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이 선우 앞에서 드디어 사고를 쳤다는 소식은 해인 주변 사람들에게서 널리 돌고 돌아 완전히 퍼져버렸다. '드디어 그 내숭을 집어 던진거냐' 는 식의 말을 하루에도 몇 십 번씩 들으면서 자신만 보면 웃어 제끼는 사람들 때문에 해인은 스트레스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오빠!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소문을 내다니!!"
"야, 야.. 내가 그런 건 아니다. 그 조용한 도서관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른 건 너잖아."
"아무리 그렇지!! 너무해요!! 오빨 믿었는데!!"
동훈을 붙잡고서 빨개진 얼굴로 온갖 성질을 부리고 있는 해인의 뒤로 같은 과의 기범이 다가와서 히죽거렸다.
"아이구~ 우리 순진한 해인이가 아직도 뭘 잘 모르네.. 믿을 놈을 믿어야지 동훈이를 믿냐? 이 놈이 어제도 그 얘기 하면서 얼마나 웃어대던지.."
"그것봐요 오빠!!!!"
"야! 내가 언제 그랬냐? 기범이 너!! 그때 네가 뒤에서 다 보고 있다가 소문낸거잖아!!"
"뭐야 그럼, 범씨 짓이었어? 아아악!!"
"야야, 누구 짓이면 어떠냐, 어차피 소문 날대로 다 난거. 지금쯤이면 선우라는 놈 귀에 너가 2년동안 내숭떨었다는 것도 다 들어갔겠다. 큭큭큭."
"안돼, 그것 만은.....쪽팔리게..."
기범의 말에 어쩌면 선우의 귀에도 다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 순간 해인은 머리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되버린 거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선우가 볼 때 자신은 무려 2년이나 자신 앞에서 내숭을 떤 왕 가증 덩어리정도로 밖에 안여겨 질 게 분명했다.
"....그래도, 이왕 포기 한거 좋게 생각되고 싶었는데... 이게 뭐야...."
빨개진 얼굴에다 핏발까지 선 눈에는 이제 눈물까지 고여버렸다. 별 생각없이 해인을 놀리던 기범과 동훈은 해인의 눈물에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사실 해인은 그 시간동안 정말로 선우를 좋아했었던 건데 자신의 실수로 내숭떨었던 게 다 들통나고 그게 여기 저기 소문까지 다 나버렸으니 자신들이 선우여도 해인을 곱게 생각할 리는 없었다. 그냥 조용히 멀어지고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 미안, 해인아.. 내가 수업 끝나고 빨리 갔어야 하는건데.. 그럼 적어도 그렇게 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미안.."
"아뇨.. 오빠가 잘못한 건 아니잖아요. 갑자기 줄이 끊어진 내가 잘못이지... 원래 이런 성격이면서 그 동안 참아 왔던 거 생각하면... 하아... 정말 대단해요. 그쵸?"
"........그렇긴 하다. 소주 5병의 술고래가, 한잔에 쓰러지는 내숭을 떨다니... 정말 대단해. 그런 의미에서 그동안 밀린 술 오늘 오빠가 사주마!"
괜히 옆에서 자신이 끼어들어 놀린 것 때문에 해인이 더 울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해진 기범은 평소에는 절대 사지 않는 술을 사주겠다면서 해인을 달래기 시작했다. 평소 아끼는 후배가 눈앞에서 울고 있으니 자신이 해줄 만한 건 술 한잔 하는 것 밖에는 없다 싶어서 한 말이었다.
"......아니 그럴 거 까진 없어요.."
"아냐, 해인아. 오늘 수업 다 끝났지? 동훈이 너도 오늘 오전 수업만이었잖냐. 내가 다음 수업이 있긴 한데, 이쁜 후배를 위해 한번 쯤 제껴준다. 가자, 오빠가 사주는 거 흔치 않는 일이다."
"......"
기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해인을 끌고서 동훈과 함께 자주 가던 호프집을 갔다. 호프집에 올 때까지도 한마디 하지 않는 해인을 보니 자꾸만 죄책감이 더해지는 기분에 기범은 소주 5병을 시켜서 그중 3병을 해인 앞에 놔주었다.
