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은데 곤두와나 성안에서는 작은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무사히 살아돌아온 아이리스와 또 기적적으로 살아난 레오르도의 부녀상봉을 기꺼이 축하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버서커들의 난동이 있던 그 공포스런 밤 이후에 곤두와나에 살아남은 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 즐거운 술자리는 조촐하기 그지 없다.
이 가운데 동카스는 기쁜 마음과 서글픈 감정에 착찹한 심정까지 더해져 아예 술을 항아리째로 들이붓고 있었다. 과연 난쟁이족이라 그런지 그는 혼자서 족히 열동이나 되는 술을 비우고도 끄덕이 없다. 되려 괜히 그의 옆자리에 앉았던 베르베르가 된통 술을 마셔 눈이 풀리고 혀가 꼬이니 그 꼬락서니가 정말 가관이다. 베르베르는 거나하게 술이 좀 들어가자 도대체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인간들이 부르는 남녀상열지사의 유행가를 아주 신나게 불러제끼고 있는게 아닌가? 이런 그의 모습은 루씨도 처음 보는지라 춤까지 덩실덩실 춰대는 베르베르를 입을 떡 벌리고 쳐다보고있었다. 왁자지껄한 가운데 동카스가 술을 한잔 가득 담아 루씨에게 권한다.
"이보시게 젊은이, 정말 고마우이. 우리 아이리스님을 이렇게 무사히 돌봐주었으니 말일세."
루씨는 술자리에 익숙지 않아 정신이 없다. 아까 한잔 마신게 좀 컸나 보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눈앞이 아른아른하다. 그래도 권하는 술이라 사양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들이키는데 동카스가 갑자기 루씨의 옆에 놓여진 중검을 덥썩 집어들었다. 정신이 번쩍 든 루씨가 검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가 술기운에 땅만 짚고 말았다. 당황하는 루씨에게 동카스가 얼굴을 들이민채 술냄새를 풍기며 말한다.
"내 보기에 이 검이 보통 검이 아닌 것 같으이. 내 구경좀 해봐도 되겠지?"
"네? 네..."
루씨가 얼떨결에 허락한다.
동카스는 자신의 키에 두배나 되는 검을 들고는 찬찬히 살펴본다. 아까까지의 장난스러운 표정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다. 한참 검을 살펴보던 동카스가 중검을 두손으로 받들어 번쩍 머리위로 쳐들더니 대뜸 레오르도에게 고함을 지른다.
"이보게 레오르도 양반~! 이 검이 어떠한 것 같소?"
갑작스런 고함소리에 사람들이 일제히 동카스를 주시하는데 술이 얼큰한 베르베르만이 계속해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덩실덩실 춤추고 있다. 은은한 불빛이 레오르도의 얼굴에 아른거리는데 그가 담담히 대답한다.
"시골 변두리 마을에 일개 병사가 검에 대해서 뭘 알겠소만 그런 내가 척 보기에도 확실히 보통 검은 아닌 것 같소이다."
동카스는 중검을 바닥에 공손히 놓고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보기엔 이 검은 바로 정복왕 폴크스겐님의 검이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바로 그 대륙통일 전쟁 당시 정복왕께서 전장을 가르시던 바로 그 검이란 말이오"
루씨가 슬그머니 중검을 끌어다 자신 뒤에 놓는다. 이 작달 만한 노인네가 자신의 중검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하고 있으니 과히 기분이 좋질 않다.
루씨가 중검을 가져가자 동카스가 버럭 화를 낸다.
"이보게 젊은이 ! 어떻게 그 검을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검은 예전에 내가 모시던 정복왕님의 검이니 어서 돌려주시게!"
무슨 날강도도 아니고 대뜸 검을 내놓으라니 루씨는 기가 막혔다. 막 뭐라 대꾸하려 하는데 레오르도가 나선다.
