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율(礎律) 제 28화

피바다2004.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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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제와 설무랑 사이에 지루한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의 가운데 설무랑은 조심스레 천제의 얼굴을 살폈는데 그는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으로 먼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수에 찬 표정은 그가 기억 저 먼 곳의 어느 시점을 회상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천제는 그렇게 다른 생각에 빠져있으면서도 설무랑의 시선까지 잡아낼 정도로 빈틈이 없었다. 그는 설무랑의 눈길이 간지럽다는 듯 피식 웃었다.

  " 애주가들은 긴 밤을 달랠 근사한 이야기거리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지."

 천제가 운을 띄웠다.

 " 내 먼저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 보겠네. 뒤이어 자네도 내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걸세. 만약 자네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보다 재미있다면 내가 상을 내리도록 하지. 어떠한가? 이야기 내기일세."

 천제는 문득 심심해졌는지 설무랑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 전하의 이야기가 보다 재미나면 저는 무엇을 드리면 되옵니까?"

 " 음..무엇을 받을까..?" 

 천제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 보아하니 타계 종족의 머리를 제법 그럴싸하게 자르는 것 같더군. 마족이나 수라족 생물의 머리는 어떨까? "

 그는 성인식을 떠나던 날 설무랑이 쏟아낸 마족의 머리를 회상하며 즐거운 듯 내기의 대상을 언급했다.  " 받들겠습니다."

 천제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 음...이건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일세. 아! 누군지는 묻지 말게. 그를 뭐라고 일컫는다?

   옳지, 어느 왕이라고 해 두지."

 천제는 술 때문인지 아니면 이야기의 전개에 스스로 취했는지 약간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 한 때 위협적으로 강해진 천민 반란세력이 있었지. 그 새력이 눈에 띄게 강해지고 있어 보다못한 왕은 손수 군대를 이끌고 반란군을 치러 갔다네. 오합지졸 천민 조무래기들이 제법 무기를 다룰 정도로 보통의 반란군과는 격이 달랐지. 하지만 그래봤자 천민들이 아닌가? 왕의 군대를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인가? 그건 처음부터 정해진 결말이었어!"

 비류천은 오만하게 웃었다. 그 순간만큼은 천민을 벌레만치 혐오하는 제황성의 지존다운 얼굴이었다.

 " 마침내 반란군의 수장을 잡아냈다네. 사실 왕이 스스로 출병한 것은 그 수장때문이었어. 그는 자기 눈으로 그를 보고 싶었거든. 천민들 사이에서 마치 구세주라도 나타난 듯 그 이름만으로도 천민들이 눈덩이처럼 결속해갈 정도였으니...보통 인물이 아니었던 거지.

  마침내 수장은 끌려와 왕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지. 왕은 그 우두머리를 본 순간 놀라울 따름이었어. 그는....이계의 존재였단 말일세."

 설무랑은 천제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뭔가 매력적인 전개가 펼쳐질 분위기였다.

 

 왕은 말 위에 앉아 반란군의 우두머리를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민들 사이에서 희망의 불꽃으로 전해지던 그는 잘려나간 두 개의 뿔 자국을 가진 사내였던 것이다.

 " 하하..하하하..으하하하하."

 왕은 참지 못하고 기어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겨우 웃음을 멈춘 왕은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경멸의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 천민들의 상상력은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하지. 이번에도 어김이 없군. 하하하

  쓰레기같은 것들의 머리 속에 허황된 꿈을 집어넣어 내게 더러운 반란의 칼을 들이대게 한 자가 누군지 궁금했었다. 그런데...맙소사! 그들의 영웅이 결국 이계의 반역자라니!"

 반란군의 수장은 타는 눈빛으로 왕을 노려보고 있었고 왕은 분노한 목소리를 높였다.

 " 자기 세계에서도 추방 당한 짐승이 감히 신성한 천계를 더럽히려했느냐! 너의 발악은 여기까지다. 너와 함께 더러운 이 곳을 남김없이 멸하리라!"

 그러자, 우두머리는 냉소했다.

 " 천계는..썩을대로 썩었다. 천계를 구하려면 너부터 없어져야 할 것이다."

