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하늘은 무척이나 맑고 평온 했다. 강남 H아파트 23층에 사는 김미연은 베란다에 나와서 푸른 하늘을 보며 밝게 웃었다. 그리고 크게 숨을 쉬었다. 행복했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저렇게 아름다운 하늘을 볼 수 있고 내 귀여운 아이를 가슴에 안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이제 세살이 되어가는 딸아이는 곧잘 말도 잘하며 재롱을 피웠다. 김미연은 해맑게 웃으며 팔을 벌리고 달려드는 딸을 힘껏 안았다.
“까르르르”
딸아이는 엄마 품에 안기자 무엇이 좋은지 마냥 웃어댔다. 그 투명한 웃음에 엄마도 전염된 듯 같이 밝게 웃으며 맑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투명하고 맑은 파란하늘이었다.
박민수는 주방에 있는 칼을 집어 들었다. 베란다에서 밝게 웃고 있는 아내와 딸을 보며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들었다. 세상의 모든 행복을 주고 싶었던 사랑하는 아내와 딸. 그러나 지금 그의 가슴에 남아있는 것은 절망과 어둠뿐이었다. 아내와 딸을 그 절망 속에 남겨두고 혼자 갈 수는 없었다. 순간 머리가 어찔하며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몇 일전 아내와 싸웠던 일이 떠올랐다.
“당신이 무능력하니까 그런 거야!”
싸울 때 외치던 아내의 목소리가 귓속을 계속 울리고 있는 것 같다. 그때 그녀의 싸늘한 눈빛과 비웃음 그리고 딸아이의 짜증스런 울음까지....
“아아아아....그만!!”
박민수가 귀를 막으며 소리치자 놀란 김미연이 소리치며 달려왔다.
“여보! 왜 그래요?”
김미연의 물음에 박민수가 고개를 들고 쳐다봤다. 순간, 김미연은 박민수의 눈에 푸른빛이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서 그녀는 소리쳤다.
“여....여보!”
박민수는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년 이였어. 네 년이 날 죽인 거야!!”
“무...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박민수는 갑자기 소리치며 칼로 김미연을 찔렀다.
“네가 날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거야....너만 아니었어도 내 운명이 이렇게 처참하지는 않았단 말야.“
날카로운 칼이 김미연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아악!!”
그녀의 하얀 옷이 붉게 번져갔다.
“엄마! 아아앙앙!!”
김미연은 광기에 찬 남편을 보고 바닥에 앉아서 울어대는 딸아이를 보며 무엇인가 말하려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커....어....어...”
그런 그녀를 보던 박민수가 다시 칼로 그녀를 찔러댔다.
푹! 푹! 푹!
사방에 붉은 핏물이 튀었다.
바닥에 앉아서 울고 있은 아이에게도 핏물이 튀어서 하얀 피부가 붉게 변했다.
“아아앙!! 엄마!! 아앙!”
김미연을 칼로 계속 찌르던 박민수가 갑자기 딸아이를 돌아보며 무섭게 소리쳤다.
“그만 울어! 네 년은 날 말려 죽이려고 태어난 거 다 알아. 다 봤어! 네 년들이 전생에 품은 한으로 날 죽이려 한 거 다 알아!“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박민수는 천천히 울고 있는 딸에게 다가갔다. 그의 눈은 푸른빛이 번쩍거렸고 온통 피를 뒤집어 씌고 있었서 마치 악마와 같았다. 아이는 무서움에 떨며 뒷걸음질 쳤지만 너무 무서워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허우적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크크크...내가 다 알아버려서 놀랬어? 왜? 무서워?”
아이는 아버지의 푸른 눈빛을 보며 무서워 떨었다.
“엄마! 무서워!!”
압구정동에서 3년째 옷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신하영은 짜증이 났다. 모름지기 가게는 첫 손님이 중요했다. 첫 손님이 개시를 잘 해주어야 그날 장사가 잘되는 것이다. 그러데 아침에 문을 열자마자 20대 청년 한 명이 들어와 30분 동안 가게를 휘저으며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물건을 고르는 것도 아니다. 찾는 옷이 있느냐? 물어도 대답 없이 그저 가게 안을 어슬렁거리니 들어오려던 손님들도 이상한 분위기에 모두 가버리는 것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던 신하영은 청년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옷 살거 아니면 나가줘요!”
그러나 청년은 아무 대답 없이 등을 보이고 서있다.
“이봐요! 계속 이렇게 남의 장사 방해 하면 경찰 부를 꺼예요.”
청년은 계속 못들은 척 등을 보이고 있다.