"이보시게 동카스 성주! 이러한 종류의 검이 필시 흔치 않은 것은 확실하지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오. 이 종류의 검은 고대인들의 연금 비법으로 만들어진 특수합금으로 제작된 것으로 용들을 사냥할 목적으로 특별하게 만들어진 것이오."
"오~호! 아주 잘 아시는구랴"
동카스가 정색을 하며 대꾸하는데 레오르도가 얘기를 계속한다.
"용사냥용 검 얘기는 무기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병사라면 누구나 아는 것이고 또 정복왕께서 젊은 시절 용사냥꾼이었다는 건 이 나라 백성이라면 모두 알고 있소. 그런데 이런 검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정복왕의 검이라 내놓으라는 건 가당치도 않소"
"하하~! 내가 뭐라 했더랬습니까? 난 아뭇 소리도 안했소. 정복왕님의 검이 시신과 함께 묻힌건 나도 잘 아오. 난 그냥 이 젊은이의 검이 너무 좋아 탐이 나길래 농을 한 번 해본 것 뿐이오."
레오르도의 반응이 예상외로 강경하자 동카스가 은근슬쩍 얼버무리면서 다시 술동이를 찾아 들이킨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루씨는 울컥하려다 뻘쭘해져 다시 자리에 앉았다. 베르베르는 여전히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농을 한 것이라 했지만 동카스는 사실 레오르도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일부러 도발한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의 철심법을 다루는 의술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동카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온통 주변에 수수께끼의 인물투성이이다. 레오르도의 철심법은 물론이거니와 저 얼간이 같은 베르베르란 남자는 엄청난 전투력에 신비로운 치유능력까지 갖추었다. 게다가 이 호리호리한 루씨라는 청년은 보통 사람은 가눌 수도 없다는 대용검을 지니고 있는게 아닌가? 동카스가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해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자신의 팔짱을 낀다. 돌아다보니 아이리스이다.
"앗! 아... 아이리스양~!"
순식간에 동카스의 얼굴이 홍당무가 된다.
"동카스님. 그만 화푸시고 어서 술이나 한잔 더 드세요."
아이리스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하자 동카스는 정신이 몽롱해져 연신 싱글벙글하며 무조건 고개만 끄떡인다.
"아... 예!예! 아이리스양이 그러시라면 당연히 그래얍지요. 하하하!!!"
동카스가 다시 벌컥벌컥 술을 들이키자 아이리스가 루씨를 쳐다보곤 혀를 낼름 내보이더니 살짝 미소를 지어보인다. 아이리스는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로 차츰 예전의 상냥하면서도 새침하고 털털한 성격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루씨는 왠지 싱숭생숭해져 자리를 빠져나왔다.
달은 차고 밤은 더욱 깊어 새벽으로 치닫는데 사람들은 하나 둘 곪아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한 성내에 또각또각 조용조용한 말발굽 소리가 울리더니 남녀 한쌍이 성문 빗장 앞에 선다.
"그래도 이렇게 가는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아요."
"어쩔 수 없다. 아이리스."
레오르도가 아이리스를 바라보곤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가는건 정말 도리가 아닌 것 같아요."
"얘기했지 않느냐 아이리스! 절대 안된단 말이다."
레오르도가 발끈 성을 냈다. 자신에게 화를 내는 일은 절대 없던 당신인 터라 아이리스는 당황했다. 레오르도는 베르베르에게 자초지정을 들어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반대편 그 어딘가에 신을 보좌하는 천사들이 사는 세계인 천공계가 있었다. 천공계는 수석 천사장인 위가르드의 다스림을 받고 있었지만 그들 세계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커다란 다른 축이 있었다. 바로 신의 말씀을 천사들에게 전하는 성녀이다. 왜 그러한지는 알 수 없으나 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성녀는 인간들, 그것도 여자 중에서만 나타났으며 그러므로 성녀의 자리는 대대로 인간의 여자 중에서만 간택되었다.
