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은 아련히 들려오는 산새소리에 눈을 떴다. 따뜻한 이불속에서 일어나기를 조금 망설이고 있을 때, 방문 밖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놈아! 해가 네놈 똥 구명에 치받쳤는데, 아직도 자고 있느냐? 어서 일어나 나와라. 밥값을 해야지. 어서 냉큼 일어나 샘에 가서 물 좀 떠와라.”
“네, 어르신!”
노인의 호통에 정민은 깜짝 놀라 큰소리로 대답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재빨리 잠자리를 정리하며, 어제의 일을 생각했다. 집을 떠나 이곳에 와서 겪은 하루는 참으로 묘한 인연의 계속이었다. 생전 보도 못한 노인을 할아버지로 부르게 되었고 부엌에 들어갔다가 무언가에 놀란 뒤의 기억이 가물가물했고, 어떻게 해서 이방에 왔는지도 전혀 기억에 없었다. 정민이 이불을 정리하며 방안에서 꾸물거리자, 밖에서 다시 노인의 호통이 이어졌다.
“이놈아 무얼 복잡하게 생각하느냐? 어서 빨리 나와라, 안 그러면 우리 할망구가 아침밥이 없다고 하는 구나.”
“아, 네! 나가겠습니다, 어르신.”
정민은 정리를 대충 마치고 옷을 입은 다음 방문을 열고 나왔다. 노인은 깨끗한 한복에 중절모를 쓴 모습으로 지팡이를 들고 마당에 서있었다. 노인 옆에는 예의 여인이 그 서있었지만, 어제의 외모는 아니었고, 그저 미인형의 얼굴을 가진 곱게 늙은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정민은 어제의 외모를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자연스럽게 그 여인을 노인의 처로 받아 드렸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어르신? 그리고 할머님께서도 밤새 평안 하셨습니까?”
“그래 이놈아! 사내자식이 그렇게 간이 작아서 무엇에 쓸고. 그래 쥐새끼에 놀라 기절하는 놈이 네놈 말고 대명천지(大明天地)에 또 어디 있을까? 그렇게 멍청하게 있지 말고 어서물이나 길어 오너라. 그리고 아침밥 먹고 어제 일러 준대로해라. 나는 이 길로 서울에 가봐야 하겠다. 그럼 담에 보자!”
노인은 할 말을 다 하고는 더 볼일 없다는 것을 시위하듯 냉정하게 돌아서서 길을 나섰다. 정민은 멍청하니 말을 듣다가, 노인이 돌아서서 길을 떠나는 것을 보고 허둥거리며 뒤에다 대고 인사를 했다.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어르신!”
할아버지는 겉보기보다 날랜 걸음으로 정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정민은 할머니에게 물지게가 있는 곳을 묻자, 할머니는 손짓으로 물지게가 있는 곳과 물을 떠올 샘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정민은 물지게를 등에 졌다. 그리고 두 개의 물통을 달았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물지게를 지는 것이 어색했다.
알려준 대로 한 30분을 걸어서 샘에 도착했다. 단순히 집에서 보이는 작은 언덕을 넘으면 있다고 했는데 시계를 보니 삼십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학교를 다니면서 삼년 넘게 매일 아침구보를 해왔던 까닭에 그렇게 힘든지 몰랐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샘은 그렇게 많은 물이 고여 있는 곳이 아니었다. 모래바닥에서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물을 작은 표주박으로 모래가 섞이지 않게 조심스럽게 샘에서 물을 떠서 물통에 담았다. 두 개의 물통을 채우는데 만 꼬박 30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겨우 두 개의 물통을 채우고 물지게를 등에 지고 양쪽 고리에 물통을 하나씩 걸었다. 정민은 물지게를 지고 일어섰다. 묵직한 무게가 정민의 어깨를 눌렀고 걸음을 내딛는 순간 물이 출렁이며 몸이 비틀거렸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물이 출렁거림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닌데…, 앞으로 고생문이 훤하군!’
