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가운데 유미만 덩그러니 앉아있고 어딜 갔는지 해빈과 상운은 보이질 않았다. 2층으로 올라간 것 같았는 데, 그 이후로 감감 무소식이었다.
"...배고픈데, 어딜 간거야.."
유미는 자신이 아직까지 뭘 제대로 먹지 못해 배가 매우 고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하기 무섭게 꼬르륵, 소리를 내는 배에 괜히 민망해졌다.
배도 고프고 혼자 심심도 해서 거실을 한바퀴 휭 둘러보았지만 집 안은 깨끗하긴 했지만 사람이 살지는 않는 곳인지 특별한 물건은 없었다.
이런 곳에 집이 있다는 건 아마도 별장같은 것 일텐데.. 보통 별장은 커다랗고 화려하다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이 집은 상당히 깔끔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사치를 부린 흔적은 전혀 없었고 그냥괜찮은 펜션같은 분위기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특별히 부담스럽지 않은 평범한 실내 장식에 가구들..
"어, 저게 뭐지..."
천천히 집안을 둘러보던 중 벽에 걸린 커다란 액자가 유미의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상운으로 추정되는 남자아이와 부모가 있는 단란한 가족사진이었다. 가운데 서있는 상운의 양 옆으로 나란히 앉아 계신 부모님.
"와...부모님이 다 미남 미녀시구나."
상운의 부모님은 상운의 외모가 절대적으로 유전에 의한 것임을 증명할 만큼 눈에 띄는 분들이셨다. 아버지의 모습도 그렇지만 상운의 어머니는 시원시원하고 굵직한 얼굴선을 하신 서구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미인이었다. 굉장히 대가 세고 자기 주장이 강할 것 같아 뵈는 분이란 느낌이 들었다.
"강유미씨?"
"핫!! 네!!"
한참 동안 사진을 보고 있는 데 등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지레 찔려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는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의 상운이 서 있었다.
"밥 먹지."
"아..네."
유미는 주방으로 걸어가는 상운을 보다가 사진에 있는 어릴 적 상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지금보다 앳된 얼굴에는 장난기가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그의 어머니와 꼭 닮은 표정은 그 역시 한 고집하는 성격임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중학교때 쯤인가..?"
너무 귀여워 보이기만 하는 저 얼굴이 언제부터 저렇게 굳어져 버린걸까? 유미는 상운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진속의 아무 걱정없이 환하게 웃고 있는 소년은 지금 유미 앞에서 변하지 않은 고집스런 눈매를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 밑은 그늘져 있었다. 세상 모든 짐을 다 들고 있는 것 마냥 굳어있는 그의 눈.
'나도, 저런 걸까?'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부모님이 살아계실때는 아무 걱정없이 행복하기만 했던 하루하루였다. 그러나 영원히 지속될 줄 알았던 그녀의 행복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어쩌면 그도 자신과 같은 상처가 있는 걸까? 그의 밑에서 일을 하면서 단 한번도 그의 부모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이 기억이 났다. 한 두번쯤은 회사로 걸려온 그의 부모의 전화를 받았을 법도 한데 유미는 그의 밑에 있는 동안 그런 전화는 커녕 부모에 대한 단 하나의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김비서조차 그런 얘기는 한 적이 없었다.
"유미씨! 어서와요!!"
주방에서 그녀를 재촉하는 해빈의 목소리에 유미의 생각도 거기까지였다. 어느새 주방쪽에서 풍기는 맛있는 냄새에 그녀의 배는 본능적으로 꼬르륵 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남자 둘이서 뭘 만들었겠어, 싶은 마음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막상 식탁위에 차려진 제법 훌륭한 음식을 보고 유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와, 누가 만든 거에요? 해빈씨는 요리 못하잖아요."
예전 그녀의 집에서 뭔가를 만들어주겠다며 자신만만하게 부엌을 점령해놓고 냄비에 주전자, 하다못해 계란프라이까지 태워먹었던 해빈을 기억하며 유미가 물었다.
"당연히 상운이 녀석이 만들었지. 얘 혼자산지 오래되서 요리도 제법 잘해요."