레오르도는 기가 막혔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저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자신의 어린 딸이 바로 신에게 선택된 성녀라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말이 안된다. 하나님은 아이리스가 얼마나 안타까운 아이인지 정말 모르는 모양이다. 레오르도는 여기까지 생각하니 괜시리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게다가 그 얘기인즉슨 너무나도 허무맹랑하다. 아무렴 천사들이 널리고 널렸는데 하나님 한 분 말씀 들을자가 없어서 너를 찾겠느냐? 설령 정말 그렇다쳐도 그것은 그들의 문제. 하늘에서의 일 때문에 지상에 있는 우리까지 희생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서늘한 새벽공기가 아이리스의 뺨을 스치운다. 아이리스는 레오르도와 함께 이제는 아무도 지키는 자 없는 곤두와나 성문의 빗장을 열었다.
"아이리스님~!"
낭랑하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아이리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새벽달빛의 어둠속에서 반짝이는 루씨의 두눈이 보였다.
"루씨님!"
아이리스가 그를 부르는 호칭은 어느새 그동안 루씨가 되어있었다. 그의 이름만 부르고 차마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아이리스를 대신해 레오르도가 나선다.
"잡으려는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말 게~ 젊은이."
"아이리스님은 가실 수 없습니다."
루씨가 단호하게 말하자 레오르도가 답한다.
"가고 안가고는 자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설령 자네가 신의 영역에 속하는 존재라 해도 말일세."
자신의 말에 루씨의 표정이 한치의 변화도 없자 레오르도는 허리에 찬 검을 뽑아들었다.
"정녕 우리를 잡을 생각이라면 나를 먼저 쓰러뜨려야 할 것이네."
루씨가 잠깐 생각하더니 자신도 허리에 찬 장검을 빼어든다.
"정말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지요."
루씨가 가벼운 발놀림으로 검을 짓쳐 들어갔다. 곧 레오드로의 옷깃에 검이 닿을 찰나 루씨는 귓가에 엄청난 공기의 파열음을 느끼고는 다른 한손으로 황급히 중검을 뽑아 등 뒤로 메듯 세웠다.
루씨는 원래 가볍게 레오르도를 제압하여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뒷편에서 갑작스레 날아든 예기치 못한 엄청난 공격에 중검까지 뽑아든 것이다.
"떵~!"
큰 종소리를 내며 중검이 울리고 루씨는 팔이 저려왔다. 몸을 비틀어 뒤를 돌아보자 푸르스름한 기운에 둘러싸인 망치가 동카스의 손으로 부메랑처럼 돌아간다. 난쟁이 성주 동카스가 루씨에게 그의 마법의 망치를 던진 것이다.
"젊은이, 예의가 없구만. 어른이 가시겠다면 인사나 드리고 곱게 보내드려야지. 이 무슨 망발인가?"
"성주님께서는 참견할 일이 아니십니다."
루씨가 이렇게 대꾸하자 동카스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지금 나랑 한 판 붙어보자는 겐가?"
아이리스는 난처했다. 아버지를 따라 몰래 길을 나서기는 했으나 이렇게 루씨와 동카스를 맞닥뜨리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아이리스는 아버지 레오르도가 분명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 그러는 것이라 짐작하기는 했지만 이미 정들었던 고향을 등지고 왕국의 기사들까지 해친 마당에 차라리 천공이라는 곳으로 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도 싶었다. 그러나 레오르도는 완강히 반대했으며 되려 루씨일행과 동카스 몰래 길을 떠나려 했던 것이다.
루씨를 한참동안이나 노려보던 동카스가 기합을 넣으며 달려들었다. 그의 긴 자루의 망치가 루씨의 품을 파고든다. 루씨는 오른발을 빙글 돌려 왼발을 축으로 삼아 장검으로 비스듬히 망치를 받아낸다. 동카스는 몸이 기우뚱하는가 싶더니 망치 머리를 땅에 댄 채 자루를 장대삼아 공중으로 부웅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망치 머리를 땅에서 다시 떼어 공중에서 그대로 루씨의 어깻죽지를 향해 내리친다.
