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과 한차를 타다.....2

효도의 결말2004.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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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최 일류대 출신에 부산 명문대 교수직을 지냈건만  자신의 부모를 부르는 소리는 한결같은 "년" 이었다

엄마 없이는 아무것도 할수없었던 그...

어쩌면 그 스스로 일어설수 없음을 실패로 자인하며 엄마를 그렇게 미워하는지도 모른다

인생에.. 결혼에.. 그는 모든것에 실패 하였다

그저 수십억에 달하는 유산분에 목숨을 걸구 어찌할바를 모를뿐 그는 더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자가 따라왔다

마치 엄마처럼 어디든 제 여자를 달구 다니며 그렇게 아기처럼 돌봐주는 것이었다

 

차창에 손을 괴구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그를 난 물끄러미 처다 보았다

"정말 자는 것일까"

"아님 애써 날 외면 할려구..."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 이를때 없었다

형제이면서 남 처럼 애써 무시 할려는 그

하지만 이런 우연은 살아 생전 두번 다시 찿아오지 않을진대...

"뭔가라도 애기를 나눌까"

난 한참을 궁리 했다

그러다 문뜩 누나가 싸준 찰떡이 떠올랐다

난 그에게로 갔다

"이거 먹어 누나가 싸준건데..."

"저리가"

날카로운 응수였다

하지만 다시금 그에게 건넸다

미간상이 오만상 찌뿌려 들었다

"안 치워"

더 이상 응수를 물을수도 없었다

한참을 처다 보다가 난 자리로 돌아왔다

 

어릴때  그에게 죽도록 맞으면서 난 제 자식이 나면 기필코 살려두지 않을 거라구 이를 물구 다짐 했었다

난 그에게 무척 마니 맞았다

아니 무척보다 더 이상 이었다

대학을 다니면서 그 기억을 되살려 글로 써 놓았는데

"그는 사람이 아니고 신이었습니다" 라는 글이 눈에 뜨인다

왜 악마라 표현하지 않고 신이라 썼을까...

분명 지금도 생생 하지만 신처럼 생각 되었다

그가 두개로 보이기도 하구 아득히 떨어져 있기도 했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가죽 혁띠가 내몸을 휘 감았었다

그는 그 혁띠로 어러가지 연습을 했었다

물론 내몸을 상대로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두개의 영상은 빈혈이 있었던것 같구 그러기에 그 모습에 미친 그가 신처럼 보여 줬을 것이란 웃지못할 결론을 내렸다

어느날엔 도서관엘 가라구 했는데 마침 그날 도서관이 휴관 이었다

사정을 애기 했지만 그는 들어주지 않았다

통(안으면 다 들어갈 큰 다라이..)속에 들어가라구 했는데 난 상황을 짐작하구 불안해 했었다

물이 없다구 했다

하지만 곧 물을 줄테니 옷을 벗구 들어가 있으라구 했다

난 너무 고마웠다

용서해 주다니... 용서해 주다니...

하지만 그가 들고온 것은 빨레 망망이 였다

엄마두 포도나무 가지를 꺽어 들고 왔다

얼마나 맞았는지 모른다

어디 피할데라곤 전혀 없는 잔뜩 꾸부려야할 밀페된 공간 안에서 ... 난 더 이상 기억이 없었고 나중에 물이 부어 졌는데 온몸이 쓰라렸다는 그때의 기억이 결말 이었다

아니 또 있다

좁은 공간은 미쳐 버린다는 사실...

그 기원은 찿을수 없지만 어느날 친구 19평 아파트 집떨이를 갔는데 난 결국 고함을 지르며 뛰쳐 나오고 말았다

좁은 공간에만 있으면 난 불안해 지기 시작한다

고등학교 입학 축하는 그는 아주 확실히해 주었는데 10손가락중 8개의 손톱을 모두 뽑아야만 했다

새 손톱이 나기 까지 날마다 그 속에 고인 물들을 짜내야 했는데 휴~^ ^

하지만 난 맞는데는 이골이 난 지경 이었기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는 내가 제 말을 듣지 않는다고 했다

단지 못 들었을 뿐인데...

남은 전혀 생각치 않는 그~

아니 남의 즐거움이 곧 자신의 기쁨인... 자그마한 즐거움을 찿고자 남의 평생 고통을 요구했던 그~

그가 지금 나와 함께 4 시간의 시간을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다

 

학교에서도 그리고 동네 아이들에게도 난 무척 마니 맞았었다

전쟁이 일어나 모두들 죽으라구도 수 천번 외쳤고 아니 지구 멸망이 와  모두 함께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날마다 했었다

난 슬픔을 좋아했다

홀로 상상 하는게 나의 유일한 즐거움 이었는데 그 속에서 위안을 찿으며 성장 했었고...

