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사.진. 1장 [1]

해오름2004.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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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AL 707기, 파리행 비행기는 이미 떠나버렸다.

한때는 내가 그 비행기안에서 들뜬 모습으로

점점이 박히는 공항 주변의 모습들을 어린아이의 눈으로

새기며 희망이라는 녀석을 꼬옥 부둥켜 안을거라 생각했지만.

나는 지금 멀어져 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하릴없이 서 있고

희망은 이로써 영영 내게 돌아오지 않을만큼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하늘은, 끝내 내게 좌절만을 안겨주었다.

 

 

 

 

 

 

 

@@@

 

 

 

 

'... 지금, 창 밖으로 눈이 내리는 모습이 보이네요.

오랜만에 보는 눈이라서 반갑기도 하지만, 올해는 낭만적인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것 같아서 그 마음이 더 큰 것 같습니다.

그동안 눈이 오지 않았던 이유가 아마도 크리스마스를 더욱 빛내기

위함이었던 것 같은......'

 

'크리스마스?? 흐음...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제길! 몇 시지?'

 

 

온 몸에 둘둘 말려져 있는 이불을 걷어내며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놓여진 알람 시계를 바라보자 초침은 어느덧 8시를 지나고 있었다.

 

 

'큰일났다! 8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아영은 밤샘 작업으로 인해 잠의 유혹을 떨쳐 버리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하지만, 추위와 인파속에 홀로 외로이 쓸쓸히 떨고 있을 현수를 생각하면

마냥 늦장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부랴부랴 화장을 마치고 옷을 주워 입는데 마음이 급해선지

단추를 잠그는 것도, 스타킹을 신는 것도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느린 것 같아 초조해졌다.

 

 

'우선 전화를...'

 

 

급한 마음에 단축 번호를 누르곤 벌써 집 밖으로 뛰쳐 나간 아영은

핸드백 속의 차 키를 찾으면서도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 배겼는지 차 키를 쉬이 찾을 수가 없었다.

 발은 달리고, 눈은 핸드백 속에 고정, 손은 핸드폰에 잡힌 체 자동차들에 눌려

한껏 미끄러워진 눈길을 헤치는 아영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콰당!'

 

 

아니나 다를까? 거대한 -아영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인영과의 충돌로 인해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나동그라진 아영은 아픔으로 인해 찔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상대방도 충격이 컸는지 앓는 소리를 내며

겨우 일어서고 있었다.

 

 

"야! 제대로 보고 못 다녀? 아씨. 재수가 없을라니까!

한가지나 제대로 하란 말야!"

 

 

상대방은 아영을 향해 다짜고짜 강짜를 부리며 막말을 퍼부어댔다.

안 그래도 약속시간에 늦어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데 상대방의 안하무인인

태도가 아영의 심기에 휘발유를 들이 붓고 대형 선풍기를 작동시키는

꼴이 되고 말았다.

 

 

"씨발. 너, 나 언제 봤다고 반말이냐? 너는 봉사냐? 한.가.지.만 잘하는 니가

피해서 갔으면 됐겠네! 니가 나.만.큼 재수없어?

내가 오늘은 바빠서 이만 간다! 운 좋은 줄 알아, 새꺄~!"

 

 

아영의 날카로운 기세에 눌린건지,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힌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방은 그저 아영이 하는 양을 지켜 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아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닥에 떨어진 소지품들을

핸드백 안에 주워넣으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짜증나! 별 거지 같은 인간 다 보겠어, 정말. 오늘 완전 재수 털리는 거 아니야?'

 

 

사건의 발단이 된 차 키를 찾은 것 까진 좋았는데,

이미 아영의 기분은 몹시 상해 있었다.

 

 

 

 

 

@@@

 

 

 

 

거리는 크리스마스 캐롤에 맞춰 춤이라도 추는 양 휘청, 휘청거렸다.

어디서 그렇게 쏟아져 나온 건지, 평소의 두배가 넘는 듯한 인파가

그 현란한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벌써 한시간이 넘게 그 자리에 붙박혀 아영을 기다리는 현수의 얼굴이

밀납 인형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망할 것! 몹쓸 것! 오늘 같은 날까지 기다리게 만들다니. 흐윽~ 매정한 것!

오기만 해봐! 오기만 해봐! 그냥 안 둬, 썩을 것!'

 

 

현수는 얼어 붙은 입술을 마른 침으로 어렵사리 녹이며 아영에 대한 원망을

곱씹고 있었다. 막상 만나면 아무런 말도 못 할 거면서.

 조언에 의하면 아영의 사랑에 비해 현수의 사랑이 더 크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현수는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고 늘 생각해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를 가진 아영의 눈을 바라보면 어느새 그 속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 눈동자가,

그 눈동자를 가진 아영이, 그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 또한 그 인것 같아

화를 낼 수도, 분노를 터뜨릴 수도 없었다. 뭐, 물론 자기 합리화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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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루퉁하게 부은 얼굴로 들어서는 민재를 희연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맞았다.

 

 

"왜그래? 무슨 일 있었어? 표정이 몹시 안 좋아 보이는데? 이렇게 좋은 날."

 

"몰라."

