 꼭 그렇다는 건 아니다는 말은 어쨌든 다르긴 다르다는 소리네. 아냐?"
"..응. 좀 다르긴 해."
평소같으면 잔뜩 성질내고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고서는 뒤도 안돌아 보고 가버려야 그게 모두들 아는 정선우인데, 그렇지 않고 꼬치꼬치 말을 하는 선우의 태도에 해인은 확실히 나사가 풀린 것이 분명했다. 상황을 수습하려면 그냥 얼머부리면 될 것을 왜 자꾸 입을 나불거린 건지...
계속해서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는 선우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자신도 모르게 헤헤- 하고 웃어버렸다. 정말 긴장감도 없는 얼굴로, 멍청하기 그지 없는 얼굴로 웃어버렸다.
해인의 웃음이 먹힌 건지 어쨌든 굳어있던 선우의 얼굴이 풀린 것으로 봐서는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이번에 선우의 얼굴은 다른 의미로 해인의 가슴을 덜컹하게 만들었다.
낯선 사람을 보듯, 이상한 물건을 보듯 희한하다는 눈길로 자신을 훑어보는 눈길에 해인은 얼마전까지의 '내숭 500단' 이 떠올랐다.
'안돼! 이제는 정말 나사를 조여야 해! 갑작스런 상황에 나사가 풀려버렸잖아!! 안돼, 이제 그만!'
해인의 머리속으로는 저 멀리서 드라이버를 들고 뛰어와 거의 다 풀려서 달랑달랑하는 나사를 조이는 작은 해인들의 영상이었다. 정말로 꽉, 꽉 나사를 조이고 조이는 영상이 몇 백 만번 쯤 리플레이 되었을까.. 선우가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며 자신을 툭 치는 순간에야 겨우 '작은 해인들 나사 조이기' 영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건 왜?"
"번호 입력해."
"....무슨 번호?"
"너 핸드폰도 없냐? 보면 몰라?"
"....알아서 뭐하게?........!!!!"
이쯤 되면 막가는 입이였다. 이제는 척추반응인지 입이 아주 제멋대로 움직이는 탓에 해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이젠 내가 미친거지.. 다시 리플레이! 나사 조여야 해!! 아악.'
열심히 조여놓은 나사는 선우의 핸드폰을 바라보면서 그대로 튕겨 나갔는 지, 이제 해인의 입은 조절조차 되지 않는 듯 했다.
"....전화하려고.."
"새삼스레..언제 전화 했다고.........."
"....새삼스레 알고싶어졌다. 됐냐?"
"....지나간 버스 타려고 그러냐?"
"......"
'....제대로 미쳤다.'
..이쯤 되니 내숭이고 뭐고 포기 상태에 들어섰다. 주인의 의지를 마음껏 배반하는 주둥아리가 너무 미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한 구석에서 ' 잘한다! 이제 더이상 눈치 보지 말아! 저놈은 재수없는 천하의 바람둥이일 뿐이야! 당해도 싸다고! ' 하고 외치는 작은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 이 놈은 이 정도의 말 들어도 싸다고. 내가 여태동안 이 놈때문에 흘린 눈물을 생각하면..!'
'아냐.. 그래도 난 예전의 그런 마음 같은거 정리하기로 마음 먹었는 걸.. 이대로 계속하면 나만 더 상처받을 뿐이야...'
"지나간 버스 뭐 볼게 있다고 이제와서 타겠냐? 뭐 대단한 버스도 아니고.. 아무나 타는 버스에다가. 게다가 내가 뭐가 아쉬워서 기껏 버스정도에 미련을 두냐? 난 대중 교통은 택시, 그것도 모범 택시 이외에는 취급 안한다."
-툭!
...그리고, 드라이버를 갖다대는 순간 나사는 결국 잠시를 못버티고 그대로 떨어져 버렸다.
"....야!"
"....왜?"
