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적절한 남자(49)

리드미온2004.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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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시기적절한 남자(49)

"호텔 방을 하나 더 예약 못했어요. 정신이 없었거든요. 제 방에 침대가 두개 있긴 한데..."

현수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자신과 상관 없는 사람이라도 자살했다는 뉴스만 봐도 놀라는 게 사람이 아닌가...

"할 수 없죠. 하룻밤인데...괜찮아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호텔로 향했다. 어차피 예전에도 동거하면서도 아무 일 없던 사이가 아닌가...

호텔 방에 도착해서 현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샤워를 했다. 이 정도의 피곤함이라면 현수와 같은 방에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긴장감도 없이 바로 잠들 것 같았다.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창밖을 바라보던 현수가 불렀다.

"민아씨! 나름대로 여기 야경도 좋은데요."

현수는 내가 거절했다고 하더라도 야경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던 모양이었다.

나는 현수 옆으로 가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탄성을 지를 만큼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까만 도시에 별빛이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작은 불빛들이 군데군데 빛나고 있었다.

"그 여학생 돌봐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어요."

현수가 말을 꺼냈다.

왠지 레종이 죽었을 때 대화하던 때가 생각났다.

죽음과 생의 차이는 참 명확하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그 여학생의 자살이 성공했다면 우리는 이렇게 여유롭게 대화를 하고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학생이 살아 있기에 이렇게 피곤함도 느끼고 대화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여학생이 죽을 만큼 괴로웠다고 하더라도 결국 살았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맥주 한 잔 할래요?"

내가 먼저 맥주를 청했다. 자살을 목격한 동반자라는 느낌이 현수를 더 친근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네. 제가 가져오죠."

현수는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내서 내가 앉아 있는 의자 뒤쪽으로 와서 나를 끌어 안았다.

"오늘 고마워요. 정말 힘이 됐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나에게 키스를 했다. 그러고보니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키스한 후에 두번째 키스였다.

처음에 한 키스가 갑작스럽고 가슴이 두근거렸다면 지금은 지친 하루를 위로해주는 느낌이었다.

"전에 레종 때문에 저한테 연락했던 때가 생각나네요. 오늘 걱정스런 표정이 그 때하고 비슷해요."

"그래요? 그때도 민아씨가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되었는데... 아마 이런 느낌 때문인가봐요. 민아씨가 좋은 이유가...시기적절하게 제 옆에 있어주는..."

현수는 맥주를 따서 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마워요. 그런 거 있잖아요. 혼자라서 편하고 좋을 때 많아요. 옆에서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고, 전처럼 붐비는 영화관에서 혼자라면 영화도 볼 수 있고, 여행을 가더라도 상대방의 기분 맞추지 않고 내 맘대로 할 수도 있고, 저도 그걸 꿈꾸며 독립했지요. 그런데 아주 가끔은 내 옆에 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죠. 그 때 딱 내 옆에 있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 없을까...라고 아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바랄 때가 있죠."

나는 현수가 따 준 맥주를 한모금 마시고 말했다.

"민아씨...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뭐요?"

"진짜 사랑을 찾았어요?"

"글세요."

"실은 계속 물어보고 싶었는데, 남자친구 있잖아요. 결혼하고 돌아왔다는..."

"아..그 사람이요? 시간을 두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누군가와 함께 평생을 함께 한다는 건 급하게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럼 저에게도 기회가 있는 건가요?"

"하하..기회는 이 세상 모든 남자에게 있지요."

"그럼 경쟁자가 너무 많은데요."

"그래도 다섯 손가락 안에든 들어 있는 것 같아요."

"그걸로 부족한데요..."

"좋아요. 그럼 오늘 밤 기회를 드리지요. 다른 사람들을 물리칠 수 있는 무언가를 보여주면..."

"그건 말도 안돼요."

"왜요?"

"생각해보세요. 지금까지 한 게 얼마나 많은데요? 선보기 싫어하는 민아씨를 위해 선이 일찍 끝나도록 해줬고요. 집 구하는 민아씨에게 싸게 집도 구해줬고요. 진우라는 놈한테 당할 뻔 했을 때도 구해줬고, 우리 아버지한테 맞아죽을 뻔 했을 때도 구해줬고, 심지어 민아씨 회사를 위해 입사도 해줬고요. 또..."

"저는요? 선볼 때 제가 쥬스값도 냈고요. 미국 가는 현금이 필요하니까 바로 계약해줬고, 레종도 돌봐줬고요, 미국에서 돌아와서 집도 없을 때 같이 살아줬고요. 일도 못구하고 있는데 내가 구해줬고요. 또 이렇게 북경까지 와 있잖아요."

"그리고요?"

"그리고요..라뇨?"

"그리고 또 뭐가 있냐고요?"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키스한 건 왜 얘기 안 해요?"

"그러는 현수씨는 왜 얘기 안 해요?"

현수는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한번 더 키스하려고요."

그리고는 덥썩 키스를 했다. 이번에는 아주 길고 달콤한 키스가 계속 되었다.

"이제 몇 번째에요?"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왜요? 완전히 밀려난 거에요?"

"다 좋은데,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어요."

"뭔데요?"

"선봐서 만났다...이 것처럼 바보 같은 게 어딨어요?"

"그럼 어떻게 만났다고 할까요? 공항에서? 영화관에서? 공원에서?"

처음 만난 곳이 어디면 어떠랴...이현수, 이 남자...  불청객만 잔뜩 나타나는 내 인생에 단 한명의 시기적절한 남자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