다시 물이 줄렁이지 않게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집을 향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물은 출령거리며 정민의 발을 적셨고, 신발에 물이 고여 질척이는 소리가 요란해질 때가 되어서야 집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꼬박 3시간에 걸친 첫 물 기르기의 결과는 통에 반만 남은 물과 땀에 젖은 몸, 그리고 물에 젖은 신발에서 정민의 자존심을 긁는 질척이는 소리였다.
이런 정민을 소리 없는 웃음으로 쳐다본 할머니는 손짓으로 밥을 먹으라고 했다. 정민은 마루에 차려져 있는 밥을 묵묵히 먹었다. 어제저녁과 거의 같은 반찬에 밥은 감자만 빠져있는 보리밥이었다. 그리고 정민이 밥을 먹는 내내 할머니는 반대편에 앉아서 이것저것을 챙겨주면서 살갑게 굴었다. 정민은 이런 할머니의 마음 씀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맛있게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정민은 노인의 지시대로 어제 깎던 목각을 다시 깎기 시작했다. 노인이 깎으라고 한 것은 정확히 세 벌, 여섯 개의 부조목각이었다. 두 개를 하나로 마주대면 하나의 완벽한 모양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각기 모양은 말, 새, 그리고 괴상한 물고기 모양인데 꼭 똑 같다고는 할 수 없는 약간 변형된 모습이었다. 정민은 이들 목각을 깎으면서 용도에 대한 의문이 떠올랐다.
‘이것들이 내가 써야할 물건들 이라고? 벽에 걸면 딱 어울릴 물건이구만. 매듭을 묶어 책상 앞에 걸면 더 좋을 물건인데 이게 다른 용도가 있을까? 어어 이런! 엉뚱한 곳을 깎고 말았네.’
정민은 잠시 딴 생각에 빠졌다가 실수를 하고 말았다. 노인이 주고 간 나무토막은 정확히 여섯 개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실수를 하게 되면 노인에게서 새로운 나무토막을 받아야 했다. 정민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걸 어떻게 한다. 할머니에게 다른 조각이 더 있는지 여쭈어 봐야 되겠군. 다음부터는 조심해야지.’
정민은 바로 하던 일을 그만 두고 할머니를 찾아 집 쪽으로 갔다. 할머니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집 주위를 부지런히 살폈다. 그러나 할머니의 모습은 집안 어느 곳에도 보이질 않았다.
‘어딜 가셨나? 에고 어떻게 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모두 작게 만들자. 내가 쓸 거라고 했으니 가지고 다니기 편하게 만들자.’
정민은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목각을 깎기 시작했다. 크기를 노인이 준 것들의 딱 절반 크기로 깎기 시작했다. 크기가 작아지다 보니 더욱 몰입하지 않으면 안 됐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할머니가 온 마음을 다해 목을 깎는데 열중하는 정민을 향해 소리 없이 접근했다. 그리고 정민의 옆에 앉아 정민이 하는 양을 유심히 보다가 소리 없이 키득대기 시작했다. 정민이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은 엄지손가락만한 목각을 깎고 있는 모습이 너무 우습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조금 큰칼로 조그마한 나무토막을 들고 조금씩 나무를 깎는 모습은 누가보아도 우스운 모습이었다.
정민은 할머니가 옆에서 한참을 지켜보며 있었는데도 느끼지 못하고 목각을 깎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런 정민을 웃음 띠고 한참을 바라보다 정민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기척을 냈다. 말을 못하는 할머니의 기척이라 해야 정민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이 제일이겠지만, 깎고 있던 목각이 잘못될까 그저 옆에서 자신이 있다는 걸 표현하려니 발로 땅을 구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정민은 할머니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결국 할머니는 조용히 자리를 벗어나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정민은 할머니가 다녀간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나무를 깎았다.
그렇게 계속하던 정민은 해가 넘어가 어둑어둑 해져서야 손을 멈추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 정민은 기지개를 펴서 오래 동안 앉아있어 굳은 몸을 풀었다. 시장기를 느끼고 부엌으로 다가 같다. 부엌에 거의 도착할 무렵 안에서 할머니가 밥상을 들고 나왔다. 부엌 앞에 멋 적게 서있던 정민을 발견하고 얼굴 한가득 소리 없는 웃음을 띠웠다.