내려꽂히는 망치의 기세가 너무 대단하여 루씨는 양손의 중검과 장검을 모두 들어 십자로 교차하여 막아섰다. 루씨의 머리칼이 망치에서 뻗어나오는 세찬 바람에 마구 날린다.
"그만 하세요!" 어느샌가 아이리스는 루씨의 허리를 안고 있었다. 동카스는 행여라도 그녀가 다칠까 당황하여 황급히 망치를 거두었으나 내려쳤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두세 번 혼자 돌다가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교차시킨 루씨의 장검과 중검 중 장검은 이미 부러져 그 검날이 성벽까지 날아가 박혔다.
향기로운 붓꽃 내음이 루씨의 코끝을 찔렀다. 몰랐었다. 그녀의 체취가 이런 것이었던가? 루씨가 이렇게 잠깐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의 품안에서 아이리스가 흐느꼈다.
"이제 누구도 저 때문에 다치는 걸 원치 않아요. 그러니 제발 두 분 다 그만두세요."
아이리스가 고개를 들어 루씨를 올려다보았다. 루씨가 아이리스보다 머리 하나 정도 키가 더 컸으므로 아이리스는 루씨의 가슴에 매달려 있는 형국이다. 갑자기 아이리스가 루씨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루씨가 놀라 아무 말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 서버렸다. 아이리스가 뺨을 맞추고 난 후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아이리스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루씨님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오늘은 아버지와 저를 이만 보내주세요. 루씨님이 제게 잘해 주신거 절대 잊지 않고 있어요. 꼭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당신을 따라 천공으로 갈 터이니 기다려주세요. 약속할께요."
루씨는 정신이 없었다. 아이리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그녀의 붓꽃 향기만이 계속 코끝을 어지럽히고 있을 뿐이다.
"복 터졌군."
동카스가 저쪽에서 뭐라 자꾸 궁시렁댄다. 넋이 나간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우두커니 서 있는 루씨를 뒤로 하고 아이리스와 레오르도가 말에 오르자 두 팔을 벌리고 동카스가 그 앞을 막아선다.
"나도 데려가주게"
레오르도는 이맛살을 찌뿌렸다.
"당신까지도 우리 부녀를 괴롭힐 터인가?"
동카스가 손을 휘휘 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게 아니네. 내가 아이리스양을 괴롭히다니 천부당 만부당 한 말씀이시네. 다만 난 자네가 앞으로 어디를 향하여 갈 지 알 수 있을 것 같네. 그런데 어쩐지 내가 가려는 곳과 자네가 가려는 그곳이 같을 것 같아서 말이지"
레오르도가 잠시 동카스를 응시하며 망설이다 묻는다.
"그렇다면 이 성은 어찌할 터인가?"
"보시다시피 이 성은 이미 절단났네. 그나마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어젯밤에 미리 모두 성안에 재물을 나눠주고 떠날 것을 명령했다네. 이제 내 한 몸만 떠나면 되는 것이지."
동카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어차피 왕궁 기사단을 살해한 일이 발각되면 모두 죽음을 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는 일찌감치 어제밤에 성안에 있는 모든 재물을 남김없이 하나하나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곤두와나를 떠나 숨어 살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는 레오르도의 낌새를 계속해서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부녀에게 해만 끼치지 않는다면야 성주 편한 대로 하시오."
망설이던 레오르도가 짧게 한마디 내뱉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아이리스도 곧 말에 올라 루씨에게 한번 눈길을 주고는 말을 재촉했다. 그러자 한발 나중에서야 동카스가 허겁지겁 자신의 말을 끌고와 그 뒤를 따른다. 우뚝솟은 바위산 중턱에 위치한 곤두와나성엔 이제 망연자실 루씨만이 비탈진 성문 바윗길위에 덩그라니 서있다. 휑하니 산중 새벽의 찬 바람이 루씨의 옷깃을 들춰내는데도 그는 까딱하지 않고 그저 아이리스가 떠난 방향만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다.
