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알갱이 - 39

이끼2004.11.26
조회1,090

"마지막으로 이야기하지. 돌아와."

 

짐짓 화가 난다는 듯 휙 뒤돌아서면서 내뱉은 태준의 말에 유채는 가슴속에서 불이라도 당겨진 듯 열이 화르륵 올랐다. 그 놈의 마초기질은 천성인건지... 앞뒤 생각 하지도 않고 이야기를 듣고있는 유채의 입장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정말이지 어찌나 잘나셨는지!

 

"마지막?"

 

유채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콧웃음을 치자 태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김태준씨, 뭔가 단단히 착각하신 것 아닌가요? 첫번째든 마지막이든 난 당신의 이야기에 관심없어요."

 

"겪을만큼 겪어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건가?"

 

"뭐요?"

 

태준의 이야기에 유채의 얼굴이 강하게 찡그려졌다. 이 인간이 진정 오늘 한계선을 넘으려 하는건가? 유채의 인내심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설마 내 집보다 고시원이 낫다고 우길셈은 아니겠지?"

 

태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한껏 비아냥거렸다. 절대 이럴 생각으로 이 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바에서 일을 하는 유채를 보는 순간 그 동안의 그리움이 순식간에 모두 분노와 미움으로 바뀌어버렸다. 자신이 그렇게 그리워하는 동안 이 여자는 이 손님, 저 손님과 이야기하면서 히히덕거렸을 것이라는 생각을 뇌리에서 절대 지울 수가 없었다. 이것은 어린아이의 투정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없는 곳이라면 어디인들 나쁠까요?"

 

유채가 지지않고 두 눈을 번뜩이며 쏘아붙였다. 순간순간 잠시 태준을 잠시라도 그리워했다는 자신의 머리속을 국자로 휘저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유채를 미칠 듯이 만들었다. 대체 뭐가 그리 잘났다고 저 인간은 저리도 당당하게 고개를 떠들어대는 걸까? 기본적인 예의라는것은 꿀꿀이죽이라도 주어버린 듯이 말이지.

 

"그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지?"

 

태준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휘발유 뿌려놓은 곳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불은 예전에 붙었는지도 모른다. 태준과 유채의 사이에는 이미 그 누구도 근접할 수 없을 만큼 매섭게 타오르는 커다란 불기둥이라도 생긴 듯 했으니까.

 

"무슨 뜻이요? 잘난 대학교 나왔다는 걸로 아는데 영어는 잘해도 국어는 빵점인가요? 한국말도 해석 못해요?"

 

"보자보자하니까...!"

 

"이봐요. 김태준씨. 나, 당신에게 얻어쓴 것 없어. 무슨 길거리 거지한테 동정 베풀듯이 그런 식으로 사람 다루지 말란 말이야. 당신이 하라면 해야돼? 당신만 믿고 따르면 내 삶의 사소한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준다는 말인가? 당신은 근본부터 썩었어."

 

"그러는 너는? 돈많은 남자 만나서 팔자 고쳐보겠다는 니 머리는 안 썩었었는 줄 알아? 얼굴 반반해서 이리저리 빌려다 쓰는 명품으로 치장하고 A급 짝퉁으로 속이면 너도 A급이라도 되는 줄 알고 착각하는거아냐? 너도 썩은 냄새가 나. 구역질나. 역겹다고!"

 

결국 둘은 서로에게 있어서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기 시작하고야말았다. 말은 계속 거칠어져만 갔고 그 둘의 유리 심장에는 성난 기스가 하나씩 생겨났다.

 

"말이라면 다인 줄 알아? 누가 너한테 돈 달라고 했어? 내가 너한테 구걸했어? 왜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서 사사건건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고 난리냐고! 너한테 그런 대접 받는게 싫어서 내 발로 내가 뛰쳐나왔는데 니가 이제와서 나한테 뭐라고 그럴 자격이 있어?"

 

"어차피 니 목표는 돈 많은 남자 만나는거 아니었어? 길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봐. 나 충분히 돈 많아. 내노라하는 여자들도 앞다투어서 붙을만큼 나, 잘 나갈만큼 잘나가는 집안에서 잘나가는 놈이야. 그런데 니가 왜 날 무시해? 것도 돈 많은 남자 잡겠다고 커피 들고 엎어지는 너같은 여자가 왜 날 거부해?"

 

"사람도 사람 나름이야. 넌 기본 머리 구조가 썩었어!"

 

"사돈 남말하지마!"

 

태준의 말에 유채는 충분히 상처받고 아파하고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눈물은 한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아니, 울 수 없었다. 여기서 나약하게 눈물따위를 흘릴 수 없었다.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참 어처구니 없는 말싸움이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완전히 벗어난 어린애 장난 같은 그런 말싸움이었다.

 

"유채씨! 안 들어와?"

