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아(여, 20세) -최선우(남, 60세) : 아시아 대 배우, 엔터테인먼트, 푸른 극장 대표 -한 욱(남, 21세) -지나현(여, 20세) -이태석(남, 62세) : 태석 영화사 대표 -강현민(남, 51세) -유성린(여, 60세) : 선우 약혼녀, 뮤지컬 배우 -조유리(여, 18세) -우해준(남, 18세) -진한기(남, 25세)
-박필덕 감독(남, 40대 중반)
그 외...
# 내가 아는 윤아는 한 눈에 띄는 예쁜 아이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다른 특별한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겪을 수록... 뭐랄까.
상대방의 속내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이성적으로 상황을 볼 줄 알았다.
박감독님 말씀대로라면 작가로서의 기본적인 자질이 있다고 할까.
. . .
2학년 2학기가 막 시작되서 고등학교 전체가 술렁일 무렵, 난 언제나처럼 영화부 방에서 시간을 보내다, 수업시작할 즈음, 교실에 가려고 방을 나섰다.
쾅-!
털석!
[윤아 : (주저앉아 이마 문지르며) >_< 아야-]
이런, 내가 연 문에 이마를 부딪쳐 엉덩방아를 찧은 모양인데...
[민수 : 어, 미안. ^^ (싱글싱글)]
[윤아 : 그게 미안한 얼굴이예요? 그렇게 쫌 잘생긴 얼굴로 웃기만 하면 다른 애들은 그냥 넘어가줬나보죠?]
[민수 : -_-;;;]
[윤아 : 왜요? 정곡을 찔렸나보죠?]
[민수 : 곧 수업 시작하는데, 여긴 무슨 일로 왔어?]
[윤아 : 가입신청하려구요. 여기 영화부 맞죠?]
[민수 : 우린 학기중엔 안받아.]
[윤아 : 전 오늘 아침에 전학 왔는데요?]
[민수 : 안됐네, 그래도 자격 조건이 안맞아. ^^ 우린 신입생만 받아서, 스파르타식으로 관리하거든.]
[윤아 : -_-;;; 무슨 영화부가 논산훈련소라도 되요?]
[민수 : 영화란 게 그냥 낭만만으론 만드는게 아니거든. 그럼 난 바빠서 이만! ^_^ 헉!]
뭐, 뭐야...-.-;;;;;;;;; 계속 말대꾸해주다간 한도끝도 없을 것 같아 대충 얼버무리고 피하려는데 이 여자애... 내 허리띠를 잡고 늘어졌다. -_-;;;
[윤아 : 이봐요!!! 전학생은 못받는다는 자격불충분 이유를 다 못들었는데요?!]
[민수 : -.-''''' (당황) 저, 저기 그 손 좀 놓지???]
[윤아 : 이야~ ^^;;; 여기 부잣집 애들만 다니는 학교라더니, 바지 혁띠도 장난 아니네? 이거 진짜 가죽 맞죠?]
여자애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가슴에 단 이름표를 보니... '신윤아' 옆의 뱃지를 보니... 오오... ^^;;;
[민수 : 너 1학년이지?]
[윤아 : 네! ^^ (민수 뱃지 흘끔 보고) 선배님은 2학년이세요?]
음... 전혀 기가 안죽네.. 우리 학교의..특히 영화부 선후배 기강을 어찌보고..
[민수 : 응, 그리고 우리 영화부에 꼭 들어올 생각이라면, 참고로 알아야 할 게 있는데...]
[윤아 : 네! 뭔데요?]
[민수 : 나, 이 영화부 회장이야.(^^)v]
[윤아 : 아~ 그러시구나. ^0^]
[민수 : (쿠당-)]
뭐, 뭐냐... 대체 저 태연한 반응은.
[윤아 : 근데 저도 참고로 말씀드리는데요.]
[민수 : 어, 어... 뭔데?]
[윤아 : 전 다른 여자애들처럼 쫌 잘생긴 선배님보려고 영화부에 들어가려는 거 절대 아니란거요.]
허걱!!!!
# 영화부 안.
천방지축 골칫덩이 하나 들어오는 것 아닌가 했더니,
윤아가 봐달라고 건넨 20분짜리 다큐 프로그램은 예상밖으로 괜찮았다.
[욱 : 저걸 혼자 다 만들었다구? 1학년짜리가?]
[민수 : 응. 어때?]
[욱 : 쓸만한 물건 같다.]
[민수 : 무엇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의도를 영상으로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이 많이 보여.]
[욱 : 응.]
[민수 : 양쪽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다루면서 휴머니즘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욱 : 간만에 니가 진지한 모습을 보니 반갑다. ^^]
[민수 : -_-;;;]
욱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민수 : 어떻하지?]
[욱 : 넌 어떻하고 싶은데?]
[민수 : 다른 부원이 반대하지 않으면 그냥 받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차피 방학 전에 두 명이나 빠져서 공석이 있으니까.]
[욱 : ...(문 열고 나가려는)]
[민수 : 야, 부회장! 니 생각도 말로 좀 표현해봐라. 맨날 폼잡는다고 말도 안하고 무게만 잡으면 다 터프해져?]
[욱 : (나가며) 신윤아보고 저녁 때 우리 방에 들르라고 전할게.]
[민수 : -_-;;;]
저 녀석, 분명 1학년 교실 뒷문을 벌컥 열어제치고 문 끝을 턱-!하니 한 손으로 잡고는 아주~ 불량스럽게
"여기 오늘 전학 온 신윤아라고 있냐? 나와라!"
...라고, 영화 주인공처럼 온갖 폼을 다 잡겠지. -_-;;;
욱이에겐 일상의 모든 것이 영화 속 액션이니까.^^
근데 욱이의 그 모습이 떠오르면서 은근히 재미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신윤아란 애도 꽤 만만찮아 보이더라는 거다. ^_^
# 윤아가 등장하면서,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자주 번복됐다.
평소 영화계, 공연계 등으로 이래저래 알고 지냈던 어른들의 묘한 반응.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던... 딴 사람같은 선우 삼촌의 태도와 표정, 눈빛.
선우 삼촌은 내가 영화부 일로 움직이면서 '윤아'의 이름이 한번이라도 거론이 되면 꼬치꼬치 물었다. 촬영 행선지는 어디며, 위험하진 않은지, 여자애에게 어떤 일을 시키는 건지.
난 삼촌의 독신생활에 익숙해져서 아빠가 삼촌에게 유성린 선생님을 자꾸 들이대는 것이 기분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유쾌한 기분도 아니었다.
삼촌이 가정을 이루면, 나에게 오던 관심과 사랑을 뺏길까봐... 어린애같은 소심한 질투와 초초함을 갖고 있었나보다.
하지만 삼촌은 언제나... 작품관계로만 대부분의 여자들과의 관계를 유지해왔을 뿐. 절대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런 삼촌이... 윤아에게만큼은 필요이상의 관심과 친절, 부담스러울만큼 지나친 배려를 보였다.
...처음으로 봤다, 삼촌이 진심으로 상대를 간절히 원하는 표정으로 누군가를 안고 있는 모습을... 다른 곳도 아닌 푸른 극장에서...
그 상대가 윤아라는 것도 커다란 쇼크였다.
...난, 어릴적부터 삼촌의 따뜻하고 다정다감하고 자상한 면이 참 좋았다.
자기 일에 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존경스러웠다.
외부에 알려진 모습과 평소의 모습이 일치하는 변함없이 소탈한 모습.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유쾌한 농담을 할 줄 알았고, 죽은 형을 늘 설레했던 미스터리같은 비밀 로맨스로.. 삼촌에게서 신비감까지 느꼈다.
같은 남자가 봐도 매력적인 사람이니, 윤아가 삼촌에게 마음이 기우는 것은 당연했다.
지금까지도 많은 여자들이 삼촌을 사랑하고, 삼촌에게서 사랑받길 원했으니... 그런 삼촌이 윤아를 특별히 아끼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삼촌까지 그렇게 쉽게 흔들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처음엔... 어른들의 이상한 반응에 난 윤아가 혹시 우리 아빠가 밖에서 낳은 배다른 동생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하지만 아빠는 불쾌해하고, 삼촌을 걱정하는 것이었을뿐.
그래서 내 생각은... 혹시 윤아가 삼촌의 숨겨놓은 딸이 아니었을까- 하는데까지 미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아는 삼촌이라면 자신의 딸을 당당히 데려다 키울 사람이었다.
한동안 이렇게 저렇게 생각이 뒤죽박죽 꼬였지만 내 정확한 육감을... 부정하고 싶었다.
삼촌의 집에서 또 다시 울고 있는 윤아를 안아주고 있는 삼촌을 보고서도,
삼촌의 집에서 삼촌을 간호하고 있는 윤아와 맞닥뜨리고도,
안믿었다. 아니, 믿기싫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럼에도.
삼촌을 간호하고 나온 윤아를 다그쳐 울리고 돌아온 내게, 내게... 삼촌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선우 : 나... 그 애 때문에, 아팠다. 그 애가 짊어진 슬픔때문에.]
# 삼촌은 푸른 극장에서 윤아를 냉정하게 거절한 뒤, 윤아 소식을 거의 묻지 않았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오직 뮤지컬 공연 연습과 준비에만 미친듯이 몰두했다.
해외 공연을 위해 떠나기 전, 삼촌은 지나가는 말처럼, 저녁식사 때 영화부 애들 서넛 데리고 오라고 했다. 누구라고 특별히 이름을 대진 않았어도, 난 담박에 삼촌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아... 삼촌은 윤아가 보고 싶은 거구나.
삼촌 뮤지컬 팀의 해외 공연 일정은 2년으로 잡혀있었다.
그 시간이면 삼촌도 윤아도 충분히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삼촌도 예전처럼 돌아가고...
윤아도 겉으론 괜찮다, 안괜찮다 - 왔다갔다 했지만 아직은 많이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서로 얼굴 한 번 보고 헤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마땅치않아하는 윤아를 일부러 삼촌 집으로 데려갔다.
식사가 끝나고, 취한 아빠를 부축해서 윗층 우리 집으로 가느라 미처 윤아를 챙기지 못했다.
내가 아니더라도, 욱이가 버스정류장까진 같이 갔겠지.
그렇게 깜빡하고 넘어갔다.
....
삼촌은 떠나기 전까지, 뭔가 굉장히 우울해하고 괴로워했다.
굳이 말하지 않는 건 있어도, 거짓말은 안하는 사람이었기에...
그 때까지도 삼촌과 윤아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병원에서 유산하고 마취에서 깨어난 윤아의 첫마디에서 삼촌이 거론됐을 때, 난 경악했다.
절대, 믿어선 안되는 말.
삼촌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건 내가 더 잘 알아!!!!!
윤아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이 상황을 인정할 수 없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 마음에서, 윤아를 -삼촌을 이용하려는 나쁜 애로- 매도해버렸다.
그리고... 난 도망쳤다.
캐나다, 삼촌의 여동생인 선영 고모네 집으로.
#
[민수 :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나서 같이 일하게 된 거... 우연이라고 생각해?]
드라마를 함께 하기 위해, 드라마 작가 지망생인 윤아와 재회했다.
[윤아 : 뭐야, 선배 ^^ 설마 운명이니 그런 허접한 얘기하려는거야? 어? ㅎㅎ]
[민수 : 아, 아니. -_-;;;]
결국 난... 윤아에게 고백하지 못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라는 걸.
사실은 내가... 널 필사적으로 찾아냈다는 걸.
2년 전, 삼촌에게 마음을 거절당하고 아이를 잃고, 가족에게조차 외면당한... 가장 힘들었을 널 두고 비겁하게 도망쳐버린 나... 너에게 속죄받으려.
그리고... 너 때문에 많이 힘들어 한 삼촌을 위해서.
#
[선우 : (민수에게) 왔구나? ^^]
도망치듯 떠나온 캐나다 선영 고모 집에서 해외 공연 중 들른 삼촌을 만났다.
삼촌은 선영 고모네가 이민갈 때 많이 반대했지만, 막상 이민 정착금이며, 제대로 자리잡을 때까지 상당한 자금을 보조해주었다고 들었다.
[민수 : 응.]
[선우 : 잘 왔다.^^ 안그래도 고3되면, 꼼짝없이 공부만 해야될텐데 그 전에 여기서 신나게 놀다 가.]
[민수 : ...삼촌.]
[선우 : 응?]
[민수 : 아, 아냐...]
[선우 : 싱겁긴.]
삼촌은 내 앞에서, 선영 고모 앞에서, 친조카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지만...
난... 늦은 밤 삼촌이 혼자 쓸쓸히 정원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을 이층 방 창문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삼촌은 지금 누구를 생각하고 있을까... 만약 삼촌에게 윤아 이야기를 한다면... 삼촌은 어떻게 나올까...?
윤아가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삼촌의 반응은 안봐도 뻔했다.
진실일 것이... 두려웠다.
그 진실이 삼촌을 힘들게하고, 다치게 할까봐 ...두려웠다.
