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삼년 전인가 보다. 소식 오랜 지인과 반가운 해후 끝에 가까운 곳에서 가을이나 보자고 어린이 대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서리가 내린 뒤끝의 바람은 소슬하지만 쌀쌀하게 불어와 찬 공기가 폐부 속으로 가볍게 스며들었다. 장기 출장 중인지라 겨울옷가지를 준비하지 못해 며칠 계속해 불어오는 찬바람에 한기를 느낀 가벼운 추위가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비맞은 허수아비처럼 추위에 움츠리는 내 모습을 보고 함께 산책하던 지인은 내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공원 안 가까운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향기롭고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넓은 창너머로 내려다보이는 가을 오진 공원의 현란한 단풍을 즐거워하며 우리는 그렇게 단풍 이파리 같은 붉고 노란 마음을 영혼 가득 담고 있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날씨 청명하여 옷자락이라도 하늘에 담그면 금방 옥색으로 물들만큼 시리고 청명한, 하늘 더 높은 가을날이었다. 나무다리 잘 걸린 연못가에 가을바람을 타고 하늘거리는 부들과 바람에 지친 햇볕에 반짝이는 억새를 핥으면서 일렁이는 춤사위를 따라다니는 은파가 만추의 정경을 한 폭 동양화인 듯 곱게도 가을을 뽐내는 사이사이, 도심에서 볼 수 없는 다람쥐 한 마리가 앞발을 앙증맞게 모아 세수를 하는 정경은, 어릴 적 뒷동산에 올라 하늘바라기하며 금잔디에 누워 졸음 오는 가을 속으로 내달렸던, 안개처럼 흩어졌던 나의 향수를 반추하는 한 폭 그리움이었으니 찌들고 멍든 세속의 아집과 욕심을 쉽사리 잊을 수 있는 청담하고 풍요로운 가을 채색이었다. 그 속으로 스며드는 바람 속엔 잡스러운 정신은 다 빠진 소슬한 가을내음 뿐이었다.
잠시 향기로운 차 한 잔으로 온기를 적신 후 공원을 내려오다 보니 국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잘 다듬어진, 그리고 조형까지 더한 찬란한 국화의 그 현란함과 풍성하고 기이한 형태의 조화에 나는 넋을 잃고 국화 앞에서 정신은 다 빠지고 등신만 남은 빈 껍질의 육신이 무아의 형용으로 서 있음을 나도 모르고 있었다. 나 자신도 잊음으로 향 짙은 국화 아래 서 있음을 발견하고 지인의 된 소리 한마디 없었다면 내 영혼은 저쪽 피안의 세계로 날아갔을지도 몰랐으리라. 시선이 가는 곳마다 보이는 국화, 국화꽃들 사이로 스며든 향기로움은 가을도 민망하여 찢어질 듯한 형용이 따로 없었다. 이만하게 무리 진 국화들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으며 인간이 매만져 놓은 형태의 아름다움과 숱하게도 다른 색깔의 꽃들, 대국(大菊)의 그 풍성한 권위와 소국(小菊)의 작지만 온화한 긍지, 색색의 국화꽃들에 몰입하여 체온을 녹일만한 향의 온유함에 등신이 되어가는 나를 바라보며 지인은 멋쩍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 이후 나는 국화꽃을 이전보다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우리 집 정원에 가을이면 몇 종류 되지는 않지만 국화꽃을 볼 수 있도록 제법 많은 국화를 심었다. 아랫집에 국화를 잘 키우는 선배 누님으로부터 꺾꽂이로 배양한 귀한 여러 색들의 국화를 지난여름에 분양을 받아 제법 다양한 구색도 갖추었다. 그 국화가 지금 마당에 한창이다. 노란 황국이 먼저 피어나더니 자주색 소엽 국화도 질세라 피었고 흰 국화도 활짝 피었다. 지난 장날 잘 핀 자주색 큰 꽃 국화 한 분을 사들였다. 입 넓은 분에 옮겨 심은 후 베란다에 놓고 나는 지금 국화를 바라보며, 국화향에 취하며 이 글을 쓴다. 이 아니 즐거운 일이 아닌가.