“아니? 이 사람이 정말?”
화가 난 신하영이 청년에게 다가가 툭! 치며 말했다.
“내 말 안들려요?”
그녀가 자신을 건들며 말하자 청년이 천천히 뒤돌아서 신하영을 쳐다봤다. 신하영는 청년의 눈을 본 후 깨달았다.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났다는 것을... 그리고 보지 말아야 할 악마의 푸른 눈을 보았다는 것을... 그러나 이미 그녀의 깨달음은 늦고 말았다.
어느 순간 청년이 기다란 칼로 그녀의 아랫배를 푹! 찔렀기 때문이다. 그녀는 의문 가득 찬 얼굴로 청년을 바라보며 고통을 참았지만 그 청년의 얼굴은 비릿한 웃음만이 가득 했다.
‘왜? 왜? 나야?’
그러나 그녀의 의문은 계속 이어질 수 없었다. 청년은 그녀를 한번의 고통으로는 죽일 수 없다는 듯이 칼로 마구 찔렀기 때문이었다.
푹! 푹! 푹!
가게를 들어오려던 손님이 그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해서 소리쳤다.
“아아악!! 사....사...”
손님을 본 청년은 갑자기 사나운 짐승처럼 손님을 향해 달려들었다. 놀란 손님이 피하려 했지만 이미 청년의 날카로운 칼이 그녀의 등을 찔러버렸다. 청년은 미친 듯이 손님을 난자 하고는 가게를 빠져나갔다.
8월17일 화요일 오전 11시30분
고려일보 사회부 사건기자 정웅기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이상하다 말이야! 정말 이상해!”
그의 모습을 보고 있던 박찬기 기자가 물었다.
“정기자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정웅기가 사건 기록철을 들이밀며 말했다.
“이 사건들 말이야. 여기 강남H 아파트 사건과 신촌의 옷가게 살인 사건 말이야 이유를 모르겠다단 말이야 도대체 왜 자신의 아내와 딸을 죽이고 자신은 자살 한거지? 그리고 옷가게에서 살인을 저지른 놈은 정말 아무 이유가 없었단 말이야.“
박찬기 기자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참! 사람! 이런 사건이 어디 이번뿐인가? 그리고 H아파트는 남자가 사업에 압박을 받고 딸과 아내를 죽인거 아닌가? 그리고 옷가게에서 살인을 저지른 놈은 정신이상이라고 하던데...경찰이 붙잡았을 때 완전히 맛이 갔었다더군.“
박찬기의 말을 듣고도 정웅기는 고개를 계속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니야! 아파트 사건은 남자가 비록 사업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었지만 회사가 망할 정도는 아니었어. 그리고 옷가게 살인 사건을 저지른 녀석도 평소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착한 녀석이었다는 것이 주위 사람들의 말이야. 그런데 이런 사건이 요즘 계속 생기고 있다는 것이 난 이해 할 수 없다는 거야. 벌써 몇 일 사이 이유없는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10여 명이 넘어 봐!“
정웅기는 자신이 스크랩해 놓은 사건 기록을 박찬기에게 보여주며 계속 말했다.
“신림동 살인 사건은 부인이 남편을 죽였어 그런데 그 부인은 자신이 왜 남편을 죽였는지 이유를 대지도 못하고 있어. 여기 역삼동 술집 사건은 더 이상해! 술을 먹던 20대 청년이 가게 안의 손님을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인데...이 친구는 생일을 맞아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어. 친구들 말로는 술을 한 잔도 못 마시는 친구라 음료수만 먹었다는군. 그런데 갑자기 난폭해지며 사람들을 찔러 죽인거야. 뿐만 아니야 여기 봐! 기록을 보면 최근 2일 안에 서울에서 일어난 강력 사건이 두 배 이상 늘었어. 그리고 그 중 절반이상이 모두 아무런 원한이나 이유 없는 살인이야.“
정웅기의 말에 박찬기도 신기한 듯 스크랩북을 쳐다봤다.
“어? 정말 그렇네. 그래도 뭐 우연이겠지.”
그러나 정웅기는 다시 고개를 저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이 사건들의 용의자 절반이 스스로 자살하거나 붙잡혔는데 모두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어. 사람이 갑자기 미칠 수는 없는거야 분명 이유가 있을 꺼야.“
박찬기는 정웅기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자네 또 특종 냄새를 맡았군! 잘 해봐! 내 옆에서 도울 일 있으면 말해.”
정웅기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 고마워!”
박찬기가 갑자기 생각 난 듯 말했다.
“참! 오늘 아파트에서 부인과 딸을 죽인 남자 해부한다고 하는 것 같던데?”