결국 난, 삼촌이 다음 날 선영 고모집을 떠날 때까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난... 두 배로 비겁해졌고, 몇 배로 힘들어졌다.
# 특별전형으로 대학 입학이 결정된 후, 주말을 낀 황금 연휴를 이용해 영국 런던행 비행기를 탔다.
해외 공연 중인 삼촌을 만나기 위해.
[선우 : (망연해서) ...사라..졌다구...?]
[민수 : (고개 숙인 채) ...]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윤아가... 사라...졌다...고.
캐나다에서 돌아왔을 때, 윤아는 전학간 뒤였다.
난 내 마음의 짐이 너무 무거워 윤아를 만나고 싶었다.
윤아가 전학 간 대전의 학교로 찾아갔다.
하지만... 없었다. 나타나지 않았다고...했다.
서울의 윤아 큰 오빠를 만났고, 대전의 윤아 작은 오빠를 찾아가 만났다.
윤아는... 어디에도 없었다.
신기루처럼... 물거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난, 삼촌의 호텔방에 몇 일을 머물렀다.
런던의 안개는 지독했다. 삼촌과 나의 우울한 마음 이상으로.
삼촌은, 윤아의 실종을 알게된 그 날... 뮤지컬 해외 공연 시작 이후 처음으로 술에 입을 댔다.
삼촌은 활동 영역을 영화에서 공연 쪽으로 넓히면서 술과 담배를 스스로 많이 줄였다.
무대에서 관객과 함께 호흡을 같이하며 그들을 사로잡을 에너지와 힘을 키우기 위해.
해외 공연 중엔 입에 맞지않는 음식때문에 건강에 더 신경써야 하는 건 상식이었다.
후배들에게보다 스스로에게 더 엄격했던 삼촌의 내면은... 조금씩 분열돼갔다.
[선우 : 윤아한테 무슨 일... 있었어?]
[민수 : ...(고개 젓는)]
[선우 : ...]
삼촌은 뭔가 짐작간 듯한 표정으로 어두워졌다.
한국을 떠나기 전, 삼촌은 정말 윤아를 안았을까.
...왜?
삼촌이 윤아의 마음을 일부러 모질게 거절했던 건, 삼촌 자신보다 윤아의 미래를 생각했기때문이 아니었어?
그런데 왜?
[선우 : ...민수야.]
삼촌은 많이 취해있었다.
[민수 : 어.]
[선우 : ...찾아...볼 수 없을까...]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전 날, 삼촌은 술기운을 빌려 어렵게 그 말을 꺼냈다.
[민수 : 찾아볼게. ...찾으면 삼촌한테 제일 먼저 연락할게.]
[선우 : ...]
[민수 : 근데 삼촌.]
[선우 : ...응?]
[민수 : 윤아... 처음부터 없었던 거 아닐까...?]
[선우 : ...?]
[민수 : 윤아를 아는 사람들한테만 잠깐 보여졌던 거 아닐까....]
[선우 : ...]
몇 일을 넋나간 삼촌을 지켜보며 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삼촌은, 윤아를 통해 사무치게 그리워진 돌아가신 그 분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신윤아때문에 힘들어 한다는 것을.
삼촌 마음에 신윤아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삼촌의 새 사랑... 오랫동안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온 삼촌에게 어렵게 다가온 사랑...
나로선 수천번을 축하하고 박수쳐주고 싶은 일.
하지만...
하필이면... 윤아, 그 아이라니.
# 미친 듯이 찾아다녔다.
서울서 대전으로 내려가는 차도를 수십번 오가며 차도 옆 주변을, 그리고 중간중간 있는 휴게실마다 샅샅히 뒤졌다.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흔적조차 없었다.
혹시 죽은 건 아닐까....?
아니, 정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던 아이는 아니었을까.
지쳐가면서... 난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린 그동안 환영을 보아온 걸지도 몰라.
삼촌은 돌아가신 그 분이 너무 보고 싶어서... 그 아이를 본 거야. 그래서 삼촌을 알고, 그 분을 아는 다른 사람들도 그 아이를 본 거야.
신윤아라는 환영을.
# 결국 파리로 삼촌을 만나러 갔을 때 난, 빈 손이었다.
뮤지컬 팀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공연 장소 문제로 트러블이 있다는 소식부터 들렸다.
여러 나라를 다니는 동안 삼촌은 간간히 내게 전화해왔다.
간단한 안부 전화였을 뿐임에도, 삼촌은 대화 사이사이 잠깐의 침묵을 통해 윤아의 소식을 묻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먼저 말을 꺼냈을 것이므로...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민수 : 삼촌!]
삼촌 방엔 유성린과 정대표가 함께 있었다.
[정대표 : (설득 중) 그렇지만 유종의 미는 거둬야죠. 여기가 마지막 공연진데, 공연장 문제 정도 갖고 취소하자니요! 다른 곳에서는 이만한 문제 없었나요.]
[성린 : ...(생각하는)]
[선우 : 우리 그만 돌아가죠.]
삼촌은 차분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성린 : 이번 건은 우리 잘못이 아니니까, 위약금 문제같은 건 없잖아요.]
유성린도 그동안 삼촌과 함께 공연다니며 옆에서 지켜보아온 것이 있었던지 삼촌 말을 거들었다.
[정대표 : (답답해서, 한숨) 꼭... 그러셔야 되겠어요?]
삼촌은 창가로 다가갔다.
[선우 : (먼 풍경 보며) ...지쳤어요.]
...
삼촌의 손에서 술병을 뺏었다.
[민수 : 그만 마셔! (옆의 성린에게) 삼촌 계속 이랬어요?]
[성린 : (우울) 그래도 공연은 용케 잘했어.(나가버린다)]
이젠 술잔도 필요없이, 병나발이라니.
해외 공연이 완전히 마무리 된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삼촌은 안심하고 잔뜩 취해있었다.
[선우 : 민수야.]
[민수 : 어.]
[선우 : ...아직...이야...?]
[민수 : (대답못하는) ...]
[선우 : (눈물 그렁) ...아직이 아니고... 그게 그냥 끝이었나보다..]
[민수 : ...삼촌...T_T]
[선우 : ...어디서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만이라도 듣고 싶었는데...]
[민수 : ...]
삼촌이 내뱉는 한 구절 구절마다 피토하는 듯이... 들렸다.
[선우 : 만나지 않아도 좋고, 보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냥 그런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으면... 더 이상 아무것도 안바랄텐데...]
삼촌의 주정이 잦아들며 삼촌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미안해, 삼촌... 그 때 내가 비겁하게 도망치지만 않았더라면...
# 뮤지컬 팀에 묻어 삼촌과 함께 귀국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어쩌면... 윤아가 정말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현실처럼 닿아오기 시작했다.
'신윤아, 너 어디 있는거야! 정말 죽은 거 아니지?
너 정말 죽어버린 거면, 내가 용서 안할거야. 속죄고 뭐고 절대 용서 안할거야.'
무엇보다 삼촌이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걸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 나한테 고문 그 자체니까...
신윤아... 다큐성 영화를 좋아해서, 우리 영화부에 가입했다.
영화를 하고 싶었던 아이. 항상 뭔가를 찍어대고, 써대는 것이 생활이었던 아이.
늘 캠코더를 손에서 떼지않았고, 캠코더가 없을 때는 항상 뭔가를 메모하고, 그렸던 아이.
사람에 대한, 다른 이의 인생에 대한 관심을 멈추지 않던 아이.
자신에 대해서도, 영화에 대해서도, 사람에 대해서도, 사랑에 대해서도,
열정적이었던 아이.
....!!!
그래!!!!
왜 내가 그 생각을 못했을까.
삼촌이 어느 토크쇼에서 이런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났다.
-영혼에 담긴 광대의 끼는, 숨길 수 없는 법이라고.-
진행자가 -어떻게 이 길을 걷게되었냐고- 물었을 때, 그랬던가.
하여튼, 윤아가 어딘가 살아 있다면 그 아이 안에... 영화에 대한 열망만은 아직도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욱이를 전화로 불러냈다.
# 커피숍.
얼마 전 개봉된 영화 덕인지, 거기에 조연급으로 출연한 액션배우 욱이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모자를 푹 눌러쓴 욱이 싸인 공세에 시달리다가 겨우 커피숍에 들어와서는 내 맞은편에 털석 앉았다.
[민수 : 이제 막 뜨나보네.]
[욱 : ...^_^;;;;]
[민수 : 나 좀 도와주라.]
[욱 : ...]
[민수 : 말 좀 해라, 말 좀.]
[욱 : 말해.]
[민수 : 너 인터뷰같은 거, 요즘 몇 건 들어와?]
[욱 : 이번 영화 덕에, 좀 되지. 왜?]
[민수 : 그럼 인터뷰 할 때마다, 누구 좀 찾는다고 해.]
[욱 : ?]
[민수 : 고등학교 영화부 후배. 소식이 끊겼는데, 꼭 만나고 싶다고. 어?]
[욱 : ...]
윤아가 어딘가에 있다면, 살아있다면... 분명 욱이 소식을 영화 잡지나 신문, 연예인을 주로 다루는 방송에서 접할 것이다.
영화를 하고 싶어했으니까, 틀림없이 주의깊게 볼거야.
윤아에게 나와 삼촌은 껄끄러워도, 욱이한텐 부담없이 연락해 올 수 있을 것이다.
설마... 윤아가... 드라마같은데서 잘 울궈먹는 것처럼 일시적 기억상실같은 상황은 아니겠지...? -_-;;;;
[욱 : 아직도 찾고 있냐?]
[민수 : ...응.]
욱이는 자기 팔짱을 낀 채, 잠시 고개 숙이고 있더니 마침 종업원이 물잔을 놓고가자. 벌컥벌컥 마셨다.
[민수 : 넌... 내가 포기했으면 좋겠어?]
[욱 : 윤아, 지가 나타나고 싶지 않은거잖냐.]
욱이는 삼촌 얘기는 거의 모르고, 윤아 쪽만 약간 짐작하는 정도였다.
[민수 : 그냥 어디 있든 잘 있으면 누가 뭐래, 근데 그것도 모르니까 답답하지.]
[욱 : ...]
[민수 : 욱아-]
[욱 : 알았다.]
[민수 : 가급적이면 윤아에 대한 얘기 많이 비쳐줘.]
욱인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수 : 매정한 놈, 용건 끝났다구 그냥 일어나? 그래 너 많이 팍팍 떴다! +_+]
[욱 : -_-;;; 건너편 까페에서 인터넷 신문기자가 기다리고 있어. 기껏 그쪽 기다리게 해놓고, 왔더니. 쯧. 이따 연락할테니까, 그 때 놀자.]
[민수 : 인터뷰~ 잘 부탁해~ ^_^]
욱인 돌아서려다 말고, 날 한 번 봤다.
[욱 : 너, 그 녀석 그렇게 좋아했냐?]
허걱!
# 삼촌도 사람을 써서 찾는 눈치였지만, 나도 나 나름대로 윤아에 대한 작은 힌트라도 생각나는대로 마구잡이로 찾아다녔다.
전국의 대학 연극영화과, 영화 동아리, 영화사, ...
영화 비슷한 곳이면 어디라도 찾아가서 윤아의 사진을 보여주고, 그 곳 학생 혹은 스탭들 명단을 사정사정해서 직접 확인했다.
...어떻게 된 거지.
윤아는 영화까지 버린 걸까. 그렇게 쉽게 포기할 애는 아닌데.
그깟 사랑 한 번 실패했다고...
아니... 아니다.
삼촌이 저렇게 힘들어하는 걸 보면, 아무리 씩씩한 윤아라해도 그 상황... 아무렇지 않게 이겨내는 건 쉽지 않았을 거였다.
그래도 2년이나 지났는데...
혹시... 한국에 없는 건 아닐까. 외국으로 유학이라든가...
하지만 윤아 큰 오빠말로는 짐이나 돈도 거의 없이 빈 몸으로 집을 나섰다던데...
욱이의 인터뷰 건은 별 효과가 없었다. 삼촌 쪽에서도 아직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욱이 말대로 나타나고 싶지않은걸까. 아니면... 나타날 수 없는 걸까...?
삼촌만 아니라면, 난 그냥 덮고 싶었다.
삼촌만 지친 것이 아니라, 나도 지쳤다.
# 윤아를 찾아다니느라 학점 몇 개가 펑크났다.
부모님께 죄송해서, 휴학계 내면서, 영화사 일 배우며 거들겠다고 나섰다.
회사 사정은 겉보기와 달리, 좋지 않았다. 영화사도, 수 프로덕션도.
그럼에도 영화사 명성이 있어서, 따로 공모를 하지 않아도 수시로 시나리오 봉투가 도착했다.
시나리오 처리맨으로 사무실에서 뒹굴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윤아와 푸른 극장에서 아르바이트 할 때...
-------회상--------------------------------
[민수 : 넌 영화 제작보다 시나리오만 써도 잘하겠다.]
[윤아 : 정말요?]
