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의 양반들
봉화에 전해지는 '왔네 왔네 억지 춘양 나 여기 왔네......' 라는 <억지 춘양>이란 민요가 있다. 이 말은 봉화군 춘양면에서 나온 말인데 사연인즉 이렇다. 해방 후에 영주에서 태백으로 가는 영동선 기차를 놓는데, 춘양의 양반님네들이 곧게 설계해 놓은 철길을 춘양 면민을 위한다고 억지로 춘양 시내를 애돌아 가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때 나온 말이 억지 춘양인데, 다른 말로 하면 그만큼 봉화군에 또아리 틀고 앉은 양반님네의 권세가 무서웠다는 얘기다.
영남의 양반 가운데에서도 봉화는 손꼽을 수 있는 유향의 고장이다. 조선총독부 통계를 보면 1928년도 봉화 거주 양반 수는 무려 6천 5백 명에 달해 전국에서 최고를 기록했다. 인근의 안동을 비롯해 각지에서 스며든 양반 가문들이 봉화에 뿌리를 내리고 후손을 번창시킨 결과다. 하여 봉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세 가지를 꼽으라면 산과 정자와 전통 가옥이다. 요즘도 봉화 장날이면 도포 자락에 갓 쓴 노인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도도하기만 한 봉화 양반 가운데에서도 닭실마을 안동 권씨 집성촌은 유별나다. 봉화의 양반하면 닭실마을 권씨 가문을 떠올릴 만큼 단단히 세력을 펼쳤는데, 여북하면 '봉화 군수를 할래, 닭실마을 종손을 할래' 하는 말이 생겼을까. 요즘도 봉화에 부임하는 군수나 공직자들은 부임 첫날 닭실마을 종손을 찾는 일을 첫 업무로 시작한다고 하니 이만하면 닭실의 안동 권씨 가문의 위세가 어떤지를 짐작할 만하다.
닭실마을 권씨 가문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이자 절개 곧은 선비 충재(1478~1548)에서부터 시작된다. 봉화가 자랑하는 인물인 충재 권벌은 본래 안동 태생으로 봉화로 이주했다. 중종 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 경상도관찰사, 형조참판, 한성부윤 등을 지냈다. 시묘사화와 을사사화 등 두 차례의 사화를 겪은 후 평안도에서 눈을 감았고, 그의 충정을 기려 선조 때 좌의정으로 추증되고 충정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는 관직에 머무는 동안 왕에게 경전을 강의하기도 하였으며 조광조, 김정국 등 기호 사림파가 중심이 된 개혁정치에 영남사림파의 한사람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권벌 이후부터 탄탄한 가문을 구축한 닭실의 권씨들은 문과 급제자만도 15명을 헤아리고 소과 합격자까지 합하면 무려 70여 명이 관직을 오르내렸다.
안동 권씨 충재 자손은 불천위라고 했다. 자손이 끊겨 제주가 없어질 때까지 제례를 올려야 한다. 허리가 굽고 눈자위에 검은 버짐이 펴, 오래지 않아 당신이 젯밥을 먹을 처지가 되어도 휘청이는 몸을 이끌고 조상님 영전에 서야 했다. 하여 불충한 자손의 용서를 빌고, 미쳐 날뛰는 한탄스런 세상을 죽을죄로 고했다. 처마 기운 고가의 뒤틀린 문짝처럼 남은 종손으로, 종부로 살아온 날들 피맺혀도 조상님 영전에 머리 조아리고 그저 용서를 빌었다.
닭실마을을 중심으로 멀리는 춘양까지 자리한 충재의 유적을 돌아보며 유교사회에서 드세 높던 양반가의 체통과 형식의 뿌리를 확인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여정이다.
봉화 닭실 마을을 다녀오며
김 명 수
Paramithi Hehasmeno 전설같은 사랑 - Anna Vissi
A forggotten fairytale is 당신은 내게
The love you are asking. 잊혀진 전설같은 사랑을 원해요.
A faked coin that was passed on 시끌벅적한 시장의 소리에
Among the sounds of the market. 가짜 동전이 실려가듯이...
Tonight I'm going to tell you 오늘밤 당신에게
And sing for you 슬픈 노래를 불러드릴께요
A sad song about those who stay late at night 날씨를 얘기하며 늦은 밤을 지새우는
Talking about the weather. 사람들에 관한 노래를 말이예요.
I am crying in my dreams 나는 꿈속에서 울어요.
