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없이 붓을 잡아 먹물을 찍어도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는 시간들이 지나고 있었다. 사흘...그 시간들만 참아내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하고 나면 남은 날을 여한 없이 그리운 이와 함께 할 것이었다. 세상 모든 기쁨을 전부 가져와 함께 나누고 보태여 그 서러웠던 날들을 잊게 해줄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하루가 수년인 냥 더디어 돌에 새겨진 듯 멈추고 갈 줄을 몰랐다.
종현이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그 얼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걸리고 시름이 사라졌다. 그 사람으로 인해 아픈 것은 그것조차도 버리기 아까운 은혜로움이라 서러운 한 점도 놓을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가슴으로 보아 아프고 좋은 것을 구분할 수 없었다. 가슴에 품은 한 사람이 이미 세상이 되어 모든 것이 그에게 닿아 있었다.
[서러웠던 세월만큼 내가 줄 것이다..
세상을 다 뒤져 보이지 않게 숨은 그 기쁨들을 모두 찾아내..
한시도 그 얼굴에서 떠나지 않게 할 것이다..
그 몸에 굳게 갇힌 너를 불러내 나를 의지해 편히 쉬게 할 것이다..
한번도 보인 적 없는 너를 내 앞에 모두 보이게 할 것이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깃털처럼 가볍게 할 것이다...
너는 내 하루를 물처럼 돌처럼 흐르게 하는구나...
너를 앞에 둔 그 하루는 폭포처럼 쏟아져 흘렀거늘...
이리 기다리는 시간은 돌이 되어 멈추었구나..]
그 새벽 종현의 집 앞에 한 사람이 섰다. 창호지 건너로 비치는 그 그림자에서 한시도 눈을 때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을 보아 이리도 아프겠느냐...
무엇을 품어 이리도 서럽겠느냐...]
망부석인 냥 그 자리에 굳어 떠날 줄을 모르는 발걸음이 흐르는 시간을 그리 붙잡고 있었다. 한스러운 슬픔이 손끝에 모여 싸리문을 움켜쥔 손에 핏물이 고여도 한점 아픔을 느끼지 못할만큼 온 영혼이 그를 향해 있었다.
[또 다시 처음처럼 이곳에 섰다.
부르고 싶구나..
그 이름을 불러 나를 보게 하고 싶구나...
내 원망이 깊어 하늘이 너를 오래 주지 않을 모양이다...
많은 날을 함께 하지 못했어도 이미 너는 내 사람이다..
가진 것 없는 가슴한쪽 나누어 가졌으나 이미 우리는 서로의 세상이다..
그 맑은 심성에 한스러움이 고여 남은 날이 서러우면 어찌 하느냐...
버리고 살아라...
그리할 수만 있다면 나를 알았던 기억 한점도 남겨두지 말고 버려라..
서운하지 않을 것이다...
보아서 아픈 사람...
품어서 아픈 사람...
어찌 하느냐...
용서치 마라...
이리 떠나는 나를 용서치 마라..
너를 은혜한 나를 용서치 마라...]
사흘째 되던 날 밤 집을 나서든 종현도 그 곁은 지키고 선 도진도 그 어떤 말도 내 뱉지 못하고 있었다. 입을 열면 그 가슴을 울리고 있는 불안한 파동이 금방 이라도 온 지축을 뒤 흔들어 버릴 듯 마음을 조이고 있었다. 도진은 자꾸 생겨나는 그 두려움을 애써 누르며 효원이 끝까지 종현을 놓지 않을 거라는 그 믿음에 매달리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시간도 그리 사람을 말리지 못할 듯싶었다. 묘시가 가까워 올수록 종현과 도진의 심장이 말라 들어가 숨을 쉬면 부스러질 듯 했다. 결국 약속한 시각이 지나고 있었고 종현의 얼굴이 그 불안함을 이기지 못하고 굳어 갔다.
잠시 후 포구가 시끌벅적해지고 지나던 사람들의 얘기를 흘려들은 도진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가고 있었다.
"지금 무어라 하시었습니까..."
"반정이 일어났답니다..지금 온 대궐 안이 난리가 나고 권세가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 떨어지고 있답니다...잘됐지 뭔가...이 더러운 세상 한번 발칵 뒤집혀야 할 일이야..."
도진이 더 서 있지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미 그 얼굴에 혼이 남아 있질 않아 그 눈이 초점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종현이 도진의 얼굴빛에서 가슴에 꾹꾹 눌러 머리조차 내밀지 못하게 숨겨 있던 두려움을 읽고 말았다.