[민수 : 포인트도 잘 잡고, 문장도 간략하게 잘 쓰고.^^]
[윤아 : 웬일이래요? ^^ 선배가 날 다 칭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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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는 어디서 어떤 다른 것을 하고 있어도, 시나리오는 꼭 쓰고 있을 것 같았다.
일단 태석영화사에 쌓인 시나리오들을 정신없이 뒤적거렸다.
필명을 쓰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나았다.
충무로의 영화사들을 돌아다니며, 그곳에서 쓰레기통에 버린 시나리오까지 뒤졌다.
비슷한 이름만 봐도, 찾아가서 만났고. 동명이인도 숱하게 만났다.
하지만 내가 찾는 신윤아는 아니었다...
#
[박감독 : 민수야-!]
[민수 : 네, 감독님.]
차기 드라마를 수 프로덕션과 일하기로 하고 얼마전부터 사무실을 드나드는 드라마 감독인 박필덕 감독이 나를 불렀다.
[박감독 : 이것들 좀 뽑아봐.]
드라마 제작을 하게 되면, 조감독의 조감독(?)으로 일을 하기로 얘기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박감독님의 조수로도 뛰어야했다.
박감독님이 컴퓨터 앞에서 물러나고, 내가 대신 앉아서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민수 : 작가매니지먼트사...? 이런데도 있어요?]
[박감독 : 어, 거긴 단편 드라마부터 시나리오까지 신인이고 기성이고 작가들 작품 DB를 보유하고 있는데지. 우리나라에서 쓸만한 건 거기가 제일 많아.]
[민수 : ! ]
[박감독 : 일단 멜로하구 전문성 있는 분야로 드라마 기획안들을 프린트로 뽑아봐. 내가 모니터로는 눈에 잘 안들어와서 말야. 너도 봐서 괜찮다 싶은 거 있으면 뽑고. 일단 뭐라도 기획안이 있어야, 뭘 시작하든지 말든지 하지.]
이런 곳도 있었구나, 미처 몰랐다.
박감독님이 자기가 알고 있는 드라마 작가들하고 '뭐 괜찮은 얘기 없어요?' 전화통화하는 것을 들으며 난 검색란에 '신윤아'를 쳐넣었다.
화면이 바뀌는 잠깐... 동안, 긴장했는지, 침이 꿀꺽 삼켜졌다.
5개의 리스트가 나왔다.
단편 둘, 미니 둘, 학원물 시츄에이션 하나.
토씨 하나 안 틀린 '신윤아'란 이름. 다섯 개 전부 동일인물이 올린 것 같았다. 작품 제목의 작명 스타일이 비슷했다.
작가의 프로필은 볼 수 없었다. 아직 데뷔하지 않은 무명이라는 것밖에 알 수 없었다.
한 장짜리 대표적 줄거리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
윤아...같다!!!
아니, 이건 윤아가 틀림없다.
나는 영화부 선배 입장에서 가끔 윤아의 시나리오를 봐줬기에 윤아의 문장 스타일을 잘 아는 편이었다.
간결한 문장력과 촌철살인(寸鐵殺人)같은 단어의 선택으로 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느낌이었던 윤아의 시나리오 지문이 떠올랐다.
살아있다!!!
윤아가, 살아있어!!!
나는 작가매니지먼트사의 약도를 프린트해서 들고 프로덕션을 뛰쳐나갔다.
[박감독 : (?) 민수야!]
[민수 : 잠깐 다녀올데가 있어요!!! 갔다와서 해드릴게요!!!]
# 작가 매니지먼트사에 '수 프로덕션'이름을 팔아 '신윤아' 이름으로 등록된 드라마 기획안과 대본을 찾아 읽어볼 수 있었다.
신원보호차원으로 작가의 신상명세를 볼 순 없었지만 제대로 만들어진 기획안에 (작의, 등장인물, 줄거리 등이 포함된) 작가의 연락처도 함께 나와 있었다.
가슴이 마구마구 뛰었다.
무엇보다 '비상'이라는 학원물은 갓 잡힌 생선이 파닥파닥거리듯 등장인물과 줄거리가 실화를 바탕으로 드라마틱하게 써낸 것처럼 약간 거친듯하면서도, 날 것같이 신선했다.
실지 일반인들의 모습을 담는, 다큐 영화를 하고 싶어했던 윤아의 스타일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작가 매니지먼트사에서 내민 <표절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하고 '비상' 기획안 복사본을 받아들고 나왔다.
하지만 공원에서 읽고 또 읽으며, 점점 흥분이 가라앉았다.
만약... 내가 찾는 신윤아가 아니라면?
동명이인이라면...?
하긴... 내가 여태 한두번 속아봤나...
...윤아가 왜 드라마를 쓰는거지?
왜 방향을 틀었지?
...문득, 삼촌의 돌아가신 그 분이 드라마 작가였다는 것이 떠올랐다.
윤아의 실종 이후, 힘들어하던 삼촌은 내가 삼촌을 찾아갈 때마다 지독히 술에 취하면 수십년동안 삼촌 안에 담겨있던 마음을 조금씩 꺼내놓곤 했다.
윤아.... 그리고 돌아가신 그 분...에 대해.
드라마 작가였던 그 분... 그리고 현재 드라마를 쓰고 있는 윤아...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 각기 다른 3개의 드라마 기획안을 놓고 잠정적이지만 최종적인 결정에 가까운 회의가 있었다.
-작가 매니지먼트사에서 내가 갖고 온 '비상' -박감독님이 아는 기성 작가에서 받아 온 미니시리즈 -작가 교육원의 추천을 받은 신인 작가의 일일극
박감독님은 자신이 가져온 미니시리즈 기획안보다 '비상'을 보자마자 흥분했다.
[박감독 : 역시 신인은 덜 다듬어진 듯하면서도 신선하단 말야. ^0^]
내 아버지, 이태석 대표는 '비상'의 1,2회 대본까지 읽고는 굳어버렸다.
처음부터 이번 드라마에 출연하기로 약속하고 같이 참여한 선우 삼촌은 다른 기획안은 한번 훑어버리고 말더니, '비상'의 기획안과 대본은 여러번 반복해 보면서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별로인가?
드라마쪽으론 감을 잡기 힘든 나로선 세 사람의 각양각색의 태도를 종잡을 수 없었다.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며, 조용히 앉아 시간만 죽였다.
[태석 : 돈 되고 빠른 결과를 보려면 미니시리즈가 낫겠죠...?]
[박감독 : 일일극하고 시츄에이션은 기간이 기니까 여간한 기획이 아니면, 방송국 계약따는 거 만만찮겠네요.]
[선우 : ...대신 프로덕션엔 당분간 안정을 줄 수 있을거야. 조기종영될 정도로 형편없지만 않다면 말야.]
두 사람은 미니시리즈쪽으로 기울었고, 선우 삼촌은 조심스럽게 반대쪽이었다.
[선우 : (민수에게) 니 생각은 어때.]
[민수 : 전... 제가 갖고 온 거라 그런지, 시츄에이션 드라마가 좋을 것 같은데요.]
박감독의 눈이 반짝거렸다.
[민수 : 제가 알아보기론 시츄에이션은 무대하고 세트, 고정인물로 가기 때문에 제작비가 적게 들면서 소재빈곤만 없으면 시청률 잡는 게 어렵지않는 경제 원칙이 있어서...방송사에서도 상품성있게 보는, 선호도 있는 프로그램이라던데요. 저렴한 제작비에 높은 시청률은 우리 프로덕션에서 해내야하는 거잖아요.]
[태석 : 대안학교란 배경은 보편성과 대중성이 낮아.]
[박감독 : 공부 좀 했구만, 조감독.]
[민수 : ^^;;;]
[선우 : 배경은 대안학교지만, 교육문제는 어디에 놓아도 마찬가지야. 오히려 특이한 배경 덕에 일반학교에서도 갖고 있는 문제지만, 함부로 노출할 수 없었던 교육 문제를 더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거 아냐? 난 작가가 그런 의도를 염두에 둔 거라고 생각하는데. 게다가 캐릭터들도 모범생부터 꼴찌까지 다양하니까 시청자마다 자기와 닮은 등장인물 하나쯤은 찾아 볼 수 있을거야. 그게 시청률로 이어진다면, 이런 학원물도 시도해볼만해. 민수가 뽑아온 최근 5년간 방송된 드라마들 리스트와 내용요약을 보면 최소한 2년에 한 번 정도는 학원물이 등장했는데, 대부분 반응이 약했어. 주 시청자일 10대들의 진짜 모습을 그리지 못해서 동질감과 공감대 형성에 실패했기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거야.]
[태석 : ...]
[민수 : 하지만 '비상'은 진짜 대안학교에 있는 사람이 쓴 것 같잖아요? 학생들의 문제점, 자아정체성, 교사의 문제점과 사명감 고뇌, 현재 대안학교의 문제점들, ... 그런게 등장인물하고 줄거리 속에 재미있게 잘 어우려져 있어요. 제가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요즘 교육문제가 장난 아니예요, 학교가 없다고도 하고, 대안학교나 홈스쿨을 선호하는 가정도 많아요. 요즘 추세가 그렇다구요. 이런 타이밍에 이런 드라마가 나오면 대박까진 아니더라도 화재를 몰기 시작하면 충분히 먹힐 거예요. 방송국에서도 슬슬 새 학원물을 준비할 때가 됐다구요.]
정신없이 떠들어대고 보니, 갑자기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비상'의 작가, 신윤아.
예전에 아빠가 윤아를 좋게 보지 않았던 것이 떠올라 일부러 세 기획안의 작가 이름을 화이트펜으로 지우고 제출했다.
[박감독 : 일단 세 작가 다 만나보죠. 집필 역량이 어느정도 되는지 얘기도 해보고, 개인 사정도 있을지 모르니 그것도 들어보고. 난 우선 '비상' 작가를 만나보고 싶은데.]
[태석 : 선우가 이 대본을 들고 드라마 들어가면, 힘들거다. 신윤아 그 애는 선우하곤 악연이야. 일부러 엮일 필요는 없어.]
[민수 : ...]
[태석 : (강조) '비상'은 캔슬이다.]
[민수 : ...알겠습니다, 사장님.]
윤아는 나 혼자 만나보고 마는 수밖에 없겠어.
하지만... 윤아를 찾은 것 같으니까 막상 만날 용기가 안난다.
# 박감독님에게 신윤아에 대해 대충 얼버무리려던 시도는 실패했다.
하루에도 대여섯번 이상 계속 물어왔다.
[박감독 : 왜 연락이 안 돼? 계속해 봐, 번호가 틀리면 작가 매니지먼트사에 다시 물어보고. 거긴 변경된 연락처 갖고 있을지 모르잖아.]
[민수 : ...네.]
[박감독 : 아니다, 민수 넌 밥 먹으러 가. 내가 할게.]
[민수 : 아, 아닙니다. 제가 할게요, 제가...]
다시 수화기를 들고 전화 버튼을 눌렀다.
이번엔 진짜 번호를 눌렀다.
"네, 청솔 고등학교입니다."
....
신윤아가 오기로 한 토요일 오후,
수 프로덕션 옆 사무실인 선우 삼촌의 매니지먼트사에 욱이와 욱이 막내 매니저 나현, 선우 삼촌, 선우매니지먼트사의 맏이 매니저격 송부장님 등이 모였다.
그동안 오직 선우 삼촌만으로 운영되어 온 선우 매니지먼트사의 변화가 있는 날이었다. 삼촌은 삼촌 이름으로 되어 있던 매니지먼트사 대표 자리를 송부장에게 넘기고, 투자한 비율의 지분을 받고 물러났다. 그리고 선우매니지먼트사는 선우 삼촌뿐만 아니라 다른 전문계열의 연기자도 (액션 배우, 외국인 배우, 등...) 관리하는 시스템으로 재정립됐다. 오늘 욱이가 선우매니지먼트사와 정식으로 계약하러 들어온다. 나현이도 욱이 매니저로 같이 들어온다...
초초하게 윤아를 기다리고 있는데, 사무실끼리 통하는 작은 문으로 나현이가 불쑥 들어왔다.
[나현 : 선배, 방금 우리 쪽에 강현민 선생님두 오셨는데, 잠깐 얼굴 비쳐요.]
[민수 : 어, 그래? 근데 나 곧 약속이 있어.]
[나현 : ...그래요?(다시 돌아가려는데)]
[민수 : 참, 선우 삼촌한테 이쪽으로 오시라고 전해줄래? 미팅 약속돼있던 작가가 곧 도착할거야.]
[나현 : 알았어요. ^^]
자꾸 초초해져서인지 이것저것 불필요한 말들을 하게된다.
이러면 안되는데...
[민수 : 참, 나현아?]
[나현 : 네?]
[민수 : 계약 끝나고 시간되면, 이쪽으로 건너올래? 욱인 오늘 스케쥴이 어떻게 돼?]
[나현 : 이제부턴 여기하고 같이 짜야죠.]
[민수 : 아, 그렇지.]