"아아~"
의외의 말에 유미는 놀랐다. 상운이 요리를 잘 한다는 사실도 의외였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란 건 상운이 혼자 산다는 것이었다. 역시, 부모님이 안계신건가..
"어서 먹기나 해 둘다."
"어? 너는 안먹어?"
"난 아까 좀 먹었어. 잠깐 눈 좀 붙인다."
옆에서 상운의 요리솜씨에 대해 끊임없이 말을 늘어놓는 해빈이 부담스러운건지 상운은 식탁을 차려주고는 주방을 나섰다. 유미는 그가 음식에 입도 대지 않은 채 주방을 나서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해빈은 신경도 안쓰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해빈을 따라 유미도 상운이 만들어 놓은 동태찌개를 한입 먹어보았다. 과연 맛이 있을까 하는 불안감은 엄청난 국물맛에 감동으로 변해버렸다.
"와..맛있어요!"
"그치? 상운이 쟤 은근히 요리하는 거 좋아해요. 근데 막상 만들어 놓고 먹지는 않는 달까.. 오늘도 아마 암것도 안먹었을거야. 쟤 스트레스 받으면 뭐든지 막 만들어놓거든. 다른데 집중할 게 필요한거지.."
"..네.."
해빈은 상운의 행동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하며 밥 먹는 데 열중했지만 유미는 상운이 신경이 쓰여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어쩌면 아무것도 먹지 않았을 거라는 말에 자기들만 이렇게 먹어도 되나 싶어서 한술 뜨기도 미안하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유미씨, 나 그냥 아예 말 놓을게. 반말 존대말 섞어서 하기 너무 힘들어."
"-풋, 네. 그래요."
아무말 없이 밥을 쳐다보며 느릿 느릿 먹고 있는 유미를 보며 해빈이 말했다. 그렇잖아도 유미 역시 해빈의 말투가 불편했던 터라 그냥 말 놓으라 해야지.. 하고 생각하던 터였다. 해빈이 실없이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에 웃음지으며 억지로 밥 한그릇을 먹긴 했지만 밥은 꼭 뱃속에 얹힌 것처럼 부담스럽기만 했다.
자신은 쉬라며 주방에서 내쫒고는 설거지를 하는 해빈을 두고 유미는 거실에서 서성거리다가 집 밖으로 나갔다.
푸르른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을 따라 집 뒤로 걷다 보니 호수라고 하기에는 좀 작고 연못이라고 하기엔 좀 큰 그런 물가가 나왔다. 깊지 않은 곳인지 물 속까지 훤히 들여다 보이는 그 곳에는 작은 물고기들로 가득했다.
"와.."
유미는 너무 예쁜 그 광경에 연못으로 다가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 근처 나무 그늘 아래에 상운이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인지라 자신이 있는 걸 눈치챌까 싶어 조용 조용 돌아 간다고 걸었지만 풀속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뿌직- 밟아버린 덕분에 상운은 고개를 돌려 그녀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서 뭐해?"
"아..그냥 걷다 보니까.."
"이리로 와서 앉지."
"네? 네.."
해빈의 말에 의하면 기분이 좋지 않댔으니 뭐라고 한소리 하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상운은 무덤덤하니 별 반응없이 그대로 누워있을 뿐이었다. 옆에 가만히 앉아 있기가 민망해서 뭔가 할 말이 없을 까 허둥댔지만 특별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자 그냥 눈 앞에 반짝이는 물가를 멍청히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 곳, 좋지?"
"..네."
얼마나 그렇게 서로 말 없이 있었는 지 모르겠지만 그 고즈넉한 조용함에 익숙해질 즈음 상운이 입을 열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야. 이렇게 누워 있으면.. 그 때 만큼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으니까."
"......"
간신히 그가 입을 열었나 했지만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던 유미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는 귀 기울이지 않았으면 듣지 못할 만큼 조용 조용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유미씨에게는... 내가 할 말이 없어. 미안하다고 하기도 그렇군. ... 그 당시 난 그런..일을 해 줄 여자가 필요했어. 당장의 상황에 눈이 멀어서, 당신의 입장은 생각하지 못했어. 그것에 대해서는.. 몇 백번이고 사과를 하지.. 받아들여 지지는 않겠지만, 유미씨가 용서해 줄 때까지 할수 있는 건 하겠어."