成禮兮會鼓 성례혜회고 예를 갖추어 일제히 북을 치고
傳芭兮代舞 전파혜대무 파초를 건네며 번갈아 춤을 추는
?女倡兮容與 과녀창혜용여 아리따운 무녀들 노래 은은하고
春蘭兮秋菊 춘란혜추국 봄에는 난초 가을에는 국화
長無絶兮終古 장무절혜종고 길이길이 끊임없이 이어져라
BC 300(?)년대의 사람 “굴원(屈原)”의 초사(楚辭)에 보이는 “진혼가(鎭魂歌)”다. 굴원은 더러운 세태와 가증스런 현실 속에서 번민하며 고민한, 너무나 강직한 성격 탓에 속인들에게 용납되지 않아 갖은 모함 속에서 현실을 염오한 나머지 그 속에서 벗어나려 하면서도 죽는 날까지 벗어나지 못한 애국심과 우수에 빠진 정치인이자 문장가였다. 그의 시절, 이미 수천 년 전에도 국화는 사랑받는 꽃이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국화는 중국이 그 원산지라고 한다. 굴원의 초사(楚辭)에는 또 다른 국화에 대한 기록이 있다. “아침에는 목란의 이슬을 마시고 저녁엔 가을 국화의 꽃을 씹는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 국화가 언제 우리나라에서 재배되었는지는 몰라도 재배 국화의 기원에 대해서는 고려 충숙왕 때 원나라에서 학정홍·소설백 등 여러 품종의 국화를 다른 꽃들과 함께 도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도 오래 전부터 국화는 있었다. 중국 송나라 때의 양국대가(養菊大家)인 유몽의 국보(菊譜)에는 품종에 신라국(新羅菊)의 이름을 들고 일명 옥매 또는 능국(陵菊)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고, 또 일본의 [왜한삼재도회]에서는 4세기 경에 백제에서 청·황·홍·백·흑 등 오색의 국화가 일본에 수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보아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또는 그 이전부터 이미 국화가 있었고 중국으로부터 도래된 국화와 더불어 재배 또는 교류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중국과 같이 국화의 원산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서양에서는 가을에 피는 꽃의 꽃말에 일반적으로 어두운 이미지가 많다. 결실의 가을인 동시에 쓸쓸한 계절, 닥쳐올 겨울의 어두움을 가을꽃에 이미지를 붙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꽃의 상징성의 문제에 더 깊은 뜻을 두고 있다. 매란국죽(梅蘭菊竹)을 사군자라 일컬어온 것은 유교적인 덕목에서 보는 꽃의 인식이다.
가을을 상징하는 꽃은 말할 것도 없이 국화이다. 그래서 가을을 ‘국추(菊秋)’라고도 하고 9월을 ‘국월(菊月)’이라고도 한다. 국화는 가을에 서리를 이기고 피어나기 때문에 불굴과 절개를 상징한다. 국화는 뭇꽃들이 다투어 피는 봄이나 여름을 피하여 황량한 늦가을에 고고하게 피어난다. 자연의 현상에서 인생의 진실을 배웠던 우리 선조들은 늦가을 찬바람이 몰아치는 벌판에서 외롭게 피어난 그 모습을 보고 이 세상의 모든 영화를 버리고 자연 속에 숨어사는 은사(隱士)의 풍모를 느꼈기에 ‘국화는 은일자(隱逸子)’ 라는 성격을 부여하고 국화는 은군자(隱君子) 또는 은사라는 별명도 갖게 되는 하나의 선을 획책해 놓은 꽃으로 위치를 굳힌 꽃이다.
국화의 생태는 인간사회에서의 현실저항을 상징한다. 또 오랜 세월 격정과 고통을 견디어 낸 인간의 인고와 희생을 상징한다. 그리고 외압에 굴하지 않고 굳은 의지로 살아가는 기골 찬 인물에 비유되기도 하고 온갖 무서운 고초에도 굴하지 않는 충절과 여인의 절개를 상징하기도 한다.
