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령 들린<서울공화국>,이를 어쩌나!-(상편)

권근일2004.10.24
조회132

●●●망령 들린<서울공화국>,이를 어쩌나!-(상편)


 

현재 지구상의 당상수의 국가가 지역이기주의의 횡포로 인해 국가의 '빈부격차 해소'와 '균형발전 정책'의 실행에 큰 타격을 받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한술 더 떠 지구상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막강한 지역이기주의인 '서울-중심주의'로 인해 빈부격차해소나 균형발전정책의 실행의 문제정도가 아니라, 뜻밖에도 법조인 그들 자신에 의해, 민주주의 핵심인 법치주의 그 자체가 흔들리고 훼손되어 각 분야에서의 준법정신의 해이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금번의 신행정수도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내용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지난 600년 동안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명언―<사람이 나면 '서울'로 보내고...><지방사람은 인간취급도 못 받는다><서울공화국>―등등은 서울거주자 이외의 모두가 공감하는 명언(?)임을 상기하여야 한다!))

 

이해관계 없는 중립적 위치에서 한번 솔직히 생각해보자.

우리들이 아끼며 사랑하는 위대한 동방의 등불 대한민국! 그러나 <서울>...서울은 별로 자랑스럽지가 못하다. (심각한 인구과밀이나 공해 등등은 제쳐두고라도...)

 

서울은 600여년 전(1392년) 이성계(이태조)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한양이란 이름으로 도읍지를 정했던 그 시점부터 수많은 사건과 불행한 이야기들을 생산해내며 오늘에 이르렀다.

우선 최초에 한양(서울)을 도읍(수도)지로 정한 이성계의 왕위 등극부터가 자랑스럽지 못한 반역의 역사요, 부정의(不正義)의 시발이었다.

 

함경도의 일게 무사였던 이성계는 1356년에 아버지 이자춘(李子春)과 협력하여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탈환하는 공을 세우는 것으로 출발하여 홍건적(紅巾賊)과 몇 차례의 왜구(倭寇)를 막아내는 등등으로 그 공로를 인정받으면서, 신진세력인 친명파(親明派)의 대표자가 되어 구세력인 친원파(親元派)와 대립하더니.....

 

고려 32대 우왕(禑王)때의 충신이자 장군으로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 침입을 격퇴하였고, 우왕 2년(1376년) 홍산(鴻山)싸움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르는 등 명성 높았던 친원파(親元派) 최영(崔瑩)이 우왕 14년(1388년)에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명(明)나라를 치고자 군사를 일으켜 왕과 함께 평양까지 출진했을 때, 그를 막고자 혈안이 되어있던 이성계는......

 

최영장군의 그 요동 정벌군을 위화도(威化島)에서 용케도 회군(回軍)시키면서 실권을 장악하더니, 곧이어 왕위를 뺏는 <왕위찬탈>에 성공하고는 최영장군을 살해·제거한 것은 물론, 이성계 자신의 병 문안을 마치고 개성으로 돌아가던 고려충신이자 유학자이던 정몽주(鄭夢周)까지 이방원(李芳遠)과 조영구(趙英珪)의 계략과 실행을 이용하여 선죽교(善竹橋)에서 쇠망치로 무참히 시해하기까지 했던 것이며, 그것으로도 안심이 안되어 왕족까지 거의 남김없이 학살했던 것이다. 그후 왕자의 난으로 이성계 자신도 왕위에서 밀려나 은둔생활을 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었다.

 

이렇게 별로 자랑스럽지도 못한 건국역사를 갖는 조선국의 최초의 수도가 바로 서울(한양)이었던 것이며, 그 이후 서울은 아주 유사한 더 많은 부끄러운 역사들을 품어야 하는 운명에 처하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1910년의 한일합방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된 불쌍한 나라의 서울은, 풍수지리학상의 미약한 힘이라도 남겨두게 될까봐 염려한 일본국 충신들에 의해, 주요 산의 여기저기 산등·산혈(山穴)에 쇠못이 박히는 운명을 맞았으며, 그것으로 일부는 이제 서울의 정기(精氣)와 국운이 급격히 쇠퇴·소멸하게 되었다고 비탄에 잠기기도 하였다 한다.