마계건국기 1부-15편: 도주
밤은 깊은데 곤두와나 성안에서는 작은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무사히 살아돌아온 아이리스와 또 기적적으로 살아난 레오르도의 부녀상봉을 기꺼이 축하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버서커들의 난동이 있던 그 공포스런 밤 이후에 곤두와나에 살아남은 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 즐거운 술자리는 조촐하기 그지 없다.
이 가운데 동카스는 기쁜 마음과 서글픈 감정에 착찹한 심정까지 더해져 아예 술을 항아리째로 들이붓고 있었다.
과연 난쟁이족이라 그런지 그는 혼자서 족히 열동이나 되는 술을 비우고도 끄덕이 없다.
되려 괜히 그의 옆자리에 앉았던 베르베르가 된통 술을 마셔 눈이 풀리고 혀가 꼬이니 그 꼬락서니가 정말 가관이다.
베르베르는 거나하게 술이 좀 들어가자 도대체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인간들이 부르는 남녀상열지사의 유행가를 아주 신나게 불러제끼고 있는게 아닌가?
이런 그의 모습은 루씨도 처음 보는지라 춤까지 덩실덩실 춰대는 베르베르를 입을 떡 벌리고 쳐다보고있었다.
왁자지껄한 가운데 동카스가 술을 한잔 가득 담아 루씨에게 권한다.
"이보시게 젊은이, 정말 고마우이. 우리 아이리스님을 이렇게 무사히 돌봐주었으니 말일세."
루씨는 술자리에 익숙지 않아 정신이 없다.
아까 한잔 마신게 좀 컸나 보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눈앞이 아른아른하다.
그래도 권하는 술이라 사양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들이키는데 동카스가 갑자기 루씨의 옆에 놓여진 중검을 덥썩 집어들었다.
정신이 번쩍 든 루씨가 검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가 술기운에 땅만 짚고 말았다.
당황하는 루씨에게 동카스가 얼굴을 들이민채 술냄새를 풍기며 말한다.
"내 보기에 이 검이 보통 검이 아닌 것 같으이. 내 구경좀 해봐도 되겠지?"
"네? 네..."
루씨가 얼떨결에 허락한다.
동카스는 자신의 키에 두배나 되는 검을 들고는 찬찬히 살펴본다.
아까까지의 장난스러운 표정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다.
한참 검을 살펴보던 동카스가 중검을 두손으로 받들어 번쩍 머리위로 쳐들더니 대뜸 레오르도에게 고함을 지른다.
"이보게 레오르도 양반~! 이 검이 어떠한 것 같소?"
갑작스런 고함소리에 사람들이 일제히 동카스를 주시하는데 술이 얼큰한 베르베르만이 계속해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덩실덩실 춤추고 있다.
은은한 불빛이 레오르도의 얼굴에 아른거리는데 그가 담담히 대답한다.
"시골 변두리 마을에 일개 병사가 검에 대해서 뭘 알겠소만 그런 내가 척 보기에도 확실히 보통 검은 아닌 것 같소이다."
동카스는 중검을 바닥에 공손히 놓고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보기엔 이 검은 바로 정복왕 폴크스겐님의 검이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바로 그 대륙통일 전쟁 당시 정복왕께서 전장을 가르시던 바로 그 검이란 말이오"
루씨가 슬그머니 중검을 끌어다 자신 뒤에 놓는다. 이 작달 만한 노인네가 자신의 중검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하고 있으니 과히 기분이 좋질 않다.
루씨가 중검을 가져가자 동카스가 버럭 화를 낸다.
"이보게 젊은이 ! 어떻게 그 검을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검은 예전에 내가 모시던 정복왕님의 검이니 어서 돌려주시게!"
무슨 날강도도 아니고 대뜸 검을 내놓으라니 루씨는 기가 막혔다.
막 뭐라 대꾸하려 하는데 레오르도가 나선다.
"이보시게 동카스 성주! 이러한 종류의 검이 필시 흔치 않은 것은 확실하지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오.