“해부?”
“응. 장기를 기증하고 자신을 해부용 실습으로 써달라고 유서까지 남겼잖아.”
“그래? 어느 대학 병원에서 몇 시에 하는데?”
“왜? 거기까지 가보게? 아마 한림대 오후 3시라고 그런 것 같던데.”
정웅기는 수첩에 메모를 한 후 박찬기에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박기자. 잘 되면 내 한 턱 내지.”
밀폐된 조금만 방안에 한 남자가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각의 벽은 방음 장치가 되어 있고 한 쪽 벽면은 불투명 유리로 장식되어있다. 방 중앙엔 작은 책상이 놓여있고 그 앞에 조그만 의자가 하나 놓여 있는 게 전부였다.
문이 열리며 검은 양복을 입은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방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고개를 숙인 사람 앞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미우라! 더 이상 고집 부리지마라!”
그의 말에 미우라가 초췌한 얼굴을 들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미우라를 보고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목적으로 들어왔나? 당신과 접선했던 모자 쓴 놈은 누구야?”
그러나 그의 말에 미우라는 아무 말 없이 차갑게 미소만 지었다. 남자는 탁자를 쾅! 치며 물었다.
“잘 들어! 넌 어차피 여기서 죽어! 곱게 죽고 싶지 않으면 불어!
너 이 새끼 그 건물에서 도대체 무슨 짓을 했어? 우리요원 7명이 이유 모른체 죽었어. 서로를 잡아먹으면서 죽어갔다구!!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의 말에 미우라가 히죽거리며 조용히 말했다.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본능을 일깨워 주었을 뿐.”
“무슨 헛소리야? 그들에게 무슨 약을 쓴 거야?”
사내는 소리치며 미우라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나 미우라는 히죽 웃으며 사내에게 말했다.
“어차피 모두 죽어! 날 죽인다 해도 소용없어. 이미 악마의 심장은 뛰기 시작했어. 이제 곧 세계는 정화된다.“
미우라의 말에 사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악마의 심장은 뭐야? 세계? 그럼 한국 말고 또 다른 나라에 테러를 감행 할 생각이란 말인가?“
미우라는 차가운 눈빛으로 사내를 보며 말했다.
“우리 ‘빛과 그림자’는 병에 찌든 지구를 구하기 위해 정화사업을 시작했다. 곧 세계 각지에 나가 있는 우리 형제들이 정화사업을 시작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빛의 수호신 슈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너희는 다 죽어갈 것이다.“
“미친놈!!”
“하하하. 미쳤다고? 크하하하 그렇지 미친놈들의 눈에는 우리들이 정상으로 보일 리가 없지. 곧 악마의 심장이 박동을 시작하면 세계 정화사업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하하“
사내가 미우라를 거세게 붙잡으며 물었다.
“악마의 심장이 뭐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테러를 감행 할 예정이지? 목표가 뭐야?“
“하하하. 그건 네 놈들이 알아서 알아내야지 내가 가르쳐 줄 것 같아?”
미우라의 말에 사내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네가 스스로 불게 만들어주지.”
미우라에게 말하고 사내는 문을 열고 나갔다.
옆방에서 미우라와 사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장태훈이 말했다.
“인터폴에 연락해서 미우라와 같은 ‘빛과 그림자’의 신도들이 동시에 다른 나라에도 입국했나 알아봐! 이건 우리나라에 국한된 문제만이 아닌 것 같군. 그리고 저 놈 T1을 주사해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뭐든 알아내!“
그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강민우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과장팀! T1은 잘 못하면 죽거나 정신 이상까지 일으킬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저 놈은 일본 놈이라 일본에서 항의를 해 온다면 문제가 심각하지 않겠습니까?“
장태훈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항의? 웃기지 말라고 그래! 지금은 국가 위기 상태야! 저 미친놈이 어디다 무엇을 터트릴지 어떻게 알겠어? 놈이 입국할 당시 특별한 무기를 소지 하지 않았다는 것은 놈들이 사용할 무기가 화학 무기일 가능성이 많다는 소리야 만약, 서울 한 복판에 화학 무기가 터진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해! 아무소리 말고 저놈을 족쳐!!! 무슨 수를 쓰든 알아내....놈의 말로 들어봐서 세계 곳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테러를 일으킬 생각이 틀림없어! 시간이 촉박하다.“
장태훈의 말에 강민우와 요원들은 대답을 하고 방을 나갔다. 장태훈은 창 넘어 미우라를 바라보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미우라! 넌 내게 잘못 걸렸어! 난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불독이거든!!”
