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적절한 남자(48)

리드미온2004.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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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시기적절한 남자(48)

"그 여학생이 왜요?"

도대체 그 여학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서 현수가 갑자기 북경까지 갔으며 또 나를 부르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자살 미수에요...유서에 민아씨에 관한 내용이 있었고요. 일단 사장님에게도 말씀드렸으니까 일단 민아씨가 오는 거엔 문제 없을 거에요. 지금 의식이 돌아오긴 했는데 의사가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하네요. 민아씨가 만나주면 좋을 것 같아요."

자살 미수라...

현수에게 더 묻기보다는 이왕 이렇게 된 일이니 나도 북경으로 가기로 했다.

다음 날 서둘러 가장 빠른 북경행 비행기를 탔다.

여학생이 왜 죽음을 생각했으며 그 순간에 왜 나를 필요로 했을까...

그래도 미수에 그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해야할까 많은 생각들이 머리 속에 떠다녔다. 어떻게든 이 세상은 살 만한 거라고 설득해야 할텐데...

그리고 현수도 걱정되긴 했다. 처음으로 학생을 보낸 경우인데 이런 대형 사고가 터져서 수습하느라고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사람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생각하기 마련인 것 같았다. 이승과 저승을 해매고 있는 여학생보다도 어떤 면에선 현수가 더 걱정되기도 했다.

북경 공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했다. 현수가 병실을 지켜야 하니까 공항에는 나오지 못한다고 나에게 찾아 오라고 했었다. 나는 영어로 여학생의 이름을 말하고 병실을 물었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여학생은 잠이 들어 있었다.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어 보였지만 푹 잠들어 있는 듯 했다.

나는 여학생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오느라 힘들었죠? 잠깐 나갈까요? 방금 잠들었으니까 자리를 비워도 될 것 같네요. 그리고 아무래도 여기서 얘기하는 것보다 밖이 나을 것 같아요."

"네."

나는 현수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내가 보긴 그냥 평범한 여학생으로 보였는데...여러 사연이 있더군요."

"미안해요. 저는 여학생한테 들어서 대충은 알고 있었는데 개인 사정 같아서 현수씨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그런 것 같더군요. 유서를 보니까..."

현수는 나에게 여학생이 썼다는 유서를 건네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나에겐 그 사람이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엄마가 없다는 운명이라는 것을 잊게 해주었지요.

그리고 난 영원히 그 사람과 함께 할 것이라고

나에게 준 사랑을 갚아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잃었습니다.

북경에 올 때 비행기를 함께 타고 온 언니에게 나의 마지막 길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저에 관한 얘기를 했던 사람으로 어쩌면 지금의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엄마, 행복하세요.

저는 영원히 엄마의 딸입니다.'

유서를 봐서는 여학생의 엄마가 원인이라는 것을 알겠지만 정확한 상황을 알 수는 없었다.

"엄마가 어떻게 된 건데요?"

"재혼을 했나봐요. 여학생이 여기 온 사이에...엄마와 갑자기 연락이 안되니까 여기저기 알아보았나봐요. 여학생은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자살을 시도했는데 학교에선 엄마에게 연락이 되지 않으니까 우리 유학원에 연락을 했던 거고요."

나는 여학생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엄마는 지금 피아노가 더 좋데요.'

라고 했었다. 그러나 그 말은 단지 여학생이 엄마에게 너무 의존하는 것 같아 조금 거리를 두라는 충고로서 한 말이었다.

엄마가 재혼했다고 해서 딸과의 관계를 버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 엄마가 피아노에 애정을 쏟는다고 해서 자식에 대한 애정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듯이 말이다.

아마도 이 여학생은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에 재혼을 했다고 해서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제 생각엔 엄마도 잘못하신 것 같네요. 차라리 딸하고 상의를 하면 서로 이해했을텐데 말에요."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내가 처음 공항에서 봤을 때는 어떤 비밀도 없어 보이는 모녀지간이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서로의 인생에 관해서는 얘기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게 바로 친엄마인가 아닌가의 차이 아닐까요? 엄마도 그런 얘기를 못했겠지요."