조신(曺伸)이 지은 [소문쇄록]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조선 중종 때의 문신 황여헌이 당시의 명역관이었던 조신에게 국화를 달라고 했다. 조신은 모란을 캐어 보냈다. 황여헌이 재차 국화를 달라고 했으나 조신은 여전히 그와 같이 했다. 세 번까지 이르렀는데도 역시 그와 같이 했다. 여기에서 조신은 국화를 보내지 않고 계속 모란을 보냄으로써 자신의 의사를 상대방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즉 황여헌이 번화한 것을 좋아한다고 그를 조롱한 것이다. 그리고 아량이 없어 군자다운 사람이 못 된다고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설총의 [화왕계]에서 ‘모란은 임금’이고 ‘장미는 미희’이며 ‘할미꽃은 선비’로 나온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꽃의 문화도 변하여 후대로 내려오면 국화는 선비의 상징성을 농후하게 품은 꽃이 된다. 선비가 그의 집 뜰에 모란이나 작약을 심지 않고 굳이 동쪽 울 밑에 국화를 심어놓았다면 그것은 모든 부귀영화를 등지고 유유자적하면서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그 뜻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선비가 거처하는 집이나 그 주위에 심은 꽃을 보고도 그 선비의 의사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이 우리 선조들이 보는 꽃의 상징세계에 대한 인식이었다.
국화의 고귀하고 고결하며 성숙한 모습의 이미지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국화는 험한 환경에 강한 꽃이라는 것이 그 이유인 것 같다. 국화가 생장해서 성숙하여 꽃을 피우기까지의 과정은 봄에 싹을 틔우고 여름 뙤약볕을 견뎌내다가 가을도 늦은 서리를 맞고 난 이후 한기에 시달리면서 꽃을 피우는 그 가치를 실로 높이 본 것이다. 시인 서정주는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고, 먹구름 속에서 천둥이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라고 했다. 그리고 국화는 그해의 마지막 피는 꽃으로서 인간의 노숙한 경지와 같이 본다는데 있다.
조선시대 광해조 때에 시화(詩禍)로 죽음을 당한 석주(石洲) 권필은 솔·대·매화·국화·연을 소재로 지은 시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식물 중에는 가지와 잎을 사랑할 만한 것이 둘이 있으니 소나무와 대나무이며, 꽃을 사랑할 만한 것이 둘이니 매화와 국화이고, 꽃과 잎을 모두 사랑할 만한 것은 하나인데 연꽃이다. 내가 평생에 이 다섯 가지를 심히 사랑하였다.”
음력 9월9일을 중구일(重九日)이라고도 하고 중양일 또는 중양절이라고도 한다. 중구는 9가 겹쳤다는 뜻이고 중양은 양(陽)이 겹쳤다는 뜻이다. 중양절은 극한에 달한 양기가 일전하영 음기(겨울)로 향하고자 하는 계절의 마디에 있는 날이다. 바로 어제(10월 22일)가 중양절이다. 중양일이 되면 단풍이 들고 국화가 만발하기 때문에 국화보기와 단풍구경을 즐겼는데 이를 ‘중양풍국유(重陽楓菊遊)’라고 했고 국화 구경을 즐겼다하여 ‘상국일(賞菊日)’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사라진 풍습이지만 중양일이 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국화전과 국화주이다. 노란 국화꽃잎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하여 둥근 떡을 만들어 그것을 지진 국화전을 먹었다. 술에 국화를 넣어서 빚은 국화주는 그 향기가 일품이었다. 중양절의 놀이에는 이 국화주가 필수적이었다. 중양절의 국화주를 소재로 한 시는 대단히 많기도 하거니와 ‘각설이 타령’에도 “구자나 한 장 들고 보니 9월이라 9일 날에 국화주가 좋을시고”라는 구절을 볼 수 있다.