정웅기는 한림대 해부학 실습실 복도에 벌써 한 시간째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차가운 복도에서 있으면서 머리 속으로 의문점을 하나하나 짚어갔다. 그러나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사건이 연결된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저 막연한 느낌에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 될 뿐 뚜렷하게 무엇 때문에 이상스런 살인 사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지 답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왜 사람을 해부하는 곳까지 왔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한 참을 생각하며 피식 웃을 때 복도 끝 쪽에서 걸어오는 여자가 보였다. 하얀색 티셔츠에 청바지 차람이 무척이나 시원스럽게 보였다. 다가온 그녀가 정웅기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물었다.
“여기가 해부학 실습실 맞나요?”
“그런 것 같네요.”
그의 대답에 그녀는 실습실을 잠시 쳐다보더니 다시 물었다.
“오늘 박민수씨를 해부 실습한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그녀의 물음에 정웅기는 눈빛을 반짝이며 쳐다봤다. 그녀는 마치 정웅기가 해부학 교수라도 되는 듯이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웅기의 관심은 그녀가 누구인가? 였다. 그녀가 물은 박민수는 H 아파트 살인 사건 범인이며 지금 해부 실습이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웅기가 그녀를 살짝 보며 물었다.
“기자입니까?”
정웅기의 물음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며 말했다.
“기자처럼 보이나요?”
“기자가 아니고선 이런 해부실습에 관심을 갖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럼, 댁은 기자겠군요?”
“그렇게 보이나요?”
정웅기의 물음에 그녀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풋! 해부학 실습실 앞에 서성이는 것 보면 학생은 아니고 그렇다고 교수도 아닐 테니 당연히 해부에 관심을 갖고 있는 기자가 아니겠어요? 더구나 지금 해부되고 있는 사람은 사랑하는 가족을 죽이고 자살한 살인자니 기사 감으로는 최고 아닌가요?“
정웅기는 그녀의 말에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예리하시네요. 맞습니다. 고려일보 사회부 사건기자 정웅기라고 합니다.”
그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모른 척 딴 소리를 했다.
“그래요? 전 기자하고는 친하지 않아서요.”
그녀가 외면하자 정웅기는 내민 손이 무안해서 머리로 손을 가져가 긁적이며 말했다.
“그럼, 아가씨는...아니 성암이 어떻게 되시죠?”
“글세요.”
정웅기는 그녀의 딱딱함에 입술을 살짝 삐쭉이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 무슨 일 때문에 오셨습니까?”
정웅기의 물음에 그녀는 답을 하지 않고 실습실을 다시 쳐다봤다. 그러나 기자의 근성은 끈질김에 있다. 정웅기가 다시 그녀에게 질문을 퍼부으려 할 때 실습실 문이 열리며 하얀 백발의 사내가 나왔다. 그를 본 정웅기는 그가 바로 뇌 박사로 불리는 백병욱 박사라는 것을 바로 알아보았다. 정웅기가 다가가 박사를 불렀다.
“백병욱 박사님!”
백발의 백병욱 박사가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았다.
“안녕하십니까? 고려일보 사회부 기자 정웅기라고 합니다.”
백병욱 박사가 의문스런 눈으로 정웅기를 쳐다봤다.
“무슨 일 때문에 저를 찾아왔습니까?”
“시간이 괜찮으시면 오늘 해부실습을 한 박민수씨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백병욱 박사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글세요. 전 특별히 기자 분과 할 말이 없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고인이 된 분에 관해 제가 뭐라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구요.“
정웅기는 기자의 습성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인의 명예를 훼손시킬 생각은 없으니까요. 전 단지 박사님께서 해부하신 것에 대한 해부학적 소견을 듣고 싶은 것뿐입니다.“
정웅기의 말에 백병욱 박사는 망설이는 듯 보였다. 정웅기는 이때가 바로 강하게 밀고 나가야 할 때임을 알고 다시 말하려 할 때 뒤 쪽에 있던 여인이 끼어들었다.
“박사님! 저는 오늘 해부한 박민수씨의 처제 되는 강미란이고 합니다.”
그녀의 말에 정웅기와 백병욱 박사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며 그녀를 쳐다봤다.
“바쁘신 것은 알지만 박사님의 해부학 소견을 듣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습니까?“
강미란의 말을 들으며 정웅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이상하네. 박민수의 부인은 김씨인데....강미란이라면 어떻게 처제가 되지?’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기회를 빌어 백병욱 박사를 더욱 몰아 붙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악마의 심장 -3
3. 악마의 심장
2004년 8월 16일 월요일 오전 9시 30분
아침 하늘은 무척이나 맑고 평온 했다.