난 갂ㅁ 그토록 날 괴롭히던 이들이 지금 뭘 하구 있을까 궁금 해질때가 가끔 있다

하지만 잘 살고 있을 것이란 결론만 남는다

남을 괴롭히던 어쨌든 그들은 강자이고  강자는 어디든 강자로 군림 하니까

약자는 그렇게 빨리 목숨을 끊던가 아님 멍에를 괴로워 하며 평생을 살아 가는 것이다

하지만 약자를 극도로 흥분 시키는 또 다른 행동이 다음에 있다

바로 강자였던 그가 '미안 하다'고 사과 하는 것이다

어느날 만난 학교 동창이... 그리고 군을 제대한 고참이 그렇게 편지를 보내오는 것이었다

난 여태껏 당한 것들중 모든것을 합한 모멸감을 느꼈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면서 스스로 위안도 삼는다는 것이다

형님도 그렇게 죽는 순간에 날 보자고 할 것이며 그렇게 필..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난 어떻게 그 순간을 피할까 모색 중이다

난 결코 그들의 사과를 받아 들이지 않겠다

그건 내가 할수 있는 유일한 복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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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에서 고속버스 터미널 까진  전철 지도로 한코스 밖에 되질 않았다

 돈이야 아낄수록 좋은거라구 '남는게 시간밖에 없는걸.." 싶어 터벅 터벅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거운 짐을 들고 걷기엔 꽤 먼 거리였다

한양길 멀다하고 싸온 남은 김밥(?) 이라도 먹어 버릴걸...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물어 물어 시간과 어우러진 발길은 어느듯 터미널에 다았고  대구로 향하는 버스가 출발 시간을 3분여 남겨두고 있었다

더구나 궁합이 딱 맞는 일반버스...

황급히 올라탄 버스엔 자리 또한 넉넉하여 우등보다 더 넓은 공간이 우둔한 몸짐을 맞아 들었다

젤.. 먼저 하나님꼐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서서히 버스는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때...

"아닐거야.." 난 무언가를 잘못 보았다고 이렇게 되내길때.. 영상은 또렷이 동공을 밝히고 있었다

형님 이었다

"허참... 인연이란..."
다시 생각하니 그렇게 우연은 아닐수도 있다

재판을 마치고 같은 대구로 내려가야할 길이라면...

그렇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수식어 다운 둘만의 4시간의 여행이 시작 되었다

 

우린 6남매였다

아니 동생이 살아있음 7남매 라고 애기 했을수도 있다

하지만 동생은 희생양인듯 그렇게 스스로 저생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동생이 죽은지 몇년이 지나도록 그후 6년후 어머님이  동생을 거두어 가시기 전까지 난 날마다 꿈속에서 동생과 같이 놀았다

어느날엔 동생에게 이렇게 물었다

"야.. 너 죽었잖아"

그러자 동생은 "안 죽었어" 그랬다

별로 개의치 않았다 날마다 그렇게 동생을 만날수 있었다

난 그게 무슨 원인인지도 안다

동생을 화장해서 큰방 창가 햇살에 동생을 두었으니까...

남들이 들었을때 정말 기겁을 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면서 동생을 꼭 자기와 같이 묻어 달라고 했다

어머님은 ... 그것이 마지막 한이었을거야...

그후 동생은 자취를 감추었다

난 어머님이 가끔 원망스러웠다

혼자 몇달을 보내면서 너무 외로웠다

반 고아나 다름없이 밤을 밝히기란 너무 고독 했다

하지만 얼마후 결혼을 했고 그들은 가끔씩 떠오르는 나의 기억이 되곤 하였는데...