 

그 때였다. 바에서 서빙을 담당하는 유채와 같은 아르바이트생 하나가 유채를 불렀다. 바에서 벗어난지 얼만큼 시간이 지났는지 태준도 유채도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금방 가요!"

 

언제 태준과 싸웠냐는 듯 유채의 목소리와 표정은 이내 생글거리는 미소로 바뀌었다가 태준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또 다시 냉랭한 기운을 되찾았다.

 

"할 말 다했죠?"

 

"......"

 

"나 돈 벌어야되요. 할 말 다했으면 가봐요. 그리고... 다신 여기 오지 마요."

 

유채가 할말만 똑똑떨어지게 늘어놓고는 바를 향해 뒤로 돌았다.

 

"진유채."

 

태준의 낮은 음성이 유채를 불렀다. 뒤로 돌아 움직이던 유채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왜 이런 일을하지? 원한다면 바를 사주겠어. 굳이 네가 바에 들어가서 일을 해야할 필요가 있어?"

 

원한다면 바를 사주겠다... 유채가 태준의 말에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진정 돈을 뜯어낼 것이 목적의 여자라면 두 손을 들고 만세를 부를 일이었다. 바가 어디 한두푼이던가? 유채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김태준... 정말이지 이 남자는 너무도 맹목적이고 자기 멋대로이다. 유채는 뒤로 돌아 김태준에게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언제쯤이면 이 남자가 뭐가 문제인건지 깨달을 수 있을까...?

 

"이봐, 김태준씨...그렇게 돈이 튀어?"

 

뭐라고 말을 해야될까...? 0.01초 유채의 머리속에서 맴돌던 단어는 결국 다른 선택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유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닥치고 가서 니 할일이나 하고 살어."

 

태준을 그렇게 보내고 유채는 오늘 컵을 3개나 꺴다. 평소답지 않은 유채의 행동에 바의 매니저는 유채를 몇번이고 들어가서 쉬라고 말렸지만 유채는 말을 듣지 않았다. 더군다나 오늘따라 유채 주위에 몰려있는 손님들도 많아서 유채는 계속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말야, 이 친구가~"

 

"어머, 재미있네요."

 

손님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어주면서도 유채는 여전히 머리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유채가 내뱉은 말에 심하게 상처를 받은 듯이 뒤돌아서던 태준의 눈빛이 계속 목에걸린 생선가시처럼 유채를 괴롭게 했다.

 

"진유채씨."

 

"네?"

 

무심코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유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오늘이 뭔 날이길래...

 

"잘 지냈어요?"

 

서글서글한 미소로 태연하게 바에 앉은 손님은 다름아닌 백사형이었다. 태준과 서로 내통이라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갑자기 같은 날 이렇게 찾아올 수가 있는거지?

 

"여긴 어쩐 일이예요?"

 

태평하게 유채가 웃으면서 사형에게 작은 메뉴판을 내밀었다.

 

"어떻게 하다가 알게되었어요. 여기서 일한다고... 흠... 마가리타 주세요."

 

대충 메뉴판을 훑어보던 사형이 칵테일 이름을 하나 지명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데요?"

 

"김태준도 아는데 나라고 모를 것 없죠. 몇시에 끝나요?"

 

유채는 태준과 달리 싱글싱글 웃으면서 자신을 대하고 있는 사형에게 묘한 경계심을 느끼고 있었다.

 

 

 


*                       *                         *                           *                        *

 

 

 


"일은 할만해요?"

 

결국 유채는 마감까지 버티지 못하고 바의 매니저에게 말하고는 조퇴를 했다. 태준에 이어서 백사형까지 찾아온 상황에서 더이상 일을 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온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에 두손두발을 다 든 상태였다.

 

"그냥 그래요. 쉽진 않죠, 뭐."

 

커피캔 하나를 들고서 유채와 사형은 사형의 차를 타고 북악스카이 웨이를 올랐다. 새벽안개가 깔린 서울의 모습은 묘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 스산한 기운에 유채는 살짝 몸을 떨었다.

 

"왜 갑자기 바의 일을 하게 된거예요? 다른 일을 할게 없진 않았을텐데..."

 

"그냥 몸이 좀 힘든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이유는 딱히 없네요."

 

"몸이 힘든 일이라..."

 

유채의 말을 음미하듯 되풀이하면서 사형이 커피 한모금을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뭔가 마음이 힘든 일이 있는 모양이죠? 그걸 잊고 싶어서 몸이 힘든 일을 찾은거 아닌가요?"

 

마음이 힘든 일... 이번엔 사영의 말을 유채가 되새김질을 했다. 그래, 어쩌면 마음이 힘들어서 일부러 몸을 힘들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몸이 힘든 덕분에 정말 일할 때는 바빠서 잊고 일이 끝나면 피곤해서 자느라 아무 생각이 없었으니까...