강남 H아파트 23층에 사는 김미연은 베란다에 나와서 푸른 하늘을 보며
밝게 웃었다. 그리고 크게 숨을 쉬었다.
행복했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저렇게 아름다운 하늘을 볼 수 있고 내 귀여운 아이를 가슴에 안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이제 세살이 되어가는 딸아이는 곧잘 말도 잘하며 재롱을 피웠다.
김미연은 해맑게 웃으며 팔을 벌리고 달려드는 딸을 힘껏 안았다.
“까르르르”
딸아이는 엄마 품에 안기자 무엇이 좋은지 마냥 웃어댔다.
그 투명한 웃음에 엄마도 전염된 듯 같이 밝게 웃으며 맑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투명하고 맑은 파란하늘이었다.
박민수는 주방에 있는 칼을 집어 들었다.
베란다에서 밝게 웃고 있는 아내와 딸을 보며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들었다. 세상의 모든 행복을 주고 싶었던 사랑하는 아내와 딸.
그러나 지금 그의 가슴에 남아있는 것은 절망과 어둠뿐이었다.
아내와 딸을 그 절망 속에 남겨두고 혼자 갈 수는 없었다.
순간 머리가 어찔하며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몇 일전 아내와 싸웠던 일이 떠올랐다.
“당신이 무능력하니까 그런 거야!”
싸울 때 외치던 아내의 목소리가 귓속을 계속 울리고 있는 것 같다.
그때 그녀의 싸늘한 눈빛과 비웃음 그리고 딸아이의 짜증스런 울음까지....
“아아아아....그만!!”
박민수가 귀를 막으며 소리치자 놀란 김미연이 소리치며 달려왔다.
“여보! 왜 그래요?”
김미연의 물음에 박민수가 고개를 들고 쳐다봤다.
순간, 김미연은 박민수의 눈에 푸른빛이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서 그녀는 소리쳤다.
“여....여보!”
박민수는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년 이였어. 네 년이 날 죽인 거야!!”
“무...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박민수는 갑자기 소리치며 칼로 김미연을 찔렀다.
“네가 날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거야....너만 아니었어도 내 운명이
이렇게 처참하지는 않았단 말야.“
날카로운 칼이 김미연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아악!!”
그녀의 하얀 옷이 붉게 번져갔다.
“엄마! 아아앙앙!!”
김미연은 광기에 찬 남편을 보고 바닥에 앉아서 울어대는 딸아이를
보며 무엇인가 말하려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커....어....어...”
그런 그녀를 보던 박민수가 다시 칼로 그녀를 찔러댔다.
푹! 푹! 푹!
사방에 붉은 핏물이 튀었다.
바닥에 앉아서 울고 있은 아이에게도 핏물이 튀어서 하얀 피부가 붉게 변했다.
“아아앙!! 엄마!! 아앙!”
김미연을 칼로 계속 찌르던 박민수가 갑자기 딸아이를 돌아보며 무섭게 소리쳤다.
“그만 울어! 네 년은 날 말려 죽이려고 태어난 거 다 알아. 다 봤어!
네 년들이 전생에 품은 한으로 날 죽이려 한 거 다 알아!“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박민수는 천천히 울고 있는 딸에게 다가갔다.
그의 눈은 푸른빛이 번쩍거렸고 온통 피를 뒤집어 씌고 있었서 마치 악마와 같았다.
아이는 무서움에 떨며 뒷걸음질 쳤지만 너무 무서워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허우적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크크크...내가 다 알아버려서 놀랬어? 왜? 무서워?”
아이는 아버지의 푸른 눈빛을 보며 무서워 떨었다.
“엄마! 무서워!!”
압구정동에서 3년째 옷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신하영은 짜증이 났다.
모름지기 가게는 첫 손님이 중요했다.
첫 손님이 개시를 잘 해주어야 그날 장사가 잘되는 것이다. 그러데 아침에 문을
열자마자 20대 청년 한 명이 들어와 30분 동안 가게를 휘저으며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물건을 고르는 것도 아니다.
찾는 옷이 있느냐? 물어도 대답 없이 그저 가게 안을 어슬렁거리니 들어오려던
손님들도 이상한 분위기에 모두 가버리는 것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던 신하영은 청년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옷 살거 아니면 나가줘요!”
그러나 청년은 아무 대답 없이 등을 보이고 서있다.
“이봐요! 계속 이렇게 남의 장사 방해 하면 경찰 부를 꺼예요.”
청년은 계속 못들은 척 등을 보이고 있다.
