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사랑할 권리는 있다...20

美道-━★200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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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 6시쯤이 되자 다른 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창 일하던 사람들이 오늘은 하나 둘 씩 퇴근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주말을 앞두고서 금요일에는 일하기 싫은 그런 심리 탓인 지 모두들 일찍 퇴근하는 분위기였다.

 

유미도 어제 무리를 해서 일을 해놓은 덕분인지 생각보다 오늘은 많이 한가해서 같이 퇴근하고서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8시에 잡혀있는 유사장과의 약속때문에 회사에 더 남아서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집에 들렸다가 다시 약속장소로 가기에는 시간이 상당히 애매했기 때문에 최소한 1시간 정도는 더 회사에서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았다.

 

"유미씨, 퇴근안해?"

 

"아.. 이거 마저 하려고요."

 

"에휴~ 대단한 일벌레나셨네! 내일 주말인데 그냥 쉬지 그래?"

 

"그러고 싶은데.. 다음주가 편하려면 오늘 좀 고생해야죠."

 

"그래, 그럼 나 갈게. 월요일에 봐."

 

"네, 가세요."

 

 

 

마지막으로 일에 가장 열심인 주란씨마저 퇴근하고 나니 6시 40분쯤이 되었을 땐 사무실에 유미 혼자 뿐이었다.

 

"아... 뭐야, 나도 집에 가고싶다."

 

 

 

 

 

정말로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애매한 약속시간때문에 그럴 수 조차 없었다. 이미 시간은 7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고 더이상 인터넷을 뒤져서 볼 만한 것도 없었다.

 

"심심해.."

 

 

 

차마 일은 하기 싫어서 밀쳐둔 파일을 뒤적거리다 지친 유미는 그냥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약속장소로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웃옷을 입었다. 화장을 고친다고 펼쳐두었던 화장품들을 주어담고서 가방을 챙기는 데 난데없이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번호를 보니 저장도 되어 있지 않은 모르는 번호였다.

 

"...누구지..?"

 

 

 

어차피 자신의 번호를 아는 사람은 다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으니 잘못 걸린 전화겠지 싶어 무시할까 했지만 밀려오는 지루함에 그냥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 강유미씨?

 

"네, 그런데 어디시죠?"

 

- 나야, 한상운.

 

 

 

한상운, 한상운.. 누구더라.. ....한상운??

 

 

 

"네.. ..네?"

 

 

유미는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을 인지하는 순간 깜짝 놀라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 했다. 한상운이라하면 분명히 지금 유미가 일하는 이 건물의 12층에 있는 사장을 말하는 건데..

 

 

"..사장님?"

 

- 이제 알아들은 건가? 내 번호, 몰랐나 보군.

 

"아..네. 죄송합니다."

 

- 아니 뭐 보통 사장의 핸드폰 번호를 모르는 사원들이 대부분이지.

 

"..네.."

 

- 지금 시간있나?

 

"....지금이요?"

 

 

 

 

다정하고 부드럽게는 아니었지만 자신이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예전과는 달리 힘이 좀 빠진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상운이 익숙치 않아 유미는 자신이 전화하고 있는 상대가 상운이 맞는 지 조차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지금 시간 있냐니.. 하필, 지금! 시간이 있냐니...

 

'뭐라고 말하지?... 나에 대해 모든 걸 아는 이 사람에게, 뭐라고 해야 하는 거지?'

 

 

 

"...지금은 좀..."

 

- 무슨 약속 있나 보지?

 

"약속..이라기 보다는 좀.."

 

 

'하아.. 미치겠네.. 유사장님 만나러 가야해요, 라고 말 할수는 없는 거잖아!'

 

 

 

- 그래? 그럼 ..월요일 저녁은 시간이 되려나?

 

"네? .. 아..네."

 

- 그럼 그때 시간 비워둬. 이만 끊지.

 

"..네."

 

 

 

 

의외로 더 이상은 묻지 않고 넘어가주는 상운 덕택에 한시름 놓긴 했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불안해져 왔다. 혹시 자신의 행적을 조사하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도 생기고 새삼스레 보자 그래서 뭔가를 시키려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시키면 해야지, 별 수 있겠냐만은..."

 

 

 

 

찹착한 마음에 한숨을 푹 쉬고서 가방을 챙겨 나왔다. 혹시라도 회사안에서 마주치면 어쩌나 싶어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회사를 나갈때까지 불안했지만 다행이 그와 마주치지는 않았다.

 

 

 

 

 

회사에서 전철을 타고 유사장과 약속한 장소로 갔다. 30분 정도 일찍 도착해서 어디를 돌아다닐까 했지만 왠지 온몸에서 느껴지는 피곤한 기분에 그대로 이로도리로 향했다. 그리고 안쪽 방에 멍하니 앉아있기를 몇 분. 약속시간보다는 좀 빨리온 유사장이 안으로 들어섰다.

 

 

"일찍 왔군."

 

"네, 일이 일찍 끝나서.."

 

유미는 유사장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서 인사를 하고는 그가 앉을때 까지 기다렸다.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는 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띄고 들어오는 유사장이 자꾸만 불길한 느낌을 줬지만 유미는 내색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았다.

 

"그래, 회사일은 할만한가?"

 

"네."

 

"해외 사업부라고 했지? 대리로 발령났다는 얘기 들었네."

 

"네."

 

 

자신이 유사장에게 한 적도 없는 얘기들을 도대체 누구에게서 들은 거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저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뒷조사를 하는 게 대단한 일도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맡은 일이 뭔지도 다 알고 있을 그런 사람이었다.