"자, 해인아! 일단 이 3병, 너 다 마셔라! 오늘 너 쓰러질 때까지 이 오빠들이 책임진다!"
".....고마워요."
해인은 기범이 놔준 소주를 따서 안주도 없이 한 잔, 두 잔 따라마시다가 그대로 병을 들고 입속으로 들이부었다.
"헉! 야, 해인아! 아니 그래도, 안주 좀 같이 먹지, 벌써부터 그렇게 병째 마시면.... 헉!!!!야!!"
기범과 동훈이 놀라 말릴 새도 없이 해인은 한병을 꿀떡 마셔버리고서 두번 째 병을 따고 마시기 시작했다.
"해인아, 그게 물도 아니고... 좀 천천히 마셔라."
동훈은 해인이 들고 있는 병을 빼앗고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두번째 병 역시 해인의 입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후였다. 한숨을 쉬며 그래, 너 맘대로 해라 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해인을 바라보는데 옆에 있던 기범이 다가와 동훈의 귀에 속삭였다.
"야! 너 돈 좀 있냐? 아씨..내가 미쳤지. 해인이 오랜만에 마셔서 얼마 안마실 줄 알았는 데 저 상태면은 오늘 장난아닐거 같아."
"알았어, 걱정마. 내가 같이 낼게."
동훈과 기범이 해인의 무서운 기세에 술값을 걱정하며 속삭이는 걸 아는지 모르는 지 이제 두병을 비운 해인은 안주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3병째. 어차피 한번은 이렇게 해인이 미친 듯 마실 시간이 필요했었고 그게 오늘이 됐을 뿐이라는 생각으로 말리지 않고는 있었지만 옆에 놓인 소주 잔이 무색하게 자꾸만 병째 들이 붓는 해인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 탁!
"오빠!"
말없이 계속 마시기만 하던 해인이 드디어 소주 3병을 비우고서 병을 탁자위에 소리나게 놓았다. 해인이 하는 것만 바라보던 둘은 흠칫 놀라 그녀를 바라보니 연달아 3병을 비운 상태라 아무리 술이 세다는 해인이라도 이미 눈은 반쯤 풀려 있고 얼굴은 빨개질 대로 빨간 상태였다.
"...어? 어?"
"..내가.. 내가 그렇게 못났어?"
"아냐! 누가 그래!!"
"나는 별볼일.. 없는 버스래. ... 그래? 난, 아무나 타는 버스 정도 밖에 안되는 애야?"
".....어제 그 놈이 그러디?"
동훈은 어제 선우가 그 말을 할때 쯤 그들을 발견해서 이미 들었던 말이었지만, 동훈에게 대충 전해듣기만 한 기범은 해인이 선우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다는 생각에 흥분하고 말았다.
"그 놈이 어제 너보고 그랬단 말야? 너보고 그딴 말을 해? 하.. 그런 더러운 새끼한테 그런 말 들었으면 몇 배로 갚아줘야 할 거 아냐! ...... 너 바보냐!!"
"...... 원래.. 그런 성격인 건 알았지만... 그 말은 너무 충격이었어.. 내가, 걔 앞에서 안하던 짓 좀 했기로서니...... 내가 .... ..."
"...한 잔 받아라."
울먹거리는 해인에게 기범은 소주잔을 내밀었다. 해인과 같이 마시면 보기 보다 술에 약한 자신이라 먼저 나가떨어지기 일쑤였지만, 아끼는 후배가 그런 말을 들을 때 자신이 옆에 없었다는 게 후회스러워 지금 만큼은 같이 마셔 주고 싶었다.
둘이서 말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을 보며 동훈은 한숨을 지었다. 기분 같아서는 마셔주고 싶지만 해인이 저렇게 완전히 망가져버렸고 기범도 이 상태면 오래지 않아 쓰러질테니 자신만이라도 멀쩡해야 뒷수습을 한다는 생각에 술에는 손을 대지 않고 애꿏은 안주만 축내고 있었다.
이미 기범과 해인 사이에는 소주 3병이 더 추가가 되어있었고, 해인은 2병을 마셔서 이제는 자기의 주량을 넘어선 상태였다. 술이 세다는 해인도 이쯤되면 이미 머리속이 알콜에 지배되는 상황이고 해인과 같이 마신 기범은 소주 반병인 한계선을 넘어 이미 치사량에 도달하고 있어서 이제 슬슬 말려야지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딸랑.