“아니? 이 사람이 정말?”
화가 난 신하영이 청년에게 다가가 툭! 치며 말했다.
“내 말 안들려요?”
그녀가 자신을 건들며 말하자 청년이 천천히 뒤돌아서 신하영을 쳐다봤다.
신하영는 청년의 눈을 본 후 깨달았다.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났다는 것을...
그리고 보지 말아야 할 악마의 푸른 눈을 보았다는 것을...
그러나 이미 그녀의 깨달음은 늦고 말았다.
어느 순간 청년이 기다란 칼로 그녀의 아랫배를 푹! 찔렀기 때문이다.
그녀는 의문 가득 찬 얼굴로 청년을 바라보며 고통을 참았지만 그 청년의 얼굴은
비릿한 웃음만이 가득 했다.
‘왜? 왜? 나야?’
그러나 그녀의 의문은 계속 이어질 수 없었다.
청년은 그녀를 한번의 고통으로는 죽일 수 없다는 듯이 칼로 마구 찔렀기 때문이었다.
푹! 푹! 푹!
가게를 들어오려던 손님이 그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해서 소리쳤다.
“아아악!! 사....사...”
손님을 본 청년은 갑자기 사나운 짐승처럼 손님을 향해 달려들었다.
놀란 손님이 피하려 했지만 이미 청년의 날카로운 칼이 그녀의 등을 찔러버렸다.
청년은 미친 듯이 손님을 난자 하고는 가게를 빠져나갔다.
8월17일 화요일 오전 11시30분
고려일보 사회부 사건기자 정웅기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이상하다 말이야! 정말 이상해!”
그의 모습을 보고 있던 박찬기 기자가 물었다.
“정기자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정웅기가 사건 기록철을 들이밀며 말했다.
“이 사건들 말이야. 여기 강남H 아파트 사건과 신촌의 옷가게 살인 사건 말이야
이유를 모르겠다단 말이야 도대체 왜 자신의 아내와 딸을 죽이고 자신은 자살 한거지?
그리고 옷가게에서 살인을 저지른 놈은 정말 아무 이유가 없었단 말이야.“
박찬기 기자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참! 사람! 이런 사건이 어디 이번뿐인가? 그리고 H아파트는 남자가 사업에 압박을
받고 딸과 아내를 죽인거 아닌가? 그리고 옷가게에서 살인을 저지른 놈은 정신이상이라고
하던데...경찰이 붙잡았을 때 완전히 맛이 갔었다더군.“
박찬기의 말을 듣고도 정웅기는 고개를 계속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니야! 아파트 사건은 남자가 비록 사업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었지만 회사가 망할
정도는 아니었어. 그리고 옷가게 살인 사건을 저지른 녀석도 평소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착한 녀석이었다는 것이 주위 사람들의 말이야. 그런데 이런 사건이 요즘
계속 생기고 있다는 것이 난 이해 할 수 없다는 거야. 벌써 몇 일 사이 이유없는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10여 명이 넘어 봐!“
정웅기는 자신이 스크랩해 놓은 사건 기록을 박찬기에게 보여주며 계속 말했다.
“신림동 살인 사건은 부인이 남편을 죽였어 그런데 그 부인은 자신이 왜 남편을
죽였는지 이유를 대지도 못하고 있어. 여기 역삼동 술집 사건은 더 이상해!
술을 먹던 20대 청년이 가게 안의 손님을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인데...이 친구는
생일을 맞아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어. 친구들 말로는 술을 한 잔도 못 마시는
친구라 음료수만 먹었다는군. 그런데 갑자기 난폭해지며 사람들을 찔러 죽인거야.
뿐만 아니야 여기 봐! 기록을 보면 최근 2일 안에 서울에서 일어난 강력 사건이
두 배 이상 늘었어. 그리고 그 중 절반이상이 모두 아무런 원한이나 이유 없는
살인이야.“
정웅기의 말에 박찬기도 신기한 듯 스크랩북을 쳐다봤다.
“어? 정말 그렇네. 그래도 뭐 우연이겠지.”
그러나 정웅기는 다시 고개를 저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이 사건들의 용의자 절반이 스스로 자살하거나
붙잡혔는데 모두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어. 사람이 갑자기 미칠 수는 없는거야
분명 이유가 있을 꺼야.“
박찬기는 정웅기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자네 또 특종 냄새를 맡았군! 잘 해봐! 내 옆에서 도울 일 있으면 말해.”
정웅기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 고마워!”
박찬기가 갑자기 생각 난 듯 말했다.
“참! 오늘 아파트에서 부인과 딸을 죽인 남자 해부한다고 하는 것 같던데?”