“왜....왜 그르냐....무슨 일이냐...혹여 마마께...”
도진이 종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혈을 집어 그 자리에서 혼절시켰다. 그리고 뒤를 지키게 했던 장정들을 불렀다. 떨리는 심장이 목까지 닿아 내 놓는 말이 쉬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모셔라...깨어나셔도 절대 집밖을 나가게 해선 안 된다... 혹여 내가 돌아오지 못해도 너희는 본분을 다해라...이제 너희가 지킬 분은 마마가 아니다...“
궁으로 향하는 도진의 발걸음이 넋을 놓고 움직이는 사람처럼 흔들렸다. 자신의 몽매함에 혀를 깨물고 싶었다. 그 말을 그리 믿어버린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평생을 모셔 온 효원을 모르지 않았으나 종현을 아끼는 그 마음을 믿어 그리 쉽게 믿어버린 것이 도리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게 했음을 알았다.
[이리 가실 수는 없습니다..
이리 보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어찌 제게 이리도 큰 죄를 범하게 하시 옵니까...
결단코 돌릴 수 없는 길이라면 가시는 그 길을 제가 지켜야 함입니다..
이리는 아니 되옵니다...]
혼절에서 깨어난 종현의 얼굴에 이미 허망함이 깃들어 있었다. 알아져도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할 그 허망함이 온 몸에 번지고 있었다. 마당으로 뛰쳐나가 분노와 서러움이 뒤섞인 비통함을 토해냈다. 장정들에 의해 문을 나서는 것조차 하지 못한 종현이 두 손으로 흙바닥을 움켜쥐고 온 심장을 들썩여 서럽고 서러운 오열을 쏟아냈다. 그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메아리처럼 다시 그에게로 돌아왔다.
"그럴 사람이 아니다...
이리 허망하게 나를 놓고 갈 사람이 아니다...
뭔가 잘못된 것이다...
내가 갈 것이다...
가서 그를 만날 것이다...."
수많은 목숨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어떤 이가 반정을 꽤했는지 조차 정확히 아는 이 없는 그 일이 온 대궐 안을 피로 물들였다. 임금위에 임금으로 섰던 이조판서 김우섭이 소리 없이 세상을 버렸고 그를 구명하기 위한 세력들의 마지막 힘줄을 효원이 끊어내고 떠났다. 대궐을 치고 들어올 군사가 있다 해도 이미 그들에겐 명분을 잃었다. 핏줄을 놓아 김우섭을 버린 임금에게 누구도 반기를 들지 못했고 반정 속에 한쪽 발을 담고 있던 아정과 이숙원에 대한 어떤 원성도 들어내지 못했다. 효원이 그 모든 짐들을 가지고 떠났고 종현이 하늘과 땅을 잃었다.
[이리 간다는 말을 했던 것이냐...
이것이었느냐...
그 먼 길이 이리 허망한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냐.....
차라리 내게 오지 말았어야 했다......
이리 갈 것을 왜 내게 왔더냐...
이제 기다리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내가 무엇으로 살길 바라느냐....]
종현이 그렇게 물조차 넘기지 못하는 날들을 보내며 모든 것을 놓으려 하고 있었다. 하늘과 땅을 잃은 자에게 목줄이 타 들어가는 그 고통은 차라리 위안이 되었다.
[이리 참아 끈을 놓으면 그리운 이를 보게 되는 것이리라...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갈 것이다....
이제 그 무거운 옷들을 다 벗어버렸을 테니 편히 쉬어질 것이다...
내가 갈 것이다....]
--회한--
봄볕이 방문을 새어들어 종현의 무거운 눈꺼풀을 끌어 올렸다. 몽롱한 정신 속으로 어렴풋한 사람 소리와 새소리가 함께 섞여 내려앉았다.
"긴 잠을 주무셨습니다..."
아직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희뿌연 시선 속으로 여인의 소리가 먼저 들려 왔다.
"누구 신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조금씩 뚜렷해지는 시선 속에 낯설지 않은 그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당신은..."
"예...영월각에 화연입니다..."
"여기가 어딥니까...어찌 된 일입니까..."
종현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심한 현기증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머리를 감싸며 겨우 몸을 일으킨 그가 방을 둘러보았다.
"아직 거동하기 힘든 몸입니다...기력이 너무 쇠해서 음식조차 받질 않는다 하니 몸을 추스리려면 한참 걸릴거라 했습니다..."