 

어머님이 돌아 가신뒤 묘소를 정하지 못해 우왕좌왕 하였다

서울 병원에서 돌아 가셨기에 더욱더 난처했다

하지만 누나가 어디 알아 보더니 대구 인근의 공동묘지와 서울근 천주묘지가 있다고 했다

난 엄연 대구로 내려 가셔야 된다고 했지만 주거지가 서울에 있는 누나들은 극구 서울을 고집했다

난 그들의 속셈을 안다

장례하러 대구까지 가기 싫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서울을 정말 싫어 했는데..." 난 서울 기억이란 고생만밖에 없다는..(큰 형님 학교 뒷바라지...) 그래서 서울이 정말 싫다는..."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지만 모두들 그렇게 주장하는지라 별 도리가 없었다

서울에서 자기네들이 찿아보구 보살피겠다고 했다

둘째 형은 그저 그랬고 큰 형은 "그년 뒤진데 내가 왜가.."라며 오지도 않았다

장례 첫날밤은 그렇게 합의 하고서 모두들 가 버렸다

병원 묘소에서 난 그렇게 울면서 하룻밤을 지새웠다

난 참 바보다

어머니 통장에  4억이 되는 돈이 있었는데 통장과 도장 모두 내게 있었고 모든 거래는 내가 했었는데 그렇게 평소에 어머니가 내 통장으로 옮기라고 신신당부 하셨는데... 난 엄마 쓸쓸 할까봐 그렇게 하질 않았다

그날 밤도 그 담날도 엄마 죽었다고 울며 불며 눈물만 흘리줄 알았지 그 생각을 못 했다

장례후 생각이 나 은행엘 들렸을땐 이미 모두 지급 정지가 걸려 버렸다

10여년간 내가 번 돈이며 그렇게 엄마와 알뜰하게 모은 돈이었는데 ...명의 문제로 순식간에 알거지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더구나   일요일이라 돈을 찿지못해 마침 문상온 사업하는 친구에게 300만원을 빌렸는데 그또한 고스란히 빛이되고 만 것이다

부조금 또한 저희들 끼리 갈라 버렸다

이유인즉 자기네 사람들이고 자기들도 그 사람들이 상이 나면 그돈들고 가야 한다나...

난 어머니 산소엘 가보고 싶어도 쉬~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어디 한양길이 뉘집 애기련가

재판때 나마 찿아가 뵙겠다고 생각했지만 넉넉지 못한 형편으로 기름값을 감당치 못해 그 또한 여의치 못하다

산소엘 갈려면 차가 있어야 한다

올 봄엔 집에 국화를 길려 차에 가득 싣었다

재판을 하고 차에서 하룻밤을 자구서 새벽부터 몇해만에 찿아온 산소엔 흉칙하기 이를때 없었다

풀은 재 멋대로 자라고 묘봉은 세월에 깎여져 평면을 유지한다

자신들이 돌보겠다는.. 누나들의 말이 거짓말인걸 안다

그후 한번도 가길 않았다

국화를 심구 열심히 묘종삽으로 흙을 떠다 덮었지만... 따스한 밥을 직접 지어 올리겠다는 계획은 여지없이 차질을 빚구 말았다

그래도 올 가을엔 국화가 만발하여 오느이 마다 어머니를 한번쯤 봐 줄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울다가.. 일하다가.. 노래 하다가.. 지금만은 아무도 이곳엘 나타나질 않길 바랬지만 그날이 한식 이라나...

아내에게 한번쯤 같이 가 줄것을 바랬는데 아내는 어림두 없다

5살..아래로 3년년생의 세아이를 데리고 잘곳도 없는 그곳엘... 덤으로.. 막내임에도 불구하고 제사 지내주는 것만으로도...

직장도 없는 내 형편에 울집..을 또 그렇게 강조할수도 없다

난 어머니 돌아가시기전 어떻게든 설..에 가서 엄마 병을 고쳐버려 직장을 놓았다

그후.. 그렇게 쉬~ 버린 취직 자리는 선듯 나서질 않았다

 

부모님은 유산이 많았다

하지만 어느분도 유언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하신채 그렇게 갑짝스레 돌아 가셨다

그 이유로 이번에도 설.. 법원에 그렇게 모여든 것이다

젤.. 먼저 눈에 띄는건 큰 형님의 준비서면 이었다

무려 수십 페이지에 달하건만 각 페이지 마다 엄마에 대한 "년" 이란 단어가 빠지질 않았다

장남이라고 이미 수십억에 달하는 남아있는 유산과는 상대도 안되는 부동산을 물려 주었건만 범물동에, 황금 아파트 코너에 대로변 빌딩 지을 터가 수백평이나 있고 범물동에 3층 빌라를 지어 살고 그덕에 그들은 살고 처가 식구들을 살리건만 그들 부부는 욕을 멈추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그 "년"이란 단어의 출처는 모두 두번째로 시집온  여자 때문이었다

(난 그 여자를 형수라 부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