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면 이불속에서 나오기 싫어지는 걸 보면 이제 서서히 옷장에서 겨울 옷을 꺼내 입어야 할 계절이 온것 같다.
결혼해서 이제 7년째에 접어드는 한 여자의 남편으로, 한 아이의 아빠로서 오늘은 그녀에게 용기내어 미안하다는, 그리고 고맙다는 말이 하고 싶어진다. 잘 할수 있을련지는 모르겠지만.
자력이었지만 외국에서 유학도 하고 온 후 부푼 꿈을 안고, 부모님의 기釉?한몸에 안고 당당히 광화문 거리를 신입 사원이란 명찰을 차고 TV에서나 봐오던 콩나물 시루 지하철을 타도 열심히 직장 생활을 시작했었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1년 정도를 한 후 지방으로 발령이 나면서 이제 한 여자를 만나면 정착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지금 이곳으로 내려온다.
중고차도 할부로 사고, 양복입은 근사한 모습에 그런 20대의 나의 모습이 어찌나 멋적어보이던지.
퇴근 후 운동하면서 만난 동생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첫 사랑과 두번재 사랑의 실패로 더이상 이성에게 전력투구를 못할것 같았던 나였지만 5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잘따라주었던 그녀와 교제를 시작하였다. 무엇보다 고등학교 졸업할때까지 농사일을 하시는 부모님을 도와오며 지냈던 시골 출신인 그녀에게 도시에서만 자라는 난 그녀에게는 난 서울쥐와 같은 기분으로 무엇이든 새로운것과 처음 대하는것 투성이었고, 재밌어하는 그녀를 만날때마다 나 역시도 이제 한 여자를 만났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교제를 시작하고 난 부푼 꿈으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랑과 새 생활을 정착해 갈 무렵 IMF라는 큰 시련이 다가왔다.
순식간에 난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했고, 백화점 비서실에 근무를 한 그녀 역시 조금 뒤에 그만 둘수 밖에 없었다. 난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왔었고 어느 정도는 생활력이 있었던 터라 바로 일용직 공장에 나갔다. 무언인가를 안하면 내 자신이 망가질것만 같았기 때문일게다.
새벽밥 먹고 공장 버스 타고 다녔던 그 공장은 단순 노동으로 3D업종이었던 곳인데, 내가 노동한만큼 보수는 턱없이 모자랐고 용역회사에 떼이는 돈이 너무 많았었는데, 월급 받은날 얼마나 억울하던지.
더더욱 날 힘들게 했던것은 공장에 근무하는 정규직 사원들이 얼마나 거만하게 굴던지, 몸이 힘든것 보다는 자존심이 상하게하는 언행들이 더욱 수치감이 들게 하였다.
공장 한달째 첫월급 받고 얼마나 서럽던지 함께 일을 다녔던 전직 엘리트 동료들과 술을 많이 마신 후
한달 동안 수고했다며 나를 보러온 그녀를 아파트 주차장에서 만났는데 왠지 모를 서러움에 눈물이 났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 당시는 온통 절망 뿐이었었다.
이런 나 라도 결혼 하자고 하면 할꺼냐고 했더니, 오빠 같으면 나 굶기지 않겠네 하면서 결혼을 승락해주었다. 그렇게 웃기 지도 않은 말을 술에 취해 해버렸고 그것이 그녀에겐 프로포즈가 되었다.
상황이 더 어려워지기 전에 결혼을 강행하자고 우린 답을 내렸고, 곧바로 양가집에 인사도 드리고 바로 결혼 준비를 하였는데, 우리집 역시 부모님 회사 부도로 형편이 어려웠고, 장인 어른댁 역시 농사일을 하시는 분들이라 혼수 같은 것은 엄두도 못낼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가 유학 당시 쓰고 가져온 가전 제품에다 세탁기, 냉장고, 주니어 옷장만 사고, 가스통 없는 가스렌지와 전화선 연결 안된 전화기로 신혼 살림을 꾸렸다.
신혼집은 축의금 1000만원 정도 들어온거에서 결혼식 비용을 제하고 나니 700만원 정도 남아 그 돈으로 20년 넘은 사글세 13평 아파트로 정하였다. 말이 아파트지, 완전...5층 건물에 5층이었는데 어찌나 춥던지 기름 보일러가 있는데도, 기름 차가 올라오질 못해 항상 기름통에다가 기름을 날라야했다.