국화에 대한 여러 상징과 인식의 세계를 살펴보았지만 국화에 대한 찬양은 문학세계에서도 끝이 없는 소재로 수 없이 남아 있다. 재주 없으니 국화를 대하는 내 진솔한 마음을 풀어낼 길은 없어도 국화를 보는 마음만은 옛 선인들의 그것과 다름이 없다. 오늘 따스한 가을 go햇살 두어 줌 스며드는 베란다에 앉아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우리 집 마당의 국화를 바라보며 가을 속에 동화된 것만으로 나 또한 국화가 되어 있다. 국화를 바라보며 사리(私利)에 밝혀들었던 심보 작은 마음을 국화와 같이 어떠한 역경이나 고난 속에서도 꿋꿋한 삶을 지켜나가는 도리를 배움도 자못 깊고도 맑은 길이라는 것을 앎이 가을날 청청하게 피어난 국화의 교훈일 것이다. 시인 이은상은 그의 [국화삼도(菊花三到)]라는 글에서 “국화에서는 충담·청원·정고의 세 가지가 생명”이라고 하고 있다.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 동풍 다 보내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는다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 뿐인가 하노라
‘이정보’가 읊은 이 시조는 서릿발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꽃을 피우는 국화를 노래함으로써 국화의 높은 지조와 고고한 기풍을 흠모하고 찬양한 것이다. 국화의 고상한 인품, 굳은 절개는 눈서리도 이를 침노할 수 없고, 높은 지조는 무서운 무기로도 결코 굽히게 할 수 없는 것이리라. 서리 내리는 늦가을 찬바람이 불어오는데 헐벗은 뜰에 외로이 피어 차라리 얼지언정 뭇꽃들과 같이 할 수는 없다는 꽃, 그래서 봄철에 피는 요염한 꽃들도, 또 작열하는 태양 아래 피어나는 진한 빛깔의 꽃들도 차라리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는 꽃이 국화꽃이다. 청명한 가을 하늘아래 맑고 그윽한 향을 따라 벌들이 꼬이는 그 꽃 속으로 나도 꼬여들기는 마찬가지인가 보다.
2004 10 24
푸 른 바 다
♪* 가을 테마 연주곡 모음 *♪
Richard Clayderman - 야생화 연주곡 - 사랑보다 깊은 상처 연주곡 - 가을의 속삭임 연주곡 - 검은 상처의 블루스 연주곡 - 로망스(가을동화 삽입곡) 연주곡 - 로라 연주곡 - Autumn Leaves(고엽) 연주곡 - 집시의 바이얼린 연주곡 - 리멘시타 연주곡 - 이사도라 연주곡 - 별밤의 세레나데 비발디 사계중 - 가을 영화음악 - 가을의 전설 메인테마 Claude Ciari - La playa (안개 낀 밤의 데이트)
국화가 있기에 가을이 있다 / 104
국화가 있기에 가을이 있다
수 삼년 전인가 보다. 소식 오랜 지인과 반가운 해후 끝에 가까운 곳에서 가을이나 보자고 어린이 대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서리가 내린 뒤끝의 바람은 소슬하지만 쌀쌀하게 불어와 찬 공기가 폐부 속으로 가볍게 스며들었다. 장기 출장 중인지라 겨울옷가지를 준비하지 못해 며칠 계속해 불어오는 찬바람에 한기를 느낀 가벼운 추위가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비맞은 허수아비처럼 추위에 움츠리는 내 모습을 보고 함께 산책하던 지인은 내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공원 안 가까운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향기롭고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넓은 창너머로 내려다보이는 가을 오진 공원의 현란한 단풍을 즐거워하며 우리는 그렇게 단풍 이파리 같은 붉고 노란 마음을 영혼 가득 담고 있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날씨 청명하여 옷자락이라도 하늘에 담그면 금방 옥색으로 물들만큼 시리고 청명한, 하늘 더 높은 가을날이었다. 나무다리 잘 걸린 연못가에 가을바람을 타고 하늘거리는 부들과 바람에 지친 햇볕에 반짝이는 억새를 핥으면서 일렁이는 춤사위를 따라다니는 은파가 만추의 정경을 한 폭 동양화인 듯 곱게도 가을을 뽐내는 사이사이, 도심에서 볼 수 없는 다람쥐 한 마리가 앞발을 앙증맞게 모아 세수를 하는 정경은, 어릴 적 뒷동산에 올라 하늘바라기하며 금잔디에 누워 졸음 오는 가을 속으로 내달렸던, 안개처럼 흩어졌던 나의 향수를 반추하는 한 폭 그리움이었으니 찌들고 멍든 세속의 아집과 욕심을 쉽사리 잊을 수 있는 청담하고 풍요로운 가을 채색이었다. 그 속으로 스며드는 바람 속엔 잡스러운 정신은 다 빠진 소슬한 가을내음 뿐이었다.