[나현 : (민수가 이상한) 선배 무슨 일 있어요?]
[민수 : 나? 아, 아니..]
송부장님이 작은 문으로 고개를 들이밀더니, 내게 손짓했다.
[송부장 : 야, 우리 컴퓨터가 좀 이상하다? 잠깐 와서 봐줄래? 지금 계약서 뽑으려니까, 막 난린데?]
이것저것 만져보니, 한글 프로그램이 깨진 모양이다. 정식씨디를 넣고 다시 까는 방법을 대강 설명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데, 박감독님한테 전화가 왔다.
여직원이 작게 '작가님 오셨어요'한다.
[박감독F : 사거리 지났으니까, 금방 도착할거야. 근데 작가는 왔어?]
[민수 : 예, 왔답니다. 저 먼저 만나고 있겠습니다.]
회의실로 녹차를 들여갔다가 나오는 여직원을 지나쳐 일부러 태연을 가장해 회의실로 들어갔다.
호기있게 회의실을 들어가자마자, 놀라서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어리버리해진 사람과 마주쳤다.
[민수 : 역시 너구나!]
[윤아 : ...서, 선배! 0_0]
신윤아... 정말 너구나...
널 다시 보긴 보는구나...
정말 내 앞에 있는 거, 신윤아구나...
...살아있었구나... 고맙다...
나... 이제야 삼촌한테, 너한테 늘 죄지은 마음이었던 거, 끝내도 되지...? ^^
난, 의자에 앉으며 애써 태연히 들고 있던 (기획안을 돌돌 말은) 종이로 윤아의 팔을 툭 치며 몇 일동안 마음으로 준비해 둔, 다음 대사를 날렸다.
[민수 : 이름만 보곤 긴가민가 했지. ^^]
# 아빠는 신윤아를 캔슬하지 못한 것에 대해 나에게 어떤 책임추궁을 하지 않았다.
이른 아침, 회의실 안은 고요했다.
윤아를 만나고, '비상'으로 마음을 굳힌 박감독님과 윤아가 드라마를 쓴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던 선우 삼촌과 헐리우드에서 들어오자마자 신윤아를 다시 만나고 평소와 달리 무척 심각해진 현민 삼촌, 그리고... 아빠와 나.
[박감독 : (여러 대본들이 쌓인 회의 테이블 앞에 앉은, 단호히) 전 '비상'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거 신작가하고 해야겠어요.]
보름 전, 내게 윤아의 이메일이 날라왔다.
----------------------------------------- 수 프로덕션 대표님께
수 프로덕션에서 '비상' 기획안이 필요하시면, 기획안을 팔겠습니다. 지금까지 써 온 대본 초고도 함께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정식 작가로 들어가기엔 아직 제 역량이 부족합니다. 다른 작가님을 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윤아 올림 -----------------------------------------
선우 삼촌만큼이나 윤아도 이 상황이 급작스럽고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면 거부라니.
욱이 말이 맞는 건지도 모른다. 윤아는 다시 나타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박감독은 이런 일에 익숙한 듯 곧 다른 신인.기성작가들을 몇몇을 찾아 '비상' 기획안을 보여주고, 1회 대본을 부탁했다. 가장 잘 된 대본으로 작가를 투입시킬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윤아의 기획안과 초고 대본을 읽은 박감독의 맘에 쉽게 드는 다른 대본은 없었다.
평소 순하고 만사태평인 것 같은 박감독이 자기 작품에 대한 것만큼은 이렇게 불도저 스타일일 줄은 몰랐다.
[태석 : 작가 본인이 거절했잖아요.]
[선우 : ...]
[현민 : ...]
[박감독 : 제가 찾아가서 설득하죠. 사정있으면 들어주고, 문제가 있으면 방법을 찾고... 그럼 됩니다. 자, 그럼 이걸 가는겁니다...?]
[현민 : 나도 이 드라마 들어가고 싶어.]
[모두 : ? (보는)]
[현민 : 옛날 생각난다, 이 대본보니까. 재미있을 것 같어. ^^]
[태석 : (당황) 현민아!!]
[선우 : 이건 시츄에이션이야. 한 번 들어가면, 다른 것 할 짬 못내. 적어도 1년 이상 갈 내용이고.]
방송국 데스크와는 구두로 계약이 다 된 거나 다름 없는 상황이었다.
[태석 : 역량이 확인도 안 된 신인 작가를 뭘 믿고 갈 수 있습니까. 스스로도 안된다고 하잖아요. 시츄에이션으로 가는 건 저도 반대하지 않지만, 작가는 다른 사람으로 구하시죠. 데스크에서 이런 어리고 무명인 작가, 안받아줍니다. 딴 걸론 통과되도, 감독 다음으로 제일 중요한 작가 이름, 분명 걸고 넘어질겁니다.]
[박감독 : (진지한) 이대표님. 이 드라마가 수 프로덕션 이름으로 납품되고, 프로덕션 이름으로 나가는 거지만요. 드라마를 만드는 건 접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방송나가는 50분을 제 이름을 걸고 책임지고 만들어 방송국 송출 기기에 테잎 거는 건 저라구요. 연출 박필덕, 제 이름이 나가는 드라마, 항상 잘 만들고 싶어요. 드라마 잘 만들려면, 작가가 제대로 대본을 써줘야 합니다. 나보고 영상 잘 만드는 감독이요? 스토리 구성 허술하면 그거 말짱 꽝이예요. 80년대 뮤직비디오보다 더 못하단 말입니다. 신작가 대본, 볼수록 절 미치게 해요. 빨리, 여긴 이렇게 하고, 저긴 어디서 어떻게 하고, ... 당장 촬영 현장으로 달려나가고 싶어 팔짝팔짝 뛰게 만든단 말입니다. 다른 작가 대본은 필요없어요. 신작가의 광끼에 나도 같이 미쳐서 한바탕 놀랍니다.]
박감독은 벌떡 일어나며 회의탁자에 놓인 다른 작가들의 대본을 낡은 자기 가방에 구겨 넣더니 회의실 문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박감독 : (민수에게) 민수야, 가자. 지도 챙겼지?]
[민수 : (얼결에 따라 일어섰지만) 저, 저...]
[태석 : (벌떡 일어나며) 한낱 무명 작가 하나 때문에 이 계약, 무산될 수도 있어요! 이 드라마는 우리 프로덕션 시작이자 미래입니다!! 설사 계약하고 진행된다 해도, 시청률을 어디까지 장담해줄 수 있습니까? 박감독님은 이 드라마가 실패해도 원 소속인 방송국으로 돌아가시는 걸로 끝나지만, 여긴 사활이 걸렸어요.]
[박감독 : ...(뚱하니- 태석 보는)]
[선우 : 형!]
[현민 : (중얼) ...에고, 쌀벌하구만.]
[박감독 : 이대표님, 제가 쓴 소리 하나 해드리죠. 태석 영화사든, 수 프로덕션이든, 앞으로도 아침에 문 열고 싶으면, 새 피를 수혈하세요. 이대표님, 감 진짜 많이 떨어졌습니다. 이대표님이 정 싫으시면, 저 이거 들고 그냥 우리 방송국으로 들어갈겁니다. 우리 방송국 산하 프로덕션에서 만들거예요.]
[태석 : ! ]
[선우 : (!, 일어서며) 그건 안됩니다, 감독님.]
[박감독 : (순해져서, 선우에게) 제 말이 그 말이죠. 다 같이 잘 만들어서, 잘해보자는 거잖아요. 나 원 참, 이대표님은 신작가 만나보지도 않고, 왜 그렇게 싫어한대? 난 이쁘기만 하드만.^^ 피부도 뽀송뽀송한게-]
[민수 : -_-;;;]
[박감독 : (나서며 태석에게) 그리고 요즘 단막극 데뷔도 없이 미니시리즈로 직행하는 신인 작가가 한둘입니까. 물론 하나로 운좋게 대박치고, 뒷감당 못하는 작가들이 많아서 탈이지만. 정 불안하면, 다른 작가 하나 더 붙여서 공동으로 가면 될 거 아닙니까. (민수에게) 민수야, 가자! 니가 먼저 운전해라.]
[민수 : (따라나서며, 선우를 돌아본다) 네, 네.]
[선우 : (박감독에게) 다녀오십시오. 좋은 결과 기다리겠습니다. ^^]
[태석 : 선우야!]
[선우 : 형이 한 수 진거야.^^ 억울하면 박감독보다 더 나은 감독 데려오든가.]
[태석 : -_-;;;]
[선우 : 재밌을 것 같아, 이 드라마. ^^ 현민이 말따나 정말 옛날 생각난다.]
[태석 : ...]
[현민 : (태석에게) 다들 좋다는데, 형만 이상하게 됐네. ㅎㅎ]
윤아의 재등장으로 또 다시 어른들 사이에서 내부 분열이 생겼다.
평소 순한 박감독님까지 가세해서 자기 연출 소신에 대해서만큼은 절대 양보가 없다.
조감독 군번도 못되는 나로선 찍소리도 못하고 -_-;;; 박감독님을 따라 나서는 수 밖에.
내가, 윤아를 찾아낸 것... 과연 잘한 것일까.
<흡혈귀 마녀와 동침을II-05 외전(민수편) 끝.>
뱀발 : 요즘 듣고 있는 노래랍니다.
듣다가 가사 중에 '내게 남겨진 생의 반을 그에게 줄 순 없나요...' 이 부분이 나오면 가슴이 아려요, 선우가 생각나서요.
'그는 떠나고 나는 남았다'...('고독'이란 드라마의 OST로 알고 있습니다)
문득 찻잔을 두 잔 꺼내었죠 이젠 하나면 충분한 일인데 나는 그대를 위해 우리를 위해 아침을 준비했죠 모두 잊어도 좋을 것 같은데 너무 익숙해져 버린 나는 또 잔인하게도 손이 먼저 가요 함께한 오래된 습관이 서로를 닮아가게 했지만 그대를 보낸 나를 서성이게 해 아직도 그대 빈 자리에 그대를 채워두고 사는 바보는 두렵겠죠 남은 날들이- 세상에 태어나 나 단 한 사람 오직 그를 욕심낸 것 뿐인데 그것조차 허락할 수 없나요 도대체 왜 인가요 한번만 한번만 부탁할게요 그를 내게 다시 데려다줘요 다른 아무것도 원치 않을게요 제발 내곁에 돌려줘요 햇살이 가득한 날이면 그대가 불러주던 노래를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죠 한가한 휴일이라도 되면 귀찮게 나를 베고 눕던 그대를 다시한번 안고 싶은데 세상에 태어나 나 단 한 사람 오직 그를 욕심낸 것 뿐인데 그것조차 허락할 수 없나요 도대체 왜 인가요 한번만 한번만 부탁할게요 그를 내게 다시 데려다줘요 다른 아무것도 원치 않을게요 제발 내곁에 돌려줘요 내게 남겨진 생의 반을 그에게 줄 순 없나요 이건 아녜요 더는 못해요
[로맨스 소설]<<흡혈귀 마녀와 동침을II-05 외전(민수편)>>
사람도 곰처럼 겨울잠을 잘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옥탑방은 벌써부터 한겨울이거든요.
옷을 겹겹이 입어도, 자꾸 어깨가 식어갑니다.
그러다 순간 오한이 들면 또 열이 나서 여러날 앓죠.
게다가 키보드치려면 손이 자꾸 곱아지고 얼어서...
요즘은 낮시간에도 글 쓸 엄두를 잘 못냅니다.
무조건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계절이 겨울이라드니...
저나 그런 사람들에게... 돈도 나가지 않고, 먹지않아도 되고,
...푸욱~ 잠이나 잘 수 있는 동면이 허락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네요.
생활비 벌어야 하는 알바 구하려는 노력하긴 싫구,
얼마 전에 사놓은 4Kg의 쌀이 퍽퍽 줄어드는 것에(제 입에 들어가는 것임에도)
스트레스 받으며 우울한 마녀였습니다.
이야기 들어갑니다.
참, 이거 민수의 시점으로 이야기하는 외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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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소설] << 흡혈귀 마녀와 동침을II - 05 외전(민수편) >>
쓰는 이 : 연지바른 마녀(mskim0920@nate.com)
*등장인물*
-이민수(남, 21세, 화자)
-신윤아(여, 20세)
-최선우(남, 60세) : 아시아 대 배우, 엔터테인먼트, 푸른 극장 대표
-한 욱(남, 21세)
-지나현(여, 20세)
-이태석(남, 62세) : 태석 영화사 대표
-강현민(남, 51세)
-유성린(여, 60세) : 선우 약혼녀, 뮤지컬 배우
-조유리(여, 18세)
-우해준(남, 18세)
-진한기(남, 25세)
-박필덕 감독(남, 40대 중반)
그 외...
#
내가 아는 윤아는
한 눈에 띄는 예쁜 아이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다른 특별한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겪을 수록... 뭐랄까.
상대방의 속내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이성적으로 상황을 볼 줄 알았다.