 

 

민재는 싫은 내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런 일이 비일비재 했는지 희연은 짐짓 태연한 척 주방으로 가 준비해 두었던

음료를 가져와 민재에게 건내주었다. 그 손짓과 표정엔 궁금함이 가득했지만

묻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음료를 마신 후 민재가 토로할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연인 사이라면 그정도 눈치쯤은 당연한 걸 테지만.

 벌컥 벌컥 숨도 안쉬고 음료를 들이킨 민재는 한숨을 내쉬며 희연을 바라보았다.

 

 

"나가자. 군에 있을때 후임이었던 놈이 오늘 지 애인이랑 같이 놀자고 하든데."

 

"후임?"

 

"쫄따구. 나보다 두달 늦게 들어온 놈. 꽤 친했는데 전역하고는 처음이네. 어때?"

 

 

희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직도 민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일련의 사건에 대해 듣기를 원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에 민재의 한숨이 더해졌지만.

 

 

"오다가 좀 재수없는 일이 있었어.

별 거 아니니까 그렇게 보지마. 나가자."

 

 

썩 만족스러운 답은 아니었지만, 희연은 그정도에서 만족해야 했다.

오늘 같은 날, 괜히 민재의 심기를 건드려 좋을 건 없으니까.

성큼 성큼 앞서 가는 민재를 아쉬운 눈길로 바라보는 희연.

다정한 에스코트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보폭이라도 맞춰주면 어디가 덧나는지.

하지만, 민재의 그런 무신경함 까지도 희연은 좋았다.

역시, 제 눈에 안경이요, 제 발에 짚신이었다.

 

 

 

 

@@@

 

 

 

 

뭐가 그리도 못 마땅한건지, 기다린 건 정작 현수 본인인데

아까부터 불어터진 만두같은 얼굴을 한 희연의 눈치를 보며

그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아영 또한, 추위에 꽁꽁 얼어버린 현수에겐 무척 미안했지만, 좀

전의 사건으로 인해 잔뜩 굳어버린 안면근육이 쉬 풀어지질 않아

곤욕스러웠다.

 

'불쌍한 것... 눈치 보느라 정신이 없네. 젠장! 그 xxx만 아니었어도

미안하다는 말은 진작에 했을텐데! 재수 옴이야, 증말!'

 

그 생각을 하자 또다시 속에서 불꽃이 올라 테이블에 놓인 물을

숨도 안 쉬고 들이키는 아영. 현수는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괜히 심기를 건드리느니 얘기할 마음이 생길때까지 기다리는게

현명한 처사임을 익히 알고 있기에 아영의 마음이 얼른

진정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할 말도 있는데. 이것 참... 저거 괜히 선수치는 거 아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현수는 심술 한줄기가 뽀록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방금전의 그 난감함은 사라지고 용기?가 샘솟았다.

 

"현아영! 너! 니가 늦어놓고 왜 심술이야?

너 지금 내가 화낼까봐 선수치냐?"

 

여느때 같으면 벌써 땡삐가 열댓마리 달라붙고도 남았을텐데

아영은 아무말 없이 현수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그 눈빛에 현수의 등으로 한줄기 땀방울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아... 아니, 난 그저... 걱정이 돼서... 하하하..."

 

아영의 앞에선 한없이 작아짐을 느꼈지만

자존심이 상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미안해."

 

"어? 아, 아냐~ 기분 나쁘면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괜찮아! 좀 진정돼?"

 

"아.니! 아.직.도 기분 나빠!"

 

"어? 어... 그, 그래. 선수쳤단 말 취소. 기분 풀어~ 응?

미안. 내가 미안해."

 

 

아영은 자기를 위해 저렇게까지 마음 써주는 현수에게

괜한 심술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그의 마음씀에 한없이 속좁게 군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냐. 너 때문에 기분 나쁜거.

늦은것도, 괜히 심술부린것도 내가 다 미안해."

 

"괜찮아, 괜찮아. 너만 괜찮으면 난 아무래도 좋아."

 

"현수야."

 

"응?"

 

 

아영은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는 현수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 눈길을 대할때면 현수는 오장육부가 녹아내리는 황홀경을 맛보는 느낌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현수를 바라보던 아영이 슬그머니 현수 곁으로 와 앉았다.

 

 

"현수야."

 

"그래."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아영은 현수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귓볼에 살짝 입맞춤했다.

그것은, 키스보다 아름다운 입맞춤이었다.

 반쯤 넋이 나간 현수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던 아영은

현수 곁에 다가 선 남자를 보곤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에 놀란 현수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덩달아 남자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왔어요? 근데... 아영아?"

 

 

아영은 양 옆구리에 손을 떡 올리곤 그 남자를 죽일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현수 니 애인이 이 재.수. 옴.이냐?"

 

"네? 강병장님! 말씀이 심합니다! 재..."

 

 

하지만, 현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영의 독설이 그를 향해 날아 들었다.

 

 

"뭐? 강병장님? 이 암.덩.어.리.독.버.섯 같은 존재를 알아?

너같은 순수함의 결정체가? 말.도 안.돼! 물들까 겁난다!"

 

 

아영과 민재의 팽팽한 신경전에 희연과 현수는 영문도 모른체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둘은 앉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일대를 모두 태워버릴 듯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서로를 죽일듯이 노려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