현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그렇게 생각 안해요. 더 지독한 친엄마도 많아요. 자식을 버리는 엄마도 있잖아요. 다만 딸을 생각해서 그랬겠지요. 그리고 엄마가 재혼을 한다고 딸을 버리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 여학생도 이제 스무살이 넘었고 더구나 외국 유학을 할 정도로 독립적인 존재라고요. 이 사람들은 다만 서로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 서로의 관계를 맺어가는 것을 몰랐던 거겠죠."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지금 여학생의 상태와 유서만 본다면 엄마는 결국 딸을 버리고 재혼한 나쁜 엄마가 된다. 그리고 여학생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진실은 그게 아닐 수도 있다.

여학생은 진정으로 엄마가 행복하길 바라기 보다는 자신의 자살로 자신의 배신했다고 생각한 어머니를 괴롭히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죽음이야말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큰 복수가 될 수 있다. 만약 이 여학생이 자살에 성공했다면 이 여학생의 엄마는 괴로운 나머지 일생을 보냈을 것이다.

"민아씨 얘기가 맞을 수도 있겠네요. 나도 어제부터 오늘까지는 여학생의 어머니를 원망했거든요."

세상에는 정의할 수 없는 수 많은 관계가 존재한다. 부부, 부모와 자식, 친구, 애인...그런데 진짜 그 관계의 안을 들여다 보면 한마디로 하기 어려운 많은 진실과 거짓 오해와 이해가 존재한다. 그리고 다들 자기 입장에서만 관계를 생각한다.

현수와도 마찬가지였다. 선을 보고 동거도 했고, 같은 회사에 다닌다. 그러나...우리 관계의 진실은 그것과 좀 다른 곳에 있지 않은가...

"나 배고파요. 뭐 좀 먹으러 가요."

나는 현수가 아무 것도 먹지 않은 것 같아서 함께 식당으로 가자고 했다. 그리고 하루였지만 이러저런 상황들로 인해 지친 현수가 기운 내기를 바랬다.

다시 병실로 돌아왔을 때 여학생은 잠이 깨어 있었다.

"언니!"

나를 보더니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넌 천국에 온 거야. 이제 앞으로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대신 엄마를 볼 수 없지. 어떻게 할래?"

"엄마는 연락 됐어요?"

"아니."

"그럼 엄마는 몰랐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할래? 다시 땅으로 내려 갈래?"

나는 웃으며 물었다. 여학생도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많은 생각을 했으리라...

"엄마가 재혼할 수도 있다는 거 왜 몰랐을까요?"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네가 어떤 남자를 좋아해서 결혼한다고 치자. 그럼 엄마는 안 섭섭했을까? 그 때 엄마는 자살했을까?"

"엄마는 늘 내가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길 바란다고 했어요. 그런데 저보다 엄마가 먼저 결혼할 줄은 몰랐어요."

"그러게 미래는 누구도 모르는 거야. 그렇게 엄마가 결혼한 게 억울하면 너도 똑같이 갚아줘. 멋진 남자와 결혼한다고 엄마한테 당당히 말하는 거야. 어차피 진짜 가족도 크면 다 각자가 되는 거야. 네가 친엄마가 아니라고 섭섭할 게 하나도 없어."

나는 여학생이 빨리 마음을 잡고 자신의 인생을 꾸려가길 바랬다. 인간은 약한 면과 강한 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한없이 약해진 인간은 또 한없이 강해질 수도 있다.

"고마워요. 언니!"

"진짜로 고마우면 내일이라도 커피라도 한잔 사주라. 북경의 스타벅스에 한번 가보자."

"네."

여학생은 큰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나의 몇 마디에 여학생을 자살로 몰고간 슬픔이 걷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슬픔을 걷어낼 의지가 있는가 였다. 그렇다며 나는 어느 정도 내 임무를 수행했다고 생각했다.

현수와 나는 여학생이 저녁을 먹고 잠이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밖으로 나왔다. 이주만에 다시 온 북경인데 날씨는 조금 더 쌀쌀해진 것 같았다. 현수는 예전처럼 쟈켓을 벗어 나에게 걸쳐주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주며 말했다.

"전에 못 본 야경 보러 가요."

"아뇨. 좀 피곤한데 호텔 가서 쉬고 싶어요."

나는 전에 현수가 말해준대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지금은 아침부터 비행기를 타고 와서 이것저것 처리하고 나니 녹초가 된 기분이었다. 아무리 멋있는 야경이라도 지금은 전혀 내키지 않았다. 그냥 잠시 편안하게 누워 있고 싶을 뿐이었다.

"호텔로 가는 건 좋은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