이 종류의 검은 고대인들의 연금 비법으로 만들어진 특수합금으로 제작된 것으로 용들을 사냥할 목적으로 특별하게 만들어진 것이오."
"오~호! 아주 잘 아시는구랴"
동카스가 정색을 하며 대꾸하는데 레오르도가 얘기를 계속한다.
"용사냥용 검 얘기는 무기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병사라면 누구나 아는 것이고 또 정복왕께서 젊은 시절 용사냥꾼이었다는 건 이 나라 백성이라면 모두 알고 있소.
그런데 이런 검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정복왕의 검이라 내놓으라는 건 가당치도 않소"
"하하~! 내가 뭐라 했더랬습니까? 난 아뭇 소리도 안했소. 정복왕님의 검이 시신과 함께 묻힌건 나도 잘 아오. 난 그냥 이 젊은이의 검이 너무 좋아 탐이 나길래 농을 한 번 해본 것 뿐이오."
레오르도의 반응이 예상외로 강경하자 동카스가 은근슬쩍 얼버무리면서 다시 술동이를 찾아 들이킨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루씨는 울컥하려다 뻘쭘해져 다시 자리에 앉았다.
베르베르는 여전히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농을 한 것이라 했지만 동카스는 사실 레오르도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일부러 도발한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의 철심법을 다루는 의술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동카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온통 주변에 수수께끼의 인물투성이이다.
레오르도의 철심법은 물론이거니와 저 얼간이 같은 베르베르란 남자는 엄청난 전투력에 신비로운 치유능력까지 갖추었다.
게다가 이 호리호리한 루씨라는 청년은 보통 사람은 가눌 수도 없다는 대용검을 지니고 있는게 아닌가?
동카스가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해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자신의 팔짱을 낀다.
돌아다보니 아이리스이다.
"앗! 아... 아이리스양~!"
순식간에 동카스의 얼굴이 홍당무가 된다.
"동카스님. 그만 화푸시고 어서 술이나 한잔 더 드세요."
아이리스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하자 동카스는 정신이 몽롱해져 연신 싱글벙글하며 무조건 고개만 끄떡인다.
"아... 예!예! 아이리스양이 그러시라면 당연히 그래얍지요. 하하하!!!"
동카스가 다시 벌컥벌컥 술을 들이키자 아이리스가 루씨를 쳐다보곤 혀를 낼름 내보이더니 살짝 미소를 지어보인다.
아이리스는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로 차츰 예전의 상냥하면서도 새침하고 털털한 성격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루씨는 왠지 싱숭생숭해져 자리를 빠져나왔다.
달은 차고 밤은 더욱 깊어 새벽으로 치닫는데 사람들은 하나 둘 곪아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한 성내에 또각또각 조용조용한 말발굽 소리가 울리더니 남녀 한쌍이 성문 빗장 앞에 선다.
"그래도 이렇게 가는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아요."
"어쩔 수 없다. 아이리스."
레오르도가 아이리스를 바라보곤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가는건 정말 도리가 아닌 것 같아요."
"얘기했지 않느냐 아이리스! 절대 안된단 말이다."
레오르도가 발끈 성을 냈다.
자신에게 화를 내는 일은 절대 없던 당신인 터라 아이리스는 당황했다.
레오르도는 베르베르에게 자초지정을 들어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반대편 그 어딘가에 신을 보좌하는 천사들이 사는 세계인 천공계가 있었다.
천공계는 수석 천사장인 위가르드의 다스림을 받고 있었지만 그들 세계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커다란 다른 축이 있었다.
바로 신의 말씀을 천사들에게 전하는 성녀이다.
왜 그러한지는 알 수 없으나 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성녀는 인간들, 그것도 여자 중에서만 나타났으며 그러므로 성녀의 자리는 대대로 인간의 여자 중에서만 간택되었다.
레오르도는 기가 막혔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저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자신의 어린 딸이 바로 신에게 선택된 성녀라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말이 안된다.
