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알갱이 - 38

이끼2004.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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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성질머리 하고는..."

 

하필 둥글게 생긴 립스틱이 또르르 굴러서 누군가의 발 끝에 걸려 툭 멈추었다.

 

"김태민!"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그 발의 주인을 올려다 본 샐리가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젠장 오늘 대체 무슨 마가 끼였길래 저 놈의 김씨집안 남자 둘이 날 이토록 괴롭게 만드는거냐? 샐리가 오만상을 구기면서 벌떡 일어났다. 피식거리면서 비웃던 김태민이 허리를 굽혀 샐리의 립스틱을 집어 들었다.

 

"기집애가 그렇게 성질 더럽고 천해서 어디다가 쓸래?"

 

이 놈은 언제나 말하는 폼새가 지네 형보다 더 끔찍하다. 대체 아들 두 놈 교육을 얼케 해놨는지 오만방자 하기가 늘 하늘을 찌른다 찔러! 게다가 영국에 있어야 할 놈이 왜 자꾸 서울땅에 불쑥불쑥 나타나는 건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돈이 문제가 아니니 오고 싶을 때 못 올 이유가 없긴 하다.

 

"남이사, 신경끄시고 그거나 내 놔."

 

샐리가 태민에게 성큼성큼 걸어와서 손을 불쑥 내밀었다.

 

"싫어."

 

샐리의 약을 올리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태민이 샐리가 내미는 손을 외면한채 자신의 주머니로 립스틱을 쏙 넣어버렸다. 어이없는 표정이 샐리가 아주 잠시 멍하게 태민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상대하기를 포기했다.

 

"그래? 그럼 너 가져라."

 

샐리가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휙 뒤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유치하게시리 달라는데 안 준다는건 뭐냐? 치사해서 상대 안하고 말지...

 

"야! 야!"

 

샐리의 뒤에서 김태민의 목소리가 쨍쨍하게 울려퍼졌지만 샐리는 씩씩거리면서 두 주먹을 불끈쥐고 저벅저벅 걷기만 했다.

 

"젠장. 야!"

 

태민은 샐리가 아는 척을 안하자 스스로 몸이 달았는지 결국 달음박질을 쳐서 앞에 가는 샐리의 팔을 잡아 거칠게 자신에게 돌렸다.  갑작스런 태민의 동작에 샐리의 두 눈이 깜찍하도록 동그랗게 되었다.

 

"뭐야!"

 

"......"

 

순간 시스템이 다운이라도 된 듯 태민이 멍하니 멈추어섰다. 늘 샐리는 이랬다. 보통의 여자애들은 천재라고 소문난 자신이 어떤 발언을 하던 어떤 동작을 하던 눈을 반짝이면서 흥미를 가졌었는데, 유난히 요란스러운 복장으로 늘 어디에 있던 눈에 띄이도록 박장대소를 하면서 천박하다는 느낌 마저 풍겨대는 샐리는 늘 태민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서 늘 싸우게 되었다.

 

"왜에!"

 

이 꽥꽥거리는 오리새끼 같은 아가씨에 왜 늘 태민이 시선을 주어야만 하는지 그것은 태민이 자신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넌 바보냐? 니 것도 하나 제대로 못 챙기게?"

 

또 할 말이 없으니 나가는 말은 싸움을 거는 말밖에 없다.

 

"내가 안 챙겼어? 니가 안 준다며?"

 

"안준다고 그냥 가는건 어느나라 법이냐?"

 

"참 내, 나같이 무식한 년이 어느나라 법인지 알게뭐냐? 너랑 싸우기 귀찮아서 그냥 너 가지라는데 왜 가는 사람 붙잡고 난리야?"

 

언제나 태민과 샐리가 만나서 도화선의 불만 당기면 바로 폭탄이 터진다. 금새 둘은 장소가 고급 부띠끄만 입점해있는 몰이라는 것도 새까맣게 잊고 둘만의 싸움으로 빠져들어갔다. 이러니 옆의 친구들이 둘이 부딪히면 눈을 가리다시피 끌고가서 찢어놓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정말 쓸데없는 문제로 괜한 시비를 붙여서 잘도 싸우는 두 사람이니까.

 

"아, 그럼 내놔! 내 립스틱 내놓으라구!"

 

"공짜로 그냥 주는게 어딨어!"