"말을 해 보시오....여기는 어디고 누가 나를 데려온 것이오..."
여인이 조용히 방을 나가고 잠시 후 도진이 방에 들었다. 종현이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을 토해내려 하고 있었다.
"아닐 게다...
그럴 사람이 아니다...
올 것이다...
나를 이리 버릴 사람이 아니다...
내가 아픈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어찌 나를 홀로 버리겠느냐..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
반쯤 정신을 놓아 버린 사람처럼 자꾸 그렇게 돼 뇌이고 있었다. 도진이 일어나 벽에 걸려 있던 그림에서 보자기를 들어냈다. 한 점의 기력조차 없던 그가 스르르 몸을 일으켜 그 그림에게로 다가갔다. 도진이 말없이 자리를 비키고 그림과 홀로 남은 종현은 떨리는 손으로 그림속의 효원을 어루만졌다.
[한번은 올 거라 믿었다...
이리 왔구나....
내가 기다릴 것이 못내 염려되어 이리 내게 왔구나...]
종현은 벽에서 그림을 때어내 바닥에 펼쳤다.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를 대하듯 내쉬는 숨조차 죽이고 떨리는 손끝을 가져가 효원을 맞았다. 온몸을 녹여내는 눈물이 끝도 없이 흘러내려 눈앞의 효원이 뿌옇게 흐렸다. 종현을 두고 떠나는 그 서러움이 그곳에 그대로 내려 앉아있었다.
[내가 태어난 연유를 알지 못했다.
너를 알아 잠시 살아있는 나를 보았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너를 알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가져갈 것 없는 내 마지막이 원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허망하지 않다.
그러니 너는 슬픈 눈물을 흘리지 마라.
내가 너를 기억해 가져갈 것이다.
수없는 망각을 강을 건너고 수억겁의 인연을 거쳐 내가 너를 찾을 것이다.
너를 품은 나는 가는 길이 외롭지 않다.
그러니 너는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의 아름다움을 다 담아 오너라.
귓전을 지나는 바람한점도 흘려보내지 말고 하나 빠짐없이 다 담고 오너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니 속에 담아 나를 만나면 원 없이 쏟아 보아라.
나는 오직 한사람만 기억해 갈 것이다.
내가 너를 은혜 했다]
문밖으로 피를 토할 듯한 종현의 절규가 세어 나왔다.
--효원이 떠나기 전날 밤--
"형님들의 작호를 거두시고 어머님과 편히 살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그러면 너는 내게 무엇을 주겠느냐...."
"저를 드리겠사옵니다... 제가 가져갈 목숨들과 함께 반정을 가져가 드리겠사옵니다"
"정녕....그리하겠느냐..."
효원의 얼굴에 잠시 갈등이 일다 사라졌다.
"왜 살려 하지 않느냐..."
“어차피 이번 생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삶입니다.."
“너는 어찌 너를 버리는 일에 이토록 초연할 수 있느냐...”
“육신에 병이 깊습니다......조금 앞당겨 가는 길에 남은 사람들의 시름을 가져갈 수 있으니 그리 서럽지는 않습니다..“
“내가 너의 그릇을 안다...정녕 한세상 가져보고자 욕심나지 않더냐...”
“제게는 가지고 싶었던 다른 세상이 있었사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더냐...”
“품고 갈 꿈인 듯 합니다...내 보이는 것조차 아까운 꿈인 듯 합니다..”
[제게는 그 사람이 제 세상이었습니다...
한 세상을 가지는 것 보다 그 한 사람을 얻는 일이 더 간절했습니다..]
"내가 너를 아까워했든 것을 잊지 마라..."
"청이 있사옵니다...마지막 가는 길에 드리는 청이 옵니다."
"말해 보아라"
효원이 가슴에서 고희 접힌 필서를 꺼내 놓았다.
"이 속에 한 사람이 있사옵니다. 신분은 미천하나 그 재능과 학식이 그리 두기 아까운 사람이옵니다. 그에게 과장에 나설 수 있는 신분을 주시옵소서."
조선야사..<나를 용서치 마라..15..(완결편)>
수 없이 붓을 잡아 먹물을 찍어도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는 시간들이 지나고 있었다. 사흘...그 시간들만 참아내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하고 나면 남은 날을 여한 없이 그리운 이와 함께 할 것이었다. 세상 모든 기쁨을 전부 가져와 함께 나누고 보태여 그 서러웠던 날들을 잊게 해줄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하루가 수년인 냥 더디어 돌에 새겨진 듯 멈추고 갈 줄을 몰랐다.