박감독님 말씀대로라면
작가로서의 기본적인 자질이
있다고 할까.
.
.
.
2학년 2학기가 막 시작되서
고등학교 전체가 술렁일 무렵,
난 언제나처럼 영화부 방에서 시간을 보내다,
수업시작할 즈음, 교실에 가려고 방을 나섰다.
쾅-!
털석!
[윤아 : (주저앉아 이마 문지르며) >_< 아야-]
이런, 내가 연 문에 이마를 부딪쳐
엉덩방아를 찧은 모양인데...
[민수 : 어, 미안. ^^ (싱글싱글)]
[윤아 : 그게 미안한 얼굴이예요?
그렇게 쫌 잘생긴 얼굴로 웃기만 하면
다른 애들은 그냥 넘어가줬나보죠?]
[민수 : -_-;;;]
[윤아 : 왜요? 정곡을 찔렸나보죠?]
[민수 : 곧 수업 시작하는데, 여긴 무슨 일로 왔어?]
[윤아 : 가입신청하려구요. 여기 영화부 맞죠?]
[민수 : 우린 학기중엔 안받아.]
[윤아 : 전 오늘 아침에 전학 왔는데요?]
[민수 : 안됐네, 그래도 자격 조건이 안맞아. ^^
우린 신입생만 받아서, 스파르타식으로 관리하거든.]
[윤아 : -_-;;; 무슨 영화부가 논산훈련소라도 되요?]
[민수 : 영화란 게 그냥 낭만만으론 만드는게 아니거든.
그럼 난 바빠서 이만! ^_^ 헉!]
뭐, 뭐야...-.-;;;;;;;;;
계속 말대꾸해주다간 한도끝도 없을 것 같아
대충 얼버무리고 피하려는데
이 여자애... 내 허리띠를 잡고 늘어졌다. -_-;;;
[윤아 : 이봐요!!! 전학생은 못받는다는
자격불충분 이유를 다 못들었는데요?!]
[민수 : -.-''''' (당황) 저, 저기 그 손 좀 놓지???]
[윤아 : 이야~ ^^;;; 여기 부잣집 애들만 다니는 학교라더니,
바지 혁띠도 장난 아니네? 이거 진짜 가죽 맞죠?]
여자애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가슴에 단 이름표를 보니... '신윤아'
옆의 뱃지를 보니...
오오... ^^;;;
[민수 : 너 1학년이지?]
[윤아 : 네! ^^ (민수 뱃지 흘끔 보고) 선배님은 2학년이세요?]
음... 전혀 기가 안죽네..
우리 학교의..특히 영화부 선후배 기강을 어찌보고..
[민수 : 응, 그리고 우리 영화부에 꼭 들어올 생각이라면,
참고로 알아야 할 게 있는데...]
[윤아 : 네! 뭔데요?]
[민수 : 나, 이 영화부 회장이야.(^^)v]
[윤아 : 아~ 그러시구나. ^0^]
[민수 : (쿠당-)]
뭐, 뭐냐... 대체 저 태연한 반응은.
[윤아 : 근데 저도 참고로 말씀드리는데요.]
[민수 : 어, 어... 뭔데?]
[윤아 : 전 다른 여자애들처럼
쫌 잘생긴 선배님보려고
영화부에 들어가려는 거 절대 아니란거요.]
허걱!!!!
#
영화부 안.
천방지축 골칫덩이 하나 들어오는 것
아닌가 했더니,
윤아가 봐달라고 건넨
20분짜리 다큐 프로그램은
예상밖으로 괜찮았다.
[욱 : 저걸 혼자 다 만들었다구? 1학년짜리가?]
[민수 : 응. 어때?]
[욱 : 쓸만한 물건 같다.]
[민수 : 무엇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의도를
영상으로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이 많이 보여.]
[욱 : 응.]
[민수 : 양쪽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다루면서
휴머니즘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욱 : 간만에 니가 진지한 모습을 보니 반갑다. ^^]
[민수 : -_-;;;]
욱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민수 : 어떻하지?]
[욱 : 넌 어떻하고 싶은데?]
[민수 : 다른 부원이 반대하지 않으면
그냥 받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차피 방학 전에 두 명이나 빠져서
공석이 있으니까.]
[욱 : ...(문 열고 나가려는)]
[민수 : 야, 부회장! 니 생각도 말로 좀 표현해봐라.
맨날 폼잡는다고 말도 안하고 무게만 잡으면 다 터프해져?]
[욱 : (나가며) 신윤아보고 저녁 때
우리 방에 들르라고 전할게.]
[민수 : -_-;;;]
저 녀석, 분명
1학년 교실 뒷문을 벌컥 열어제치고
문 끝을 턱-!하니 한 손으로 잡고는
아주~ 불량스럽게
"여기 오늘 전학 온 신윤아라고 있냐? 나와라!"
...라고, 영화 주인공처럼 온갖 폼을 다 잡겠지. -_-;;;
욱이에겐 일상의 모든 것이 영화 속 액션이니까.^^
근데 욱이의 그 모습이 떠오르면서
은근히 재미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신윤아란 애도 꽤 만만찮아 보이더라는 거다. ^_^
#
윤아가 등장하면서,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자주 번복됐다.
평소 영화계, 공연계 등으로
이래저래 알고 지냈던
어른들의 묘한 반응.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던...
딴 사람같은 선우 삼촌의 태도와 표정, 눈빛.
선우 삼촌은 내가 영화부 일로 움직이면서
'윤아'의 이름이 한번이라도 거론이 되면
꼬치꼬치 물었다.
촬영 행선지는 어디며, 위험하진 않은지,
여자애에게 어떤 일을 시키는 건지.
난 삼촌의 독신생활에 익숙해져서
아빠가 삼촌에게 유성린 선생님을
자꾸 들이대는 것이
기분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유쾌한 기분도 아니었다.
삼촌이 가정을 이루면,
나에게 오던 관심과 사랑을 뺏길까봐...
어린애같은 소심한 질투와
초초함을 갖고 있었나보다.
하지만 삼촌은 언제나... 작품관계로만
대부분의 여자들과의 관계를 유지해왔을 뿐.
절대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런 삼촌이...
윤아에게만큼은 필요이상의 관심과 친절,
부담스러울만큼 지나친 배려를 보였다.
...처음으로 봤다,
삼촌이 진심으로
상대를 간절히 원하는 표정으로
누군가를 안고 있는 모습을...
다른 곳도 아닌 푸른 극장에서...
그 상대가 윤아라는 것도
커다란 쇼크였다.
...난, 어릴적부터
삼촌의 따뜻하고
다정다감하고 자상한 면이
참 좋았다.
자기 일에 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존경스러웠다.
외부에 알려진 모습과
평소의 모습이 일치하는
변함없이 소탈한 모습.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유쾌한 농담을 할 줄 알았고,
죽은 형을 늘 설레했던
미스터리같은 비밀 로맨스로..
삼촌에게서 신비감까지 느꼈다.
같은 남자가 봐도
매력적인 사람이니,
윤아가 삼촌에게
마음이 기우는 것은
당연했다.
지금까지도 많은 여자들이
삼촌을 사랑하고,
삼촌에게서 사랑받길 원했으니...
그런 삼촌이
윤아를 특별히 아끼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삼촌까지 그렇게 쉽게
흔들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처음엔... 어른들의 이상한 반응에
난 윤아가 혹시 우리 아빠가 밖에서 낳은
배다른 동생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하지만 아빠는 불쾌해하고,
삼촌을 걱정하는 것이었을뿐.
그래서 내 생각은...
혹시 윤아가 삼촌의 숨겨놓은 딸이
아니었을까- 하는데까지 미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아는 삼촌이라면
자신의 딸을 당당히 데려다 키울 사람이었다.
한동안 이렇게 저렇게 생각이 뒤죽박죽 꼬였지만
내 정확한 육감을... 부정하고 싶었다.
삼촌의 집에서
또 다시 울고 있는 윤아를
안아주고 있는 삼촌을 보고서도,
삼촌의 집에서
삼촌을 간호하고 있는 윤아와
맞닥뜨리고도,
안믿었다.
아니, 믿기싫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럼에도.
삼촌을 간호하고 나온 윤아를
다그쳐 울리고 돌아온 내게, 내게...
삼촌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선우 : 나... 그 애 때문에, 아팠다.
그 애가 짊어진 슬픔때문에.]
#
삼촌은 푸른 극장에서
윤아를 냉정하게 거절한 뒤,
윤아 소식을 거의 묻지 않았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오직 뮤지컬 공연 연습과 준비에만
미친듯이 몰두했다.
해외 공연을 위해 떠나기 전,
삼촌은 지나가는 말처럼, 저녁식사 때
영화부 애들 서넛 데리고 오라고 했다.
누구라고 특별히 이름을 대진 않았어도,
난 담박에 삼촌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아... 삼촌은 윤아가 보고 싶은 거구나.
삼촌 뮤지컬 팀의 해외 공연 일정은
2년으로 잡혀있었다.
그 시간이면 삼촌도 윤아도
충분히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삼촌도 예전처럼 돌아가고...
윤아도 겉으론
괜찮다, 안괜찮다 - 왔다갔다 했지만
아직은 많이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서로 얼굴 한 번 보고
헤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마땅치않아하는 윤아를
일부러 삼촌 집으로 데려갔다.
식사가 끝나고, 취한 아빠를
부축해서 윗층 우리 집으로 가느라
미처 윤아를 챙기지 못했다.
내가 아니더라도,
욱이가 버스정류장까진 같이 갔겠지.
그렇게 깜빡하고 넘어갔다.
....
삼촌은 떠나기 전까지,
뭔가 굉장히 우울해하고 괴로워했다.
굳이 말하지 않는 건 있어도,
거짓말은 안하는 사람이었기에...
그 때까지도 삼촌과 윤아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병원에서 유산하고 마취에서 깨어난
윤아의 첫마디에서 삼촌이 거론됐을 때,
난 경악했다.
절대, 믿어선 안되는 말.
삼촌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건
내가 더 잘 알아!!!!!
윤아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이 상황을 인정할 수 없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 마음에서, 윤아를
-삼촌을 이용하려는 나쁜 애로-
매도해버렸다.
그리고... 난 도망쳤다.
캐나다, 삼촌의 여동생인 선영 고모네 집으로.
#
[민수 :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나서
같이 일하게 된 거... 우연이라고 생각해?]
드라마를 함께 하기 위해,
드라마 작가 지망생인 윤아와 재회했다.
[윤아 : 뭐야, 선배 ^^
설마 운명이니 그런 허접한 얘기하려는거야? 어? ㅎㅎ]
[민수 : 아, 아니. -_-;;;]
결국 난... 윤아에게 고백하지 못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라는 걸.
사실은 내가... 널 필사적으로
찾아냈다는 걸.
2년 전, 삼촌에게 마음을 거절당하고
아이를 잃고, 가족에게조차 외면당한...
가장 힘들었을 널 두고
비겁하게 도망쳐버린 나... 너에게 속죄받으려.
그리고... 너 때문에 많이 힘들어 한 삼촌을 위해서.
#
[선우 : (민수에게) 왔구나? ^^]
도망치듯 떠나온 캐나다 선영 고모 집에서
해외 공연 중 들른 삼촌을 만났다.
삼촌은 선영 고모네가 이민갈 때 많이 반대했지만,
막상 이민 정착금이며, 제대로 자리잡을 때까지
상당한 자금을 보조해주었다고 들었다.
[민수 : 응.]
[선우 : 잘 왔다.^^ 안그래도 고3되면,
꼼짝없이 공부만 해야될텐데
그 전에 여기서 신나게 놀다 가.]
[민수 : ...삼촌.]
[선우 : 응?]
[민수 : 아, 아냐...]
[선우 : 싱겁긴.]
삼촌은
내 앞에서, 선영 고모 앞에서, 친조카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지만...
난... 늦은 밤 삼촌이 혼자 쓸쓸히
정원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을
이층 방 창문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삼촌은 지금 누구를 생각하고 있을까...
만약 삼촌에게 윤아 이야기를 한다면...
삼촌은 어떻게 나올까...?
윤아가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삼촌의 반응은 안봐도 뻔했다.
진실일 것이... 두려웠다.
그 진실이
삼촌을 힘들게하고, 다치게 할까봐
...두려웠다.
결국 난, 삼촌이
다음 날 선영 고모집을 떠날 때까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난... 두 배로 비겁해졌고,
몇 배로 힘들어졌다.
#
특별전형으로 대학 입학이 결정된 후,
주말을 낀 황금 연휴를 이용해
영국 런던행 비행기를 탔다.
해외 공연 중인 삼촌을 만나기 위해.
[선우 : (망연해서) ...사라..졌다구...?]
[민수 : (고개 숙인 채) ...]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윤아가...
사라...졌다...고.
캐나다에서 돌아왔을 때,
윤아는 전학간 뒤였다.
난 내 마음의 짐이 너무 무거워
윤아를 만나고 싶었다.
윤아가 전학 간 대전의 학교로 찾아갔다.