 

오늘따라 태민은 유난히 더 애처럼 징징거리고 있었다. 유채 문제 때문에 태준과 심리가 왕창 꼬여있던 샐리는 눈에 화르륵 불을 켜고 태민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런 샐리의 눈빛을 엉뚱맞게 생기넘치는 활력으로 보고 있는 태민의 눈은 분명 정상이 아닌 듯 싶었다. 영국에서 몇 년간 심혈을 기울여 원소에 대한 실험이 완전 수포로 돌아간 것에 대해 크게 상심한 태민이 일부러 이런 샐리를 찾아 한국으로 굳이 온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히 설명이 된다. 태민은 샐리와 언성을 높여 싸우는 것이 즐거웠다. 샐리와의 싸움은 옳고 그른 것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만나는 그 잘났다고 설쳐대는 여자들의 내숭 덩어리 데이트와 사뭇다른 샐리와의 싸움질만 하는 만남은 태민에게는 두뇌에 공급하는 산소와도 같은 것이었다.

 

"밥 사. 그럼 립스틱 줄께."

 

태민의 말에 샐리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그런 조금도 꾸밈없는 샐리의 저 표정이 태민은 귀엽기 짝이 없었다. 확실히 천재는 제 정신이 놈이 없다더만, 태민이 바로 그런 놈인 모양이었다.

 

"너, 미쳤냐? 너 가지라는데 내가 왜 밥까지 사면서 너한테 립스틱을 달라고 해야되냐?"

 

샐리의 눈썹이 짜증난다는 듯 긴 사선을 그었다.

 

"그럼 내가 살께 밥 먹어. 그럼 됐지?"

 

오늘은 태민의 기분이 많이 울적한 날이었다. 태민은 더이상 말이 필요없다는 듯 샐리의 손을 덥썩 잡고 저벅저벅 걷기 시작했다.

 

"야! 내가 왜 너랑 밥 먹어?"

 

샐리가 엉겁결에 끌려다가 모질게 태민의 손을 뿌리쳤다.

 

"너, 밥 먹었어?"

 

태민이 태평하게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는 거만한 표정으로 턱끝으로 샐리를 가르키며 물었다.

 

"아니."

 

"그럼, 어차피 먹을꺼네. 가자."

 

"아, 아니..."

 

또 다시 손을 붙들린 샐리가 태민의 뒤를 졸졸 따라가는 형색이 되버리자 당황해서 샐리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솔직히 싫지는 않았다. 태민과의 거리가 많이 가까운 상태를 증명이라도 하듯 샐리의 코 끝에 상쾌한 남자 향수의 향기가 계속적으로 맴돌았다. 그 향기가 태민의 것이라고 인지하는 순간 샐리의 얼굴을 어쩐지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아냐, 아냐... 이건 부끄러워서 그런게 아니라 열이 받아서 그런거야! 샐리는 자신의 마음속으로 합리화를 시켰지만 이미 샐리의 심장은 태민이 잡은 자신의 오른손 끝으로 자리를 옮겨서 팔딱거리면서 뛰고 있었다.

 

"열쇠줘."

 

지하주차장에 샐리가 주차해 놓은 차 앞으로 샐리를 끌고간 태민이 샐리에게 손을 대뜸 내밀었다. 너무도 당연한 태민의 폼새에 샐리가 자신의 차 키를 넙죽 건네고 나서 조수석에 올라탔다. 내가 왜 차키를 주는거지? 왜? 도무지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상황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샐리는 자책하듯 자신의 머리를 수백번을 내려쳤다. 천하태평과 뻔뻔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태민은 능숙한 포즈로 샐리의 주차된 차를 빼내서 냅다 교외로 내 달렸다.

 

"어디로 가는거야?"

 

"밥 먹으러."

 

"그게 어딘데?"

 

"가면 알겠지."

 

둘의 대화가 뚝 끊겼다. 어색하기 짝이없는 침묵속에 차 속의 두 남녀는 서로 힐끔힐끔 쳐다보기에 정신이 없어서 대화가 끊겼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매일 얼굴만 마주치면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렇게 고요한 상황에서 서로를 볼 수 있는 것은 둘에게 있어서 아주 특별한 사건이었다.

빨간 신호등에서 차가 멈춰서자 행인들이 우르르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갑자기 어인 연인들이 이리도 많은지 허리를 감고, 목을 끌고안고, 팔짱을 낀 남녀들이 삼삼오오 태민과 샐리가 탄 차의 앞을 지나갔다.

 

"... 뭐, 좋아하냐?"

 

싸울 때와 달리 조금 더 차분하게 가라앉은 믿을 수 없는 태민의 목소리가 샐리의 귀 끝을 간지럽혔다. 정말 간지러웠다. 솔직히... 미치도록 벽을 치고 웃고 싶었지만 샐리는 웃지 못했다. 너무 당황해서?

 

"...떡볶이."

 

아주 이례적으로 보이는 메뉴가 나왔다.

 

"떠... 떡볶이?"