종현이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그 얼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걸리고 시름이 사라졌다. 그 사람으로 인해 아픈 것은 그것조차도 버리기 아까운 은혜로움이라 서러운 한 점도 놓을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가슴으로 보아 아프고 좋은 것을 구분할 수 없었다. 가슴에 품은 한 사람이 이미 세상이 되어 모든 것이 그에게 닿아 있었다.
[서러웠던 세월만큼 내가 줄 것이다..
세상을 다 뒤져 보이지 않게 숨은 그 기쁨들을 모두 찾아내..
한시도 그 얼굴에서 떠나지 않게 할 것이다..
그 몸에 굳게 갇힌 너를 불러내 나를 의지해 편히 쉬게 할 것이다..
한번도 보인 적 없는 너를 내 앞에 모두 보이게 할 것이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깃털처럼 가볍게 할 것이다...
너는 내 하루를 물처럼 돌처럼 흐르게 하는구나...
너를 앞에 둔 그 하루는 폭포처럼 쏟아져 흘렀거늘...
이리 기다리는 시간은 돌이 되어 멈추었구나..]
그 새벽 종현의 집 앞에 한 사람이 섰다. 창호지 건너로 비치는 그 그림자에서 한시도 눈을 때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을 보아 이리도 아프겠느냐...
무엇을 품어 이리도 서럽겠느냐...]
망부석인 냥 그 자리에 굳어 떠날 줄을 모르는 발걸음이 흐르는 시간을 그리 붙잡고 있었다. 한스러운 슬픔이 손끝에 모여 싸리문을 움켜쥔 손에 핏물이 고여도 한점 아픔을 느끼지 못할만큼 온 영혼이 그를 향해 있었다.
[또 다시 처음처럼 이곳에 섰다.
부르고 싶구나..
그 이름을 불러 나를 보게 하고 싶구나...
내 원망이 깊어 하늘이 너를 오래 주지 않을 모양이다...
많은 날을 함께 하지 못했어도 이미 너는 내 사람이다..
가진 것 없는 가슴한쪽 나누어 가졌으나 이미 우리는 서로의 세상이다..
그 맑은 심성에 한스러움이 고여 남은 날이 서러우면 어찌 하느냐...
버리고 살아라...
그리할 수만 있다면 나를 알았던 기억 한점도 남겨두지 말고 버려라..
서운하지 않을 것이다...
보아서 아픈 사람...
품어서 아픈 사람...
어찌 하느냐...
용서치 마라...
이리 떠나는 나를 용서치 마라..
너를 은혜한 나를 용서치 마라...]
사흘째 되던 날 밤 집을 나서든 종현도 그 곁은 지키고 선 도진도 그 어떤 말도 내 뱉지 못하고 있었다. 입을 열면 그 가슴을 울리고 있는 불안한 파동이 금방 이라도 온 지축을 뒤 흔들어 버릴 듯 마음을 조이고 있었다. 도진은 자꾸 생겨나는 그 두려움을 애써 누르며 효원이 끝까지 종현을 놓지 않을 거라는 그 믿음에 매달리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시간도 그리 사람을 말리지 못할 듯싶었다. 묘시가 가까워 올수록 종현과 도진의 심장이 말라 들어가 숨을 쉬면 부스러질 듯 했다. 결국 약속한 시각이 지나고 있었고 종현의 얼굴이 그 불안함을 이기지 못하고 굳어 갔다.
잠시 후 포구가 시끌벅적해지고 지나던 사람들의 얘기를 흘려들은 도진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가고 있었다.
"지금 무어라 하시었습니까..."
"반정이 일어났답니다..지금 온 대궐 안이 난리가 나고 권세가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 떨어지고 있답니다...잘됐지 뭔가...이 더러운 세상 한번 발칵 뒤집혀야 할 일이야..."
도진이 더 서 있지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미 그 얼굴에 혼이 남아 있질 않아 그 눈이 초점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종현이 도진의 얼굴빛에서 가슴에 꾹꾹 눌러 머리조차 내밀지 못하게 숨겨 있던 두려움을 읽고 말았다.
“왜....왜 그르냐....무슨 일이냐...혹여 마마께...”