"그럼 내가 별 볼일 없는 버스다 이거냐! 씨발!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못하는 소리가 없어! 내가 너한테 2년 동안 목맸다고 이제는 만만하게 보는 거야? 이게 어따대고 지랄이야 지랄은!! 내가 너 싸가지 없는 거 알아도 그놈의 반반한 얼굴때문에 참고 살았는데, 이젠 나도 못참아! 나도 내가 뭐가 부족해서 너같은 놈한테 지난 아까운 세월을 낭비했는지 모르겠다! 재수없어!! 아아악!! 이 씨바러스한 놈아!! 넌 언젠가 그 아무나 타는 버스에 깔려 뒈질거다! 이 발정난 개.."
"해인아!"
........
'-발정난 개 같은 놈아!' 라는 말을 채 끝내기 전 재빨리 새 나사를 채워 준 건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으로 온 동현 오빠였다. 해인이 자리에 없자 찾아볼 겸 휴게실에 왔다가 선우를 향한 해인의 발작(?)을 목격하고 나사를 채워준 고마운 오빠.
'..오빠..좀 만 더 일찍 오지....'
동현의 등장으로 제정신을 차린 해인은 차마 선우를 바라볼 수 없어 그대로 휴게실에서 뛰쳐나가 열람실에 있던 짐을 챙겨가지고 재빨리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그 자리에 1분이라도 더 있다간 이미 엎어진 물에 미끄러져 또 한번 사고를 칠 것만 같았다.
"해인아!"
"어마!!!"
뒤따라온 동현이 해인의 어깨를 잡자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해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려 버렸다.
"에휴... 어쩌다 그렇게까지 사고를 쳤냐."
"잉..몰라요 오빠.. 5분만 빨리 오지..."
"나도 그럴 걸 후회하는 중이다. 길해인, 그 동안 내숭 떨던거 오늘로 완전 쫑났구나."
"......아앙...미치겠다. 적어도 끝은 이렇게 내고 싶지 않았는데... 다 그 놈 때문이에요! 오늘따라 이렇게까지 부딪힐 게 뭐람.."
"선우 걔 아직 상황 파악이 안되는 지 너 뛰쳐나가고 나서도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있더라."
"아아악! 걔 얘기 이제 그만! 히잉.. 오빠, 과제는 내일 다시 해요. 나 이제 집에 갈래. 이따 전화할게요!!"
해인은 책을 줍자 마자 엄청나게 빨개진 얼굴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가버렸고 동훈은 그런 해인의 뒷모습을 보며 '쯧쯧-' 혀를 차며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다시 도서관으로 되돌아 갔다.
바람이 머무르는 곳...04
호흡이 잘 맞아서 그런지 해인은 본격적으로 도서관에 들어 앉아 동훈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과제를 하다가 정신을 차리니 점심때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점심때라는 걸 깨닫고 나니 갑작스레 밀려오는 배고픔에 허덕여 동훈을 졸라 밥을 먹으로 나왔다.
"그래 그럼 뭐 먹을래?"
"오올~ 사주는 거에요?"
"간만에 공부 열심히 하니까 그 기념으로 사줄게."
"크크크.. 그럼, 난 오늘 돈가스 정식!"
"어? 정말?"
"비싸다고 내빼기 없기에요!"
"아니.. 그게 아니라 학교 밖에 나가서 사줄라고 했지.. 밖으로 나가서 먹자. 매일 먹고 앞으로 2년은 더 먹을 식당 밥인데.."
"어..그래도.... 그냥 학교 밥 먹어도 괜찮아요."
"씁! 길해인! 아까 이 오라비의 벌을 받겠다고 하지 않았어?"
"..웅.... 그럼 사양안할게요. 미천한 소녀 벌을 받아야 하겠지요?"
"그래, 가자."
해인은 자신을 신경써주는 동훈의 마음이 고마워서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뭐든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탓에 학교에서 먹어도 충분 했지만 오전의 일을 신경 쓰고 있는 동훈이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차마 끝까지 거절하지 않고 대신 밖에서 해인이 무척이나 좋아하는 일본식 돈가스를 먹기로 했다.