밥상을 받아 들려는 정민에게 고개를 저으면서 직접 상을 들고 마루로 가서 아침과 마찬가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정민이 밥을 먹는 동안 내내 아침과 똑같이 붙어서 시중을 들었다. 정민은 아침에 한 번 겪은 일이기에 자연스럽게 밥을 먹었고, 잠시 마루에 앉아서 하늘에 반짝이는 볕들을 바라보다, 할머니가 부엌으로 가는 걸 보고 말을 했다.
“할머니, 그럼 저는 쉬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정민의 목소리를 들은 할머니는 뒤를 돌아보며 말없이 미소와 고개를 끄떡이며 알았다는 의사를 표했다. 정민이 방문을 열고 들어간 뒤, 서있던 할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아쉬움어린 표정으로 닫힌 방문을 바라보다 돌아서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날이후로 정민의 일상은 목각을 완성하기 까지 나날이 하루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물 길러오고, 아침 먹고, 목각을 깎다가 점심 생략, 저녁 먹고 잠자리에 가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목각을 다 깎는 동안 노인으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드디어 시작 30일 만에 여섯 개의 목각이 완성되었다. 두 개가 한 짝이 되는 엄지손가락만한 것이었다. 정민은 완성된 여섯 개의 목각을 살펴보며 실소를 터트렸다.
“후후, 너무 작게 만들었어. 열쇠고리 장식으로 쓰면 딱 이군. 그동안 깎을 땐 몰랐는데 내 솜씨도 상당하네. 이참에 이 길로 나서볼까?”
정민이 자아도취에 빠져 혼자 말을 응얼거릴 때 할머니가 옆으로 다가와 책을 불쑥 내밀었다. 한지로 묶인 고서였다. 정민이 책을 받자 이번에는 봉투를 내밀었다. 정민은 노인이 첫날 한말을 기억해내곤 책과 봉투를 받아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봉투를 여니 노인이 쓴 글이 있었다. 아주 간단한 글이었다.
- 수고했다.
물 깃는 것도 익숙해 졌으리라. 목각도 완성 되었을 것이니 목각들은 샘이 있는 곳에 가면 검게 죽은 고목을 찾아 그 밑둥치에 땅을 파고 묻었다가 네가 내 아들을 따라 하산할 때 다시 파서 몸에 지니도록 해라.
그리고 너에게 준책은 네가 읽고 익혀야 될 것이다. 반드시 물지게를 지고 익히는 것 잊지 말도록 해라. 지금은 쓸모가 없다고 느낄지 모르겠으나, 훗날 큰 도움이 될 것이니 성심성의를 다해 익히도록 해라. -
글을 다 읽고 난 정민은 곧바로 책을 펼쳤다. 책은 옛 한글로 적혀있어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제목은 없었다. 한쪽에 그림이 그려있고 설명이 다음 쪽에 있는 형태였다.
‘무슨 무술을 익히는 책인가? 어라 그것도 아니네! 이렇게 걸으면서 요렇게 가슴을 펴고, 숨은 이렇게 쉬고…! 에고야, 이거 완전히 양반걸음이네. 후후, 이렇게 걸으면 완전히 이상한 사람이 되겠다! 다음은…. 어허, 이건 완전히 발발이 걸음이네. 어디 이건….’
책을 넘기던 정민은 황당했다. 50쪽 모두가 하나같이 걸음걸이에 대한 것들뿐이었다. 전부 24가지의 걸음걸이에 대한 설명뿐이었고 그 밖의 내용은 전혀 없었다. 정민은 앞으로70일 동안 익혀야 될 것들이 걸음걸이라는 것에 허탈 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정민은 결국 익히기로 했다. 학교를 그만둔 뒤로 모든 곳을 정리하고 새로 출발 하려는 방편으로 이곳에 왔던 것이고 보니, 멍청하니 보내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을 정민은 했다.
그림자의 춤[影舞] 19 - 제1장 18
그림자의 춤[影舞] 19 - 제1장 지나온 세월, 그리고 새로운 출발 18 -내글-
- 새로운 출발은 항상 기분을 들뜨게 한다. 약간의 두려움을 주기도 하지만...