도진이 종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혈을 집어 그 자리에서 혼절시켰다. 그리고 뒤를 지키게 했던 장정들을 불렀다. 떨리는 심장이 목까지 닿아 내 놓는 말이 쉬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모셔라...깨어나셔도 절대 집밖을 나가게 해선 안 된다... 혹여 내가 돌아오지 못해도 너희는 본분을 다해라...이제 너희가 지킬 분은 마마가 아니다...“
궁으로 향하는 도진의 발걸음이 넋을 놓고 움직이는 사람처럼 흔들렸다. 자신의 몽매함에 혀를 깨물고 싶었다. 그 말을 그리 믿어버린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평생을 모셔 온 효원을 모르지 않았으나 종현을 아끼는 그 마음을 믿어 그리 쉽게 믿어버린 것이 도리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게 했음을 알았다.
[이리 가실 수는 없습니다..
이리 보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어찌 제게 이리도 큰 죄를 범하게 하시 옵니까...
결단코 돌릴 수 없는 길이라면 가시는 그 길을 제가 지켜야 함입니다..
이리는 아니 되옵니다...]
혼절에서 깨어난 종현의 얼굴에 이미 허망함이 깃들어 있었다. 알아져도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할 그 허망함이 온 몸에 번지고 있었다. 마당으로 뛰쳐나가 분노와 서러움이 뒤섞인 비통함을 토해냈다. 장정들에 의해 문을 나서는 것조차 하지 못한 종현이 두 손으로 흙바닥을 움켜쥐고 온 심장을 들썩여 서럽고 서러운 오열을 쏟아냈다. 그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메아리처럼 다시 그에게로 돌아왔다.
"그럴 사람이 아니다...
이리 허망하게 나를 놓고 갈 사람이 아니다...
뭔가 잘못된 것이다...
내가 갈 것이다...
가서 그를 만날 것이다...."
수많은 목숨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어떤 이가 반정을 꽤했는지 조차 정확히 아는 이 없는 그 일이 온 대궐 안을 피로 물들였다. 임금위에 임금으로 섰던 이조판서 김우섭이 소리 없이 세상을 버렸고 그를 구명하기 위한 세력들의 마지막 힘줄을 효원이 끊어내고 떠났다. 대궐을 치고 들어올 군사가 있다 해도 이미 그들에겐 명분을 잃었다. 핏줄을 놓아 김우섭을 버린 임금에게 누구도 반기를 들지 못했고 반정 속에 한쪽 발을 담고 있던 아정과 이숙원에 대한 어떤 원성도 들어내지 못했다. 효원이 그 모든 짐들을 가지고 떠났고 종현이 하늘과 땅을 잃었다.
[이리 간다는 말을 했던 것이냐...
이것이었느냐...
그 먼 길이 이리 허망한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냐.....
차라리 내게 오지 말았어야 했다......
이리 갈 것을 왜 내게 왔더냐...
이제 기다리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내가 무엇으로 살길 바라느냐....]
종현이 그렇게 물조차 넘기지 못하는 날들을 보내며 모든 것을 놓으려 하고 있었다. 하늘과 땅을 잃은 자에게 목줄이 타 들어가는 그 고통은 차라리 위안이 되었다.
[이리 참아 끈을 놓으면 그리운 이를 보게 되는 것이리라...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갈 것이다....
이제 그 무거운 옷들을 다 벗어버렸을 테니 편히 쉬어질 것이다...
내가 갈 것이다....]
--회한--
봄볕이 방문을 새어들어 종현의 무거운 눈꺼풀을 끌어 올렸다. 몽롱한 정신 속으로 어렴풋한 사람 소리와 새소리가 함께 섞여 내려앉았다.
"긴 잠을 주무셨습니다..."
아직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희뿌연 시선 속으로 여인의 소리가 먼저 들려 왔다.
"누구 신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조금씩 뚜렷해지는 시선 속에 낯설지 않은 그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당신은..."
"예...영월각에 화연입니다..."
"여기가 어딥니까...어찌 된 일입니까..."
종현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심한 현기증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머리를 감싸며 겨우 몸을 일으킨 그가 방을 둘러보았다.
"아직 거동하기 힘든 몸입니다...기력이 너무 쇠해서 음식조차 받질 않는다 하니 몸을 추스리려면 한참 걸릴거라 했습니다..."
"말을 해 보시오....여기는 어디고 누가 나를 데려온 것이오..."
여인이 조용히 방을 나가고 잠시 후 도진이 방에 들었다. 종현이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을 토해내려 하고 있었다.