"베니건스나 TGI 가두 괜찮은데... 이걸로 괜찮아?"
"에이~ 오빠두 참.. 지갑에서 돈이 숨 좀 쉬게 해달래요? 이것보다 더 후한 벌을 주려구.."
"흠.. 이게 아직 정신을 못차렸나? 그래 돈이 숨 좀 쉬게 해달란다. 그 김에 하나 더 시켜주마. 팍팍 먹어라!"
"아니아니!! 괜찮아요 오빠! 헤헤헤."
"쿡쿡.. 그래. 잘 먹어라."
"네~."
동훈 덕에 좋아하는 일본식 돈가스를 실컷 먹고 나니 아까보다는 기분이 좀 좋아진 듯 했다. 점심을 먹고 후식으로 설레임까지 얹어주는 동훈에게 감사의 표현으로 해인표 애교를 떨어주었더니 여태까지 귀여운 것~ 하고 말하는 듯 했던 동훈의 표정이 뭐 씹은 듯 바뀌면서 황급히 책을 들고 수업에 들어간다며 가버렸다.
물론 곧바로 수업이어서 간 것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하필이면 그때 그런 얼굴을 하고 뛰어가는 동훈을 보니 웃기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그리고 고맙기도 한 마음에 푸하하- 웃으면서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그럼 작업 좀 들어가 볼까~'
동훈이 없는 동안 정리를 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과제 마무리에 들어갔지만 동훈이 책을 챙겨가고서 비어버린 자리를 맡아놓는 것을 깜박한 사이에 들어앉은 낯익은 얼굴 때문에 들고 있던 펜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씨.."
하필이면 떨어진 펜이 그 자리로 굴러가버린 건지....
이어폰을 끼고 한창 책을 읽던 그가 고개를 들자, 아니나 다를까 그 남자는 다름아닌 선우였다. 학교내에서 얼굴 한번 볼래도 보기 힘든 그가 어째서 도서관에 그것도 자기 바로 앞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건지....
어제부터 시작되는 우연아닌 우연에 해인은 눈가가 뜨거워지려고 했다.
'하늘도 참 무심하지.. 한번 보게 해달라고 빌 때는 머리카락 하나도 보기 힘들더니....'
마음을 접으려고 노력중인 지금은 왜이렇게 눈에 자주 띄는지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굳어지는 얼굴 근육을 움직여 억지로 웃으며 인사했다.
"어.. 공부하는 거야?"
"응.."
그도 해인을 보자 놀란 건지 어떤 건지 의외라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펜을 건네주다가 순간 짜증스럽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해인은 그의 눈빛이 '아직도 날 따라 다니는 거냐..' 고 묻는 것 같아서 자신이 먼저 앉아있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책상 위에 놓아두고 간 책을 뒤척이며 폈다.
이제와서 그에게 그런 종류의 오해따위 사고 싶지 않았다. 잊을려고 노력하는데.. 길다면 긴 그 동안의 짝사랑 이제 끝내고 싶은데.. 이런식의 마주침은 그녀의 가슴에 상처만을 남길 뿐이었다.
한참동안 책에 시선을 고정시키고서 공부하는 척 책장을 넘기다가 흘낏 선우를 바라보니 그는 신경도 안쓰는 듯 다시 이어폰을 끼고서 책을 보고 있었다.
해인은 그가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않기를 바랬으면서도 막상 정말로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자 섭섭해지는 자신이 너무 우스웠다.
'바보같이.... 혼자 흥분하고 그래.'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고서 책을 바라보면서 딴 생각에 젖어 있는 데 갑자기 어깨를 툭툭- 치는 느낌에 고개를 들어보니 선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왜..?"
"잠깐 나가자."
"응..? 응..."