 

"유미씨에 대해 나는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지. 내 위치가 위치니 만큼 마음만 먹으면 유미씨가 다닌 유치원 선생의 이름까지도 알아 낼수 있다네."

 

"......"

 

 

유미가 뭐라고 대답을 할 새도 없이 음식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나 둘 씩 음식이 놓이는 동안 유미도 유사장도 아무 말이 없었다. 유미가 좋아하는 회에 초밥들이 식탁위에 놓이기 시작했지만 유미의 눈에는 다 관상용품으로 비춰졌다. 유사장의 한 말이, 그리고 앞으로 그가 할 말들로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어서 다른 것들이 들어오지를 않았다.

 

 

"맛있게 드십시오."

 

음식을 나른 여자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나가자 유사장은 일본주가 담겨진 잔에 입을 가져갔다. 유미 역시 그를 따라 잔에 입을 갖다 댔지만 일본주는 별로인지라 가볍게 입술만 갖다 대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지 신경이 쓰이겠지. 대단한 건 아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난 BOK 의 유통라인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

 

 

역시, 그런 것인가... 유미는 유사장의 말에 꿀꺽 침을 삼켰다. 언젠가 유사장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것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 무언가가 BOK에 관한 일 일것이라는 것도 짐작하고는 있었다.

 

 

 

"아직 대리일 뿐이고 그것도 한달 밖에 되지 않아서 당장은 불가능 하다는 건 아실텐데요."

 

"물론 그 정도는 알고 있지. 난 유미씨의 가능성에 비추어서 잠재적 분자를 키워 놓고 싶은거야."

 

"그런 정보는 유사장님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알아내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이미 BOK내부에 유사장이 심어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유미도 짐작하고 있는 일이었다. 아마 그 사람은 자신보다 더 오래 회사 내부에서 심어져 있었고 자신보다 더 안정된 위치에서 일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굳이 이제 겨우 대리가 되었을 뿐인 자신에게 요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유사장의 꿍꿍이가 의심스러웠다.

 

 

 

"...한상운이라는 놈, 절대 보통이 아니야. 아직까지도 자기가 직접 일을 처리하는 놈이지."

 

"......"

 

 

하긴, 그러니 날 그렇게 이용도 했었겠지. 정확히 그의 일하는 스타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유미이지만 일에 대한 그의 집착은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식으로 일하는 지금 주변사람들의 그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였다.

 

 

"유미씨가 해야 하는 건 그 한상운을 뚫는 거야."

 

"....."

 

"단순히 외부적으로 드러난 정보쯤은 당연히 알아낼 수 있지. 그러나 그건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이야."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라는 거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당장 알아내라는 건 아냐. 시간을 두고 천천히 1년이든, 2년이든 좋아. 강유미씨는 그 놈을 뚫으면 돼."

 

 

유사장은 다시금 술잔을 들이켰다. 독한 일본주임에도 물처럼 쉬이 들이키는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유미는 그의 비워진 술잔에 다시 술을 채우고, 자신 역시 술잔에 입을 갖다댔다. 이번에는 입술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목구멍으로 넘겼다.

 

 

유미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사장은 들고 있던 술잔을 다시 입술에 갖다대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일산쪽에 괜찮은 집이 하나 있지."  

 

 

 

-흠칫.

 

 

 

 

"2년 쯤 전인가... 갑작스레 급매로 나온 것인데.. 예전부터 눈여겨 봐둔 집이라 곧바로 사들였었지."

 

 

 

유미는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 놓은 채 유사장을 바라 보았다. 술잔에 담긴 술을 찰랑이며 무심하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 알게 모르게 작은 미소가 씌워져 있음을 발견했다.

 

 

 

"건축가 강.한.솔씨가 설계했다는... 집이지. 특별할 것 없는 구조지만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분위기를 가진 집이더군. ....강유미씨 마음에 들거라고 생각하네만..."

 

 

 

유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이 떨고 있다는 걸 들킬까 싶어 급히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렸지만 이미 유사장의 입가에 담긴 미소에서 자신은 선택의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 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한꺼번에 닥친 일들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파악하지 못한 채 집은 경매에 넘어가 버렸었다. 자신이 손을 쓸 시간도 없이 넘어간 집에 찾아가보지도 못한 채 정신을 차렸을 때는 상운의 밑에 있었을 뿐이었다.

 

 

"즉흥적으로 마음에 들어서 산 집이어서 처치 곤란인지라... 집에 물건들은 그대로 둔 채 썩히고만 있었지... "

 

 

 

....... 눈가가 시큰해져 왔다. 유미는 주먹을 꽉 쥔채 힘겹게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여전히 무심한 듯한 눈.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을 얻은 눈.

 

 

 

"......알겠습니다. 대신 시간은 넉넉하게 주십시오."

 

"3년.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지만 한사장을 상대하기에는 좀 벅찰 수도 있겠지. 반드시 3년 안에 한상운을 뚫어야 해."

 

"......네."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직 자신은 상운에 비하면 작디 작은 존재였다. 어쩌면 5년, 10년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고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유사장의 부름에 그의 비서가 들고온 서류를 유미는 한자라도 놓칠 새라 꼼꼼히 훑어보았다. 다름아닌 유사장과의 일이었고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되었다.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겠다는 듯 두 장밖에 되지 않는 서류를 유미는 한참동안이나 훑어 보고서야 싸인을 했다. 서류를 복사해서 보내달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어떤 조작이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유사장은 예상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고,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 지 어디로 들어가는 지도 모른 채 식사를 하고서 그와 헤어졌다.

 

 

집은 당장 유미의 명의로 옮겨서 서류와 함께 보내주겠다는 유사장의 말 만이 유미의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