신혼 초기에 결혼에 대한 낮설움 같은것 보다는 그때까지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방황했던 내가 싫었던 모양이다. 나와 아내는 직업 훈련원을 다니며 한달에 실업자 수당 60만원으로 생활을 해왔었는데, 참 이렇게 비참하게 사는 내 자신이 왜 그렇게도 원망스럽던지, 이래서 남자는 일이 없으면 안되는 구나 하고 이제서야 느껴본다.
매일 술과 잦은 외박에, 집에 들어가는 것 조차 싫었고, 난생 처음 낚시 같은것도 가보았지만, 주위엔 모두 나와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내자신도 그렇게 비참해 보일수가 없었다.
만나는 선후배들은 왜 그렇게 사는지, 그럴려고 결혼 햇는지 동정했었고, 나 조차도 싫어서 죽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었다. 거의 신혼 후 3개월 정도를 그렇게 보내다 보니, 술 기운에 아내와 이혼하자는 소리를 자주 했었고, 아내는 큰 눈으로 눈물만 흘리고, 문을 닫고 다시 나가려는 날 붙잡고 퍽도 많이 울었었다.
그러던 어느 눈내리던 날, 그 전날도 밖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친구집에 가서 자고서는 집에 돌아와보니 기름도 없어 온기도 없는 추운 방에서 큰방에 걸어놓았던 결혼 사진을 바닥에 내려놓고 혼자서 눈물을 흘리고 있던 아내를 보았을때, 저 여자가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날 만나 마음아파해야하는지 생각을 하니 정신이 조금 드는것 같았다. 마음도 아프고 이래서는 안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해 겨울을 그렇게 폐인처럼 보내고 나니 술마시기도 지겨웠는지, 이렇게 살면 진짜 폐인이 될것 같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결혼 후 6개월 정도가 지나서야 아내와 예전에 사이 좋은 오빠 동생으로서 지내게 되었다. 가끔 신문이나 보도 매체를 보면 경제 사정때문에 가정이 파괴되고, 무서운 사건들도 일어나는 걸 보면서, 그 당시의 나를 떠올리기도 한다.
그때 신혼 3개월동안 아내에게 참 못된짓, 마음아프게한짓 다해본것 같다.
여자들은 그런 아픈 기억들은 가슴속에 꼭꼭 묻어두고 산다는데, 그녀가 무슨 말을 한다해도 난 나의 잘못을 인정할수 밖에 없다.
7년이 지난 지금도 그 시절 애기는 잘 하지 않는다.
그 날 부서져버린 액자에는 결혼 사진은 아니지만 다정하게 찍은 다시 넣어 두었고, 그때 그 신혼 시절을 보낸 아파트도 이젠 재건축을 시작해서 그 집을 다시 볼순없지만, 아직도 그녀는 그 동네를 싫어한다. 생각이 날 때마다 미안했었다고, 애교를 부리며 넘어가긴 하지만 그녀의 가슴에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지 나 역시도 반성을 하고 있다.
지금도 한달에 150만원 정도의 급여를 받고 있는 셀러리 맨이지만 항상 묵묵히 지켜봐주는 아내가 고마워서 일년에 한번씩은 외국 여행도 보내주려고 하고, 내 용돈 아꺼서라도 아가씨들이 입는 유행하는 청바지나, 그녀 몰래 보험도 들어주기도 한다. 나름대로는 그것이 그녈 위한 보상이라 생각하면서.
결혼 후 4년 정도가 지나 돌이켜보니 서로 무뎌지기도 하고, 서로를 위해 다른 시간들이 필요한것 같아 1년 동안 열심히 준비를 한 후 그녀를 위해 내가 유학을 했던 곳으로 데리고 가고 싶어져서 2년 전에는 잠시 휴직을 하고 함께 외국 유학도 해보았었다.
거기서 지금의 아이를 하나님께서 내려 주셔서 들어 올때는 한 아이의 아빠와 엄마가 되어서 돌아오게 되었다.
시골이지만 여유로운 아파트에서 그리고 이제는 아직 두살이 안된 아들과 함께 셋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소망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게 된 나의 이 모습이 우리 모두의 아빠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난 도시에서 자란 사람이라고 아내에게 울쭐대며 곧잘 농담을 하고 하지만, 역시 부부는 닮아가나보다.
오늘은 오랜만에 아내와 단 둘이서 김이 모락 모락 나는, 연애 시절 자주 갔었던 시장통 허름한 한그릇에 3,000천원 하는 순대 국밥집에 들러 못마시는 소주도 마시게 하고 예전에 참 미안했었다고 말하고 그녀의 술주정도 받아주어야 겠다.
나도 죽도록 힘겨웠던 시간들을 보내본 적이 있다.