하지만... 없었다.
나타나지 않았다고...했다.
서울의 윤아 큰 오빠를 만났고,
대전의 윤아 작은 오빠를 찾아가 만났다.
윤아는... 어디에도 없었다.
신기루처럼...
물거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난, 삼촌의 호텔방에
몇 일을 머물렀다.
런던의 안개는 지독했다.
삼촌과 나의 우울한 마음 이상으로.
삼촌은,
윤아의 실종을 알게된 그 날...
뮤지컬 해외 공연 시작 이후 처음으로
술에 입을 댔다.
삼촌은 활동 영역을
영화에서 공연 쪽으로 넓히면서
술과 담배를 스스로 많이 줄였다.
무대에서 관객과 함께 호흡을 같이하며
그들을 사로잡을 에너지와 힘을
키우기 위해.
해외 공연 중엔
입에 맞지않는 음식때문에
건강에 더 신경써야 하는 건
상식이었다.
후배들에게보다
스스로에게 더 엄격했던
삼촌의 내면은... 조금씩 분열돼갔다.
[선우 : 윤아한테 무슨 일... 있었어?]
[민수 : ...(고개 젓는)]
[선우 : ...]
삼촌은 뭔가 짐작간 듯한 표정으로
어두워졌다.
한국을 떠나기 전,
삼촌은 정말 윤아를 안았을까.
...왜?
삼촌이 윤아의 마음을
일부러 모질게 거절했던 건,
삼촌 자신보다 윤아의 미래를
생각했기때문이 아니었어?
그런데 왜?
[선우 : ...민수야.]
삼촌은 많이 취해있었다.
[민수 : 어.]
[선우 : ...찾아...볼 수 없을까...]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전 날,
삼촌은 술기운을 빌려
어렵게 그 말을 꺼냈다.
[민수 : 찾아볼게.
...찾으면 삼촌한테 제일 먼저 연락할게.]
[선우 : ...]
[민수 : 근데 삼촌.]
[선우 : ...응?]
[민수 : 윤아... 처음부터 없었던 거 아닐까...?]
[선우 : ...?]
[민수 : 윤아를 아는 사람들한테만
잠깐 보여졌던 거 아닐까....]
[선우 : ...]
몇 일을 넋나간 삼촌을 지켜보며
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삼촌은, 윤아를 통해 사무치게 그리워진
돌아가신 그 분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신윤아때문에 힘들어 한다는 것을.
삼촌 마음에 신윤아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삼촌의 새 사랑...
오랫동안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온 삼촌에게
어렵게 다가온 사랑...
나로선 수천번을 축하하고
박수쳐주고 싶은 일.
하지만...
하필이면... 윤아, 그 아이라니.
#
미친 듯이 찾아다녔다.
서울서 대전으로 내려가는
차도를 수십번 오가며 차도 옆 주변을,
그리고 중간중간 있는 휴게실마다
샅샅히 뒤졌다.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흔적조차 없었다.
혹시 죽은 건 아닐까....?
아니, 정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던
아이는 아니었을까.
지쳐가면서... 난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린 그동안 환영을 보아온 걸지도 몰라.
삼촌은 돌아가신 그 분이
너무 보고 싶어서... 그 아이를 본 거야.
그래서 삼촌을 알고, 그 분을 아는
다른 사람들도 그 아이를 본 거야.
신윤아라는 환영을.
#
결국 파리로 삼촌을 만나러 갔을 때
난, 빈 손이었다.
뮤지컬 팀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공연 장소 문제로 트러블이 있다는
소식부터 들렸다.
여러 나라를 다니는 동안
삼촌은 간간히 내게 전화해왔다.
간단한 안부 전화였을 뿐임에도,
삼촌은 대화 사이사이 잠깐의 침묵을 통해
윤아의 소식을 묻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먼저 말을 꺼냈을 것이므로...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민수 : 삼촌!]
삼촌 방엔
유성린과 정대표가
함께 있었다.
[정대표 : (설득 중) 그렇지만 유종의 미는 거둬야죠.
여기가 마지막 공연진데,
공연장 문제 정도 갖고 취소하자니요!
다른 곳에서는 이만한 문제 없었나요.]
[성린 : ...(생각하는)]
[선우 : 우리 그만 돌아가죠.]
삼촌은 차분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성린 : 이번 건은 우리 잘못이 아니니까,
위약금 문제같은 건 없잖아요.]
유성린도 그동안 삼촌과 함께 공연다니며
옆에서 지켜보아온 것이 있었던지
삼촌 말을 거들었다.
[정대표 : (답답해서, 한숨) 꼭... 그러셔야 되겠어요?]
삼촌은 창가로 다가갔다.
[선우 : (먼 풍경 보며) ...지쳤어요.]
...
삼촌의 손에서 술병을 뺏었다.
[민수 : 그만 마셔! (옆의 성린에게) 삼촌 계속 이랬어요?]
[성린 : (우울) 그래도 공연은 용케 잘했어.(나가버린다)]
이젠 술잔도 필요없이, 병나발이라니.
해외 공연이 완전히 마무리 된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삼촌은 안심하고 잔뜩 취해있었다.
[선우 : 민수야.]
[민수 : 어.]
[선우 : ...아직...이야...?]
[민수 : (대답못하는) ...]
[선우 : (눈물 그렁) ...아직이 아니고...
그게 그냥 끝이었나보다..]
[민수 : ...삼촌...T_T]
[선우 : ...어디서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만이라도 듣고 싶었는데...]
[민수 : ...]
삼촌이 내뱉는 한 구절 구절마다
피토하는 듯이... 들렸다.
[선우 : 만나지 않아도 좋고, 보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냥 그런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으면...
더 이상 아무것도 안바랄텐데...]
삼촌의 주정이 잦아들며
삼촌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미안해, 삼촌...
그 때 내가 비겁하게 도망치지만 않았더라면...
#
뮤지컬 팀에 묻어
삼촌과 함께 귀국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어쩌면... 윤아가 정말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현실처럼 닿아오기 시작했다.
'신윤아, 너 어디 있는거야!
정말 죽은 거 아니지?
너 정말 죽어버린 거면,
내가 용서 안할거야.
속죄고 뭐고 절대 용서 안할거야.'
무엇보다 삼촌이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걸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
나한테 고문 그 자체니까...
신윤아...
다큐성 영화를 좋아해서,
우리 영화부에 가입했다.
영화를 하고 싶었던 아이.
항상 뭔가를 찍어대고, 써대는 것이
생활이었던 아이.
늘 캠코더를 손에서 떼지않았고,
캠코더가 없을 때는
항상 뭔가를 메모하고, 그렸던 아이.
사람에 대한,
다른 이의 인생에 대한 관심을
멈추지 않던 아이.
자신에 대해서도,
영화에 대해서도,
사람에 대해서도,
사랑에 대해서도,
열정적이었던 아이.
....!!!
그래!!!!
왜 내가 그 생각을 못했을까.
삼촌이 어느 토크쇼에서
이런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났다.
-영혼에 담긴 광대의 끼는, 숨길 수 없는 법이라고.-
진행자가 -어떻게 이 길을 걷게되었냐고- 물었을 때,
그랬던가.
하여튼, 윤아가 어딘가 살아 있다면
그 아이 안에... 영화에 대한 열망만은
아직도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욱이를 전화로 불러냈다.
#
커피숍.
얼마 전 개봉된 영화 덕인지,
거기에 조연급으로 출연한 액션배우 욱이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모자를 푹 눌러쓴 욱이
싸인 공세에 시달리다가
겨우 커피숍에 들어와서는
내 맞은편에 털석 앉았다.
[민수 : 이제 막 뜨나보네.]
[욱 : ...^_^;;;;]
[민수 : 나 좀 도와주라.]
[욱 : ...]
[민수 : 말 좀 해라, 말 좀.]
[욱 : 말해.]
[민수 : 너 인터뷰같은 거, 요즘 몇 건 들어와?]
[욱 : 이번 영화 덕에, 좀 되지. 왜?]
[민수 : 그럼 인터뷰 할 때마다, 누구 좀 찾는다고 해.]
[욱 : ?]
[민수 : 고등학교 영화부 후배.
소식이 끊겼는데, 꼭 만나고 싶다고. 어?]
[욱 : ...]
윤아가 어딘가에 있다면, 살아있다면...
분명 욱이 소식을 영화 잡지나 신문,
연예인을 주로 다루는 방송에서 접할 것이다.
영화를 하고 싶어했으니까,
틀림없이 주의깊게 볼거야.
윤아에게 나와 삼촌은 껄끄러워도,
욱이한텐 부담없이 연락해 올 수 있을 것이다.
설마... 윤아가... 드라마같은데서 잘 울궈먹는 것처럼
일시적 기억상실같은 상황은 아니겠지...? -_-;;;;
[욱 : 아직도 찾고 있냐?]
[민수 : ...응.]
욱이는 자기 팔짱을 낀 채,
잠시 고개 숙이고 있더니
마침 종업원이 물잔을 놓고가자.
벌컥벌컥 마셨다.
[민수 : 넌... 내가 포기했으면 좋겠어?]
[욱 : 윤아, 지가 나타나고 싶지 않은거잖냐.]
욱이는 삼촌 얘기는 거의 모르고,
윤아 쪽만 약간 짐작하는 정도였다.
[민수 : 그냥 어디 있든 잘 있으면 누가 뭐래,
근데 그것도 모르니까 답답하지.]
[욱 : ...]
[민수 : 욱아-]
[욱 : 알았다.]
[민수 : 가급적이면 윤아에 대한 얘기 많이 비쳐줘.]
욱인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수 : 매정한 놈, 용건 끝났다구 그냥 일어나?
그래 너 많이 팍팍 떴다! +_+]
[욱 : -_-;;;
건너편 까페에서
인터넷 신문기자가 기다리고 있어.
기껏 그쪽 기다리게 해놓고, 왔더니. 쯧.
이따 연락할테니까, 그 때 놀자.]
[민수 : 인터뷰~ 잘 부탁해~ ^_^]
욱인 돌아서려다 말고,
날 한 번 봤다.
[욱 : 너, 그 녀석 그렇게 좋아했냐?]
허걱!
#
삼촌도 사람을 써서 찾는 눈치였지만,
나도 나 나름대로
윤아에 대한 작은 힌트라도 생각나는대로
마구잡이로 찾아다녔다.
전국의 대학 연극영화과, 영화 동아리, 영화사, ...
영화 비슷한 곳이면 어디라도 찾아가서
윤아의 사진을 보여주고,
그 곳 학생 혹은 스탭들 명단을
사정사정해서 직접 확인했다.
...어떻게 된 거지.
윤아는 영화까지 버린 걸까.
그렇게 쉽게 포기할 애는 아닌데.
그깟 사랑 한 번 실패했다고...
아니... 아니다.
삼촌이 저렇게 힘들어하는 걸 보면,
아무리 씩씩한 윤아라해도
그 상황... 아무렇지 않게 이겨내는 건
쉽지 않았을 거였다.
그래도 2년이나 지났는데...
혹시... 한국에 없는 건 아닐까.
외국으로 유학이라든가...
하지만 윤아 큰 오빠말로는
짐이나 돈도 거의 없이
빈 몸으로 집을 나섰다던데...
욱이의 인터뷰 건은 별 효과가 없었다.
삼촌 쪽에서도 아직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욱이 말대로 나타나고 싶지않은걸까.
아니면... 나타날 수 없는 걸까...?
삼촌만 아니라면,
난 그냥 덮고 싶었다.
삼촌만 지친 것이 아니라,
나도 지쳤다.
#
윤아를 찾아다니느라
학점 몇 개가 펑크났다.
부모님께 죄송해서,
휴학계 내면서,
영화사 일 배우며 거들겠다고 나섰다.
회사 사정은 겉보기와 달리, 좋지 않았다.
영화사도, 수 프로덕션도.
그럼에도 영화사 명성이 있어서,
따로 공모를 하지 않아도
수시로 시나리오 봉투가 도착했다.
시나리오 처리맨으로 사무실에서 뒹굴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윤아와 푸른 극장에서 아르바이트 할 때...
-------회상--------------------------------
[민수 : 넌 영화 제작보다 시나리오만 써도 잘하겠다.]
[윤아 : 정말요?]
[민수 : 포인트도 잘 잡고, 문장도 간략하게 잘 쓰고.^^]
[윤아 : 웬일이래요? ^^ 선배가 날 다 칭찬하고.]
------------------------------------------
윤아는 어디서 어떤 다른 것을 하고 있어도,
시나리오는 꼭 쓰고 있을 것 같았다.
일단 태석영화사에 쌓인 시나리오들을
정신없이 뒤적거렸다.
필명을 쓰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나았다.
충무로의 영화사들을 돌아다니며,
그곳에서 쓰레기통에 버린 시나리오까지 뒤졌다.
비슷한 이름만 봐도, 찾아가서 만났고.
동명이인도 숱하게 만났다.
하지만 내가 찾는 신윤아는 아니었다...
#
[박감독 : 민수야-!]