18
정민은 아련히 들려오는 산새소리에 눈을 떴다. 따뜻한 이불속에서 일어나기를 조금 망설이고 있을 때, 방문 밖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놈아! 해가 네놈 똥 구명에 치받쳤는데, 아직도 자고 있느냐? 어서 일어나 나와라. 밥값을 해야지. 어서 냉큼 일어나 샘에 가서 물 좀 떠와라.”
“네, 어르신!”
노인의 호통에 정민은 깜짝 놀라 큰소리로 대답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재빨리 잠자리를 정리하며, 어제의 일을 생각했다. 집을 떠나 이곳에 와서 겪은 하루는 참으로 묘한 인연의 계속이었다. 생전 보도 못한 노인을 할아버지로 부르게 되었고 부엌에 들어갔다가 무언가에 놀란 뒤의 기억이 가물가물했고, 어떻게 해서 이방에 왔는지도 전혀 기억에 없었다. 정민이 이불을 정리하며 방안에서 꾸물거리자, 밖에서 다시 노인의 호통이 이어졌다.
“이놈아 무얼 복잡하게 생각하느냐? 어서 빨리 나와라, 안 그러면 우리 할망구가 아침밥이 없다고 하는 구나.”
“아, 네! 나가겠습니다, 어르신.”
정민은 정리를 대충 마치고 옷을 입은 다음 방문을 열고 나왔다. 노인은 깨끗한 한복에 중절모를 쓴 모습으로 지팡이를 들고 마당에 서있었다. 노인 옆에는 예의 여인이 그 서있었지만, 어제의 외모는 아니었고, 그저 미인형의 얼굴을 가진 곱게 늙은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정민은 어제의 외모를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자연스럽게 그 여인을 노인의 처로 받아 드렸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어르신? 그리고 할머님께서도 밤새 평안 하셨습니까?”
“그래 이놈아! 사내자식이 그렇게 간이 작아서 무엇에 쓸고. 그래 쥐새끼에 놀라 기절하는 놈이 네놈 말고 대명천지(大明天地)에 또 어디 있을까? 그렇게 멍청하게 있지 말고 어서물이나 길어 오너라. 그리고 아침밥 먹고 어제 일러 준대로해라. 나는 이 길로 서울에 가봐야 하겠다. 그럼 담에 보자!”
노인은 할 말을 다 하고는 더 볼일 없다는 것을 시위하듯 냉정하게 돌아서서 길을 나섰다. 정민은 멍청하니 말을 듣다가, 노인이 돌아서서 길을 떠나는 것을 보고 허둥거리며 뒤에다 대고 인사를 했다.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어르신!”
할아버지는 겉보기보다 날랜 걸음으로 정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정민은 할머니에게 물지게가 있는 곳을 묻자, 할머니는 손짓으로 물지게가 있는 곳과 물을 떠올 샘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정민은 물지게를 등에 졌다. 그리고 두 개의 물통을 달았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물지게를 지는 것이 어색했다.
알려준 대로 한 30분을 걸어서 샘에 도착했다. 단순히 집에서 보이는 작은 언덕을 넘으면 있다고 했는데 시계를 보니 삼십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학교를 다니면서 삼년 넘게 매일 아침구보를 해왔던 까닭에 그렇게 힘든지 몰랐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샘은 그렇게 많은 물이 고여 있는 곳이 아니었다. 모래바닥에서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물을 작은 표주박으로 모래가 섞이지 않게 조심스럽게 샘에서 물을 떠서 물통에 담았다. 두 개의 물통을 채우는데 만 꼬박 30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겨우 두 개의 물통을 채우고 물지게를 등에 지고 양쪽 고리에 물통을 하나씩 걸었다. 정민은 물지게를 지고 일어섰다. 묵직한 무게가 정민의 어깨를 눌렀고 걸음을 내딛는 순간 물이 출렁이며 몸이 비틀거렸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물이 출렁거림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닌데…, 앞으로 고생문이 훤하군!’