아침이면 이불속에서 나오기 싫어지는 걸 보면 이제 서서히 옷장에서 겨울 옷을 꺼내 입어야 할 계절이 온것 같다.
결혼해서 이제 7년째에 접어드는 한 여자의 남편으로, 한 아이의 아빠로서 오늘은 그녀에게 용기내어 미안하다는, 그리고 고맙다는 말이 하고 싶어진다. 잘 할수 있을련지는 모르겠지만.
자력이었지만 외국에서 유학도 하고 온 후 부푼 꿈을 안고, 부모님의 기釉?한몸에 안고 당당히 광화문 거리를 신입 사원이란 명찰을 차고 TV에서나 봐오던 콩나물 시루 지하철을 타도 열심히 직장 생활을 시작했었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1년 정도를 한 후 지방으로 발령이 나면서 이제 한 여자를 만나면 정착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지금 이곳으로 내려온다.
중고차도 할부로 사고, 양복입은 근사한 모습에 그런 20대의 나의 모습이 어찌나 멋적어보이던지.
퇴근 후 운동하면서 만난 동생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첫 사랑과 두번재 사랑의 실패로 더이상 이성에게 전력투구를 못할것 같았던 나였지만 5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잘따라주었던 그녀와 교제를 시작하였다. 무엇보다 고등학교 졸업할때까지 농사일을 하시는 부모님을 도와오며 지냈던 시골 출신인 그녀에게 도시에서만 자라는 난 그녀에게는 난 서울쥐와 같은 기분으로 무엇이든 새로운것과 처음 대하는것 투성이었고, 재밌어하는 그녀를 만날때마다 나 역시도 이제 한 여자를 만났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교제를 시작하고 난 부푼 꿈으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랑과 새 생활을 정착해 갈 무렵 IMF라는 큰 시련이 다가왔다.
순식간에 난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했고, 백화점 비서실에 근무를 한 그녀 역시 조금 뒤에 그만 둘수 밖에 없었다. 난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왔었고 어느 정도는 생활력이 있었던 터라 바로 일용직 공장에 나갔다. 무언인가를 안하면 내 자신이 망가질것만 같았기 때문일게다.
새벽밥 먹고 공장 버스 타고 다녔던 그 공장은 단순 노동으로 3D업종이었던 곳인데, 내가 노동한만큼 보수는 턱없이 모자랐고 용역회사에 떼이는 돈이 너무 많았었는데, 월급 받은날 얼마나 억울하던지.
더더욱 날 힘들게 했던것은 공장에 근무하는 정규직 사원들이 얼마나 거만하게 굴던지, 몸이 힘든것 보다는 자존심이 상하게하는 언행들이 더욱 수치감이 들게 하였다.
공장 한달째 첫월급 받고 얼마나 서럽던지 함께 일을 다녔던 전직 엘리트 동료들과 술을 많이 마신 후
한달 동안 수고했다며 나를 보러온 그녀를 아파트 주차장에서 만났는데 왠지 모를 서러움에 눈물이 났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 당시는 온통 절망 뿐이었었다.
이런 나 라도 결혼 하자고 하면 할꺼냐고 했더니, 오빠 같으면 나 굶기지 않겠네 하면서 결혼을 승락해주었다. 그렇게 웃기 지도 않은 말을 술에 취해 해버렸고 그것이 그녀에겐 프로포즈가 되었다.
상황이 더 어려워지기 전에 결혼을 강행하자고 우린 답을 내렸고, 곧바로 양가집에 인사도 드리고 바로 결혼 준비를 하였는데, 우리집 역시 부모님 회사 부도로 형편이 어려웠고, 장인 어른댁 역시 농사일을 하시는 분들이라 혼수 같은 것은 엄두도 못낼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가 유학 당시 쓰고 가져온 가전 제품에다 세탁기, 냉장고, 주니어 옷장만 사고, 가스통 없는 가스렌지와 전화선 연결 안된 전화기로 신혼 살림을 꾸렸다.
신혼집은 축의금 1000만원 정도 들어온거에서 결혼식 비용을 제하고 나니 700만원 정도 남아 그 돈으로 20년 넘은 사글세 13평 아파트로 정하였다. 말이 아파트지, 완전...5층 건물에 5층이었는데 어찌나 춥던지 기름 보일러가 있는데도, 기름 차가 올라오질 못해 항상 기름통에다가 기름을 날라야했다.
