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넘어가면서 그 노을빛으로 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설무랑의 걸음에는 서두름이 없었다. 산 중턱에서 잠시 멈추어 선 그는 트인 곳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집들이 옹기종기 사이좋게 모여있는 소박한 마을이 보였다. 잘 정돈된 논과 밭은 평화롭게 누워있었고 하루를 마치고 돌아가는 몇 명 농사꾼들의 모습도 보였다.
설무랑은 그런 장면을 등지고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왼 손엔 흰 히비어꽃 한 다발이 들리어 그가 걸을 때마다 보조를 맞춰 꽃송이를 부딪히며 흔들렸다.
얼마 걸어가지 않아 산모퉁이를 하나 돌자 양지 바른 위치에 작은 무덤이 하나 드러누워 있었다. 그곳에서 설무랑은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비석이나 비목 하나 없이 덩그라니 홀로 누운 무덤은 그 주인이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름없는 무덤치고는 아주 손질이 잘 되어 있었다. 잘 다듬어진 잔디는 누군가 공들인 흔적이었다.
설무랑은 잠시 무덤에 시선을 박은 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의 차갑던 눈빛이 서서히 부드럽게 변하고 있었다. 그는 무덤 앞으로 다가가 히비어꽃을 놓았다. 허리를 굽힌 채 손을 뻗어 무덤 위의 잔디를 마치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 듯 쓸더니 그는 무덤 옆에 주저 앉았다. 그의 목적지가 그곳인 모양이었다.
매끈하게 깔린 잔디가 자라난 땅바닥을 주시하는 그의 눈 속으로 흙 속을 열심히 누비고 다니는 개미떼가 들어왔다. 서로의 꽁무니를 열심히도 쫓고 있는 개미떼를 그는 유심히도 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히비어의 강하고 달콤한 향이 그를 스쳤다. 마지막으로 강렬하게 붉어진 노을이 히비어의 흰색을 선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 이것이 네 선택이었느냐?"
그는 듣는 이 없이 중얼거렸다.
설무랑은 흙과 풀을 털어내며 일어섰다. 그는 느린 걸음으로 무덤을 천천히 빙 돌았다. 착잡한 기분을 떨쳐내려 먼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지만, 그의 감정은 오히려 격해지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그 순간 노을보다 더 짙은 붉은 색으로 바꼈다. 설무랑은 무덤에 누운 이를 향해 소리쳤다.
" 살아있었더라면....꿋꿋하게 살아 있었다면 너를 단념해주려 했다! 하지만, 이젠 결코 너를 놓아줄 수 없게 되었어. 너는 이제 내 심장 속에서 영원히..영원히 살테니깐. 놓아주지..않겠다."
설무랑은 힘없이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주저 않았다.
" 보란 듯이 살아가지 그랬어? 나를 봐 주지 않아도 괜찮은데...살아만 있어주지 그랬어? 왜...왜..이렇게 멀리 가 버린거냐?"
해는 완전히 넘어가 이젠 밤의 시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하늘에는 두 개의 달이 떠 있었다.
마른 풀을 밟는 소리가 다가오면서 설무랑의 붉은 눈동자가 다시 보라색으로 돌아왔다. 그는 일어서 무덤에서 잠시 물러나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주시했다. 잠시 후, 모퉁이를 돌아 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검을 형체로 나타났던 그가 다가 올 수록 달빛의 힘을 빌려 모습이 확실해져 갔다. 둘은 서로를 확인할 수 있게 되자, 동시에 꽤나 놀랐다.
설무랑은 순간적으로 법도도 잊은 채, 놀란 눈으로 나타난 이를 바라보고 있다가 급히 무릎을 꿇어 앉으며,
" 지고지존이신 천제께 동방성 지국천왕의 장자(長子) 설무랑이 예를 올리옵니다."
이름없는 평범한 야산의 밤길을 걸어 온 이는 바로 천제 비류천이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상대를 만나 당황한 것은 비류천도 마찬가지였다.
" 저네?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하하..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 일어서게."
비류천은 반갑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무덤을 바라보더니 어둠 속에서 밝은 흰 빛을 내고 있는 히비어를 발견했다.
" 혹시..자네가 히비어를 놓아두었는가?"
천제는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설무랑을 돌아다보았고, 설무랑은 모르는 일인 듯 새삼스레 무덤을 낯설게 바라보면서,
" 소인은 단지 길을 가던 중, 이름 모를 무덤 앞에서 잠시 멈추었을 뿐입니다."
" 그런가?"
천제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무덤으로 다가갔다. 설무랑은 천제의 손에 들린 또 하나의 히비어 다발을 보았다. 그는 놓여있는 히비어 옆에 나란히 자신의 꽃을 놓고 숙인 허리를 세웠다.
" 다른 꽃도 아닌 히비어라..."
천제는 중얼거리며 어깨에 맨 비단 새끼줄에 매달린 술병을 하나 풀어냈다. 마개를 열고 술병을 고쳐 쥔 그는 무덤 위에 술을 몇 번 흩뿌리면서,
"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 고인에 대한 예의는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나머지는 산 사람을 위해 남겨 놓는 거지. 안그런가, 설무랑?"