 

"대답이 없는거 보니까 맞는 모양이네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훗..."

 

유채의 말에 사형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사형의 웃음에 유채가 궁금증어린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슨 의미지?

 

"놀랄만한 이야기 하나 해줄까요?"

 

사형이 상당히 능글거린다는 것을 유채는 새롭게 깨닫고 있었다. 전에는 그냥 성격좋은 남자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뭔데요?"

 

유채의 반문에 다시 사형의 미소만이 돌아왔다.

 

"뭐길래 뜸을 들여요?"

 

"유채씨 일하는 바... 그거 내 꺼예요."

 

"네?"

 

사형의 말에 유채의 두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또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같은 소리란 말인가?

 

"뭐, 내가 운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투자한 곳이니까."

 

"아니...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일하는 바 주인이 사형씨란 말이예요?"

 

"네."

 

"맙소사..."

 

세상이 아무리 좁다고 해도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유채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를 못하고 멍하게 사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은... 유채씨가 그 바에 일한다는 정보를 듣자마자 그 바를 인수했어요."

 

"네?"

 

유채의 머리속은 물과 기름이 따로도는 마블링처럼 휘휘 겉돌기만 하고 있었다. 아무리 휘저어도 모든 이야기들이 그저 둥둥 물위에 뜬 기름 같았다.

 

"혹시 유채씨 힘들게 일할까봐 인수했어요. 하지만 그래도 힘이 들었나보네요."

 

사형의 말을 이해하는 순간 유채는 그만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세상에 갑자기 뭔 남자 복이 제비 박터지듯 이렇게 터진다냐... 만약 세상 사람들이 이 상황을 안다면 얼마나 질투의 돌멩이를 던져댈까...?

 

"좀 웃어봐요. 그 어이없다는 표정은 이제 그만 좀 하고..."

 

사형의 말에 유채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커피캔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니까... 태준은 나한테 바를 사준다고 하더니만 사형은 지금 날 위해서 이 바를 자기가 샀다... 그거지?

 

"왜 그랬어요?"

 

그래, 대체 왜들 그러는지 유채는 정말 궁금했다. 도대체 왜들 그러는건지!

 

"왜라뇨... 유채씨 힘든일 하는거 보기 안타까워..."

 

"만약에 사형씨는 애를 낳았는데 그 애가 공부하기 힘들어하면 돈으로 해결을 해 줄껀가요?"

 

유채가 눈썹을 바짝 치켜올리며 사형에게 캐물었다.

 

"네?"

 

"돈으로 학교 들어가게 해줄껀가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사형의 말에 유채가 가슴속 깊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태준이나 사형이나 별반 틀릴 것이 없었다. 아니 둘다 똑같았다.

 

"사형씨 마음은 잘 알겠어요. 그 마음은 고맙게 생각하지만... 이런 행동은 정말 별로네요."

 

"그게, 무슨 말이죠?"

 

"난... 보살핌을 받아야하는 존재가 아니예요. 내가 바에가서 일하면 바를 사고, 백화점가서 일하면 백화점을 살껀가요? 호텔에 가서 일하면 제일 좋겠군요. 호텔도 살테니까요."

 

"유채씨!"

 

유채의 말 뜻을 알아챈 사형이 유채의 말을 급히 가로막았지만 유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온실안의 화초처럼 난 보호받아야만 생존하는 존재가 아니예요. 뭐 세상에는 그런 여자들도 존재할 지는 모르겠지만, 전 제가 바람쐬러 나가고 싶다고 하는데 따라다니면서 온실 만들어주는 사람이라면 질색이예요. 찬바람을 맞아서 죽게되더라도 그건 제 선택이고 책임이예요."

 

"유채씨!"

 

"내일부터 그 바에는 일을 못나가겠네요. 그동안 일한 월급은 통장으로 넣어달라고 해줘요."

 

유채는 당황한 사형을 그대로 두고서 차 안에서 자신의 가방을 꺼내들었다.

 

"아니, 왜 이래요!"

 

유채의 동작에 사형이 놀라서 유채의 팔을 붙들었다. 북악스카이웨이는 택시도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차가 있어야 올 수있고, 돌아갈 수가 있었다. 사람도 살지않는 이런 곳에 차가 다닐리 없었다. 그저 가끔 아침시간에 산책하고 조깅하는 사람들만 간간히 하나둘 있을 정도의 한적하기 짝이었는 도로였다.

 

"사형씨 놔요."

 

"아니, 지금 어딜 간다고 그래요. 여기서 어떻게 간다고."

 

사형의 만류에 유채가 침착한 표정으로 사형의 눈을 응수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서 왜 못가는데요? 제 발로 걸어서 제가 내려갈꺼예요. 못할 꺼 뭐있어요? 길은 이미 훤히 뚫려있고 난 걷기만 하면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