 왕은 이런 상황에서도 태연할 수 있는 수장의 대범함에 실소를 흘렸다.

 " 죽을 마당이니 기꺼이 들어주겠다. 더 할 말이 남았다면 하라. 아니면..신선한 피를 마시게 해 줄까? 죽을 자를 위해 내 선처하도록 하마."

 " 나는 수라계에서 왔다. 너희 천계인들은 수라계의 생명들을 벌레만도 못한 하등의 존재로 생각하며 멸시하고 있지."

 그는 담담하게 자신의 출생을 밝혔다.

 수라계는 독특한 계층구조와 생존 규율을 가진 세계였다. 비교적 체계적인 계급 구조와 관습을 가진 천계와 마계와는 확연히 다른 세계였다. 수라계는 유일왕인 수라왕 이하로 서열도, 계급도 없었고, 법도도 규율도 없었다. 그들의 세계에서 모든 행위의 기준은 "힘"이었다. 힘으로 지배하고 지배당했고,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먹으며 생명을 유지했으며 선악의 판단 기준도 누가 강하냐에 따른 것이었다. 그래서 천계는 서로 먹고 먹히는 수라계를 저주 받은 세계로 여겨 지극히 혐오하고 있었다.

 " 너희들이 아는 것처럼 수라계에서는 힘이 정의이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는다. 하지만 그건 살기 위해서다. 오직 살아가기 위해서! 너희처럼 즐기기 위해 피를 흘리는 것은 아니다!"

 "뭐...라고?"

 왕은 그 순간에 인상을 찌푸렸다.

 " 수라계에서 피와 살육은 곧 생존이다. 하지만, 너희는 어떠냐? 너희의 살육은 광란일 뿐이다.

 스스로 높고 낮음의 기준을 세워놓고 자기 이외는 모두 근본적으로 천하며 무지하다고 생각하지. 자신들만이 가장 가치로운 존재라고 여기는 것이 너희 천계의 지배층이 아니더냐?"

 반란군의 수장은 악을 쓰며 천계를 욕했다.

 " 약한 자를 짓밟고, 재미를 위해 그들의 삶을 망가뜨리며, 거짓 권위를 높이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고 있지 않느냐? 그러면서 그들의 처절한 비명 소리에 즐거워 웃음을 터뜨리지. 벌레만도 못한 것은 바로 너희 천계의 지배층이다! 도대체 너희의 권위따위는 누가 주었으며 어디에서 난 것이냐?"

 우두머리는 저주를 퍼붓듯 고함을 쳐댔다.

 " 썩어빠진 천계는 반드시 뒤집혀야한다. 너희........."

 " 슈욱!"

 왕의 칼날이 번뜩이자, 반란군 수장의 머리는 미처 말을 끝맺지 못한 채, 바닥에서 뒹굴었다.

 왕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바닥에서 구르는 머리를 향해 소리쳤다.

 " 이것이 나의 권위이다! 내 권위는 얻은 게 아니라, 내가 부여한 것이다. 내가 바로 천계이다!"

 왕은 칼에 묻은 피를 태연히 닦아내고 칼집에 도로 집어 넣으며 휘하 장수에게 명했다.

 " ........태워버려라."

 왕이 말 머리를 돌리는 순간,

 " .........자만에 빠진 이여......"

 쉰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 헉!"

 " 저...전하!!!"

 겁에 질린 장군과 병사들의 목소리가 뒤이어 터져나왔고, 왕이 다시 말 머리를 돌렸을 때 그 역시 경악스러운 표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잘려나갔던 수라계 장수의 머리가 공중으로 떠 오르며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굳지 않은 피를 바닥에 쏟아내며 눈동자가 허옇게 까뒤집힌 머리는 왕을 똑바로 향한 채 저주를 부어댔다.

 

 

===주말 잘 보내셨어요? 지난 몇 주동안 계속 여행이다, 모임이다해서 쉬질 못했었어요. 이번 토요일도 동호회 모임이 있어 새벽까지 밖에 있었고, 오늘 간만에 집에서 쉬었답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몸살기운이 느껴지네요. 이럴 때일 수록 더욱 조심해야겠죠? 아프지들 마세요. 특히 타지에 계신 분들, 아프면 서럽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