“해부?”
“응. 장기를 기증하고 자신을 해부용 실습으로 써달라고 유서까지 남겼잖아.”
“그래? 어느 대학 병원에서 몇 시에 하는데?”
“왜? 거기까지 가보게? 아마 한림대 오후 3시라고 그런 것 같던데.”
정웅기는 수첩에 메모를 한 후 박찬기에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박기자. 잘 되면 내 한 턱 내지.”
밀폐된 조금만 방안에 한 남자가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각의 벽은 방음 장치가 되어 있고 한 쪽 벽면은 불투명 유리로 장식되어있다.
방 중앙엔 작은 책상이 놓여있고 그 앞에 조그만 의자가 하나 놓여 있는 게
전부였다.
문이 열리며 검은 양복을 입은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방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고개를 숙인 사람 앞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미우라! 더 이상 고집 부리지마라!”
그의 말에 미우라가 초췌한 얼굴을 들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미우라를 보고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목적으로 들어왔나? 당신과 접선했던 모자 쓴 놈은 누구야?”
그러나 그의 말에 미우라는 아무 말 없이 차갑게 미소만 지었다.
남자는 탁자를 쾅! 치며 물었다.
“잘 들어! 넌 어차피 여기서 죽어! 곱게 죽고 싶지 않으면 불어!
너 이 새끼 그 건물에서 도대체 무슨 짓을 했어? 우리요원 7명이 이유 모른체
죽었어. 서로를 잡아먹으면서 죽어갔다구!!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의 말에 미우라가 히죽거리며 조용히 말했다.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본능을 일깨워 주었을 뿐.”
“무슨 헛소리야? 그들에게 무슨 약을 쓴 거야?”
사내는 소리치며 미우라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나 미우라는 히죽 웃으며
사내에게 말했다.
“어차피 모두 죽어! 날 죽인다 해도 소용없어. 이미 악마의 심장은 뛰기
시작했어. 이제 곧 세계는 정화된다.“
미우라의 말에 사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악마의 심장은 뭐야? 세계? 그럼 한국 말고 또 다른 나라에
테러를 감행 할 생각이란 말인가?“
미우라는 차가운 눈빛으로 사내를 보며 말했다.
“우리 ‘빛과 그림자’는 병에 찌든 지구를 구하기 위해 정화사업을 시작했다.
곧 세계 각지에 나가 있는 우리 형제들이 정화사업을 시작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빛의 수호신 슈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너희는 다 죽어갈 것이다.“
“미친놈!!”
“하하하. 미쳤다고? 크하하하 그렇지 미친놈들의 눈에는 우리들이 정상으로
보일 리가 없지. 곧 악마의 심장이 박동을 시작하면 세계 정화사업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하하“
사내가 미우라를 거세게 붙잡으며 물었다.
“악마의 심장이 뭐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테러를 감행 할 예정이지?
목표가 뭐야?“
“하하하. 그건 네 놈들이 알아서 알아내야지 내가 가르쳐 줄 것 같아?”
미우라의 말에 사내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네가 스스로 불게 만들어주지.”
미우라에게 말하고 사내는 문을 열고 나갔다.
옆방에서 미우라와 사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장태훈이 말했다.
“인터폴에 연락해서 미우라와 같은 ‘빛과 그림자’의 신도들이 동시에
다른 나라에도 입국했나 알아봐! 이건 우리나라에 국한된 문제만이 아닌 것 같군.
그리고 저 놈 T1을 주사해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뭐든 알아내!“
그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강민우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과장팀! T1은 잘 못하면 죽거나 정신 이상까지 일으킬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저 놈은 일본 놈이라 일본에서 항의를 해 온다면 문제가 심각하지 않겠습니까?“
장태훈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항의? 웃기지 말라고 그래! 지금은 국가 위기 상태야! 저 미친놈이 어디다
무엇을 터트릴지 어떻게 알겠어? 놈이 입국할 당시 특별한 무기를 소지 하지
않았다는 것은 놈들이 사용할 무기가 화학 무기일 가능성이 많다는 소리야 만약,
서울 한 복판에 화학 무기가 터진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해! 아무소리 말고
저놈을 족쳐!!! 무슨 수를 쓰든 알아내....놈의 말로 들어봐서 세계 곳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테러를 일으킬 생각이 틀림없어! 시간이 촉박하다.“
장태훈의 말에 강민우와 요원들은 대답을 하고 방을 나갔다.
장태훈은 창 넘어 미우라를 바라보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미우라! 넌 내게 잘못 걸렸어! 난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불독이거든!!”