잠시 향기로운 차 한 잔으로 온기를 적신 후 공원을 내려오다 보니 국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잘 다듬어진, 그리고 조형까지 더한 찬란한 국화의 그 현란함과 풍성하고 기이한 형태의 조화에 나는 넋을 잃고 국화 앞에서 정신은 다 빠지고 등신만 남은 빈 껍질의 육신이 무아의 형용으로 서 있음을 나도 모르고 있었다. 나 자신도 잊음으로 향 짙은 국화 아래 서 있음을 발견하고 지인의 된 소리 한마디 없었다면 내 영혼은 저쪽 피안의 세계로 날아갔을지도 몰랐으리라. 시선이 가는 곳마다 보이는 국화, 국화꽃들 사이로 스며든 향기로움은 가을도 민망하여 찢어질 듯한 형용이 따로 없었다. 이만하게 무리 진 국화들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으며 인간이 매만져 놓은 형태의 아름다움과 숱하게도 다른 색깔의 꽃들, 대국(大菊)의 그 풍성한 권위와 소국(小菊)의 작지만 온화한 긍지, 색색의 국화꽃들에 몰입하여 체온을 녹일만한 향의 온유함에 등신이 되어가는 나를 바라보며 지인은 멋쩍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 이후 나는 국화꽃을 이전보다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우리 집 정원에 가을이면 몇 종류 되지는 않지만 국화꽃을 볼 수 있도록 제법 많은 국화를 심었다. 아랫집에 국화를 잘 키우는 선배 누님으로부터 꺾꽂이로 배양한 귀한 여러 색들의 국화를 지난여름에 분양을 받아 제법 다양한 구색도 갖추었다. 그 국화가 지금 마당에 한창이다. 노란 황국이 먼저 피어나더니 자주색 소엽 국화도 질세라 피었고 흰 국화도 활짝 피었다. 지난 장날 잘 핀 자주색 큰 꽃 국화 한 분을 사들였다. 입 넓은 분에 옮겨 심은 후 베란다에 놓고 나는 지금 국화를 바라보며, 국화향에 취하며 이 글을 쓴다. 이 아니 즐거운 일이 아닌가.
成禮兮會鼓 성례혜회고 예를 갖추어 일제히 북을 치고
傳芭兮代舞 전파혜대무 파초를 건네며 번갈아 춤을 추는
?女倡兮容與 과녀창혜용여 아리따운 무녀들 노래 은은하고
春蘭兮秋菊 춘란혜추국 봄에는 난초 가을에는 국화
長無絶兮終古 장무절혜종고 길이길이 끊임없이 이어져라
BC 300(?)년대의 사람 “굴원(屈原)”의 초사(楚辭)에 보이는 “진혼가(鎭魂歌)”다. 굴원은 더러운 세태와 가증스런 현실 속에서 번민하며 고민한, 너무나 강직한 성격 탓에 속인들에게 용납되지 않아 갖은 모함 속에서 현실을 염오한 나머지 그 속에서 벗어나려 하면서도 죽는 날까지 벗어나지 못한 애국심과 우수에 빠진 정치인이자 문장가였다. 그의 시절, 이미 수천 년 전에도 국화는 사랑받는 꽃이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국화는 중국이 그 원산지라고 한다. 굴원의 초사(楚辭)에는 또 다른 국화에 대한 기록이 있다. “아침에는 목란의 이슬을 마시고 저녁엔 가을 국화의 꽃을 씹는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 국화가 언제 우리나라에서 재배되었는지는 몰라도 재배 국화의 기원에 대해서는 고려 충숙왕 때 원나라에서 학정홍·소설백 등 여러 품종의 국화를 다른 꽃들과 함께 도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도 오래 전부터 국화는 있었다. 중국 송나라 때의 양국대가(養菊大家)인 유몽의 국보(菊譜)에는 품종에 신라국(新羅菊)의 이름을 들고 일명 옥매 또는 능국(陵菊)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고, 또 일본의 [왜한삼재도회]에서는 4세기 경에 백제에서 청·황·홍·백·흑 등 오색의 국화가 일본에 수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보아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또는 그 이전부터 이미 국화가 있었고 중국으로부터 도래된 국화와 더불어 재배 또는 교류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중국과 같이 국화의 원산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서양에서는 가을에 피는 꽃의 꽃말에 일반적으로 어두운 이미지가 많다. 결실의 가을인 동시에 쓸쓸한 계절, 닥쳐올 겨울의 어두움을 가을꽃에 이미지를 붙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꽃의 상징성의 문제에 더 깊은 뜻을 두고 있다. 매란국죽(梅蘭菊竹)을 사군자라 일컬어온 것은 유교적인 덕목에서 보는 꽃의 인식이다.