따라오라며 손짓하는 선우를 쫒아 도서관 내에 있는 휴게실로 들어갔다. 선우가 먼저 자신에게 말을 걸어 나오라고 한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에 마음을 정리한다고 마음 먹은 뒤였어도 두근 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먼저 의자에 앉은 선우를 보고 어디에 앉아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선우의 맞은 편 한칸 옆 자리에 앉아서 그를 바라보았다. 예전 같으면 그의 옆에는 여자들로 우글우글 해서 해인이 앉을 자리 조차 없었겠지만 오늘따라 휴게실에는 해인과 선우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이 단 한명조차 없었다.
"열쇠.. 언제 갖다 놓은 거야?"
"응.. ? 음....3달 쯤..전에?"
"...왜 말 안했어?"
"아..깜박 했어. 열쇠.. 찾았니? 미안.. "
"..아냐."
원체 둘 사이에 대화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던 터라, 아무데서나 말 잘하는 해인이었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막막하기만 했다. 게다가 상대가 이제 마음을 정리하려고 한 근 2년간의 짝사랑 상대이니...... 말 한마디 하는 게 너무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이렇게 아무 말도 안하고 뻘쭘하게 앉아 있다가 자리로 돌아가는 것도 우스운 것 같아서 억지로나마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입을 열었다.
"왠일로 도서관에 다 있어? 예전에는 잘 안왔잖아."
"....너무 귀찮게 굴길래... 오늘은 좀.. 피곤해서."
"그래? 하기사.. 너가 도서관에 있을거라고는 생각 안할테니까 여기서 널 찾진 않겠....."
아마도 선우를 쫒아다니는 여자애들을 말하는 듯 했다. 적어도 학교에서는 해인때문에라도 선우를 쫒아오는 애들이 많지 않았는 데 최근들어 해인이 선우를 포기했다는 말이 돌기 시작하면서 예전의 그 극성맞은 여자애들이 다시 선우를 쫒아다니는 듯 했다. 연예인은 아니지만.. 선우 정도라면 충분히 여자애들이 따라다닐 만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불쑥 도서관엘 오다니.. 어지간히 귀찮았으면 한학기에 한번 올까 말까한 도서관에 이렇게 왔을까 싶어 괜히 웃음이 나와서 자신도 모르게 장난스럽게 말을 뱉고 말았다.
말을 하고 보니 상대는 평소 같이 놀던 사람이 아니라 선우라는 사실을 깨닫고서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원체 잘난 인생을 살아와서 그런지 자신을 조금이라도 우습게 얘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성질부터 버럭 내는 선우의 성격대로라면 기분 나쁨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쏘아보며 화를 낼 게 분명했기 때문에 해인은 아무 생각없이 한 말실수에 가슴이 덜컹 했다.
마음을 정리한다고는 했지만..이런 말 실수로 그의 뇌리에 남고 싶지는 않은데....
"......그거, 좋은 뜻이냐?"
한참을 뚫어져라 해인을 바라보던 선우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놀란 해인이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지만 그다지 화난 기색이 없는 걸로 보아 굳이 신경쓰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응, 좋은...뜻이지."
해인이 더듬 더듬 대답하자 선우는 피식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덩달아 일어난 해인을 두고서 자판기에 돈을 넣고 오렌지 쥬스 2캔을 뽑아 건네주었다.
"자, 좋은 뜻의 말을 해준 답례다."
"..어? ... 어..."
정말 의외인 선우의 행동에 해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적어도 그가 화가 난 것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어디.. 아파?"
그래도 뜻밖의 상황에 머리가 마음대로 돌아가버린 탓일까, 의도하지 않게 해인의 입은 자꾸만 움직여버렸다.
"..뭐?"
"..아..아니.....갑자기 안하던 행동을 다 하고... 웃기잖...아.. 하하하."
"......"
이번에는 눈에 띄게 굳어버린 선우의 얼굴을 보자 해인은 자신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을 만큼 저주했다. 언제부터 선우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이가 되었다구..!! 게다가 이렇게 말해버리면 그동안 내숭 떨었던 것도 다 들킬지도 모르는데....!!!!