정웅기는 한림대 해부학 실습실 복도에 벌써 한 시간째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차가운 복도에서 있으면서 머리 속으로 의문점을 하나하나 짚어갔다.
그러나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사건이 연결된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저 막연한 느낌에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 될 뿐 뚜렷하게 무엇 때문에
이상스런 살인 사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지 답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왜 사람을 해부하는 곳까지 왔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한 참을 생각하며 피식 웃을 때 복도 끝 쪽에서 걸어오는 여자가 보였다.
하얀색 티셔츠에 청바지 차람이 무척이나 시원스럽게 보였다.
다가온 그녀가 정웅기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물었다.
“여기가 해부학 실습실 맞나요?”
“그런 것 같네요.”
그의 대답에 그녀는 실습실을 잠시 쳐다보더니 다시 물었다.
“오늘 박민수씨를 해부 실습한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그녀의 물음에 정웅기는 눈빛을 반짝이며 쳐다봤다.
그녀는 마치 정웅기가 해부학 교수라도 되는 듯이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웅기의 관심은 그녀가 누구인가? 였다.
그녀가 물은 박민수는 H 아파트 살인 사건 범인이며
지금 해부 실습이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웅기가 그녀를 살짝 보며 물었다.
“기자입니까?”
정웅기의 물음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며 말했다.
“기자처럼 보이나요?”
“기자가 아니고선 이런 해부실습에 관심을 갖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럼, 댁은 기자겠군요?”
“그렇게 보이나요?”
정웅기의 물음에 그녀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풋! 해부학 실습실 앞에 서성이는 것 보면 학생은 아니고 그렇다고 교수도
아닐 테니 당연히 해부에 관심을 갖고 있는 기자가 아니겠어요? 더구나 지금
해부되고 있는 사람은 사랑하는 가족을 죽이고 자살한 살인자니 기사 감으로는
최고 아닌가요?“
정웅기는 그녀의 말에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예리하시네요. 맞습니다. 고려일보 사회부 사건기자 정웅기라고 합니다.”
그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모른 척 딴 소리를 했다.
“그래요? 전 기자하고는 친하지 않아서요.”
그녀가 외면하자 정웅기는 내민 손이 무안해서 머리로 손을 가져가 긁적이며
말했다.
“그럼, 아가씨는...아니 성암이 어떻게 되시죠?”
“글세요.”
정웅기는 그녀의 딱딱함에 입술을 살짝 삐쭉이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 무슨 일 때문에 오셨습니까?”
정웅기의 물음에 그녀는 답을 하지 않고 실습실을 다시 쳐다봤다.
그러나 기자의 근성은 끈질김에 있다.
정웅기가 다시 그녀에게 질문을 퍼부으려 할 때 실습실 문이 열리며
하얀 백발의 사내가 나왔다.
그를 본 정웅기는 그가 바로 뇌 박사로 불리는 백병욱 박사라는 것을 바로
알아보았다.
정웅기가 다가가 박사를 불렀다.
“백병욱 박사님!”
백발의 백병욱 박사가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았다.
“안녕하십니까? 고려일보 사회부 기자 정웅기라고 합니다.”
백병욱 박사가 의문스런 눈으로 정웅기를 쳐다봤다.
“무슨 일 때문에 저를 찾아왔습니까?”
“시간이 괜찮으시면 오늘 해부실습을 한 박민수씨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백병욱 박사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글세요. 전 특별히 기자 분과 할 말이 없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고인이 된
분에 관해 제가 뭐라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구요.“
정웅기는 기자의 습성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인의 명예를 훼손시킬 생각은 없으니까요. 전 단지
박사님께서 해부하신 것에 대한 해부학적 소견을 듣고 싶은 것뿐입니다.“
정웅기의 말에 백병욱 박사는 망설이는 듯 보였다.
정웅기는 이때가 바로 강하게 밀고 나가야 할 때임을 알고 다시 말하려 할 때
뒤 쪽에 있던 여인이 끼어들었다.
“박사님! 저는 오늘 해부한 박민수씨의 처제 되는 강미란이고 합니다.”
그녀의 말에 정웅기와 백병욱 박사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며 그녀를 쳐다봤다.
“바쁘신 것은 알지만 박사님의 해부학 소견을 듣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습니까?“
강미란의 말을 들으며 정웅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이상하네. 박민수의 부인은 김씨인데....강미란이라면 어떻게 처제가 되지?’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기회를 빌어 백병욱 박사를 더욱 몰아
붙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백병욱 박사는 강미란과 정웅기를 번갈아보며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일단 내 사무실로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