하나님은 아이리스가 얼마나 안타까운 아이인지 정말 모르는 모양이다.
레오르도는 여기까지 생각하니 괜시리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게다가 그 얘기인즉슨 너무나도 허무맹랑하다.
아무렴 천사들이 널리고 널렸는데 하나님 한 분 말씀 들을자가 없어서 너를 찾겠느냐? 설령 정말 그렇다쳐도 그것은 그들의 문제. 하늘에서의 일 때문에 지상에 있는 우리까지 희생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서늘한 새벽공기가 아이리스의 뺨을 스치운다.
아이리스는 레오르도와 함께 이제는 아무도 지키는 자 없는 곤두와나 성문의 빗장을 열었다.
"아이리스님~!"
낭랑하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아이리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새벽달빛의 어둠속에서 반짝이는 루씨의 두눈이 보였다.
"루씨님!"
아이리스가 그를 부르는 호칭은 어느새 그동안 루씨가 되어있었다.
그의 이름만 부르고 차마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아이리스를 대신해 레오르도가 나선다.
"잡으려는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말 게~ 젊은이."
"아이리스님은 가실 수 없습니다."
루씨가 단호하게 말하자 레오르도가 답한다.
"가고 안가고는 자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설령 자네가 신의 영역에 속하는 존재라 해도 말일세."
자신의 말에 루씨의 표정이 한치의 변화도 없자 레오르도는 허리에 찬 검을 뽑아들었다.
"정녕 우리를 잡을 생각이라면 나를 먼저 쓰러뜨려야 할 것이네."
루씨가 잠깐 생각하더니 자신도 허리에 찬 장검을 빼어든다.
"정말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지요."
루씨가 가벼운 발놀림으로 검을 짓쳐 들어갔다.
곧 레오드로의 옷깃에 검이 닿을 찰나 루씨는 귓가에 엄청난 공기의 파열음을 느끼고는 다른 한손으로 황급히 중검을 뽑아 등 뒤로 메듯 세웠다.
루씨는 원래 가볍게 레오르도를 제압하여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뒷편에서 갑작스레 날아든 예기치 못한 엄청난 공격에 중검까지 뽑아든 것이다.
"떵~!"
큰 종소리를 내며 중검이 울리고 루씨는 팔이 저려왔다. 몸을 비틀어 뒤를 돌아보자 푸르스름한 기운에 둘러싸인 망치가 동카스의 손으로 부메랑처럼 돌아간다.
난쟁이 성주 동카스가 루씨에게 그의 마법의 망치를 던진 것이다.
"젊은이, 예의가 없구만. 어른이 가시겠다면 인사나 드리고 곱게 보내드려야지. 이 무슨 망발인가?"
"성주님께서는 참견할 일이 아니십니다."
루씨가 이렇게 대꾸하자 동카스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지금 나랑 한 판 붙어보자는 겐가?"
아이리스는 난처했다.
아버지를 따라 몰래 길을 나서기는 했으나 이렇게 루씨와 동카스를 맞닥뜨리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아이리스는 아버지 레오르도가 분명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 그러는 것이라 짐작하기는 했지만 이미 정들었던 고향을 등지고 왕국의 기사들까지 해친 마당에 차라리 천공이라는 곳으로 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도 싶었다.
그러나 레오르도는 완강히 반대했으며 되려 루씨일행과 동카스 몰래 길을 떠나려 했던 것이다.
루씨를 한참동안이나 노려보던 동카스가 기합을 넣으며 달려들었다.
그의 긴 자루의 망치가 루씨의 품을 파고든다.
루씨는 오른발을 빙글 돌려 왼발을 축으로 삼아 장검으로 비스듬히 망치를 받아낸다.
동카스는 몸이 기우뚱하는가 싶더니 망치 머리를 땅에 댄 채 자루를 장대삼아 공중으로 부웅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망치 머리를 땅에서 다시 떼어 공중에서 그대로 루씨의 어깻죽지를 향해 내리친다.