흔히들 귀신이 지나가는 순간이라 그러던가. 그 시끄럽던 호프집이 갑자기 쥐죽듯 조용해지는 순간 문소리가 들렸다. 다른 때 같으면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겠지만 순간적으로 조용해졌을 때 들린 문소리라서 동훈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주었다가 당황해버렸다.
"....어."
이만큼 우연이 겹치면 이제는 악연인가 싶다.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해인을 지금 저 상태로 만든 정선우였다.
"해인아, 이제 그만 마시고 나가자! 응? 너 너무 많이 취했어!!"
"오빠는~ 나 아직 말짱해~ 헤헤헤헤~ 오빠! 오빠도 쫌 마셔~ 앙?"
"그으으래~ 후우니! 쪼오오오옴 마아아셔~"
확실히 취하긴 취했는지 기범은 말을 길게 늘이면서 귀여운 척 하는, 해인은 오바스럽게 웃고 애교떠는 주정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나마 둘이 같이 구석에 쳐박혀서 울지 않는 게 어디냐마는..
혹여라도 선우와 지금 상태에서 마주칠까봐 해인과 기범을 끌어내려 했지만 술에 쩔은 두 사람은 흐느적 거리면서 축 쳐서 있어 도저히 두 사람을 동훈 혼자 감당할 수가 없었다.
기범이 제정신이 아니라 돈을 내라 말 할 상황이 아닌 지라 동훈은 재빨리 자신이 계산을 하고서 먼저 해인부터 끌어내야 겠다는 생각으로 그녀를 일으켰다.
"아이~ 오빠~ 앙~~ 나 더 마실랭.. 오빠! 오빠~헤헤.. 우리 술 마시자~ 앙? 우리 동후니 오빠도 한~잔!! 캬아~ "
"어..어... 안돼, 해인아! 일어나자."
일어나기 싫다고 앙탈아닌 앙탈을 부리는 귀여운 해인을 보고서 순간적으로 마음이 흔들리긴 했지만 흘낏 주위를 둘러보다 대각선 뒤쪽 테이블에 앉아있는 선우를 발견하자마자 정신을 차렸다. 아마 선우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동훈도 해인의 애교에 넘어가 기범처럼 뻗어버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에휴..안되겠다."
"아앙~ 오빠! 시러시러~ 우에에에~"
한손으로 해인의 허리를 다른 손으로는 두 팔을 못움직이게 붙잡고서 해인을 들다시피 하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차마 붙잡지 못한 해인의 다리가 공중에서 발버둥 치다 동훈의 정강이를 퍽! 하고 걷어찼다.
"우악!"
' 하필이면 오늘따라 힐을 신을 게 뭐야! '
그랬다. 해인은 한창 내숭떨 시절에는 잘 신지 않던 굽있는 힐을 오랜만에 신고 왔고, 그 힐을 신은 채 발버둥치다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뒷굽으로 정확하게 동훈의 정강이를 걷어차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걷어 채인 동훈이 잘 붙잡고 있던 해인을 놓쳐버리면서 취중에, 오로지 동훈의 팔 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에 집중하던, 다른 것에는 완전 무방비상태였던 해인은 그래도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도 정확히 선우가 앉아 있는 테이블 가운데로.
"........길해인?"
난데없이 테이블 위로 쓰러지는 여자의 등장에 선우는 물론 같이 앉아 있던 그의 친구들마저 놀라서 바라봤다. 테이블 위에 있던 술과 안주를 엎고 그 위에 온갖 음식물 범벅이 되어 쓰러져 있는 것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순하고 귀엽고 술은 입에 댈 줄도 모르던 해인이었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얘가 많이 취해서.... 시키신 건 제가 계산해서 물어드릴게요."
뒤늦게 수습을 하려 동훈이 말을 했을 때는 이미 해인 역시 선우를 발견한 상태였다.
"어~머, 어~머.. 이게 누구야! 개싸가지 정선우잖아? 오빠~ 이거 선우 맞지?"
"...아냐 해인아, 술에 취해서 잘못 본거야."