 

상상도 못한 메뉴의 등장에 태민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태민의 눈에 귀 끝까지 새빨개진 샐리의 토라져서 반대편으로 돌려버린 얼굴이 두근거리게 와서 박혔다.

 

"...랑 순대."

 

 

 


*                        *                             *                             *                         *

 

 

 


딸랑... 딸랑...


밖에서 본 간판은 아주 모던해보이는 바였다. 태준은 분명 정보를 준 사람의 착오가 있을 것이라고 자신에게 자꾸 되풀이해서 세뇌를 했다. 모던한 바라고는 하지만... 분명 바는 술을 파는 곳이었다. 이런 곳에 유채가 있다고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검은 색과 푸른 색으로 적절하게 조화가 이루어진 계단을 따라내려가자 앞을 가로막고 있던 문 자동으로 열렸다.

 

"어서오세...!"

 

한껏 방긋 웃는 얼굴로 들어오는 손님을 향해 기운하게 인사를 하던 유채의 얼굴이 빳빳하게 굳었다. 태준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은 분명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유채였다. 절대 얌전한 복장은 아니었다. 전문 바텐더라면 바텐더 복장을 하고 있겠지 바 안에서 원피스를 입고 있을리는 없었다. 그것도 끈이 달랑거리는 저런 복장은! 유채의 두 눈동자는 입구에서 서서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하고 있는 태준에게 그대로 고정이 되었다. 그렇게 잠시간 그 둘의 사이에 팽팽한 시선의 줄다리기가 계속 되었다.

 

"저, 잠시만 나갔다 올께요."

 

아무래도 매장이 시끄러울 것을 예상한 유채가 옆에 있던 바텐더에게 양해를 구하고 바 안에서 빠져나와 태준에게 걸어갔다.

 

"너... 미쳤구나?"

 

"나가서 얘기해요."

 

유채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태준을 거칠게 잡아 끌었다. 도대체 이 인간이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온거야? 다행히 가게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 않고 태준은 곱게 유채가 잡아 끄는대로 가게 뒤편에 있는 조그만 공터로 고분고분하게 따라왔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유채가 그제서야 태준의 손을 놓았다.

 

"어떻게 찾은거예요?"

 

유채가 따지듯이 눈이 치켜뜨고 묻자 태준이 제정신이 든 듯 눈에 힘을 주었다.

 

"너 미친거 아냐? 그 꼴은 대체 뭐야?"

 

"댁이 여긴 왜 찾아와요? 남이사 뭘 하던 말던... 당신하고 상관없는 일이예요! 남 뒷조사 하고 다니는게 당신 직업이예요?"

 

유채가 지지않고 목소리를 카랑카랑하게 높였다.

 

"그래, 무슨 일은 하고 지내고 있겠거니... 했지만 기껏해야 번역일이나 하고 있을줄 알았다. 난 니가 이렇게 생각없는 여자인 줄은 미처 몰랐다. 기껏 일을 구한 곳이 술집이야? 어?"

 

태준의 눈에서 경멸의 빛이 반짝였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었다. 유채가 무슨 일을 하고 있을 지 태준이 금새 찾아내리라고 이미 유채는 훤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요. 나 이런 여자예요. 이제 알았어요? 그동안 내가 당신에게 어떻게 비췄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이런 여자 맞아요. 지금 당신이 보는 그대로예요. 이제 나 좀 내버려둬요."

 

유채는 쉽게 태준이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집에서 나올 때는 질투로 눈이 멀어서 유채를 잡지 않았겠지만 사형에게 가지 않은 이상 태준은 악착같이 자신을 찾아내서 다시 그 펜트하우스로 끌고 가리라는 것을 유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다. 어차피 몸을 버리는 일은 아니었다. 그저 태준의 제멋대로의 상상을 깨어주고 싶었을 뿐이다. 유채와 태준의 차이는 바로 이것이니까.

 

"어디까지 간거야?"

 

태준의 눈이 분노로 어둠속에서 번뜩였다.

 

"흥! 이런 일 하는 여자가 뻔하지, 뭘 그렇게 물어요!"

 

이런 거짓말에 유채는 그리 능숙하지 못했다. 양심이 따끔거린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모양이었다. 가슴 속이 따끔거리면서 은근하게 아파왔다.

 

"넌... 내가 널 어떻게 생각했는데..."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던 말던 난 원래 이런 여자였어요. 당신이 제 멋대로 날 끌고 그 집에 들어갔을 뿐이라고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한테 이러는거야!"

 

갑자기 태준의 목소리가 몇 데시벨이 상승했는지 모르겠다. 미칠듯한 태준의 분노가 목소리를 통해 고스란히 유채에게 전달되었다. 애써 태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채의 간은 금새 콩알만하게 줄어들었다.

 

이렇게 까지 격렬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