설무랑은 천제가 돌아서며 묻자 그저 말없이 허리를 숙여 동조를 표했다.
" 가는 길 급하지 않으면 나와 한 잔 하겠는가? 지국천은 학자인지라 술과 친하지 않은데, 그의 아들은 어떠한가 궁금하군."
" 전하께서 주오시면 강을 이루고 넘쳐 흐른대도 즐거이 마시겠나이다."
" 하하..이리 와서 한 잔 받으시게. 풀벌레 소리 풍악 삼아 저 별들을 여인네들 삼아 마셔보는 것도 꽤 괜찮을 것이야."
비류천은 새끼줄에 매달린 작은 주머니에서 술잔을 꺼내 설무랑에게 쥐어주고 한 잔 가득 술을 부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병 째 한 모금 들이켰다.
제황성에서 만났던 지존으로써의 비류천과 풀밭에 멋대로 주저앉아 쾌활하게 말을 거는 지금의 그는 마치 전혀 다른 사람같아 보였다. 타고 난 듯 했던 냉철함과 권위와 품위가 깡그리 사라지고 평범한 사내가 이 곳에 있었다.
" 제황성에 한 번 들러주게. 보아하니 자네도 주신(酒神)격이로군.언제 나와 한 번 술을 겨뤄보세."
비류천은 설무랑이 독한 술을 가볍게 입 속으로 털어넣자 웃으며 말했다.
" 전하께서 제게 잔 하나를 보내시면 술벗을 찾고 계심으로 알고 만사 제쳐두고 달려가겠습니다. 하오나...술 겨루기에 군신의 도는 없사옵니다."
" 하하하..하하. 배짱 역시 두둑하군."
비류천은 소리내어 즐겁게 웃으며 설무랑의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밤공기는 취기가 돌아 몸이 뜨거워진 두 사람에게 더할 나위없이 상쾌하게 다가왔다. 천제는 기분 좋은 듯 풀밭에 대자로 드러누워 쏟아질 듯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말했다.
초율(礎律) 제 27화
설무랑은 산길을 걷고 있었다. 도리천 남쪽의 이름없는 나즈막한 산이었다.
해가 넘어가면서 그 노을빛으로 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설무랑의 걸음에는 서두름이 없었다. 산 중턱에서 잠시 멈추어 선 그는 트인 곳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집들이 옹기종기 사이좋게 모여있는 소박한 마을이 보였다. 잘 정돈된 논과 밭은 평화롭게 누워있었고 하루를 마치고 돌아가는 몇 명 농사꾼들의 모습도 보였다.
설무랑은 그런 장면을 등지고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왼 손엔 흰 히비어꽃 한 다발이 들리어 그가 걸을 때마다 보조를 맞춰 꽃송이를 부딪히며 흔들렸다.
얼마 걸어가지 않아 산모퉁이를 하나 돌자 양지 바른 위치에 작은 무덤이 하나 드러누워 있었다. 그곳에서 설무랑은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비석이나 비목 하나 없이 덩그라니 홀로 누운 무덤은 그 주인이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름없는 무덤치고는 아주 손질이 잘 되어 있었다. 잘 다듬어진 잔디는 누군가 공들인 흔적이었다.
설무랑은 잠시 무덤에 시선을 박은 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의 차갑던 눈빛이 서서히 부드럽게 변하고 있었다. 그는 무덤 앞으로 다가가 히비어꽃을 놓았다. 허리를 굽힌 채 손을 뻗어 무덤 위의 잔디를 마치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 듯 쓸더니 그는 무덤 옆에 주저 앉았다. 그의 목적지가 그곳인 모양이었다.
매끈하게 깔린 잔디가 자라난 땅바닥을 주시하는 그의 눈 속으로 흙 속을 열심히 누비고 다니는 개미떼가 들어왔다. 서로의 꽁무니를 열심히도 쫓고 있는 개미떼를 그는 유심히도 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히비어의 강하고 달콤한 향이 그를 스쳤다. 마지막으로 강렬하게 붉어진 노을이 히비어의 흰색을 선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 이것이 네 선택이었느냐?"
그는 듣는 이 없이 중얼거렸다.
설무랑은 흙과 풀을 털어내며 일어섰다. 그는 느린 걸음으로 무덤을 천천히 빙 돌았다. 착잡한 기분을 떨쳐내려 먼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지만, 그의 감정은 오히려 격해지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그 순간 노을보다 더 짙은 붉은 색으로 바꼈다. 설무랑은 무덤에 누운 이를 향해 소리쳤다.
" 살아있었더라면....꿋꿋하게 살아 있었다면 너를 단념해주려 했다! 하지만, 이젠 결코 너를 놓아줄 수 없게 되었어. 너는 이제 내 심장 속에서 영원히..영원히 살테니깐. 놓아주지..않겠다."
설무랑은 힘없이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주저 않았다.