"아냐아냐~ 오빠두~ 내가 이 싸가지 면상에 뻑가서 몇년을 쫒아 다녔는데~ 얘 꼬시려고 팔자에도 없는 내숭을 떨었자나 내가~ 꺄르르르~ 맞네~ 선우~ 꺄르르르....... .....아씨.. 나 얘한테 할 말 있는데.. 오빠.. 앙... 근데, 오빠.. 나 졸려......."
- 쿵!
해인은 선우를 가리키며 부담스럽게 웃어대다가 졸리다는 말과 함께 그대로 선우를 향해 쓰러져 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그대로 잠들어 버린 것이었다. 동훈은 연신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테이블 위에 앉아 선우의 어깨에 머리를 박고 있는 해인을 끌어내려 했다.
"죄송합니다. 얘가 착각을 했나봐요. 좀 안좋은 일이 있어서.."
"얘, 길해인 맞죠? 과는... 잘 기억이 안나지만, 사진 동아리. 그쪽은.. 어제랑 엊그제 얘랑 같이 있었던 분..이고요."
해인을 붙잡는 동훈의 손을 제지하며 선우가 말했다.
기가 막히다는 눈빛으로 동훈을 바라보는 선우.
동훈은 해인이 더이상 선우와 얽히면 안될 것 같아 아니라고 잡아 떼고 싶었지만 선우의 물음은 거의 확신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부정할 수조차 없었다.
"...네, 그러니까 이제 데려갈.."
"아뇨. 제가 데려가죠."
"..네?"
"오늘은 계산 너네가 해라. 다음에 내가 사마."
동훈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선우는 자신에게 기대어 쓰러진 해인을 들처업고 사라졌다. 어느새 자기 옆으로 다가와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는 기범때문에 선우를 따라가지도 못한 채 동훈은 그냥 한숨만 내 쉴 뿐이었다.
바람이 머무르는 곳...05
해인이 선우 앞에서 드디어 사고를 쳤다는 소식은 해인 주변 사람들에게서 널리 돌고 돌아 완전히 퍼져버렸다. '드디어 그 내숭을 집어 던진거냐' 는 식의 말을 하루에도 몇 십 번씩 들으면서 자신만 보면 웃어 제끼는 사람들 때문에 해인은 스트레스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오빠!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소문을 내다니!!"
"야, 야.. 내가 그런 건 아니다. 그 조용한 도서관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른 건 너잖아."
"아무리 그렇지!! 너무해요!! 오빨 믿었는데!!"
동훈을 붙잡고서 빨개진 얼굴로 온갖 성질을 부리고 있는 해인의 뒤로 같은 과의 기범이 다가와서 히죽거렸다.
"아이구~ 우리 순진한 해인이가 아직도 뭘 잘 모르네.. 믿을 놈을 믿어야지 동훈이를 믿냐? 이 놈이 어제도 그 얘기 하면서 얼마나 웃어대던지.."
"그것봐요 오빠!!!!"
"야! 내가 언제 그랬냐? 기범이 너!! 그때 네가 뒤에서 다 보고 있다가 소문낸거잖아!!"
"뭐야 그럼, 범씨 짓이었어? 아아악!!"
"야야, 누구 짓이면 어떠냐, 어차피 소문 날대로 다 난거. 지금쯤이면 선우라는 놈 귀에 너가 2년동안 내숭떨었다는 것도 다 들어갔겠다. 큭큭큭."
"안돼, 그것 만은.....쪽팔리게..."
기범의 말에 어쩌면 선우의 귀에도 다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 순간 해인은 머리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되버린 거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선우가 볼 때 자신은 무려 2년이나 자신 앞에서 내숭을 떤 왕 가증 덩어리정도로 밖에 안여겨 질 게 분명했다.
"....그래도, 이왕 포기 한거 좋게 생각되고 싶었는데... 이게 뭐야...."
빨개진 얼굴에다 핏발까지 선 눈에는 이제 눈물까지 고여버렸다. 별 생각없이 해인을 놀리던 기범과 동훈은 해인의 눈물에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사실 해인은 그 시간동안 정말로 선우를 좋아했었던 건데 자신의 실수로 내숭떨었던 게 다 들통나고 그게 여기 저기 소문까지 다 나버렸으니 자신들이 선우여도 해인을 곱게 생각할 리는 없었다. 그냥 조용히 멀어지고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 미안, 해인아.. 내가 수업 끝나고 빨리 갔어야 하는건데.. 그럼 적어도 그렇게 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미안.."