신혼 초기에 결혼에 대한 낮설움 같은것 보다는 그때까지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방황했던 내가 싫었던 모양이다. 나와 아내는 직업 훈련원을 다니며 한달에 실업자 수당 60만원으로 생활을 해왔었는데, 참 이렇게 비참하게 사는 내 자신이 왜 그렇게도 원망스럽던지, 이래서 남자는 일이 없으면 안되는 구나 하고 이제서야 느껴본다.
매일 술과 잦은 외박에, 집에 들어가는 것 조차 싫었고, 난생 처음 낚시 같은것도 가보았지만, 주위엔 모두 나와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내자신도 그렇게 비참해 보일수가 없었다.
만나는 선후배들은 왜 그렇게 사는지, 그럴려고 결혼 햇는지 동정했었고, 나 조차도 싫어서 죽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었다. 거의 신혼 후 3개월 정도를 그렇게 보내다 보니, 술 기운에 아내와 이혼하자는 소리를 자주 했었고, 아내는 큰 눈으로 눈물만 흘리고, 문을 닫고 다시 나가려는 날 붙잡고 퍽도 많이 울었었다.
그러던 어느 눈내리던 날, 그 전날도 밖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친구집에 가서 자고서는 집에 돌아와보니 기름도 없어 온기도 없는 추운 방에서 큰방에 걸어놓았던 결혼 사진을 바닥에 내려놓고 혼자서 눈물을 흘리고 있던 아내를 보았을때, 저 여자가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날 만나 마음아파해야하는지 생각을 하니 정신이 조금 드는것 같았다. 마음도 아프고 이래서는 안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해 겨울을 그렇게 폐인처럼 보내고 나니 술마시기도 지겨웠는지, 이렇게 살면 진짜 폐인이 될것 같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결혼 후 6개월 정도가 지나서야 아내와 예전에 사이 좋은 오빠 동생으로서 지내게 되었다. 가끔 신문이나 보도 매체를 보면 경제 사정때문에 가정이 파괴되고, 무서운 사건들도 일어나는 걸 보면서, 그 당시의 나를 떠올리기도 한다.
그때 신혼 3개월동안 아내에게 참 못된짓, 마음아프게한짓 다해본것 같다.
여자들은 그런 아픈 기억들은 가슴속에 꼭꼭 묻어두고 산다는데, 그녀가 무슨 말을 한다해도 난 나의 잘못을 인정할수 밖에 없다.
7년이 지난 지금도 그 시절 애기는 잘 하지 않는다.
그 날 부서져버린 액자에는 결혼 사진은 아니지만 다정하게 찍은 다시 넣어 두었고, 그때 그 신혼 시절을 보낸 아파트도 이젠 재건축을 시작해서 그 집을 다시 볼순없지만, 아직도 그녀는 그 동네를 싫어한다. 생각이 날 때마다 미안했었다고, 애교를 부리며 넘어가긴 하지만 그녀의 가슴에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지 나 역시도 반성을 하고 있다.
지금도 한달에 150만원 정도의 급여를 받고 있는 셀러리 맨이지만 항상 묵묵히 지켜봐주는 아내가 고마워서 일년에 한번씩은 외국 여행도 보내주려고 하고, 내 용돈 아꺼서라도 아가씨들이 입는 유행하는 청바지나, 그녀 몰래 보험도 들어주기도 한다. 나름대로는 그것이 그녈 위한 보상이라 생각하면서.
결혼 후 4년 정도가 지나 돌이켜보니 서로 무뎌지기도 하고, 서로를 위해 다른 시간들이 필요한것 같아 1년 동안 열심히 준비를 한 후 그녀를 위해 내가 유학을 했던 곳으로 데리고 가고 싶어져서 2년 전에는 잠시 휴직을 하고 함께 외국 유학도 해보았었다.
거기서 지금의 아이를 하나님께서 내려 주셔서 들어 올때는 한 아이의 아빠와 엄마가 되어서 돌아오게 되었다.
시골이지만 여유로운 아파트에서 그리고 이제는 아직 두살이 안된 아들과 함께 셋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소망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게 된 나의 이 모습이 우리 모두의 아빠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난 도시에서 자란 사람이라고 아내에게 울쭐대며 곧잘 농담을 하고 하지만, 역시 부부는 닮아가나보다.
오늘은 오랜만에 아내와 단 둘이서 김이 모락 모락 나는, 연애 시절 자주 갔었던 시장통 허름한 한그릇에 3,000천원 하는 순대 국밥집에 들러 못마시는 소주도 마시게 하고 예전에 참 미안했었다고 말하고 그녀의 술주정도 받아주어야 겠다.
그리고 잠자리에서 다시는 춥게 자지 말라고 꼬옥 껴안아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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