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적절한 남자(47)

리드미온2004.10.18
조회3,887

http://blog.nate.com/blogon

 

[소설] 시기적절한 남자(47)

오랫만의 평화로운 일주일을 보낼 수 있었다.

가끔 정훈에게 안부 전화가 걸려오고 나는 회사에서 생긴 일이나 읽은 책에 대해서나 텔레비전 프로에 대해서 잡담을 했고, 현수는 회사에 눈인사를 교환하거나 레종을 본다고 집에 놀러오기도 했다.

정훈은 나에게 신중하게 생각할 것을 부탁했지만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보내는 것만 같았지만 마음은 편해졌다.

토요일은 아침부터 현아와 민석과 번갈아 전화를 하며 엄마의 연주회에 갈 준비를 했다. 처음에는 내가 현아와 민석의 집에 가기로 했는데 민석은 일부러 우리 동네까지 태우러 온다고 하는 등 분주했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동생의 배가 이제는 누가봐도 임신인 것을 알 수 있을만큼 볼록하다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쳐다봤다. 세상 모든 여자들이 임신을 한다고 하더라도 동생의 아기는 특별하게만 보였다.

"이젠 빨리 아기 낳고 옷 좀 제대로 입어 보고 싶어."

현아는 모처럼의 외출인데 제대로된 옷을 입지 못했다고 투정을 했다.

"이쁘다니깐... 누가 네 배만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운전석에 앉아 있는 민석이 현아를 위로하는 한마디를 했다.

나는 두 사람의 대화가 재밌다고 생각하는데 전화가 왔다.

아버지였다.

"야..아버지 전환데?"

나는 오늘 엄마의 연주회에 대해서 아버지가 모르리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전화가 걸려와서 놀래서 현아에게 말했다.

"정말?"

현아도 갑작스런 아버지의 전화에 놀랐다.

나는 일단 전화를 받았다.

"양재구민회관이 어디냐?"

아버지는 엄마의 연주회에 오려는 모양이었다.

"그게 양재나들목에서요...하훼공판장으로 나오시면요..."

나는 아버지에게 대충의 길을 설명해 드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가 오시려나보네..."

현아가 말했다.

"그러게...그래도 엄마 연주회가 궁금하시긴 한가보다."

생각해보면 엄마가 피아노를 좋아한다는 것은 누구보다 아버지가 잘 알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난 계기가 지금 고모의 피아노 레슨을 하다가 만난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어머니가 피아노 치는 모습에 대한 추억은 아버지만 갖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오늘 연주회에서 아버지와 엄마 뿐만 아니라 현아와 민석도 있었다. 얼마 전에 민석이 아버지를 찾아 갔다가 내가 결혼하기 전에는 안된다는 대답을 듣고 왔다고 하지 않은가...

엄마의 연주회라고 들 떠 있던 마음이 아버지의 출현으로 여러모로 불안해졌다.

연주회장 앞에서 아버지를 만났고 우리 일행은 나란히 앉아서 어머니의 연주회를 보았다.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내 눈에는 엄마밖에 보이지 않았다. 엄마 말대로 젊음애들 속에 섞여 실수하지 않을까 너무 긴장하지 않을까 여러 걱정을 하며 보았다. 이런 걱정에도 불구하고 연주회는 훌륭하게 끝났다. 아마추어들이라 대부분 연주자들과 아는 사람들이 와서 그런지 연주가 끝난 후의 박수 갈채도 친근함이 느껴졌다.

엄마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순이 다 되어서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 꿈은?

지금 나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연주회가 끝나고 우리에게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현아는 불편해 하는 것 같았지만 민석은 분위기를 생각해서인지 웃는 얼굴로 식당으로 향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가족이 한꺼번에 모여서 식사를 하는 일은...

분명히 어렸을 때는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언젠가부터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는 일이 연중행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어땠니?"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에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기 어려워하고 있는데 엄마가 먼저 물었다. 연주회가 어땠냐는 뜻이었을 것이다. 누구보다 그것이 궁금했을 것이다. 자신의 연주가 어떻게 보였을지...

"잘 하시던데요."

민석이 먼저 대답했다.

