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느긋하게 욕조에서 라벤더 향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회사에서 챙겨온 서류들을 생각하니 그런 여유도 사치라는 생각에 가벼운 샤워만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샤워를 하고 나니 느껴지는 가벼운 공복감에 간단하게 뭘 해먹을까.. 고민하며 욕실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우..싫다. 어디야.."
자신에게 전화 올 곳은 정해져 있으니 어차피 회사려니..하는 마음에 발신 번호를 확인해보니 유사장의 번호였다. 낮에 전화한다고 해놓고서 깜박했던 것이 그제서야 생각이 났지만 막상 전화를 받으려고 하니 망설여졌다.
"...하아..."
"네, 강유미입니다."
- 유미씨, 날세.
"네,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전화를 깜박 했습니다."
- 아냐아냐, 요즘 유미씨가 많이 바쁘다는 얘기는 들었지.
"....네."
- 많이 피곤할 테니, 간단히 용건만 말하지. 금요일 저녁 어떤가?
"괜찮습니다."
- 금요일에 항상 가던 곳, 이로도리에서 8시.
"알겠습니다."
- 그럼 그때 보지. 열심히 일, 하라구.
"....내가 바쁘다는 얘기는 들었다고? ...누구한테?"
문득 예전의 유들한 유사장의 웃음이 생각나자 유미는 닭살이 돋았다. 최근에는 그런 식의 웃음을 자신에게 보인 적이 없었지만, 가끔 생각날 때마다 소름이 끼치는 그런 웃음이었다. 다른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천성적으로 위에서 모든 걸 지배하는 사람.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어쩌면 BOK 내부에 자신외에도 유사장과 사적인 만남을 갖는 사람이 있을 수 있었다. 유미가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을 통해서 자신의 신변이 노출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한번도 하지 않았는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괜히 유사장에게 손을 뻗은 건가 싶기도 했다. 유재욱이라는 사람을 상대하면 할 수록 잘못 골랐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지 호색한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발판으로 유미 자신을 키우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폼으로 신우 물산의 사장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그는 유미의 생각보다 몇 수는 앞서나가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이대로 유미가 그에게 먹힐수도 있었다. 처음 유미의 생각 정도는 이미 유사장이 간파했을 것이고 유사장은 아마도 유미를 통해 BOK의 정보를 빼내고 싶어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BOK내부에 다른 사람이 있다면 유미가 굳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아아아.. 모르겠다."
생각하면 할수록 답답해지는 기분에 유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계속 이 생각을 하기에 아직 유미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유재욱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일에 대해서도, .....그리고 한상운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금요일.
저녁에 있는 유사장과의 약속에 혹여라도 늦을까봐 유미는 어제 무려 11시까지 야근을 하며 회사에서 버텼다. 덕분에 오늘 아침 몸은 많이 피곤했지만 일은 많이 않다는 생각에 부담없이 일어날 수 있었다.
다른 때보다 느긋하게 출근을 하려고 오피스텔을 나서는 데 난데없이 경비아저씨가 유미를 불렀다.
"이봐요 709호 아가씨!! 아가씨!!"
"네? 저요?"
"그래요. 아가씨, 집에 살긴 사는 구만~ 얼굴이 통 안보여서 말야."
"아..네, 요즘 좀 바빠서요.."
"어쩐지 얼굴 보기 힘들더라구. 그래도 우편물은 챙겨야지~. 저기 한 가득 쌓였는데, 통 보이질 않으니 신경쓰여서 말야.."
유미를 붙들은 아저씨는 인자해보이는 웃음을 띄면서 우편함쪽을 가르켰다. 아저씨의 말 대로 다른 집들의 우편함과는 달리 유미의 우편함에는 수많은 우편물들이 잔뜩 꽃혀있었다.
"어머!! 정신이 없어서 깜박했어요!! 감사해요, 아저씨!!"
"담부터는 잘 챙겨요. 우편물이 계속 꽃혀있으면 빈집 털이들이 노릴 수도 있어~."
"네, 감사해요! 그럼 가볼게요."
"그래요."
유미는 한가득 꽃혀있는 우편물을 가방에 쓸어 담고는 아저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건물을 나섰다. 그 동안 무슨 정신인지 밤늦게 왔다 갔다 하느라 우편물 확인 조차 제대로 안하고 있어서 그런지 쌓여있던 우편물은 무려 20통이 넘었다. 물론 대부분이 광고 편지나 카드 명세서 같은 것들이었지만.. 경비아저씨가 아니었다면 이런 것들도 깜박 하고 넘어갔을 뻔 했다.
"아..벌써 월말이구나... 3월도 이제 다 끝나가네.."
전철을 타고 운이 좋게 빈 자리에 앉아 가방에 넣은 우편물을 꺼내 하나하나 훑어 보았다.