 

우리의 국운은 그래도 남아있었든지 1945년에는 해방을 맞았지만, 국가적 운명의 혈투는 여전히 우리들 몫이었고,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김구를 처리하지 않고는 대통령의 위치를 보장받을 수 없을 정도였으며, 그 또한 왕위를 뺏어 왕이 된 이성계가 정해둔 바로 그 동네 <서울>에서 국정을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얼마 후 장기집권의 횡포를 규탄하다 죽기도 하고 다치기도 했던 수많은 학생들은 그로 인한 보상이나 제대로 받으며 살고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그때의 정당명은 왜 <자유당>이었던지 모르겠다.

 

현대에 와서도 그 국운상의 부끄러운 전통은 이어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던지, 1961년의 대한민국 서울은 군사쿠데타의 군화로 무참히 짓밟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합법적 대통령을 밀쳐낸 1962년의 대통령 권한대행에 이은 1963년의 대통령취임 수순은 아주 자연스레 이루어졌었다. 그리고 그 또한 왕위를 뺏어 왕이 된 이성계가 정해둔 바로 그 동네 <서울>에서 국정을 보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으며, 타의에 의해 비참한 상태로 권좌를 떠나는 운명까지도 닮아야 했다!

 

그런데 그날들엔, 총칼 앞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우리들의 위대한 헌법재판소 재판장도, 대법관도, 변호사도, 대다수의 교수와 학생도, 그리고 우리들 2천만 순수 백성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에 대통령으로의 변신은 별문제 없이 잘 진행될 수 있었다. 그 시기에, 정의감에 불타 권력찬탈에 항거하며, 장기집권을 타도하며, 우리를 대신해 분연히 일어섰던 상당수의 자랑스런 우리네 학생들은 오늘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위치를 확보하고서 살고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그때의 정당명은 국민을 주인으로 대접하며 공동화합(共同和合)하자고 <민주공화(民主共和)당>이었던가?

 

1981년이라고 뭐 다를 바가 없었다. 위대한 대한민국 국군의 총 뿌리와 군화는 여전히 강했었다. 그날의 무혈쿠데타는 우리들<서울의 슬픈 운명>을 또 한번 확인시켜주는 일을 잊지 않았었다.

물론 그 또한 왕위를 뺏어 왕이 된 이성계가 정해둔 바로 그 동네 <서울>에서, 그 뒤를 이어 피 보는 쟁투 끝에 권좌를 얻어낸 <서울>이란 마을의 경무대에서, 그리고 또 군사쿠데타의 주역이 정적을 제거해가며 장기집권의 꿈을 키우던 바로 그 <서울> 그곳에서 국정을 보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으며, 더구나 비참하게 권좌를 떠나는 운명까지도 또 다시 답습해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쯤해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정의로운 영혼들에게 묵념이라도 한번 더 보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더욱 정의롭게 살아달라는 운명을 안고 살아남은 그날의 용감했던 남녀노소들은 지금 그날의 고통에 대한 보답이나 제대로 받으며 살고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권좌의 힘으로 비축해둔 거금의 1백분의 일이라도 이들을 위해 내 놓으면 좋으련만...쯔쯔쯔! 그런데 그때의 정당명은 국민을 주인으로 대접하며 정의롭게 살아나가자고 <민주정의(民主正義)당>이었던가?

 

이렇게 우리의 <서울>은 소위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조선왕조 500년을 포함한 지난 600년 동안 줄곧 정당성을 상실한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무사(武士) 출신자에 의한 지배로 점철된 역사를 전매특허라도 낸 것처럼 지니고있었다.

 

이와 같은 자랑스럽지 못한 <서울>의 운명과 연결된 <<만년(萬年) 약소국(弱小國)성>>국운을 이미 예측했던지, 그리고 또 최고의 도읍지, 즉 조선을 명나라·원나라(지금의 중국)보다 앞서가는 나라로 만들만한, 풍수지리학상의 도읍명당자리를 알고있었던지, 그 당시의 수많은 지식인들은 충청도 계룡산근처로 도읍을 옮기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천도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이성계를 임금으로 세운 바로 그 조선의 1등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도 부정하지 못한 사실이라는 일화도 있다.

 

현대로 다시 돌아와서, 문민정부 이후라고 <서울>은 그 수치스런 운명의 멍에를 확실히 벗어버린 것 같지가 않다. 오랜 세월 총칼과 군화가 맹위 떨치던 바로 그 자리에 이제는 필설(筆舌)과 정략과 망국적 <서울 이기주의>가 들어선 것이다.    

<'하'편에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