"아뇨.. 오빠가 잘못한 건 아니잖아요. 갑자기 줄이 끊어진 내가 잘못이지... 원래 이런 성격이면서 그 동안 참아 왔던 거 생각하면... 하아... 정말 대단해요. 그쵸?"
"........그렇긴 하다. 소주 5병의 술고래가, 한잔에 쓰러지는 내숭을 떨다니... 정말 대단해. 그런 의미에서 그동안 밀린 술 오늘 오빠가 사주마!"
괜히 옆에서 자신이 끼어들어 놀린 것 때문에 해인이 더 울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해진 기범은 평소에는 절대 사지 않는 술을 사주겠다면서 해인을 달래기 시작했다. 평소 아끼는 후배가 눈앞에서 울고 있으니 자신이 해줄 만한 건 술 한잔 하는 것 밖에는 없다 싶어서 한 말이었다.
"......아니 그럴 거 까진 없어요.."
"아냐, 해인아. 오늘 수업 다 끝났지? 동훈이 너도 오늘 오전 수업만이었잖냐. 내가 다음 수업이 있긴 한데, 이쁜 후배를 위해 한번 쯤 제껴준다. 가자, 오빠가 사주는 거 흔치 않는 일이다."
"......"
기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해인을 끌고서 동훈과 함께 자주 가던 호프집을 갔다. 호프집에 올 때까지도 한마디 하지 않는 해인을 보니 자꾸만 죄책감이 더해지는 기분에 기범은 소주 5병을 시켜서 그중 3병을 해인 앞에 놔주었다.
"자, 해인아! 일단 이 3병, 너 다 마셔라! 오늘 너 쓰러질 때까지 이 오빠들이 책임진다!"
".....고마워요."
해인은 기범이 놔준 소주를 따서 안주도 없이 한 잔, 두 잔 따라마시다가 그대로 병을 들고 입속으로 들이부었다.
"헉! 야, 해인아! 아니 그래도, 안주 좀 같이 먹지, 벌써부터 그렇게 병째 마시면.... 헉!!!!야!!"
기범과 동훈이 놀라 말릴 새도 없이 해인은 한병을 꿀떡 마셔버리고서 두번 째 병을 따고 마시기 시작했다.
"해인아, 그게 물도 아니고... 좀 천천히 마셔라."
동훈은 해인이 들고 있는 병을 빼앗고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두번째 병 역시 해인의 입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후였다. 한숨을 쉬며 그래, 너 맘대로 해라 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해인을 바라보는데 옆에 있던 기범이 다가와 동훈의 귀에 속삭였다.
"야! 너 돈 좀 있냐? 아씨..내가 미쳤지. 해인이 오랜만에 마셔서 얼마 안마실 줄 알았는 데 저 상태면은 오늘 장난아닐거 같아."
"알았어, 걱정마. 내가 같이 낼게."
동훈과 기범이 해인의 무서운 기세에 술값을 걱정하며 속삭이는 걸 아는지 모르는 지 이제 두병을 비운 해인은 안주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3병째. 어차피 한번은 이렇게 해인이 미친 듯 마실 시간이 필요했었고 그게 오늘이 됐을 뿐이라는 생각으로 말리지 않고는 있었지만 옆에 놓인 소주 잔이 무색하게 자꾸만 병째 들이 붓는 해인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 탁!
"오빠!"
말없이 계속 마시기만 하던 해인이 드디어 소주 3병을 비우고서 병을 탁자위에 소리나게 놓았다. 해인이 하는 것만 바라보던 둘은 흠칫 놀라 그녀를 바라보니 연달아 3병을 비운 상태라 아무리 술이 세다는 해인이라도 이미 눈은 반쯤 풀려 있고 얼굴은 빨개질 대로 빨간 상태였다.
"...어? 어?"
"..내가.. 내가 그렇게 못났어?"
"아냐! 누가 그래!!"
