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공간이 너무 아득하게 느껴져서 눈을 뜨면 이 세상에 어디에도 없는 낯선 곳에서 현수와 나만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만 같았다.
"내 마음 알아요?"
현수가 입술을 떼고 내 귓가에 나지막히 속삭였다.
나는 살며시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몰라요. 그냥 이렇게 오래오래 있고 싶어요."
현수는 다시 나에게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현수가 나의 허리를 꼭 끌어 안고 있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받침대로 느껴져서 나는 편안하게 내 체중을 실었다. 그리고 내 입술에서 느껴지는 촉촉함 그리고 달콤함 나도 오래오래 느끼고 싶을 뿐이었다.
정훈 외에 이렇게 오래 같이 있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지금 당장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두렵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한손으로 그의 뺨과 귀를 어루만져보았다. 현수와 함께 있었던 시간은 많았지만 이렇게 체온과 피부 촉감을 느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부드러웠다.
"우리 구출 안되면 어떻게 하죠?"
현수가 물었다. 현수의 목소리에는 전혀 걱정스러움이 묻어 있지 않았다. 익살스럽게 묻고 있었다. 구출안되도 상관없다는 듯한 억양이었다.
"글세요..."
"여기서 살까요? 지금 기분같아선 평생 아무 것도 안먹어도 배가 안고플 것 같은데..."
엘리베이터에서 두 남녀가 일생을 보낸다?
그런 생각을 하자 엘리베이터 안에서 천천히 늙어가고 있는 두 남녀의 그림이 그려졌다.
현수나 나나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피부도 쪼글쪼글해질 것이다. 그렇게 서로 기대어 앉아 있다가 누군가 우리를 발견한다?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어보았다. 심각한 상황인데도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퀴즈를 낼까요? 자..우리가 여기서 구출당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나는 핸드폰이 떠올랐다. 위기 상황에서나 혹은 급한 상황에서 핸드폰만 연결된다면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나는 대답대신 핸드폰을 꺼내보았다. 안테나가 보이지 않았다.
"현수씨 핸드폰도 안돼요?"
현수도 그제야 핸드폰을 꺼내보았는데 역시 안테나는 뜨지 않았다.
"민아씨 엘리베이터 문에 대고 소리쳐 볼래요?"
"네?"
"남자인 나보단 민아씨 목소리가 멀리 갈 것 같아서요."
"네?"
실망이다. 이런 곳에서 나에게 소리치라고 시키다니...
나는 언짢은 표정으로 일단 엘리베이터 문쪽으로 향했다.
갑자기 뒤에서 '땡'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는 순간 현수가 다시 나를 끌어 안았다.
"몰랐어요? 다시 비상정지 버튼을 누르면 움직여요."
"네????"
현수의 말대로 다시 엘리베이터는 움직이기 시작하며 각 층수의 숫자를 지나 내 방이 있는 층에서 멈추었다.
"놀랬잖아요."
나는 다소 화가난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거짓말 말아요. 나랑 엘리베이터 안에서 살 생각을 했으면서..."
"아니에요. 난 어떻게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요."
나는 애써 현수의 말을 부정했다.
호텔 문앞에 도착했을 때 현수는 볼에 살짝 입맞춤을 했다.
"오늘은 이만큼만 친해졌다고 생각할게요. 낼은 어학원 원장을 만나야 해서 민아씨 가는 거 못볼 거에요. 대신 출발할 때 비행기 타기 전에 나한테 전화해줄래요?"
나는 호텔 방안에 들어와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 입으면서 아까의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상황을 생각하며 혼자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았다. 아주 오랫만에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면서 '내가 괜찮은 여자일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 잠든 거 아니죠?"
현수의 목소리였다.
"아뇨."
잠을 자고 있다가 깼더라도 남자의 전화에 자고 있다고 대답할 여자는 없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던 것처럼 연출하기 마련이다. 그 질문에 자고 있었다고 여자가 말한다면 그건 분명히 그 남자에게 마음이 없는 것이다.
"내일 공항에서 전화하라고 했는데 그 때까지 못 기다릴 것 같아서요."
"...."
엘리베이터에서 키스 사건 후로 갑자기 현수가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갑자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서로의 사정거리에 쭉 있었던 거에요. 다만 우리의 마음의 거리를 멀게 느껴지게 하는 것들이 많았죠. 나도 민아씨도 과거의 사랑의 그림자만 쳐다보고 있었으니까요. 아, 민아씨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저는 그랬던 거 같아요."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현수의 목소리는 전과 다르게 달콤하고 편안했다. 전화 통화는 가끔 하는 사이였지만 이렇게 오래 전화를 얘길 나누기는 처음이었다.
"전 많이 혼란스러워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 서울가서 만나면 어떨 것 같아요? 회사에서 만나면 어색할까요? 그런데 민아씨가 전과 같이 날 대하면 섭섭할 것 같아요."
그 동안 보아왔던 현수의 모습과 너무 달랐다.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현수도 사람에게 정해진 선을 그어놓고 그만큼만 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내일 공항에서 전화할게요. 잘 자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금 현수에게 대답한대로 아주 혼란스러웠지만 내일은 오늘의 다음날인 그냥 내일이 아니라 오늘과 아주 다른 내일이 될 것 같았다. 마치 소풍 전날 기대감에 부풀어 잠을 못자는 초등학생처럼 몸은 피곤하지만 점점 머리 속이 맑아져서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 텔레비전에 멍하니 시선을 두고 있을 뿐이었다.