"......갑자기 왜 그런 얘기를 하세요?"
유미는 난데없는 그의 말이 불쾌했다. 굳이 듣고 싶지는 않은 말이었다. 그냥 넘어갔다면 차라리 기억 저편으로 덮어두고 싶은 일. 그가 뭐라고 하든 이미 벌어진 일이고 상처이지만 그 덕분에 유미는 살아 있었다. 용서할 수는 없지만 원망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직접 말을 꺼내자 유미의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요동이 쳤다.
그에 대한 감정과 자신의 아픈 마음이 소용돌이 치며 그녀를 어지럽게 했다.
"이곳에 오니까, 유미씨가... 힘들어 하는 거 같아서."
".....결코 좋은 곳은 못되죠."
"...응."
둘은 다시 아무 말도 없이 물가를 바라보았다. 작게 불어오는 바람결에 살랑이는 물가는 미약하지만 끊임없이 바람을 타고 움직였다.
바람, 꼭 그와 같았다. 유미 가슴속의 물가를 찰랑이게 만드는 바람.
그 바람이 불 때면 아주 약한 바람에도 유미의 가슴은 찰랑였다.
"......이 곳은 나에게 정말로 소중한 곳이야."
"......"
나즈막히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에 젖은 듯 매우 낮은, 혼자 중얼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건, 내가 왜 유미씨를.... 그때, 이곳으로 데리고 왔냐는 거지."
"......"
그말에 유미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에요?'
묻고싶었지만 물을 수 없었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염없이 물가만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보니 그 역시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듯 했다.
"......왜 그랬을까?"
"......변덕, 이었을 거에요."
'변덕이었길 바래요.' 하고 말하고 싶었던 것을 삼켰다. 그의 변덕이었을 거라 믿고 싶었다. 유미 역시 가만히 물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바람은 물가를 흔들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사랑할 권리는 있다...26
거실 가운데 유미만 덩그러니 앉아있고 어딜 갔는지 해빈과 상운은 보이질 않았다. 2층으로 올라간 것 같았는 데, 그 이후로 감감 무소식이었다.
"...배고픈데, 어딜 간거야.."
유미는 자신이 아직까지 뭘 제대로 먹지 못해 배가 매우 고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하기 무섭게 꼬르륵, 소리를 내는 배에 괜히 민망해졌다.
배도 고프고 혼자 심심도 해서 거실을 한바퀴 휭 둘러보았지만 집 안은 깨끗하긴 했지만 사람이 살지는 않는 곳인지 특별한 물건은 없었다.
이런 곳에 집이 있다는 건 아마도 별장같은 것 일텐데.. 보통 별장은 커다랗고 화려하다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이 집은 상당히 깔끔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사치를 부린 흔적은 전혀 없었고 그냥괜찮은 펜션같은 분위기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특별히 부담스럽지 않은 평범한 실내 장식에 가구들..
"어, 저게 뭐지..."
천천히 집안을 둘러보던 중 벽에 걸린 커다란 액자가 유미의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상운으로 추정되는 남자아이와 부모가 있는 단란한 가족사진이었다. 가운데 서있는 상운의 양 옆으로 나란히 앉아 계신 부모님.
"와...부모님이 다 미남 미녀시구나."
상운의 부모님은 상운의 외모가 절대적으로 유전에 의한 것임을 증명할 만큼 눈에 띄는 분들이셨다. 아버지의 모습도 그렇지만 상운의 어머니는 시원시원하고 굵직한 얼굴선을 하신 서구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미인이었다. 굉장히 대가 세고 자기 주장이 강할 것 같아 뵈는 분이란 느낌이 들었다.
"강유미씨?"
"핫!! 네!!"
한참 동안 사진을 보고 있는 데 등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지레 찔려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는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의 상운이 서 있었다.
"밥 먹지."
"아..네."