"그래도...30년 전만은 못하지..."

아버지가 말했다. 역시 아버지는 엄마가 피아노를 잘 칠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30년 전에 엄마 정말 피아노 잘쳤어요?"

"그랬다."

아버지의 대답은 역시 짧았다. 아버지는 그 모습에 반해 엄마와 결혼할 결심을 했을지도 모르는데...그런 결심을 했으면서도 정작 결혼해서는 피아노를 만져 보지 못한 엄마.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난 그래도 지금이 더 좋다. 그땐 피아노를 즐기는 법을 몰랐다고나 할까...주변에 모든 사람이 경쟁자로 보여서 그들을 이기는 것만 생각했었어. 나에게 피아노는 강박관념이었다고나 할까...이 피아노를 잘쳐야만 세상의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그냥 피아노를 치고 있음 마음이 편해."

엄마는 우리보다 아버지에게 얘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때 피아노를 못하게 된 것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는다고...그리고 다시 피아노를 하게 된 것에 대해서도 인정받고 싶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이미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엄마의 연주회까지 온 것이 아닌가...

메뉴를 고르는데 현아는 까다로웠다. 육류는 먹고 싶지 않다고 생선을 골랐는데 생선 종류는 연어밖에 없다고 하자 샐러드나 먹는다고 했다.

"입덧이 지나갔을 것 같은데...그러네.."

엄마가 옆에서 한마디 했다.

"결혼 날짜 잡아라. 민석이 부모님에게도 전해라."

"정말요?"

아버지의 그 말에 가장 먼저 물어본 사람은 나였다. 내가 걸림돌인 것처럼 허락해주지 않는다고 했었는데...

그러나 진정 아버지가 허락을 한 건지 아니면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법칙 하에 포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허락이 떨어지자 민석과 현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부모님께 연락하겠습니다."

민석은 혹시라도 아버지 마음이 변할까 싶었는지 얼른 대답했다.

"그럼, 오늘은 연주회 축하 겸 현아와 민석 결혼 허락 축하 파티네요."

나도 아버지가 나중에 다른 말을 할 수 없도록 못박는 말을 했다.

"그리고...민아, 다음 주쯤에 선 하나 볼 거 있다."

또 선이라니?

현아의 결혼을 허락한다고 해도 나의 결혼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아버지의 뜻이리라.

그러나저러나 또 선이라니...언제쯤 결혼에 대해서 아버지는 나에게 위임을 해줄 것인지...

나는 싫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 분위기에서 내가 그렇게 말하면 혹시라도 어렵게 떨어진 현아와 민석의 결혼 허락이 취소될까봐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런 나의 노력 때문이었는지 오랜만에 가족 식사는 즐거운 분위기에서 마칠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태우고 갔고, 민석은 현아와 나를 태웠다.

차 안에서 현아는 들떠서 결혼식장이 어디가 좋을까, 야외 촬영을 할 것인가, 신혼 여행은 어떻게 할 것인지 끊임 없이 떠들고 있었다. 비록 지금이라도 허락이 떨어져서 잘된 일이었지만 혹시라도 나 때문에 조금 더 일찍 할 수 있는 결혼이 늦춰진 것이 아닌가 싶어서 미안하기만 했다.

나는 현아의 결혼을 많이 도와주겠다고 약속하고 집에 돌아왔다.

인터넷으로 결혼 준비에 대해 알아보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민아씨...저에요."

현수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현수의 핸드폰 번호는 아니었다. 외국에 있는 듯 낯선 번호였다.

"어디에요?"

"북경이요."

"네?"

어제까지만 해도 현수가 북경에 간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었다.

"아침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급하게 왔어요. 그런데 민아씨도 와주어야 할 것 같아요."

"제가요?"

도통 이해가지 않는 일이었다. 갑자기 현수가 북경에 갔고 나도 필요하다니...

이번에도 혹시 현수의 장난이 아닌가 싶었다.

"전에 그 여학생 기억나죠? 민아씨가 북경에 데리고 왔던..."

당연히 기억한다. 어머니와의 관계가 특별했고 나중에 비행기 안에서 친엄마가 아니라고 했던 것까지도...

"네..."

"그 여학생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