내려꽂히는 망치의 기세가 너무 대단하여 루씨는 양손의 중검과 장검을 모두 들어 십자로 교차하여 막아섰다.
루씨의 머리칼이 망치에서 뻗어나오는 세찬 바람에 마구 날린다.
"그만 하세요!"
어느샌가 아이리스는 루씨의 허리를 안고 있었다.
동카스는 행여라도 그녀가 다칠까 당황하여 황급히 망치를 거두었으나 내려쳤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두세 번 혼자 돌다가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교차시킨 루씨의 장검과 중검 중 장검은 이미 부러져 그 검날이 성벽까지 날아가 박혔다.
향기로운 붓꽃 내음이 루씨의 코끝을 찔렀다.
몰랐었다. 그녀의 체취가 이런 것이었던가?
루씨가 이렇게 잠깐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의 품안에서 아이리스가 흐느꼈다.
"이제 누구도 저 때문에 다치는 걸 원치 않아요. 그러니 제발 두 분 다 그만두세요."
아이리스가 고개를 들어 루씨를 올려다보았다.
루씨가 아이리스보다 머리 하나 정도 키가 더 컸으므로 아이리스는 루씨의 가슴에 매달려 있는 형국이다. 갑자기 아이리스가 루씨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루씨가 놀라 아무 말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 서버렸다.
아이리스가 뺨을 맞추고 난 후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아이리스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루씨님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오늘은 아버지와 저를 이만 보내주세요. 루씨님이 제게 잘해 주신거 절대 잊지 않고 있어요.
꼭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당신을 따라 천공으로 갈 터이니 기다려주세요. 약속할께요."
루씨는 정신이 없었다. 아이리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그녀의 붓꽃 향기만이 계속 코끝을 어지럽히고 있을 뿐이다.
"복 터졌군."
동카스가 저쪽에서 뭐라 자꾸 궁시렁댄다.
넋이 나간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우두커니 서 있는 루씨를 뒤로 하고 아이리스와 레오르도가 말에 오르자 두 팔을 벌리고 동카스가 그 앞을 막아선다.
"나도 데려가주게"
레오르도는 이맛살을 찌뿌렸다.
"당신까지도 우리 부녀를 괴롭힐 터인가?"
동카스가 손을 휘휘 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게 아니네. 내가 아이리스양을 괴롭히다니 천부당 만부당 한 말씀이시네.
다만 난 자네가 앞으로 어디를 향하여 갈 지 알 수 있을 것 같네. 그런데 어쩐지 내가 가려는 곳과 자네가 가려는 그곳이 같을 것 같아서 말이지"
레오르도가 잠시 동카스를 응시하며 망설이다 묻는다.
"그렇다면 이 성은 어찌할 터인가?"
"보시다시피 이 성은 이미 절단났네. 그나마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어젯밤에 미리 모두 성안에 재물을 나눠주고 떠날 것을 명령했다네. 이제 내 한 몸만 떠나면 되는 것이지."
동카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어차피 왕궁 기사단을 살해한 일이 발각되면 모두 죽음을 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는 일찌감치 어제밤에 성안에 있는 모든 재물을 남김없이 하나하나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곤두와나를 떠나 숨어 살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는 레오르도의 낌새를 계속해서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부녀에게 해만 끼치지 않는다면야 성주 편한 대로 하시오."
망설이던 레오르도가 짧게 한마디 내뱉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아이리스도 곧 말에 올라 루씨에게 한번 눈길을 주고는 말을 재촉했다.
그러자 한발 나중에서야 동카스가 허겁지겁 자신의 말을 끌고와 그 뒤를 따른다.
우뚝솟은 바위산 중턱에 위치한 곤두와나성엔 이제 망연자실 루씨만이 비탈진 성문 바윗길위에 덩그라니 서있다.
휑하니 산중 새벽의 찬 바람이 루씨의 옷깃을 들춰내는데도 그는 까딱하지 않고 그저 아이리스가 떠난 방향만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다.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