다시 물이 줄렁이지 않게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집을 향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물은 출령거리며 정민의 발을 적셨고, 신발에 물이 고여 질척이는 소리가 요란해질 때가 되어서야 집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꼬박 3시간에 걸친 첫 물 기르기의 결과는 통에 반만 남은 물과 땀에 젖은 몸, 그리고 물에 젖은 신발에서 정민의 자존심을 긁는 질척이는 소리였다.
이런 정민을 소리 없는 웃음으로 쳐다본 할머니는 손짓으로 밥을 먹으라고 했다. 정민은 마루에 차려져 있는 밥을 묵묵히 먹었다. 어제저녁과 거의 같은 반찬에 밥은 감자만 빠져있는 보리밥이었다. 그리고 정민이 밥을 먹는 내내 할머니는 반대편에 앉아서 이것저것을 챙겨주면서 살갑게 굴었다. 정민은 이런 할머니의 마음 씀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맛있게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정민은 노인의 지시대로 어제 깎던 목각을 다시 깎기 시작했다. 노인이 깎으라고 한 것은 정확히 세 벌, 여섯 개의 부조목각이었다. 두 개를 하나로 마주대면 하나의 완벽한 모양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각기 모양은 말, 새, 그리고 괴상한 물고기 모양인데 꼭 똑 같다고는 할 수 없는 약간 변형된 모습이었다. 정민은 이들 목각을 깎으면서 용도에 대한 의문이 떠올랐다.
‘이것들이 내가 써야할 물건들 이라고? 벽에 걸면 딱 어울릴 물건이구만. 매듭을 묶어 책상 앞에 걸면 더 좋을 물건인데 이게 다른 용도가 있을까? 어어 이런! 엉뚱한 곳을 깎고 말았네.’
정민은 잠시 딴 생각에 빠졌다가 실수를 하고 말았다. 노인이 주고 간 나무토막은 정확히 여섯 개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실수를 하게 되면 노인에게서 새로운 나무토막을 받아야 했다. 정민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걸 어떻게 한다. 할머니에게 다른 조각이 더 있는지 여쭈어 봐야 되겠군. 다음부터는 조심해야지.’
정민은 바로 하던 일을 그만 두고 할머니를 찾아 집 쪽으로 갔다. 할머니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집 주위를 부지런히 살폈다. 그러나 할머니의 모습은 집안 어느 곳에도 보이질 않았다.
‘어딜 가셨나? 에고 어떻게 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모두 작게 만들자. 내가 쓸 거라고 했으니 가지고 다니기 편하게 만들자.’
정민은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목각을 깎기 시작했다. 크기를 노인이 준 것들의 딱 절반 크기로 깎기 시작했다. 크기가 작아지다 보니 더욱 몰입하지 않으면 안 됐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할머니가 온 마음을 다해 목을 깎는데 열중하는 정민을 향해 소리 없이 접근했다. 그리고 정민의 옆에 앉아 정민이 하는 양을 유심히 보다가 소리 없이 키득대기 시작했다. 정민이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은 엄지손가락만한 목각을 깎고 있는 모습이 너무 우습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조금 큰칼로 조그마한 나무토막을 들고 조금씩 나무를 깎는 모습은 누가보아도 우스운 모습이었다.
정민은 할머니가 옆에서 한참을 지켜보며 있었는데도 느끼지 못하고 목각을 깎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런 정민을 웃음 띠고 한참을 바라보다 정민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기척을 냈다. 말을 못하는 할머니의 기척이라 해야 정민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이 제일이겠지만, 깎고 있던 목각이 잘못될까 그저 옆에서 자신이 있다는 걸 표현하려니 발로 땅을 구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정민은 할머니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결국 할머니는 조용히 자리를 벗어나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정민은 할머니가 다녀간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나무를 깎았다.
그렇게 계속하던 정민은 해가 넘어가 어둑어둑 해져서야 손을 멈추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 정민은 기지개를 펴서 오래 동안 앉아있어 굳은 몸을 풀었다. 시장기를 느끼고 부엌으로 다가 같다. 부엌에 거의 도착할 무렵 안에서 할머니가 밥상을 들고 나왔다. 부엌 앞에 멋 적게 서있던 정민을 발견하고 얼굴 한가득 소리 없는 웃음을 띠웠다.