And I wake up sobbing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깨어나지요
Love is lie, I tell myself 사랑은 거짓이라고 그리고 바보들의 장난이라고
봉화의 양반들 / 107
봉화의 양반들 봉화에 전해지는 '왔네 왔네 억지 춘양 나 여기 왔네......' 라는 <억지 춘양>이란 민요가 있다. 이 말은 봉화군 춘양면에서 나온 말인데 사연인즉 이렇다. 해방 후에 영주에서 태백으로 가는 영동선 기차를 놓는데, 춘양의 양반님네들이 곧게 설계해 놓은 철길을 춘양 면민을 위한다고 억지로 춘양 시내를 애돌아 가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때 나온 말이 억지 춘양인데, 다른 말로 하면 그만큼 봉화군에 또아리 틀고 앉은 양반님네의 권세가 무서웠다는 얘기다. 영남의 양반 가운데에서도 봉화는 손꼽을 수 있는 유향의 고장이다. 조선총독부 통계를 보면 1928년도 봉화 거주 양반 수는 무려 6천 5백 명에 달해 전국에서 최고를 기록했다. 인근의 안동을 비롯해 각지에서 스며든 양반 가문들이 봉화에 뿌리를 내리고 후손을 번창시킨 결과다. 하여 봉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세 가지를 꼽으라면 산과 정자와 전통 가옥이다. 요즘도 봉화 장날이면 도포 자락에 갓 쓴 노인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도도하기만 한 봉화 양반 가운데에서도 닭실마을 안동 권씨 집성촌은 유별나다. 봉화의 양반하면 닭실마을 권씨 가문을 떠올릴 만큼 단단히 세력을 펼쳤는데, 여북하면 '봉화 군수를 할래, 닭실마을 종손을 할래' 하는 말이 생겼을까. 요즘도 봉화에 부임하는 군수나 공직자들은 부임 첫날 닭실마을 종손을 찾는 일을 첫 업무로 시작한다고 하니 이만하면 닭실의 안동 권씨 가문의 위세가 어떤지를 짐작할 만하다. 닭실마을 권씨 가문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이자 절개 곧은 선비 충재(1478~1548)에서부터 시작된다. 봉화가 자랑하는 인물인 충재 권벌은 본래 안동 태생으로 봉화로 이주했다. 중종 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 경상도관찰사, 형조참판, 한성부윤 등을 지냈다. 시묘사화와 을사사화 등 두 차례의 사화를 겪은 후 평안도에서 눈을 감았고, 그의 충정을 기려 선조 때 좌의정으로 추증되고 충정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는 관직에 머무는 동안 왕에게 경전을 강의하기도 하였으며 조광조, 김정국 등 기호 사림파가 중심이 된 개혁정치에 영남사림파의 한사람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권벌 이후부터 탄탄한 가문을 구축한 닭실의 권씨들은 문과 급제자만도 15명을 헤아리고 소과 합격자까지 합하면 무려 70여 명이 관직을 오르내렸다. 안동 권씨 충재 자손은 불천위라고 했다. 자손이 끊겨 제주가 없어질 때까지 제례를 올려야 한다. 허리가 굽고 눈자위에 검은 버짐이 펴, 오래지 않아 당신이 젯밥을 먹을 처지가 되어도 휘청이는 몸을 이끌고 조상님 영전에 서야 했다. 하여 불충한 자손의 용서를 빌고, 미쳐 날뛰는 한탄스런 세상을 죽을죄로 고했다. 처마 기운 고가의 뒤틀린 문짝처럼 남은 종손으로, 종부로 살아온 날들 피맺혀도 조상님 영전에 머리 조아리고 그저 용서를 빌었다. 닭실마을을 중심으로 멀리는 춘양까지 자리한 충재의 유적을 돌아보며 유교사회에서 드세 높던 양반가의 체통과 형식의 뿌리를 확인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여정이다. 봉화 닭실 마을을 다녀오며
김 명 수
Paramithi Hehasmeno 전설같은 사랑 - Anna Vissi
A forggotten fairytale is
당신은 내게
The love you are asking.
잊혀진 전설같은 사랑을 원해요.
A faked coin that was passed on
시끌벅적한 시장의 소리에
Among the sounds of the market.
가짜 동전이 실려가듯이...
Tonight I'm going to tell you
오늘밤 당신에게
And sing for you
슬픈 노래를 불러드릴께요
A sad song about those who stay late at night
날씨를 얘기하며 늦은 밤을 지새우는
Talking about the weather.
사람들에 관한 노래를 말이예요.
I am crying in my dreams
나는 꿈속에서 울어요.
And I wake up sobbing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깨어나지요
Love is lie, I tell myself
사랑은 거짓이라고 그리고 바보들의 장난이라고
And a game for the fools.
내 자신에게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