정말이지 선우와의 기억의 끝은 조용히 혼자서 잊어 가고 싶어서 '더 이상 입을 열지 말아야지..' 하면서 두번 세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금방 풀어질 성격이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여태동안 선우 앞에서 그 내숭을 떨 수 있었는 지.. 새삼스레 얼마전 까지의 자신의 행동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내가 평소하고 다르냐?"
"...아니 뭐, 꼭 그렇 다는 건 아니고.."
"그럼? 뭔데? 꼭 그렇다는 건 아니다는 말은 어쨌든 다르긴 다르다는 소리네. 아냐?"
"..응. 좀 다르긴 해."
평소같으면 잔뜩 성질내고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고서는 뒤도 안돌아 보고 가버려야 그게 모두들 아는 정선우인데, 그렇지 않고 꼬치꼬치 말을 하는 선우의 태도에 해인은 확실히 나사가 풀린 것이 분명했다. 상황을 수습하려면 그냥 얼머부리면 될 것을 왜 자꾸 입을 나불거린 건지...
계속해서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는 선우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자신도 모르게 헤헤- 하고 웃어버렸다. 정말 긴장감도 없는 얼굴로, 멍청하기 그지 없는 얼굴로 웃어버렸다.
해인의 웃음이 먹힌 건지 어쨌든 굳어있던 선우의 얼굴이 풀린 것으로 봐서는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이번에 선우의 얼굴은 다른 의미로 해인의 가슴을 덜컹하게 만들었다.
낯선 사람을 보듯, 이상한 물건을 보듯 희한하다는 눈길로 자신을 훑어보는 눈길에 해인은 얼마전까지의 '내숭 500단' 이 떠올랐다.
'안돼! 이제는 정말 나사를 조여야 해! 갑작스런 상황에 나사가 풀려버렸잖아!! 안돼, 이제 그만!'
해인의 머리속으로는 저 멀리서 드라이버를 들고 뛰어와 거의 다 풀려서 달랑달랑하는 나사를 조이는 작은 해인들의 영상이었다. 정말로 꽉, 꽉 나사를 조이고 조이는 영상이 몇 백 만번 쯤 리플레이 되었을까.. 선우가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며 자신을 툭 치는 순간에야 겨우 '작은 해인들 나사 조이기' 영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건 왜?"
"번호 입력해."
"....무슨 번호?"
"너 핸드폰도 없냐? 보면 몰라?"
"....알아서 뭐하게?........!!!!"
이쯤 되면 막가는 입이였다. 이제는 척추반응인지 입이 아주 제멋대로 움직이는 탓에 해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이젠 내가 미친거지.. 다시 리플레이! 나사 조여야 해!! 아악.'
열심히 조여놓은 나사는 선우의 핸드폰을 바라보면서 그대로 튕겨 나갔는 지, 이제 해인의 입은 조절조차 되지 않는 듯 했다.
"....전화하려고.."
"새삼스레..언제 전화 했다고.........."
"....새삼스레 알고싶어졌다. 됐냐?"
"....지나간 버스 타려고 그러냐?"
"......"
'....제대로 미쳤다.'
..이쯤 되니 내숭이고 뭐고 포기 상태에 들어섰다. 주인의 의지를 마음껏 배반하는 주둥아리가 너무 미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한 구석에서 ' 잘한다! 이제 더이상 눈치 보지 말아! 저놈은 재수없는 천하의 바람둥이일 뿐이야! 당해도 싸다고! ' 하고 외치는 작은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 이 놈은 이 정도의 말 들어도 싸다고. 내가 여태동안 이 놈때문에 흘린 눈물을 생각하면..!'
'아냐.. 그래도 난 예전의 그런 마음 같은거 정리하기로 마음 먹었는 걸.. 이대로 계속하면 나만 더 상처받을 뿐이야...'