[민수 : 네, 감독님.]
차기 드라마를
수 프로덕션과 일하기로 하고
얼마전부터 사무실을 드나드는
드라마 감독인 박필덕 감독이
나를 불렀다.
[박감독 : 이것들 좀 뽑아봐.]
드라마 제작을 하게 되면,
조감독의 조감독(?)으로 일을 하기로
얘기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박감독님의 조수로도 뛰어야했다.
박감독님이 컴퓨터 앞에서 물러나고,
내가 대신 앉아서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민수 : 작가매니지먼트사...? 이런데도 있어요?]
[박감독 : 어, 거긴 단편 드라마부터 시나리오까지
신인이고 기성이고 작가들 작품 DB를 보유하고 있는데지.
우리나라에서 쓸만한 건 거기가 제일 많아.]
[민수 : ! ]
[박감독 : 일단 멜로하구 전문성 있는 분야로
드라마 기획안들을 프린트로 뽑아봐.
내가 모니터로는 눈에 잘 안들어와서 말야.
너도 봐서 괜찮다 싶은 거 있으면 뽑고.
일단 뭐라도 기획안이 있어야, 뭘 시작하든지 말든지 하지.]
이런 곳도 있었구나,
미처 몰랐다.
박감독님이 자기가 알고 있는 드라마 작가들하고
'뭐 괜찮은 얘기 없어요?' 전화통화하는 것을 들으며
난 검색란에 '신윤아'를 쳐넣었다.
화면이 바뀌는 잠깐... 동안,
긴장했는지, 침이 꿀꺽 삼켜졌다.
5개의 리스트가 나왔다.
단편 둘, 미니 둘, 학원물 시츄에이션 하나.
토씨 하나 안 틀린 '신윤아'란 이름.
다섯 개 전부 동일인물이 올린 것 같았다.
작품 제목의 작명 스타일이 비슷했다.
작가의 프로필은 볼 수 없었다.
아직 데뷔하지 않은 무명이라는 것밖에 알 수 없었다.
한 장짜리 대표적 줄거리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
윤아...같다!!!
아니, 이건 윤아가 틀림없다.
나는 영화부 선배 입장에서
가끔 윤아의 시나리오를 봐줬기에
윤아의 문장 스타일을 잘 아는 편이었다.
간결한 문장력과
촌철살인(寸鐵殺人)같은 단어의 선택으로
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느낌이었던
윤아의 시나리오 지문이 떠올랐다.
살아있다!!!
윤아가, 살아있어!!!
나는 작가매니지먼트사의 약도를
프린트해서 들고 프로덕션을 뛰쳐나갔다.
[박감독 : (?) 민수야!]
[민수 : 잠깐 다녀올데가 있어요!!!
갔다와서 해드릴게요!!!]
#
작가 매니지먼트사에 '수 프로덕션'이름을 팔아
'신윤아' 이름으로 등록된 드라마 기획안과 대본을 찾아
읽어볼 수 있었다.
신원보호차원으로 작가의 신상명세를 볼 순 없었지만
제대로 만들어진 기획안에
(작의, 등장인물, 줄거리 등이 포함된)
작가의 연락처도 함께 나와 있었다.
가슴이 마구마구 뛰었다.
무엇보다 '비상'이라는 학원물은
갓 잡힌 생선이 파닥파닥거리듯
등장인물과 줄거리가
실화를 바탕으로 드라마틱하게 써낸 것처럼
약간 거친듯하면서도, 날 것같이 신선했다.
실지 일반인들의 모습을 담는,
다큐 영화를 하고 싶어했던 윤아의 스타일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작가 매니지먼트사에서 내민
<표절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하고
'비상' 기획안 복사본을 받아들고 나왔다.
하지만 공원에서 읽고 또 읽으며,
점점 흥분이 가라앉았다.
만약... 내가 찾는 신윤아가 아니라면?
동명이인이라면...?
하긴... 내가 여태 한두번 속아봤나...
...윤아가 왜 드라마를 쓰는거지?
왜 방향을 틀었지?
...문득, 삼촌의 돌아가신 그 분이
드라마 작가였다는 것이 떠올랐다.
윤아의 실종 이후,
힘들어하던 삼촌은
내가 삼촌을 찾아갈 때마다
지독히 술에 취하면
수십년동안 삼촌 안에 담겨있던 마음을
조금씩 꺼내놓곤 했다.
윤아....
그리고 돌아가신 그 분...에 대해.
드라마 작가였던 그 분...
그리고 현재 드라마를 쓰고 있는 윤아...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
각기 다른 3개의 드라마 기획안을 놓고
잠정적이지만 최종적인 결정에 가까운 회의가 있었다.
-작가 매니지먼트사에서 내가 갖고 온 '비상'
-박감독님이 아는 기성 작가에서 받아 온 미니시리즈
-작가 교육원의 추천을 받은 신인 작가의 일일극
박감독님은 자신이 가져온 미니시리즈 기획안보다
'비상'을 보자마자 흥분했다.
[박감독 : 역시 신인은 덜 다듬어진 듯하면서도
신선하단 말야. ^0^]
내 아버지, 이태석 대표는
'비상'의 1,2회 대본까지 읽고는 굳어버렸다.
처음부터 이번 드라마에 출연하기로 약속하고
같이 참여한 선우 삼촌은 다른 기획안은 한번 훑어버리고 말더니,
'비상'의 기획안과 대본은 여러번 반복해 보면서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별로인가?
드라마쪽으론 감을 잡기 힘든 나로선
세 사람의 각양각색의 태도를 종잡을 수 없었다.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며,
조용히 앉아 시간만 죽였다.
[태석 : 돈 되고 빠른 결과를 보려면
미니시리즈가 낫겠죠...?]
[박감독 : 일일극하고 시츄에이션은 기간이 기니까
여간한 기획이 아니면, 방송국 계약따는 거 만만찮겠네요.]
[선우 : ...대신 프로덕션엔 당분간 안정을 줄 수 있을거야.
조기종영될 정도로 형편없지만 않다면 말야.]
두 사람은 미니시리즈쪽으로 기울었고,
선우 삼촌은 조심스럽게 반대쪽이었다.
[선우 : (민수에게) 니 생각은 어때.]
[민수 : 전... 제가 갖고 온 거라 그런지,
시츄에이션 드라마가 좋을 것 같은데요.]
박감독의 눈이 반짝거렸다.
[민수 : 제가 알아보기론 시츄에이션은 무대하고 세트, 고정인물로 가기 때문에
제작비가 적게 들면서 소재빈곤만 없으면 시청률 잡는 게 어렵지않는 경제 원칙이 있어서...방송사에서도 상품성있게 보는, 선호도 있는 프로그램이라던데요.
저렴한 제작비에 높은 시청률은 우리 프로덕션에서 해내야하는 거잖아요.]
[태석 : 대안학교란 배경은 보편성과 대중성이 낮아.]
[박감독 : 공부 좀 했구만, 조감독.]
[민수 : ^^;;;]
[선우 : 배경은 대안학교지만,
교육문제는 어디에 놓아도 마찬가지야.
오히려 특이한 배경 덕에
일반학교에서도 갖고 있는 문제지만,
함부로 노출할 수 없었던 교육 문제를
더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거 아냐?
난 작가가 그런 의도를 염두에 둔 거라고 생각하는데.
게다가 캐릭터들도 모범생부터 꼴찌까지 다양하니까
시청자마다 자기와 닮은 등장인물 하나쯤은 찾아 볼 수 있을거야.
그게 시청률로 이어진다면, 이런 학원물도 시도해볼만해.
민수가 뽑아온 최근 5년간 방송된 드라마들
리스트와 내용요약을 보면
최소한 2년에 한 번 정도는 학원물이 등장했는데,
대부분 반응이 약했어.
주 시청자일 10대들의 진짜 모습을 그리지 못해서
동질감과 공감대 형성에 실패했기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거야.]
[태석 : ...]
[민수 : 하지만 '비상'은 진짜 대안학교에 있는 사람이 쓴 것 같잖아요?
학생들의 문제점, 자아정체성,
교사의 문제점과 사명감 고뇌,
현재 대안학교의 문제점들, ...
그런게 등장인물하고 줄거리 속에 재미있게 잘 어우려져 있어요.
제가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요즘 교육문제가 장난 아니예요,
학교가 없다고도 하고,
대안학교나 홈스쿨을 선호하는 가정도 많아요.
요즘 추세가 그렇다구요.
이런 타이밍에 이런 드라마가 나오면
대박까진 아니더라도
화재를 몰기 시작하면 충분히 먹힐 거예요.
방송국에서도 슬슬 새 학원물을
준비할 때가 됐다구요.]
정신없이 떠들어대고 보니,
갑자기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비상'의 작가, 신윤아.
예전에 아빠가 윤아를 좋게 보지 않았던 것이 떠올라
일부러 세 기획안의 작가 이름을 화이트펜으로 지우고
제출했다.
[박감독 : 일단 세 작가 다 만나보죠.
집필 역량이 어느정도 되는지 얘기도 해보고,
개인 사정도 있을지 모르니 그것도 들어보고.
난 우선 '비상' 작가를 만나보고 싶은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선우 : (살짝 손 들며, 민수에게 눈찡긋) 저도요.]
[민수 : ! ]
...삼촌은 어떤 느낌을 느낀 것일까.
그냥 내 편을 들어주는 것 뿐일까...
[박감독 : 민수야, 작가들한테 연락해서
따로따로 약속잡아라.]
[민수 : 네! 알겠습니다. /(^^)]
#
회의가 끝나고, 대표실로 불려갔다.
[태석 : (드라마 기획안들을 책상에 던지며)
왜 작가들 이름을 지웠지?]
[민수 : ...]
[태석 : (낮지만 노한) 이민수!]
[민수 : 이름만 갖고 편견부터 가질까봐요.]
말도 안되는 핑계라는 것, 안다.
[태석 : '비상' 작가, 이름이 뭐야.]
[민수 : ...]
[태석 : 혹시, 신윤아 아냐?]
[민수 : ! ]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빠, 이대표는 내 표정을 읽더니
'비상' 기획안을 집어 꾸깃 구겨서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태석 : 이건 캔슬이야.]
[민수 : 하, 하지만... 감독님하고 삼촌이...]
[태석 : 연락 안된다고 해.]
[민수 : 그럴 수 없어요!
아빠, 왜 그러세요!
대체 뭐가 맘에 안드세요!
아직 결정난 것도 없는데!
기회조차 안 주려는 이유가 뭐냐구요!]
[태석 : 그러는 넌 왜 굳이 그걸 들고 들어왔어?!]
[민수 : 괜찮은 기획안이니까요!!]
아빠는 잠시... 감정을 가라앉혔다.
[태석 : 세 개 모두 괜찮은 건, 맞다.
하지만 프로덕션 문을 닫는 한이 있어도,
신윤아 건 안한다.]
[민수 : ! ]
[태석 : ...]
[민수 : ...왜...요?]
[태석 : ... 선우를 힘들게 할거니까.]
[민수 : !!!]
아빠도 선우 삼촌이 해외 공연 때
힘들어 한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직접적인 원인이 윤아일거라곤
상상도 못하고 있을텐데.
어째서 윤아의 기획안이
선우 삼촌을 힘들게 할 거라고 하시는걸까...
[민수 : ...아빠도 알잖아요.
선우 삼촌, 걔 아꼈어요.
저처럼요.
그냥 그것뿐이예요.]
[태석 : ...그게 아냐.]
[민수 : 그럼요?]
...회의실에서 '비상'의 대본을 본
아빠의 표정이 굳어있던 것이 기억났다.
[태석 : 예전에 알던 누가 쓰던 스타일하고
너무 비슷해.]
[민수 : ! ]
[태석 : 선우가 이 대본을 들고
드라마 들어가면, 힘들거다.
신윤아 그 애는 선우하곤 악연이야.
일부러 엮일 필요는 없어.]
[민수 : ...]
[태석 : (강조) '비상'은 캔슬이다.]
[민수 : ...알겠습니다, 사장님.]
윤아는 나 혼자 만나보고 마는 수밖에 없겠어.
하지만... 윤아를 찾은 것 같으니까
막상 만날 용기가 안난다.
#
박감독님에게 신윤아에 대해
대충 얼버무리려던 시도는 실패했다.
하루에도 대여섯번 이상 계속 물어왔다.
[박감독 : 왜 연락이 안 돼?
계속해 봐, 번호가 틀리면
작가 매니지먼트사에 다시 물어보고.
거긴 변경된 연락처 갖고 있을지 모르잖아.]
[민수 : ...네.]
[박감독 : 아니다, 민수 넌 밥 먹으러 가.
내가 할게.]
[민수 : 아, 아닙니다. 제가 할게요, 제가...]
다시 수화기를 들고
전화 버튼을 눌렀다.
이번엔 진짜 번호를 눌렀다.
"네, 청솔 고등학교입니다."
....
