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의 과일 감과 고욤 / 106

김명수2004.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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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의 과일 감과 고욤 / 106

 

서정의 과일 감과 고욤


활활 불붙듯이 타 ‘만산홍엽(滿山紅葉)’을 이루는 단풍은 쪽빛하늘에 그 아름다움을 절정으로 더한다. 그래서 이 가을에 무릇 정감 깊은 사람들은 무명시인이 되어 자신의 가슴까지도 태우고 있다. 단풍처럼 타고 싶은 뜨거운 사람들은 단풍놀이를 즐기려 단풍만큼이나 색색인 나들이 옷차림으로 단풍 좋다는 나라 안의 명산대천을 찾아듦에 따라 가을날 빛 잔치는 더욱 화려하게 펼쳐진다. 사람들의 얼굴도 단풍 못지않게 타오른다. 단풍 앞에서는 사람도 단풍이 든다.


산도 타고 사람도 타들어가는 그 원초적인 단풍의 대열에 새악시 볼처럼 붉게 익은 감과 함께 감나무 잎도 단풍들어 빛 잔치에 한몫 한다. 남도 사투리를 그대로 살려 쓴 남도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김영랑이 쓴 시 [오-메 단풍 들것네] 에도 감잎 단풍든 것에 남도말로 찬탄한다.


          “오-메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붉은 감잎 날아와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메 단풍 들것네


당나라시대의 시인 한유(韓愈)는 단풍든 감나무를 활활 타오르는 화신(火神)으로 표현했다. 그만큼 감나무 단풍도 빠지지 않는 가을 단풍이었다. 가을이 있다면 감이 있고, 감이 익으면 가을은 깊어간다. 감이 없는 가을은 상상만 해도 서정이 없는 가을이고 시골을 고향으로 둔 사람이라면 감나무 없는 고향을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감나무는 마을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있었다. 집단적으로 키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디를 가나 마을이 있는 곳이면 흙 담벼락에 초가지붕을 이고 시늉만으로 싸리 울타리를 엮어 담장을 두른 뒤에 마당에는 한두 그루의 감나무를 심어야 제법 구색을 갖춘 집으로 알았다. 지금도 시골의 텃밭 한 귀퉁이에 터줏대감처럼 버티고 있는 감나무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친근한 나무다.


봄날 감꽃이 피면 아이들은 그 꽃을 따다가 실로 묶어 목걸이를 하고 다녔다. 그리고 허기지면 아깝지만 하나씩 빼 먹었다. 약간 씁쓸하면서도 아릿한 맛이 전부였지만 그냥 배고픔과 군것질하고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먹었다. 아침이면 감나무아래 떨어진 풋감을 주어다 소금물에 담가 두었다가 떫은맛을 뺀 뒤 그것도 맛나게 먹었다.


어린 시절 축축한 백열등 밑에서 몽당연필 꾹꾹 눌러가며 숙제를 하노라면, 어머니는 그 옆에서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홍시 몇 알을 내 책상 앞으로 슬며시 밀어 넣고는 나가셨다. 지금 생각하면 홍시 몇 알을 얻어먹기 위해 늦도록 공부하는 시늉을 했었는지도 모르리라.


감은 서리가 내릴 즈음에 완전히 익는다. 서리 때문에 열매가 늦게 익는 경우도 있다. 감은 겨울 내내 뒤안 마루 밑 독 안에 있다가 얼음이 녹을 무렵 홍시가 되어 나오는 것이야말로 혀끝을 살살 녹여 주었다. 햇살이 들지 않는 마루 밑 항아리 안에다 두면 겨우내 녹았다 얼었다 하면서 저절로 홍시가 됐다. 이렇게 갈무리된 홍시는 치아가 부실한 노인들이 즐겨하는 과일로는 최상의 것이었다.


홍시가 되기 전 떫은 감은 주로 곶감을 만드는데 쓰였다. 이 곶감이 어찌나 맛이 있고 무서웠든지 호랑이가 온데도 울음을 그치지 않던 아이가 곶감이라는 말을 듣고 울음을 뚝 그쳤다한다. 백수의왕 호랑이를 어수룩하고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만들어버린 곶감은 이제 국제적인 과일이 되어 세계시장을 누빈다고 한다.


고욤도 가을에 익는 토종 열매다. 하지만 가을에 고욤이 익었다고 해서 덥석 고욤열매를 먹었다가는 그 떫은맛에 한참 동안 입 안이 아린 경험을 해야 할 것이다. 무릇 고욤은 서리가 내린 뒤라야 제 맛을 낸다. 고욤 맛을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서리가 내린 뒤 고욤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면 마치 생 곶감을 씹는 듯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진다. 물론 워낙에 과육이 작은데다 씨가 또 반이어서 먹을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불만이긴 하다. 옛 속담에 “고욤 일흔이 감 하나만 못하다.”는 말도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서리 맞은 고욤 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감 하나를 버리고 일흔 고욤을 택할 것이 뻔하다. 이 맛을 새들도 아는지, 겨울 양식이 부족한 새들에게도 고욤은 훌륭한 먹을거리 노릇을 한다. 그러나 분명 수익성도 없고, 감보다 나을 것이 없는지라 요즘의 고욤은 감나무 접붙이기용으로만 남아 있을 뿐, 먹는 열매로는 천대와 괄시를 받고 있지만 시골을 고향으로 둔 사람이라면 궁벽했든 시절 고욤이 주는 향수는 과일이상의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충북 영동IC를 빠져나와 금강 상류 송천을 따라 들어서면 가을길녘에서부터 줄지어 나와 반기는 감나무 가로수길 30여Km는 산림청이 선정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이 있는 거리’이다. 감잎 붉게 단풍들어 제 잎을 태우고 떨어지는 사이사이 발갛게 익어 가는 감 익는 마을, 농부는 감나무에 올라 긴장대로 다 익은 감들을 따고 있다. 아니 잘 익은 결실의 가을을 따 내리고 있다. 그리고 집집마다 높은 원두막처럼 지은 감청에서는 이미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감꾸러미가 가을햇살에 홍조를 띠며 쫀득쫀득한 곶감이 되어 가고 있다. 감 익어가는 풍경 속으로 한번쯤 스며 볼만도 하리라. 우리 집 마당의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몇 알 남겨둔 감은 까치보다 더 잽싼 직박구리가 다 따먹은 지 오래다.


2004  10  29

 

김 명 수



서정의 과일 감과 고욤 / 106

 

Come Una Foglia (Tardi.낙엽의 사랑)

- Gigliola Cinquett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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