밥상을 받아 들려는 정민에게 고개를 저으면서 직접 상을 들고 마루로 가서 아침과 마찬가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정민이 밥을 먹는 동안 내내 아침과 똑같이 붙어서 시중을 들었다. 정민은 아침에 한 번 겪은 일이기에 자연스럽게 밥을 먹었고, 잠시 마루에 앉아서 하늘에 반짝이는 볕들을 바라보다, 할머니가 부엌으로 가는 걸 보고 말을 했다.
“할머니, 그럼 저는 쉬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정민의 목소리를 들은 할머니는 뒤를 돌아보며 말없이 미소와 고개를 끄떡이며 알았다는 의사를 표했다. 정민이 방문을 열고 들어간 뒤, 서있던 할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아쉬움어린 표정으로 닫힌 방문을 바라보다 돌아서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날이후로 정민의 일상은 목각을 완성하기 까지 나날이 하루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물 길러오고, 아침 먹고, 목각을 깎다가 점심 생략, 저녁 먹고 잠자리에 가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목각을 다 깎는 동안 노인으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드디어 시작 30일 만에 여섯 개의 목각이 완성되었다. 두 개가 한 짝이 되는 엄지손가락만한 것이었다. 정민은 완성된 여섯 개의 목각을 살펴보며 실소를 터트렸다.
“후후, 너무 작게 만들었어. 열쇠고리 장식으로 쓰면 딱 이군. 그동안 깎을 땐 몰랐는데 내 솜씨도 상당하네. 이참에 이 길로 나서볼까?”
정민이 자아도취에 빠져 혼자 말을 응얼거릴 때 할머니가 옆으로 다가와 책을 불쑥 내밀었다. 한지로 묶인 고서였다. 정민이 책을 받자 이번에는 봉투를 내밀었다. 정민은 노인이 첫날 한말을 기억해내곤 책과 봉투를 받아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봉투를 여니 노인이 쓴 글이 있었다. 아주 간단한 글이었다.
- 수고했다.
물 깃는 것도 익숙해 졌으리라. 목각도 완성 되었을 것이니 목각들은 샘이 있는 곳에 가면 검게 죽은 고목을 찾아 그 밑둥치에 땅을 파고 묻었다가 네가 내 아들을 따라 하산할 때 다시 파서 몸에 지니도록 해라.
그리고 너에게 준책은 네가 읽고 익혀야 될 것이다. 반드시 물지게를 지고 익히는 것 잊지 말도록 해라. 지금은 쓸모가 없다고 느낄지 모르겠으나, 훗날 큰 도움이 될 것이니 성심성의를 다해 익히도록 해라. -
글을 다 읽고 난 정민은 곧바로 책을 펼쳤다. 책은 옛 한글로 적혀있어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제목은 없었다. 한쪽에 그림이 그려있고 설명이 다음 쪽에 있는 형태였다.
‘무슨 무술을 익히는 책인가? 어라 그것도 아니네! 이렇게 걸으면서 요렇게 가슴을 펴고, 숨은 이렇게 쉬고…! 에고야, 이거 완전히 양반걸음이네. 후후, 이렇게 걸으면 완전히 이상한 사람이 되겠다! 다음은…. 어허, 이건 완전히 발발이 걸음이네. 어디 이건….’
책을 넘기던 정민은 황당했다. 50쪽 모두가 하나같이 걸음걸이에 대한 것들뿐이었다. 전부 24가지의 걸음걸이에 대한 설명뿐이었고 그 밖의 내용은 전혀 없었다. 정민은 앞으로70일 동안 익혀야 될 것들이 걸음걸이라는 것에 허탈 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정민은 결국 익히기로 했다. 학교를 그만둔 뒤로 모든 곳을 정리하고 새로 출발 하려는 방편으로 이곳에 왔던 것이고 보니, 멍청하니 보내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을 정민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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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긴 장편의 글입니다.
도입부가 상당히 긴 호흡으로 진행 될겁니다.
오늘도 활기찬 하루 되세요.
한글날이 국경일이 되는 날까지...아자!
한글을 사랑합시다.
내글이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