시기적절한 남자(44)
http://blog.nate.com/blogon
[소설] 시기적절한 남자(44)
엘리베이터가 정지된 것처럼 시간도 정지된 것만 같았다.
시간과 공간이 너무 아득하게 느껴져서 눈을 뜨면 이 세상에 어디에도 없는 낯선 곳에서 현수와 나만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만 같았다.
"내 마음 알아요?"
현수가 입술을 떼고 내 귓가에 나지막히 속삭였다.
나는 살며시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몰라요. 그냥 이렇게 오래오래 있고 싶어요."
현수는 다시 나에게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현수가 나의 허리를 꼭 끌어 안고 있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받침대로 느껴져서 나는 편안하게 내 체중을 실었다. 그리고 내 입술에서 느껴지는 촉촉함 그리고 달콤함 나도 오래오래 느끼고 싶을 뿐이었다.
정훈 외에 이렇게 오래 같이 있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지금 당장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두렵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한손으로 그의 뺨과 귀를 어루만져보았다. 현수와 함께 있었던 시간은 많았지만 이렇게 체온과 피부 촉감을 느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부드러웠다.
"우리 구출 안되면 어떻게 하죠?"
현수가 물었다. 현수의 목소리에는 전혀 걱정스러움이 묻어 있지 않았다. 익살스럽게 묻고 있었다. 구출안되도 상관없다는 듯한 억양이었다.
"글세요..."
"여기서 살까요? 지금 기분같아선 평생 아무 것도 안먹어도 배가 안고플 것 같은데..."
엘리베이터에서 두 남녀가 일생을 보낸다?
그런 생각을 하자 엘리베이터 안에서 천천히 늙어가고 있는 두 남녀의 그림이 그려졌다.
현수나 나나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피부도 쪼글쪼글해질 것이다. 그렇게 서로 기대어 앉아 있다가 누군가 우리를 발견한다?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어보았다. 심각한 상황인데도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퀴즈를 낼까요? 자..우리가 여기서 구출당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나는 핸드폰이 떠올랐다. 위기 상황에서나 혹은 급한 상황에서 핸드폰만 연결된다면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나는 대답대신 핸드폰을 꺼내보았다. 안테나가 보이지 않았다.
"현수씨 핸드폰도 안돼요?"
현수도 그제야 핸드폰을 꺼내보았는데 역시 안테나는 뜨지 않았다.
"민아씨 엘리베이터 문에 대고 소리쳐 볼래요?"
"네?"
"남자인 나보단 민아씨 목소리가 멀리 갈 것 같아서요."
"네?"
실망이다. 이런 곳에서 나에게 소리치라고 시키다니...
나는 언짢은 표정으로 일단 엘리베이터 문쪽으로 향했다.
갑자기 뒤에서 '땡'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는 순간 현수가 다시 나를 끌어 안았다.
"몰랐어요? 다시 비상정지 버튼을 누르면 움직여요."
"네????"
현수의 말대로 다시 엘리베이터는 움직이기 시작하며 각 층수의 숫자를 지나 내 방이 있는 층에서 멈추었다.
"놀랬잖아요."
나는 다소 화가난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거짓말 말아요. 나랑 엘리베이터 안에서 살 생각을 했으면서..."
"아니에요. 난 어떻게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요."
나는 애써 현수의 말을 부정했다.
호텔 문앞에 도착했을 때 현수는 볼에 살짝 입맞춤을 했다.
"오늘은 이만큼만 친해졌다고 생각할게요. 낼은 어학원 원장을 만나야 해서 민아씨 가는 거 못볼 거에요. 대신 출발할 때 비행기 타기 전에 나한테 전화해줄래요?"
나는 호텔 방안에 들어와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 입으면서 아까의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상황을 생각하며 혼자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았다. 아주 오랫만에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면서 '내가 괜찮은 여자일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 잠든 거 아니죠?"
현수의 목소리였다.
"아뇨."
잠을 자고 있다가 깼더라도 남자의 전화에 자고 있다고 대답할 여자는 없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던 것처럼 연출하기 마련이다. 그 질문에 자고 있었다고 여자가 말한다면 그건 분명히 그 남자에게 마음이 없는 것이다.
"내일 공항에서 전화하라고 했는데 그 때까지 못 기다릴 것 같아서요."
"...."
엘리베이터에서 키스 사건 후로 갑자기 현수가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갑자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서로의 사정거리에 쭉 있었던 거에요. 다만 우리의 마음의 거리를 멀게 느껴지게 하는 것들이 많았죠. 나도 민아씨도 과거의 사랑의 그림자만 쳐다보고 있었으니까요. 아, 민아씨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저는 그랬던 거 같아요."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현수의 목소리는 전과 다르게 달콤하고 편안했다. 전화 통화는 가끔 하는 사이였지만 이렇게 오래 전화를 얘길 나누기는 처음이었다.
"전 많이 혼란스러워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 서울가서 만나면 어떨 것 같아요? 회사에서 만나면 어색할까요? 그런데 민아씨가 전과 같이 날 대하면 섭섭할 것 같아요."
그 동안 보아왔던 현수의 모습과 너무 달랐다.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현수도 사람에게 정해진 선을 그어놓고 그만큼만 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내일 공항에서 전화할게요. 잘 자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금 현수에게 대답한대로 아주 혼란스러웠지만 내일은 오늘의 다음날인 그냥 내일이 아니라 오늘과 아주 다른 내일이 될 것 같았다. 마치 소풍 전날 기대감에 부풀어 잠을 못자는 초등학생처럼 몸은 피곤하지만 점점 머리 속이 맑아져서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 텔레비전에 멍하니 시선을 두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