"나는 별볼일.. 없는 버스래. ... 그래? 난, 아무나 타는 버스 정도 밖에 안되는 애야?"
".....어제 그 놈이 그러디?"
동훈은 어제 선우가 그 말을 할때 쯤 그들을 발견해서 이미 들었던 말이었지만, 동훈에게 대충 전해듣기만 한 기범은 해인이 선우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다는 생각에 흥분하고 말았다.
"그 놈이 어제 너보고 그랬단 말야? 너보고 그딴 말을 해? 하.. 그런 더러운 새끼한테 그런 말 들었으면 몇 배로 갚아줘야 할 거 아냐! ...... 너 바보냐!!"
"...... 원래.. 그런 성격인 건 알았지만... 그 말은 너무 충격이었어.. 내가, 걔 앞에서 안하던 짓 좀 했기로서니...... 내가 .... ..."
"...한 잔 받아라."
울먹거리는 해인에게 기범은 소주잔을 내밀었다. 해인과 같이 마시면 보기 보다 술에 약한 자신이라 먼저 나가떨어지기 일쑤였지만, 아끼는 후배가 그런 말을 들을 때 자신이 옆에 없었다는 게 후회스러워 지금 만큼은 같이 마셔 주고 싶었다.
둘이서 말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을 보며 동훈은 한숨을 지었다. 기분 같아서는 마셔주고 싶지만 해인이 저렇게 완전히 망가져버렸고 기범도 이 상태면 오래지 않아 쓰러질테니 자신만이라도 멀쩡해야 뒷수습을 한다는 생각에 술에는 손을 대지 않고 애꿏은 안주만 축내고 있었다.
이미 기범과 해인 사이에는 소주 3병이 더 추가가 되어있었고, 해인은 2병을 마셔서 이제는 자기의 주량을 넘어선 상태였다. 술이 세다는 해인도 이쯤되면 이미 머리속이 알콜에 지배되는 상황이고 해인과 같이 마신 기범은 소주 반병인 한계선을 넘어 이미 치사량에 도달하고 있어서 이제 슬슬 말려야지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딸랑.
흔히들 귀신이 지나가는 순간이라 그러던가. 그 시끄럽던 호프집이 갑자기 쥐죽듯 조용해지는 순간 문소리가 들렸다. 다른 때 같으면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겠지만 순간적으로 조용해졌을 때 들린 문소리라서 동훈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주었다가 당황해버렸다.
"....어."
이만큼 우연이 겹치면 이제는 악연인가 싶다.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해인을 지금 저 상태로 만든 정선우였다.
"해인아, 이제 그만 마시고 나가자! 응? 너 너무 많이 취했어!!"
"오빠는~ 나 아직 말짱해~ 헤헤헤헤~ 오빠! 오빠도 쫌 마셔~ 앙?"
"그으으래~ 후우니! 쪼오오오옴 마아아셔~"
확실히 취하긴 취했는지 기범은 말을 길게 늘이면서 귀여운 척 하는, 해인은 오바스럽게 웃고 애교떠는 주정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나마 둘이 같이 구석에 쳐박혀서 울지 않는 게 어디냐마는..
혹여라도 선우와 지금 상태에서 마주칠까봐 해인과 기범을 끌어내려 했지만 술에 쩔은 두 사람은 흐느적 거리면서 축 쳐서 있어 도저히 두 사람을 동훈 혼자 감당할 수가 없었다.
기범이 제정신이 아니라 돈을 내라 말 할 상황이 아닌 지라 동훈은 재빨리 자신이 계산을 하고서 먼저 해인부터 끌어내야 겠다는 생각으로 그녀를 일으켰다.
"아이~ 오빠~ 앙~~ 나 더 마실랭.. 오빠! 오빠~헤헤.. 우리 술 마시자~ 앙? 우리 동후니 오빠도 한~잔!! 캬아~ "
"어..어... 안돼, 해인아! 일어나자."
일어나기 싫다고 앙탈아닌 앙탈을 부리는 귀여운 해인을 보고서 순간적으로 마음이 흔들리긴 했지만 흘낏 주위를 둘러보다 대각선 뒤쪽 테이블에 앉아있는 선우를 발견하자마자 정신을 차렸다. 아마 선우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동훈도 해인의 애교에 넘어가 기범처럼 뻗어버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에휴..안되겠다."