" 보란 듯이 살아가지 그랬어? 나를 봐 주지 않아도 괜찮은데...살아만 있어주지 그랬어? 왜...왜..이렇게 멀리 가 버린거냐?"
해는 완전히 넘어가 이젠 밤의 시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하늘에는 두 개의 달이 떠 있었다.
마른 풀을 밟는 소리가 다가오면서 설무랑의 붉은 눈동자가 다시 보라색으로 돌아왔다. 그는 일어서 무덤에서 잠시 물러나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주시했다. 잠시 후, 모퉁이를 돌아 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검을 형체로 나타났던 그가 다가 올 수록 달빛의 힘을 빌려 모습이 확실해져 갔다. 둘은 서로를 확인할 수 있게 되자, 동시에 꽤나 놀랐다.
설무랑은 순간적으로 법도도 잊은 채, 놀란 눈으로 나타난 이를 바라보고 있다가 급히 무릎을 꿇어 앉으며,
" 지고지존이신 천제께 동방성 지국천왕의 장자(長子) 설무랑이 예를 올리옵니다."
이름없는 평범한 야산의 밤길을 걸어 온 이는 바로 천제 비류천이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상대를 만나 당황한 것은 비류천도 마찬가지였다.
" 저네?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하하..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 일어서게."
비류천은 반갑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무덤을 바라보더니 어둠 속에서 밝은 흰 빛을 내고 있는 히비어를 발견했다.
" 혹시..자네가 히비어를 놓아두었는가?"
천제는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설무랑을 돌아다보았고, 설무랑은 모르는 일인 듯 새삼스레 무덤을 낯설게 바라보면서,
" 소인은 단지 길을 가던 중, 이름 모를 무덤 앞에서 잠시 멈추었을 뿐입니다."
" 그런가?"
천제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무덤으로 다가갔다. 설무랑은 천제의 손에 들린 또 하나의 히비어 다발을 보았다. 그는 놓여있는 히비어 옆에 나란히 자신의 꽃을 놓고 숙인 허리를 세웠다.
" 다른 꽃도 아닌 히비어라..."
천제는 중얼거리며 어깨에 맨 비단 새끼줄에 매달린 술병을 하나 풀어냈다. 마개를 열고 술병을 고쳐 쥔 그는 무덤 위에 술을 몇 번 흩뿌리면서,
"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 고인에 대한 예의는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나머지는 산 사람을 위해 남겨 놓는 거지. 안그런가, 설무랑?"
설무랑은 천제가 돌아서며 묻자 그저 말없이 허리를 숙여 동조를 표했다.
" 가는 길 급하지 않으면 나와 한 잔 하겠는가? 지국천은 학자인지라 술과 친하지 않은데, 그의 아들은 어떠한가 궁금하군."
" 전하께서 주오시면 강을 이루고 넘쳐 흐른대도 즐거이 마시겠나이다."
" 하하..이리 와서 한 잔 받으시게. 풀벌레 소리 풍악 삼아 저 별들을 여인네들 삼아 마셔보는 것도 꽤 괜찮을 것이야."
비류천은 새끼줄에 매달린 작은 주머니에서 술잔을 꺼내 설무랑에게 쥐어주고 한 잔 가득 술을 부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병 째 한 모금 들이켰다.
제황성에서 만났던 지존으로써의 비류천과 풀밭에 멋대로 주저앉아 쾌활하게 말을 거는 지금의 그는 마치 전혀 다른 사람같아 보였다. 타고 난 듯 했던 냉철함과 권위와 품위가 깡그리 사라지고 평범한 사내가 이 곳에 있었다.
" 제황성에 한 번 들러주게. 보아하니 자네도 주신(酒神)격이로군.언제 나와 한 번 술을 겨뤄보세."
비류천은 설무랑이 독한 술을 가볍게 입 속으로 털어넣자 웃으며 말했다.
" 전하께서 제게 잔 하나를 보내시면 술벗을 찾고 계심으로 알고 만사 제쳐두고 달려가겠습니다. 하오나...술 겨루기에 군신의 도는 없사옵니다."
" 하하하..하하. 배짱 역시 두둑하군."
비류천은 소리내어 즐겁게 웃으며 설무랑의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밤공기는 취기가 돌아 몸이 뜨거워진 두 사람에게 더할 나위없이 상쾌하게 다가왔다. 천제는 기분 좋은 듯 풀밭에 대자로 드러누워 쏟아질 듯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말했다.
" 그런데 이곳엔 어인 일이었는가?"
천제는 아무래도 연관성없는 장소에서 설무랑을 만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 때론...목적없이 걸음을 옮기곤 하옵니다. 오늘은 제 발이 절 이리로 이끌었을 뿐입니다."
" 허허... 자네도 맘 둘 데 없는 사람이로군."
천제는 다시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아 새 술병의 마개를 땄다.
" 하오시면 전하께선 이 무덤의 주인을 찾아오신것입니까?"
천제는 대답없이 사연이 밴 깊은 미소를 띄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