"지나간 버스 뭐 볼게 있다고 이제와서 타겠냐? 뭐 대단한 버스도 아니고.. 아무나 타는 버스에다가. 게다가 내가 뭐가 아쉬워서 기껏 버스정도에 미련을 두냐? 난 대중 교통은 택시, 그것도 모범 택시 이외에는 취급 안한다."
-툭!
...그리고, 드라이버를 갖다대는 순간 나사는 결국 잠시를 못버티고 그대로 떨어져 버렸다.
"....야!"
"....왜?"
"그럼 내가 별 볼일 없는 버스다 이거냐! 씨발!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못하는 소리가 없어! 내가 너한테 2년 동안 목맸다고 이제는 만만하게 보는 거야? 이게 어따대고 지랄이야 지랄은!! 내가 너 싸가지 없는 거 알아도 그놈의 반반한 얼굴때문에 참고 살았는데, 이젠 나도 못참아! 나도 내가 뭐가 부족해서 너같은 놈한테 지난 아까운 세월을 낭비했는지 모르겠다! 재수없어!! 아아악!! 이 씨바러스한 놈아!! 넌 언젠가 그 아무나 타는 버스에 깔려 뒈질거다! 이 발정난 개.."
"해인아!"
........
'-발정난 개 같은 놈아!' 라는 말을 채 끝내기 전 재빨리 새 나사를 채워 준 건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으로 온 동현 오빠였다. 해인이 자리에 없자 찾아볼 겸 휴게실에 왔다가 선우를 향한 해인의 발작(?)을 목격하고 나사를 채워준 고마운 오빠.
'..오빠..좀 만 더 일찍 오지....'
동현의 등장으로 제정신을 차린 해인은 차마 선우를 바라볼 수 없어 그대로 휴게실에서 뛰쳐나가 열람실에 있던 짐을 챙겨가지고 재빨리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그 자리에 1분이라도 더 있다간 이미 엎어진 물에 미끄러져 또 한번 사고를 칠 것만 같았다.
"해인아!"
"어마!!!"
뒤따라온 동현이 해인의 어깨를 잡자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해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려 버렸다.
"에휴... 어쩌다 그렇게까지 사고를 쳤냐."
"잉..몰라요 오빠.. 5분만 빨리 오지..."
"나도 그럴 걸 후회하는 중이다. 길해인, 그 동안 내숭 떨던거 오늘로 완전 쫑났구나."
"......아앙...미치겠다. 적어도 끝은 이렇게 내고 싶지 않았는데... 다 그 놈 때문이에요! 오늘따라 이렇게까지 부딪힐 게 뭐람.."
"선우 걔 아직 상황 파악이 안되는 지 너 뛰쳐나가고 나서도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있더라."
"아아악! 걔 얘기 이제 그만! 히잉.. 오빠, 과제는 내일 다시 해요. 나 이제 집에 갈래. 이따 전화할게요!!"
해인은 책을 줍자 마자 엄청나게 빨개진 얼굴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가버렸고 동훈은 그런 해인의 뒷모습을 보며 '쯧쯧-' 혀를 차며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다시 도서관으로 되돌아 갔다.
"...아무래도 과제는 내가 마무리 해야 겠군."
저대로 당분간은 회생 불능일게 뻔한 해인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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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올립니다..ㅎㅎ
아르바이트 출근하자 마자 한편 깔끔하게 올려요..ㅋㅋ
언제나 제 부족한 글 재밌게 읽어주시고 리플 달구 추천해주시는 분들
너무 감사드려요. 제가 잘 쓰지도 못하고, 많이 올리지도 못하는데..
꾸준히 좋아라~해주시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다시 글, 열심히 쓸게요^ㅂ^)*
오늘은 아침 날씨는 참 좋은데 바람이 넘 쌀랑하죠?
정말 가을이 짧아지려는 건지 예전보다는 더 빨리 추워지는 거 같아요.
추운거 싫은데.. 전 무지 게을러서 추울 땐 집에서 꼼짝도 안하거든요.ㅋㅋ
이불로 굴 만들어서 그 안에 가만히 잠만 잔다는...ㅎㅎ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