핸드폰 이용 요금, 카드 요금, 전기세, 수도세, 도시가스비, 관리비 등등등....
유미에게 올 우편물이라곤 없었지만 그래도 모두 돈을 내라고 말하는 종이들 뿐이어서 내심 웃음이 났다. 예전에 부모님과 함께 있을 때는... 이렇게 내는 돈이 많은 지 몰랐는데..
혼자 살게 되고부터는 뭔가 내는 것이 엄청 많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이래서 사람들이 한달 살아가는 생활비가 장난이 아닌 거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그런 부가적인 돈들은 매달 유미에게 지급되던 돈과는 따로 윤비서가 체크해서 돈을 주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는데, 이번 달은 유미가 정신이 없던 탓에 그동안 확인 못했던 고지서들을 한꺼번에 받아들게 되자 너무 많은 돈이 나가는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
'안그래도 내 집도 아닌데, 돈이 너무 많이... 아!! 맞다!! 집!!!'
혼자 살면서 자기한테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가는 거 아닌가 생각하다가 문득 자신이 살고 있는 원룸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자기 소유의 집이 아닌 건 알아도 아무 생각없이 여태동안 살아와서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 집은 예전에 '일'을 하는 조건으로 살게 된 집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예전에 했던 것과 다른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이 집에서 사는 조건과는 틀려져 있었다.
'아....생각을 못했네. 어떡하지? 이 집에서 계속 살아도 되는 건가?'
만약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물론 어느 정도의 돈은 유미에게 있었다. 하지만 월세로라도 집을 구하고 생활비를 직접 충당한다면 얼마 안가 부담이 될 것은 당연했다.
'....이따 윤비서님께 물어봐야 겠다....'
어차피 관리는 윤비서님께서 하시고 집을 구해준 것도 윤비서님이니 그냥 그에게 물어보는 편이 나을 거 같았다. 이대로 뻔뻔하게 눌러 앉아 살 수도 없으니...
"그 집 유미씨 이름으로 되어 있어요."
"네?"
찾아가서 물어볼가 어쩔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선택한 것은 결국 전화였다. 윤비서에게 전화해서 어렵게 말을 꺼내자 윤비서의 대답은 유미의 생각 밖이었다.
"처음부터 유미씨 이름으로 된 집이었어요. 아무 걱정 마시고 계속 있으면 되요."
"하지만...."
"그리고 생활비는 월급에 붙어서 나가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그렇지만, 제가 집을 받을 이유가..."
"제가 이런 말 할 입장은 아니지만, 유미씨는 어려운 일을 해주셨어요. 이제 앞으로 그런 일은 없겠지만 유미씨 덕분이 커요. 그 정도 집으로도 모자르지요."
"......"
"아, 사장님께서 부르시네요. 걱정말아요, 유미씨. 그럼 수고해요."
"...네."
전화를 끊고서 유미는 그대로 멍하니 자리에 앉아있었다. 일하는 도중에 전화한 거라서 눈 앞의 컴퓨터 화면에는 작업하다만 파일들이 잔뜩 열려있었지만 유미의 눈에는 그런 것 조차 제대로 띄지 않았다.
"...내 집 이라고?"
"응? 유미씨 뭐라고?"
"아.. 아니에요. 잠깐 딴 생각 하느라.."
"으이그, 바빠 죽겠는데 무슨 딴생각이야. 많이 피곤하면 잠깐 쉬든가 해. 그렇게 멍하니 있지 말고."
"네.."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을 들은 걸까 마침 뒤에 있던 주란씨에게 딴짓한다고 괜히 타박을 받았지만 머리속에 일이 들어오질 않았다.
'그럼, 처음부터 내 집이었단 말이야...? 사장이라는 사람, 제법 손도 크네..'
'아냐, 따지고 보면.. 내가 보통 일 한 것도 아니잖아? 커다란 집도 아니고 겨우 오피스텔인데..'
'...그래도 그런 곳에 있던 날 빼내주고, 살 곳 마련해주고, 밥에 옷에... 일이 맘에 안들다 뿐이지 생활에 전혀 불편함 없게 해 줬는데..'
'..아냐, 그래도 자기 맘대로 날 파는 사람이잖아.'
유미의 머리속으로는 수많은 생각들로 가득찼다. 이렇게 생각하면 저렇게, 저렇게 생각하면 다시 이렇게 계속 돌고 돌기만 하는 결론은 나지 않는 생각. 아무리 자기 혼자 앉아서 고민해도 결론이 날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 생각에서 유미는 헤어나질 못했다.
그 상태로 몇 분이나 멍하니 책상에 앉아 있다가 또 한번 주란씨에게 걸려서 억지로 사무실 밖에 끌려나가 차가운 쥬스 한잔을 들이키고 나서야 유미는 다시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사랑할 권리는 있다...19
- 쏴아아아....