가을을 상징하는 꽃은 말할 것도 없이 국화이다. 그래서 가을을 ‘국추(菊秋)’라고도 하고 9월을 ‘국월(菊月)’이라고도 한다. 국화는 가을에 서리를 이기고 피어나기 때문에 불굴과 절개를 상징한다. 국화는 뭇꽃들이 다투어 피는 봄이나 여름을 피하여 황량한 늦가을에 고고하게 피어난다. 자연의 현상에서 인생의 진실을 배웠던 우리 선조들은 늦가을 찬바람이 몰아치는 벌판에서 외롭게 피어난 그 모습을 보고 이 세상의 모든 영화를 버리고 자연 속에 숨어사는 은사(隱士)의 풍모를 느꼈기에 ‘국화는 은일자(隱逸子)’ 라는 성격을 부여하고 국화는 은군자(隱君子) 또는 은사라는 별명도 갖게 되는 하나의 선을 획책해 놓은 꽃으로 위치를 굳힌 꽃이다.
국화의 생태는 인간사회에서의 현실저항을 상징한다. 또 오랜 세월 격정과 고통을 견디어 낸 인간의 인고와 희생을 상징한다. 그리고 외압에 굴하지 않고 굳은 의지로 살아가는 기골 찬 인물에 비유되기도 하고 온갖 무서운 고초에도 굴하지 않는 충절과 여인의 절개를 상징하기도 한다.
조신(曺伸)이 지은 [소문쇄록]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조선 중종 때의 문신 황여헌이 당시의 명역관이었던 조신에게 국화를 달라고 했다. 조신은 모란을 캐어 보냈다. 황여헌이 재차 국화를 달라고 했으나 조신은 여전히 그와 같이 했다. 세 번까지 이르렀는데도 역시 그와 같이 했다. 여기에서 조신은 국화를 보내지 않고 계속 모란을 보냄으로써 자신의 의사를 상대방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즉 황여헌이 번화한 것을 좋아한다고 그를 조롱한 것이다. 그리고 아량이 없어 군자다운 사람이 못 된다고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설총의 [화왕계]에서 ‘모란은 임금’이고 ‘장미는 미희’이며 ‘할미꽃은 선비’로 나온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꽃의 문화도 변하여 후대로 내려오면 국화는 선비의 상징성을 농후하게 품은 꽃이 된다. 선비가 그의 집 뜰에 모란이나 작약을 심지 않고 굳이 동쪽 울 밑에 국화를 심어놓았다면 그것은 모든 부귀영화를 등지고 유유자적하면서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그 뜻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선비가 거처하는 집이나 그 주위에 심은 꽃을 보고도 그 선비의 의사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이 우리 선조들이 보는 꽃의 상징세계에 대한 인식이었다.
국화의 고귀하고 고결하며 성숙한 모습의 이미지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국화는 험한 환경에 강한 꽃이라는 것이 그 이유인 것 같다. 국화가 생장해서 성숙하여 꽃을 피우기까지의 과정은 봄에 싹을 틔우고 여름 뙤약볕을 견뎌내다가 가을도 늦은 서리를 맞고 난 이후 한기에 시달리면서 꽃을 피우는 그 가치를 실로 높이 본 것이다. 시인 서정주는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고, 먹구름 속에서 천둥이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라고 했다. 그리고 국화는 그해의 마지막 피는 꽃으로서 인간의 노숙한 경지와 같이 본다는데 있다.