유미는 주방으로 걸어가는 상운을 보다가 사진에 있는 어릴 적 상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지금보다 앳된 얼굴에는 장난기가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그의 어머니와 꼭 닮은 표정은 그 역시 한 고집하는 성격임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중학교때 쯤인가..?"
너무 귀여워 보이기만 하는 저 얼굴이 언제부터 저렇게 굳어져 버린걸까? 유미는 상운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진속의 아무 걱정없이 환하게 웃고 있는 소년은 지금 유미 앞에서 변하지 않은 고집스런 눈매를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 밑은 그늘져 있었다. 세상 모든 짐을 다 들고 있는 것 마냥 굳어있는 그의 눈.
'나도, 저런 걸까?'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부모님이 살아계실때는 아무 걱정없이 행복하기만 했던 하루하루였다. 그러나 영원히 지속될 줄 알았던 그녀의 행복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어쩌면 그도 자신과 같은 상처가 있는 걸까? 그의 밑에서 일을 하면서 단 한번도 그의 부모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이 기억이 났다. 한 두번쯤은 회사로 걸려온 그의 부모의 전화를 받았을 법도 한데 유미는 그의 밑에 있는 동안 그런 전화는 커녕 부모에 대한 단 하나의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김비서조차 그런 얘기는 한 적이 없었다.
"유미씨! 어서와요!!"
주방에서 그녀를 재촉하는 해빈의 목소리에 유미의 생각도 거기까지였다. 어느새 주방쪽에서 풍기는 맛있는 냄새에 그녀의 배는 본능적으로 꼬르륵 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남자 둘이서 뭘 만들었겠어, 싶은 마음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막상 식탁위에 차려진 제법 훌륭한 음식을 보고 유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와, 누가 만든 거에요? 해빈씨는 요리 못하잖아요."
예전 그녀의 집에서 뭔가를 만들어주겠다며 자신만만하게 부엌을 점령해놓고 냄비에 주전자, 하다못해 계란프라이까지 태워먹었던 해빈을 기억하며 유미가 물었다.
"당연히 상운이 녀석이 만들었지. 얘 혼자산지 오래되서 요리도 제법 잘해요."
"아아~"
의외의 말에 유미는 놀랐다. 상운이 요리를 잘 한다는 사실도 의외였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란 건 상운이 혼자 산다는 것이었다. 역시, 부모님이 안계신건가..
"어서 먹기나 해 둘다."
"어? 너는 안먹어?"
"난 아까 좀 먹었어. 잠깐 눈 좀 붙인다."
옆에서 상운의 요리솜씨에 대해 끊임없이 말을 늘어놓는 해빈이 부담스러운건지 상운은 식탁을 차려주고는 주방을 나섰다. 유미는 그가 음식에 입도 대지 않은 채 주방을 나서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해빈은 신경도 안쓰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해빈을 따라 유미도 상운이 만들어 놓은 동태찌개를 한입 먹어보았다. 과연 맛이 있을까 하는 불안감은 엄청난 국물맛에 감동으로 변해버렸다.
"와..맛있어요!"
"그치? 상운이 쟤 은근히 요리하는 거 좋아해요. 근데 막상 만들어 놓고 먹지는 않는 달까.. 오늘도 아마 암것도 안먹었을거야. 쟤 스트레스 받으면 뭐든지 막 만들어놓거든. 다른데 집중할 게 필요한거지.."
"..네.."
해빈은 상운의 행동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하며 밥 먹는 데 열중했지만 유미는 상운이 신경이 쓰여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어쩌면 아무것도 먹지 않았을 거라는 말에 자기들만 이렇게 먹어도 되나 싶어서 한술 뜨기도 미안하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유미씨, 나 그냥 아예 말 놓을게. 반말 존대말 섞어서 하기 너무 힘들어."
"-풋, 네. 그래요."
아무말 없이 밥을 쳐다보며 느릿 느릿 먹고 있는 유미를 보며 해빈이 말했다. 그렇잖아도 유미 역시 해빈의 말투가 불편했던 터라 그냥 말 놓으라 해야지.. 하고 생각하던 터였다. 해빈이 실없이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에 웃음지으며 억지로 밥 한그릇을 먹긴 했지만 밥은 꼭 뱃속에 얹힌 것처럼 부담스럽기만 했다.