"아닐 게다...
그럴 사람이 아니다...
올 것이다...
나를 이리 버릴 사람이 아니다...
내가 아픈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어찌 나를 홀로 버리겠느냐..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
반쯤 정신을 놓아 버린 사람처럼 자꾸 그렇게 돼 뇌이고 있었다. 도진이 일어나 벽에 걸려 있던 그림에서 보자기를 들어냈다. 한 점의 기력조차 없던 그가 스르르 몸을 일으켜 그 그림에게로 다가갔다. 도진이 말없이 자리를 비키고 그림과 홀로 남은 종현은 떨리는 손으로 그림속의 효원을 어루만졌다.
[한번은 올 거라 믿었다...
이리 왔구나....
내가 기다릴 것이 못내 염려되어 이리 내게 왔구나...]
종현은 벽에서 그림을 때어내 바닥에 펼쳤다.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를 대하듯 내쉬는 숨조차 죽이고 떨리는 손끝을 가져가 효원을 맞았다. 온몸을 녹여내는 눈물이 끝도 없이 흘러내려 눈앞의 효원이 뿌옇게 흐렸다. 종현을 두고 떠나는 그 서러움이 그곳에 그대로 내려 앉아있었다.
[내가 태어난 연유를 알지 못했다.
너를 알아 잠시 살아있는 나를 보았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너를 알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가져갈 것 없는 내 마지막이 원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허망하지 않다.
그러니 너는 슬픈 눈물을 흘리지 마라.
내가 너를 기억해 가져갈 것이다.
수없는 망각을 강을 건너고 수억겁의 인연을 거쳐 내가 너를 찾을 것이다.
너를 품은 나는 가는 길이 외롭지 않다.
그러니 너는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의 아름다움을 다 담아 오너라.
귓전을 지나는 바람한점도 흘려보내지 말고 하나 빠짐없이 다 담고 오너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니 속에 담아 나를 만나면 원 없이 쏟아 보아라.
나는 오직 한사람만 기억해 갈 것이다.
내가 너를 은혜 했다]
문밖으로 피를 토할 듯한 종현의 절규가 세어 나왔다.
--효원이 떠나기 전날 밤--
"형님들의 작호를 거두시고 어머님과 편히 살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그러면 너는 내게 무엇을 주겠느냐...."
"저를 드리겠사옵니다... 제가 가져갈 목숨들과 함께 반정을 가져가 드리겠사옵니다"
"정녕....그리하겠느냐..."
효원의 얼굴에 잠시 갈등이 일다 사라졌다.
"왜 살려 하지 않느냐..."
“어차피 이번 생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삶입니다.."
“너는 어찌 너를 버리는 일에 이토록 초연할 수 있느냐...”
“육신에 병이 깊습니다......조금 앞당겨 가는 길에 남은 사람들의 시름을 가져갈 수 있으니 그리 서럽지는 않습니다..“
“내가 너의 그릇을 안다...정녕 한세상 가져보고자 욕심나지 않더냐...”
“제게는 가지고 싶었던 다른 세상이 있었사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더냐...”
“품고 갈 꿈인 듯 합니다...내 보이는 것조차 아까운 꿈인 듯 합니다..”
[제게는 그 사람이 제 세상이었습니다...
한 세상을 가지는 것 보다 그 한 사람을 얻는 일이 더 간절했습니다..]
"내가 너를 아까워했든 것을 잊지 마라..."
"청이 있사옵니다...마지막 가는 길에 드리는 청이 옵니다."
"말해 보아라"
효원이 가슴에서 고희 접힌 필서를 꺼내 놓았다.
"이 속에 한 사람이 있사옵니다. 신분은 미천하나 그 재능과 학식이 그리 두기 아까운 사람이옵니다. 그에게 과장에 나설 수 있는 신분을 주시옵소서."
"그것이면 되느냐...다른 것은 없느냐....."
"없싸옵니다"
"너를 이리 보내는 나를 원망치 마라..."
"망극하옵니다....다시 태어나도 전하를 어버이로 모실 것 입니다."
"다시 한번 묻겠다... 정녕 그 길을 택하겠느냐"
“서러운 삶을 이제야 놓습니다..."
[길고 무거운 생에 잠시 한 마리 나비인 듯 꿈을 꾸다 갑니다.
아직도 꿈인 듯 생시인 듯 아련한 그 기억으로 가는 길이 그리 서럽지는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