조선시대 광해조 때에 시화(詩禍)로 죽음을 당한 석주(石洲) 권필은 솔·대·매화·국화·연을 소재로 지은 시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식물 중에는 가지와 잎을 사랑할 만한 것이 둘이 있으니 소나무와 대나무이며, 꽃을 사랑할 만한 것이 둘이니 매화와 국화이고, 꽃과 잎을 모두 사랑할 만한 것은 하나인데 연꽃이다. 내가 평생에 이 다섯 가지를 심히 사랑하였다.”
음력 9월9일을 중구일(重九日)이라고도 하고 중양일 또는 중양절이라고도 한다. 중구는 9가 겹쳤다는 뜻이고 중양은 양(陽)이 겹쳤다는 뜻이다. 중양절은 극한에 달한 양기가 일전하영 음기(겨울)로 향하고자 하는 계절의 마디에 있는 날이다. 바로 어제(10월 22일)가 중양절이다. 중양일이 되면 단풍이 들고 국화가 만발하기 때문에 국화보기와 단풍구경을 즐겼는데 이를 ‘중양풍국유(重陽楓菊遊)’라고 했고 국화 구경을 즐겼다하여 ‘상국일(賞菊日)’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사라진 풍습이지만 중양일이 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국화전과 국화주이다. 노란 국화꽃잎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하여 둥근 떡을 만들어 그것을 지진 국화전을 먹었다. 술에 국화를 넣어서 빚은 국화주는 그 향기가 일품이었다. 중양절의 놀이에는 이 국화주가 필수적이었다. 중양절의 국화주를 소재로 한 시는 대단히 많기도 하거니와 ‘각설이 타령’에도 “구자나 한 장 들고 보니 9월이라 9일 날에 국화주가 좋을시고”라는 구절을 볼 수 있다.
국화에 대한 여러 상징과 인식의 세계를 살펴보았지만 국화에 대한 찬양은 문학세계에서도 끝이 없는 소재로 수 없이 남아 있다. 재주 없으니 국화를 대하는 내 진솔한 마음을 풀어낼 길은 없어도 국화를 보는 마음만은 옛 선인들의 그것과 다름이 없다. 오늘 따스한 가을 go햇살 두어 줌 스며드는 베란다에 앉아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우리 집 마당의 국화를 바라보며 가을 속에 동화된 것만으로 나 또한 국화가 되어 있다. 국화를 바라보며 사리(私利)에 밝혀들었던 심보 작은 마음을 국화와 같이 어떠한 역경이나 고난 속에서도 꿋꿋한 삶을 지켜나가는 도리를 배움도 자못 깊고도 맑은 길이라는 것을 앎이 가을날 청청하게 피어난 국화의 교훈일 것이다. 시인 이은상은 그의 [국화삼도(菊花三到)]라는 글에서 “국화에서는 충담·청원·정고의 세 가지가 생명”이라고 하고 있다.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 동풍 다 보내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는다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 뿐인가 하노라
‘이정보’가 읊은 이 시조는 서릿발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꽃을 피우는 국화를 노래함으로써 국화의 높은 지조와 고고한 기풍을 흠모하고 찬양한 것이다. 국화의 고상한 인품, 굳은 절개는 눈서리도 이를 침노할 수 없고, 높은 지조는 무서운 무기로도 결코 굽히게 할 수 없는 것이리라. 서리 내리는 늦가을 찬바람이 불어오는데 헐벗은 뜰에 외로이 피어 차라리 얼지언정 뭇꽃들과 같이 할 수는 없다는 꽃, 그래서 봄철에 피는 요염한 꽃들도, 또 작열하는 태양 아래 피어나는 진한 빛깔의 꽃들도 차라리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는 꽃이 국화꽃이다. 청명한 가을 하늘아래 맑고 그윽한 향을 따라 벌들이 꼬이는 그 꽃 속으로 나도 꼬여들기는 마찬가지인가 보다.
2004 10 24
푸 른 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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