자신은 쉬라며 주방에서 내쫒고는 설거지를 하는 해빈을 두고 유미는 거실에서 서성거리다가 집 밖으로 나갔다.
푸르른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을 따라 집 뒤로 걷다 보니 호수라고 하기에는 좀 작고 연못이라고 하기엔 좀 큰 그런 물가가 나왔다. 깊지 않은 곳인지 물 속까지 훤히 들여다 보이는 그 곳에는 작은 물고기들로 가득했다.
"와.."
유미는 너무 예쁜 그 광경에 연못으로 다가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 근처 나무 그늘 아래에 상운이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인지라 자신이 있는 걸 눈치챌까 싶어 조용 조용 돌아 간다고 걸었지만 풀속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뿌직- 밟아버린 덕분에 상운은 고개를 돌려 그녀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서 뭐해?"
"아..그냥 걷다 보니까.."
"이리로 와서 앉지."
"네? 네.."
해빈의 말에 의하면 기분이 좋지 않댔으니 뭐라고 한소리 하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상운은 무덤덤하니 별 반응없이 그대로 누워있을 뿐이었다. 옆에 가만히 앉아 있기가 민망해서 뭔가 할 말이 없을 까 허둥댔지만 특별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자 그냥 눈 앞에 반짝이는 물가를 멍청히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 곳, 좋지?"
"..네."
얼마나 그렇게 서로 말 없이 있었는 지 모르겠지만 그 고즈넉한 조용함에 익숙해질 즈음 상운이 입을 열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야. 이렇게 누워 있으면.. 그 때 만큼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으니까."
"......"
간신히 그가 입을 열었나 했지만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던 유미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는 귀 기울이지 않았으면 듣지 못할 만큼 조용 조용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유미씨에게는... 내가 할 말이 없어. 미안하다고 하기도 그렇군. ... 그 당시 난 그런..일을 해 줄 여자가 필요했어. 당장의 상황에 눈이 멀어서, 당신의 입장은 생각하지 못했어. 그것에 대해서는.. 몇 백번이고 사과를 하지.. 받아들여 지지는 않겠지만, 유미씨가 용서해 줄 때까지 할수 있는 건 하겠어."
"......갑자기 왜 그런 얘기를 하세요?"
유미는 난데없는 그의 말이 불쾌했다. 굳이 듣고 싶지는 않은 말이었다. 그냥 넘어갔다면 차라리 기억 저편으로 덮어두고 싶은 일. 그가 뭐라고 하든 이미 벌어진 일이고 상처이지만 그 덕분에 유미는 살아 있었다. 용서할 수는 없지만 원망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직접 말을 꺼내자 유미의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요동이 쳤다.
그에 대한 감정과 자신의 아픈 마음이 소용돌이 치며 그녀를 어지럽게 했다.
"이곳에 오니까, 유미씨가... 힘들어 하는 거 같아서."
".....결코 좋은 곳은 못되죠."
"...응."
둘은 다시 아무 말도 없이 물가를 바라보았다. 작게 불어오는 바람결에 살랑이는 물가는 미약하지만 끊임없이 바람을 타고 움직였다.
바람, 꼭 그와 같았다. 유미 가슴속의 물가를 찰랑이게 만드는 바람.
그 바람이 불 때면 아주 약한 바람에도 유미의 가슴은 찰랑였다.
"......이 곳은 나에게 정말로 소중한 곳이야."
"......"
나즈막히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에 젖은 듯 매우 낮은, 혼자 중얼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건, 내가 왜 유미씨를.... 그때, 이곳으로 데리고 왔냐는 거지."
"......"
그말에 유미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에요?'
묻고싶었지만 물을 수 없었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염없이 물가만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보니 그 역시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듯 했다.
"......왜 그랬을까?"
"......변덕, 이었을 거에요."
'변덕이었길 바래요.' 하고 말하고 싶었던 것을 삼켰다. 그의 변덕이었을 거라 믿고 싶었다. 유미 역시 가만히 물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바람은 물가를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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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요즘은 굉장히 착실하게 올리지 않나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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