신윤아가 오기로 한 토요일 오후,
수 프로덕션 옆 사무실인
선우 삼촌의 매니지먼트사에
욱이와 욱이 막내 매니저 나현, 선우 삼촌,
선우매니지먼트사의 맏이 매니저격 송부장님 등이
모였다.
그동안 오직 선우 삼촌만으로 운영되어 온
선우 매니지먼트사의 변화가 있는 날이었다.
삼촌은 삼촌 이름으로 되어 있던 매니지먼트사 대표 자리를
송부장에게 넘기고, 투자한 비율의 지분을 받고 물러났다.
그리고 선우매니지먼트사는
선우 삼촌뿐만 아니라 다른 전문계열의 연기자도
(액션 배우, 외국인 배우, 등...)
관리하는 시스템으로 재정립됐다.
오늘 욱이가 선우매니지먼트사와
정식으로 계약하러 들어온다.
나현이도 욱이 매니저로 같이 들어온다...
초초하게 윤아를 기다리고 있는데,
사무실끼리 통하는 작은 문으로
나현이가 불쑥 들어왔다.
[나현 : 선배, 방금 우리 쪽에 강현민 선생님두 오셨는데,
잠깐 얼굴 비쳐요.]
[민수 : 어, 그래? 근데 나 곧 약속이 있어.]
[나현 : ...그래요?(다시 돌아가려는데)]
[민수 : 참, 선우 삼촌한테 이쪽으로 오시라고 전해줄래?
미팅 약속돼있던 작가가 곧 도착할거야.]
[나현 : 알았어요. ^^]
자꾸 초초해져서인지
이것저것 불필요한 말들을 하게된다.
이러면 안되는데...
[민수 : 참, 나현아?]
[나현 : 네?]
[민수 : 계약 끝나고 시간되면,
이쪽으로 건너올래?
욱인 오늘 스케쥴이 어떻게 돼?]
[나현 : 이제부턴 여기하고 같이 짜야죠.]
[민수 : 아, 그렇지.]
[나현 : (민수가 이상한) 선배 무슨 일 있어요?]
[민수 : 나? 아, 아니..]
송부장님이 작은 문으로
고개를 들이밀더니, 내게 손짓했다.
[송부장 : 야, 우리 컴퓨터가 좀 이상하다?
잠깐 와서 봐줄래?
지금 계약서 뽑으려니까, 막 난린데?]
[민수 : 아, 예-]
왜 오늘따라 이런 시간에 고장이 난담.
사무실 여직원에게 윤아 이름을 알려주고,
도착하거든 회의실로 안내해달라고 부탁하고
매니지먼트사로 건너갔다.
이것저것 만져보니,
한글 프로그램이 깨진 모양이다.
정식씨디를 넣고 다시 까는 방법을
대강 설명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데,
박감독님한테 전화가 왔다.
여직원이 작게 '작가님 오셨어요'한다.
[박감독F : 사거리 지났으니까, 금방 도착할거야.
근데 작가는 왔어?]
[민수 : 예, 왔답니다.
저 먼저 만나고 있겠습니다.]
회의실로 녹차를 들여갔다가 나오는 여직원을 지나쳐
일부러 태연을 가장해 회의실로 들어갔다.
호기있게 회의실을 들어가자마자,
놀라서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어리버리해진 사람과 마주쳤다.
[민수 : 역시 너구나!]
[윤아 : ...서, 선배! 0_0]
신윤아... 정말 너구나...
널 다시 보긴 보는구나...
정말 내 앞에 있는 거, 신윤아구나...
...살아있었구나... 고맙다...
나... 이제야
삼촌한테, 너한테
늘 죄지은 마음이었던 거,
끝내도 되지...? ^^
난, 의자에 앉으며 애써 태연히
들고 있던 (기획안을 돌돌 말은) 종이로
윤아의 팔을 툭 치며
몇 일동안 마음으로 준비해 둔, 다음 대사를 날렸다.
[민수 : 이름만 보곤 긴가민가 했지. ^^]
#
아빠는 신윤아를 캔슬하지 못한 것에 대해
나에게 어떤 책임추궁을 하지 않았다.
이른 아침, 회의실 안은 고요했다.
윤아를 만나고, '비상'으로 마음을 굳힌 박감독님과
윤아가 드라마를 쓴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던 선우 삼촌과
헐리우드에서 들어오자마자 신윤아를 다시 만나고
평소와 달리 무척 심각해진 현민 삼촌,
그리고... 아빠와 나.
[박감독 : (여러 대본들이 쌓인 회의 테이블 앞에 앉은, 단호히)
전 '비상'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거 신작가하고 해야겠어요.]
보름 전, 내게 윤아의 이메일이 날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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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프로덕션 대표님께
수 프로덕션에서 '비상' 기획안이 필요하시면,
기획안을 팔겠습니다.
지금까지 써 온 대본 초고도 함께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정식 작가로 들어가기엔 아직 제 역량이 부족합니다.
다른 작가님을 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윤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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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 삼촌만큼이나 윤아도
이 상황이 급작스럽고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면 거부라니.
욱이 말이 맞는 건지도 모른다.
윤아는 다시 나타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박감독은 이런 일에 익숙한 듯
곧 다른 신인.기성작가들을 몇몇을 찾아
'비상' 기획안을 보여주고, 1회 대본을 부탁했다.
가장 잘 된 대본으로 작가를 투입시킬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윤아의 기획안과 초고 대본을 읽은
박감독의 맘에 쉽게 드는 다른 대본은 없었다.
평소 순하고 만사태평인 것 같은 박감독이
자기 작품에 대한 것만큼은
이렇게 불도저 스타일일 줄은 몰랐다.
[태석 : 작가 본인이 거절했잖아요.]
[선우 : ...]
[현민 : ...]
[박감독 : 제가 찾아가서 설득하죠.
사정있으면 들어주고,
문제가 있으면 방법을 찾고... 그럼 됩니다.
자, 그럼 이걸 가는겁니다...?]
[현민 : 나도 이 드라마 들어가고 싶어.]
[모두 : ? (보는)]
[현민 : 옛날 생각난다, 이 대본보니까.
재미있을 것 같어. ^^]
[태석 : (당황) 현민아!!]
[선우 : 이건 시츄에이션이야.
한 번 들어가면, 다른 것 할 짬 못내.
적어도 1년 이상 갈 내용이고.]
방송국 데스크와는 구두로 계약이
다 된 거나 다름 없는 상황이었다.
[태석 : 역량이 확인도 안 된 신인 작가를
뭘 믿고 갈 수 있습니까.
스스로도 안된다고 하잖아요.
시츄에이션으로 가는 건 저도 반대하지 않지만,
작가는 다른 사람으로 구하시죠.
데스크에서 이런 어리고 무명인 작가, 안받아줍니다.
딴 걸론 통과되도, 감독 다음으로 제일 중요한 작가 이름,
분명 걸고 넘어질겁니다.]
[박감독 : (진지한) 이대표님.
이 드라마가 수 프로덕션 이름으로 납품되고,
프로덕션 이름으로 나가는 거지만요.
드라마를 만드는 건 접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방송나가는 50분을
제 이름을 걸고 책임지고 만들어
방송국 송출 기기에 테잎 거는 건 저라구요.
연출 박필덕, 제 이름이 나가는 드라마, 항상 잘 만들고 싶어요.
드라마 잘 만들려면, 작가가 제대로 대본을 써줘야 합니다.
나보고 영상 잘 만드는 감독이요?
스토리 구성 허술하면 그거 말짱 꽝이예요.
80년대 뮤직비디오보다 더 못하단 말입니다.
신작가 대본, 볼수록 절 미치게 해요.
빨리, 여긴 이렇게 하고, 저긴 어디서 어떻게 하고, ...
당장 촬영 현장으로 달려나가고 싶어 팔짝팔짝 뛰게 만든단 말입니다.
다른 작가 대본은 필요없어요.
신작가의 광끼에 나도 같이 미쳐서 한바탕 놀랍니다.]
박감독은 벌떡 일어나며
회의탁자에 놓인 다른 작가들의 대본을
낡은 자기 가방에 구겨 넣더니
회의실 문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박감독 : (민수에게) 민수야, 가자. 지도 챙겼지?]
[민수 : (얼결에 따라 일어섰지만) 저, 저...]
[태석 : (벌떡 일어나며) 한낱 무명 작가 하나 때문에
이 계약, 무산될 수도 있어요!
이 드라마는 우리 프로덕션 시작이자 미래입니다!!
설사 계약하고 진행된다 해도,
시청률을 어디까지 장담해줄 수 있습니까?
박감독님은 이 드라마가 실패해도
원 소속인 방송국으로 돌아가시는 걸로 끝나지만,
여긴 사활이 걸렸어요.]
[박감독 : ...(뚱하니- 태석 보는)]
[선우 : 형!]
[현민 : (중얼) ...에고, 쌀벌하구만.]
[박감독 : 이대표님, 제가 쓴 소리 하나 해드리죠.
태석 영화사든, 수 프로덕션이든,
앞으로도 아침에 문 열고 싶으면, 새 피를 수혈하세요.
이대표님, 감 진짜 많이 떨어졌습니다.
이대표님이 정 싫으시면, 저 이거 들고
그냥 우리 방송국으로 들어갈겁니다.
우리 방송국 산하 프로덕션에서 만들거예요.]
[태석 : ! ]
[선우 : (!, 일어서며) 그건 안됩니다, 감독님.]
[박감독 : (순해져서, 선우에게) 제 말이 그 말이죠.
다 같이 잘 만들어서, 잘해보자는 거잖아요.
나 원 참, 이대표님은 신작가 만나보지도 않고,
왜 그렇게 싫어한대? 난 이쁘기만 하드만.^^
피부도 뽀송뽀송한게-]
[민수 : -_-;;;]
[박감독 : (나서며 태석에게) 그리고 요즘 단막극 데뷔도 없이
미니시리즈로 직행하는 신인 작가가 한둘입니까.
물론 하나로 운좋게 대박치고,
뒷감당 못하는 작가들이 많아서 탈이지만.
정 불안하면, 다른 작가 하나 더 붙여서
공동으로 가면 될 거 아닙니까.
(민수에게) 민수야, 가자! 니가 먼저 운전해라.]
[민수 : (따라나서며, 선우를 돌아본다) 네, 네.]
[선우 : (박감독에게) 다녀오십시오.
좋은 결과 기다리겠습니다. ^^]
[태석 : 선우야!]
[선우 : 형이 한 수 진거야.^^
억울하면 박감독보다 더 나은 감독 데려오든가.]
[태석 : -_-;;;]
[선우 : 재밌을 것 같아, 이 드라마. ^^
현민이 말따나 정말 옛날 생각난다.]
[태석 : ...]
[현민 : (태석에게) 다들 좋다는데, 형만 이상하게 됐네. ㅎㅎ]
윤아의 재등장으로
또 다시 어른들 사이에서
내부 분열이 생겼다.
평소 순한 박감독님까지 가세해서
자기 연출 소신에 대해서만큼은
절대 양보가 없다.
조감독 군번도 못되는 나로선
찍소리도 못하고 -_-;;;
박감독님을 따라 나서는 수 밖에.
내가, 윤아를 찾아낸 것... 과연 잘한 것일까.
<흡혈귀 마녀와 동침을II-05 외전(민수편) 끝.>
뱀발 : 요즘 듣고 있는 노래랍니다.
듣다가 가사 중에 '내게 남겨진 생의 반을 그에게 줄 순 없나요...' 이 부분이 나오면 가슴이 아려요, 선우가 생각나서요.
'그는 떠나고 나는 남았다'...('고독'이란 드라마의 OST로 알고 있습니다)
문득 찻잔을 두 잔 꺼내었죠 이젠 하나면 충분한 일인데 나는 그대를 위해 우리를 위해 아침을 준비했죠 모두 잊어도 좋을 것 같은데 너무 익숙해져 버린 나는 또 잔인하게도 손이 먼저 가요 함께한 오래된 습관이 서로를 닮아가게 했지만 그대를 보낸 나를 서성이게 해 아직도 그대 빈 자리에 그대를 채워두고 사는 바보는 두렵겠죠 남은 날들이- 세상에 태어나 나 단 한 사람 오직 그를 욕심낸 것 뿐인데 그것조차 허락할 수 없나요 도대체 왜 인가요 한번만 한번만 부탁할게요 그를 내게 다시 데려다줘요 다른 아무것도 원치 않을게요 제발 내곁에 돌려줘요 햇살이 가득한 날이면 그대가 불러주던 노래를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죠 한가한 휴일이라도 되면 귀찮게 나를 베고 눕던 그대를 다시한번 안고 싶은데 세상에 태어나 나 단 한 사람 오직 그를 욕심낸 것 뿐인데 그것조차 허락할 수 없나요 도대체 왜 인가요 한번만 한번만 부탁할게요 그를 내게 다시 데려다줘요 다른 아무것도 원치 않을게요 제발 내곁에 돌려줘요 내게 남겨진 생의 반을 그에게 줄 순 없나요 이건 아녜요 더는 못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