"아앙~ 오빠! 시러시러~ 우에에에~"
한손으로 해인의 허리를 다른 손으로는 두 팔을 못움직이게 붙잡고서 해인을 들다시피 하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차마 붙잡지 못한 해인의 다리가 공중에서 발버둥 치다 동훈의 정강이를 퍽! 하고 걷어찼다.
"우악!"
' 하필이면 오늘따라 힐을 신을 게 뭐야! '
그랬다. 해인은 한창 내숭떨 시절에는 잘 신지 않던 굽있는 힐을 오랜만에 신고 왔고, 그 힐을 신은 채 발버둥치다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뒷굽으로 정확하게 동훈의 정강이를 걷어차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걷어 채인 동훈이 잘 붙잡고 있던 해인을 놓쳐버리면서 취중에, 오로지 동훈의 팔 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에 집중하던, 다른 것에는 완전 무방비상태였던 해인은 그래도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도 정확히 선우가 앉아 있는 테이블 가운데로.
"........길해인?"
난데없이 테이블 위로 쓰러지는 여자의 등장에 선우는 물론 같이 앉아 있던 그의 친구들마저 놀라서 바라봤다. 테이블 위에 있던 술과 안주를 엎고 그 위에 온갖 음식물 범벅이 되어 쓰러져 있는 것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순하고 귀엽고 술은 입에 댈 줄도 모르던 해인이었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얘가 많이 취해서.... 시키신 건 제가 계산해서 물어드릴게요."
뒤늦게 수습을 하려 동훈이 말을 했을 때는 이미 해인 역시 선우를 발견한 상태였다.
"어~머, 어~머.. 이게 누구야! 개싸가지 정선우잖아? 오빠~ 이거 선우 맞지?"
"...아냐 해인아, 술에 취해서 잘못 본거야."
"아냐아냐~ 오빠두~ 내가 이 싸가지 면상에 뻑가서 몇년을 쫒아 다녔는데~ 얘 꼬시려고 팔자에도 없는 내숭을 떨었자나 내가~ 꺄르르르~ 맞네~ 선우~ 꺄르르르....... .....아씨.. 나 얘한테 할 말 있는데.. 오빠.. 앙... 근데, 오빠.. 나 졸려......."
- 쿵!
해인은 선우를 가리키며 부담스럽게 웃어대다가 졸리다는 말과 함께 그대로 선우를 향해 쓰러져 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그대로 잠들어 버린 것이었다. 동훈은 연신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테이블 위에 앉아 선우의 어깨에 머리를 박고 있는 해인을 끌어내려 했다.
"죄송합니다. 얘가 착각을 했나봐요. 좀 안좋은 일이 있어서.."
"얘, 길해인 맞죠? 과는... 잘 기억이 안나지만, 사진 동아리. 그쪽은.. 어제랑 엊그제 얘랑 같이 있었던 분..이고요."
해인을 붙잡는 동훈의 손을 제지하며 선우가 말했다.
기가 막히다는 눈빛으로 동훈을 바라보는 선우.
동훈은 해인이 더이상 선우와 얽히면 안될 것 같아 아니라고 잡아 떼고 싶었지만 선우의 물음은 거의 확신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부정할 수조차 없었다.
"...네, 그러니까 이제 데려갈.."
"아뇨. 제가 데려가죠."
"..네?"
"오늘은 계산 너네가 해라. 다음에 내가 사마."
동훈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선우는 자신에게 기대어 쓰러진 해인을 들처업고 사라졌다. 어느새 자기 옆으로 다가와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는 기범때문에 선우를 따라가지도 못한 채 동훈은 그냥 한숨만 내 쉴 뿐이었다.
제발 해인이 술에서 깨어났을 때, 지금 방금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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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헤헤.. 5편입니다! ^ - ^
불쌍한 해인이... 이제 완전히 이미지 망가졌지요..ㅋㅋㅋㅋ
선우가 충격받았을라나~ㅋ
바람- 은 올렸으니 이제는 누구에게나 - 를 마무리 해야겠네여!!
역시 동시 두편은 너무 힘들어요..;ㅅ;)
그럼 모두들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