오랜만에 느긋하게 욕조에서 라벤더 향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회사에서 챙겨온 서류들을 생각하니 그런 여유도 사치라는 생각에 가벼운 샤워만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샤워를 하고 나니 느껴지는 가벼운 공복감에 간단하게 뭘 해먹을까.. 고민하며 욕실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우..싫다. 어디야.."
자신에게 전화 올 곳은 정해져 있으니 어차피 회사려니..하는 마음에 발신 번호를 확인해보니 유사장의 번호였다. 낮에 전화한다고 해놓고서 깜박했던 것이 그제서야 생각이 났지만 막상 전화를 받으려고 하니 망설여졌다.
"...하아..."
"네, 강유미입니다."
- 유미씨, 날세.
"네,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전화를 깜박 했습니다."
- 아냐아냐, 요즘 유미씨가 많이 바쁘다는 얘기는 들었지.
"....네."
- 많이 피곤할 테니, 간단히 용건만 말하지. 금요일 저녁 어떤가?
"괜찮습니다."
- 금요일에 항상 가던 곳, 이로도리에서 8시.
"알겠습니다."
- 그럼 그때 보지. 열심히 일, 하라구.
"....내가 바쁘다는 얘기는 들었다고? ...누구한테?"
문득 예전의 유들한 유사장의 웃음이 생각나자 유미는 닭살이 돋았다. 최근에는 그런 식의 웃음을 자신에게 보인 적이 없었지만, 가끔 생각날 때마다 소름이 끼치는 그런 웃음이었다. 다른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천성적으로 위에서 모든 걸 지배하는 사람.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어쩌면 BOK 내부에 자신외에도 유사장과 사적인 만남을 갖는 사람이 있을 수 있었다. 유미가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을 통해서 자신의 신변이 노출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한번도 하지 않았는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괜히 유사장에게 손을 뻗은 건가 싶기도 했다. 유재욱이라는 사람을 상대하면 할 수록 잘못 골랐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지 호색한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발판으로 유미 자신을 키우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폼으로 신우 물산의 사장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그는 유미의 생각보다 몇 수는 앞서나가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이대로 유미가 그에게 먹힐수도 있었다. 처음 유미의 생각 정도는 이미 유사장이 간파했을 것이고 유사장은 아마도 유미를 통해 BOK의 정보를 빼내고 싶어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BOK내부에 다른 사람이 있다면 유미가 굳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아아아.. 모르겠다."
생각하면 할수록 답답해지는 기분에 유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계속 이 생각을 하기에 아직 유미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유재욱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일에 대해서도, .....그리고 한상운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금요일.
저녁에 있는 유사장과의 약속에 혹여라도 늦을까봐 유미는 어제 무려 11시까지 야근을 하며 회사에서 버텼다. 덕분에 오늘 아침 몸은 많이 피곤했지만 일은 많이 않다는 생각에 부담없이 일어날 수 있었다.
다른 때보다 느긋하게 출근을 하려고 오피스텔을 나서는 데 난데없이 경비아저씨가 유미를 불렀다.
"이봐요 709호 아가씨!! 아가씨!!"
"네? 저요?"
"그래요. 아가씨, 집에 살긴 사는 구만~ 얼굴이 통 안보여서 말야."
"아..네, 요즘 좀 바빠서요.."
"어쩐지 얼굴 보기 힘들더라구. 그래도 우편물은 챙겨야지~. 저기 한 가득 쌓였는데, 통 보이질 않으니 신경쓰여서 말야.."
유미를 붙들은 아저씨는 인자해보이는 웃음을 띄면서 우편함쪽을 가르켰다. 아저씨의 말 대로 다른 집들의 우편함과는 달리 유미의 우편함에는 수많은 우편물들이 잔뜩 꽃혀있었다.
"어머!! 정신이 없어서 깜박했어요!! 감사해요, 아저씨!!"
"담부터는 잘 챙겨요. 우편물이 계속 꽃혀있으면 빈집 털이들이 노릴 수도 있어~."
"네, 감사해요! 그럼 가볼게요."
"그래요."
유미는 한가득 꽃혀있는 우편물을 가방에 쓸어 담고는 아저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건물을 나섰다. 그 동안 무슨 정신인지 밤늦게 왔다 갔다 하느라 우편물 확인 조차 제대로 안하고 있어서 그런지 쌓여있던 우편물은 무려 20통이 넘었다. 물론 대부분이 광고 편지나 카드 명세서 같은 것들이었지만.. 경비아저씨가 아니었다면 이런 것들도 깜박 하고 넘어갔을 뻔 했다.
"아..벌써 월말이구나... 3월도 이제 다 끝나가네.."
전철을 타고 운이 좋게 빈 자리에 앉아 가방에 넣은 우편물을 꺼내 하나하나 훑어 보았다.
핸드폰 이용 요금, 카드 요금, 전기세, 수도세, 도시가스비, 관리비 등등등....
유미에게 올 우편물이라곤 없었지만 그래도 모두 돈을 내라고 말하는 종이들 뿐이어서 내심 웃음이 났다. 예전에 부모님과 함께 있을 때는... 이렇게 내는 돈이 많은 지 몰랐는데..
혼자 살게 되고부터는 뭔가 내는 것이 엄청 많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이래서 사람들이 한달 살아가는 생활비가 장난이 아닌 거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그런 부가적인 돈들은 매달 유미에게 지급되던 돈과는 따로 윤비서가 체크해서 돈을 주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는데, 이번 달은 유미가 정신이 없던 탓에 그동안 확인 못했던 고지서들을 한꺼번에 받아들게 되자 너무 많은 돈이 나가는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
'안그래도 내 집도 아닌데, 돈이 너무 많이... 아!! 맞다!! 집!!!'
혼자 살면서 자기한테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가는 거 아닌가 생각하다가 문득 자신이 살고 있는 원룸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자기 소유의 집이 아닌 건 알아도 아무 생각없이 여태동안 살아와서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 집은 예전에 '일'을 하는 조건으로 살게 된 집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예전에 했던 것과 다른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이 집에서 사는 조건과는 틀려져 있었다.
'아....생각을 못했네. 어떡하지? 이 집에서 계속 살아도 되는 건가?'
만약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물론 어느 정도의 돈은 유미에게 있었다. 하지만 월세로라도 집을 구하고 생활비를 직접 충당한다면 얼마 안가 부담이 될 것은 당연했다.
'....이따 윤비서님께 물어봐야 겠다....'
어차피 관리는 윤비서님께서 하시고 집을 구해준 것도 윤비서님이니 그냥 그에게 물어보는 편이 나을 거 같았다. 이대로 뻔뻔하게 눌러 앉아 살 수도 없으니...
"그 집 유미씨 이름으로 되어 있어요."
"네?"
찾아가서 물어볼가 어쩔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선택한 것은 결국 전화였다. 윤비서에게 전화해서 어렵게 말을 꺼내자 윤비서의 대답은 유미의 생각 밖이었다.
"처음부터 유미씨 이름으로 된 집이었어요. 아무 걱정 마시고 계속 있으면 되요."
"하지만...."
"그리고 생활비는 월급에 붙어서 나가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그렇지만, 제가 집을 받을 이유가..."
"제가 이런 말 할 입장은 아니지만, 유미씨는 어려운 일을 해주셨어요. 이제 앞으로 그런 일은 없겠지만 유미씨 덕분이 커요. 그 정도 집으로도 모자르지요."
"......"
"아, 사장님께서 부르시네요. 걱정말아요, 유미씨. 그럼 수고해요."
"...네."
전화를 끊고서 유미는 그대로 멍하니 자리에 앉아있었다. 일하는 도중에 전화한 거라서 눈 앞의 컴퓨터 화면에는 작업하다만 파일들이 잔뜩 열려있었지만 유미의 눈에는 그런 것 조차 제대로 띄지 않았다.
"...내 집 이라고?"
"응? 유미씨 뭐라고?"
"아.. 아니에요. 잠깐 딴 생각 하느라.."
"으이그, 바빠 죽겠는데 무슨 딴생각이야. 많이 피곤하면 잠깐 쉬든가 해. 그렇게 멍하니 있지 말고."
"네.."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을 들은 걸까 마침 뒤에 있던 주란씨에게 딴짓한다고 괜히 타박을 받았지만 머리속에 일이 들어오질 않았다.
'그럼, 처음부터 내 집이었단 말이야...? 사장이라는 사람, 제법 손도 크네..'
'아냐, 따지고 보면.. 내가 보통 일 한 것도 아니잖아? 커다란 집도 아니고 겨우 오피스텔인데..'
'...그래도 그런 곳에 있던 날 빼내주고, 살 곳 마련해주고, 밥에 옷에... 일이 맘에 안들다 뿐이지 생활에 전혀 불편함 없게 해 줬는데..'
'..아냐, 그래도 자기 맘대로 날 파는 사람이잖아.'
유미의 머리속으로는 수많은 생각들로 가득찼다. 이렇게 생각하면 저렇게, 저렇게 생각하면 다시 이렇게 계속 돌고 돌기만 하는 결론은 나지 않는 생각. 아무리 자기 혼자 앉아서 고민해도 결론이 날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 생각에서 유미는 헤어나질 못했다.
그 상태로 몇 분이나 멍하니 책상에 앉아 있다가 또 한번 주란씨에게 걸려서 억지로 사무실 밖에 끌려나가 차가운 쥬스 한잔을 들이키고 나서야 유미는 다시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