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칙사랑 - 01. 그와 단둘이 창고에 갇히다

나비2004.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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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칙사랑 


[정홍주 사랑의 원칙]


1. 사랑하는 연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2. 연인외 다른 남자에게 눈 돌리지 않는다.

3. 애인이 있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4. 먼저 사랑을 그만 두지 않는다.

5. 그를 믿으며 의심하지 않고, 시험하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정한 사랑의 원칙이다. 이를 어기면 반칙이다.



** 반칙사랑  - 제 1 편 : 단 둘만의 공간


“좀 앉지 그래요? 불안해 보이는데.”

“불안하지 않는 게 이상하잖아요! 회사에 도둑이 들었고, 우리 둘이 창고에 갇혀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너무 태연하군요!”

“소리를 치면 도둑들이 흥분할지도 몰라요. 소리를 낮춰요.”


그에게 소리를 치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 내 머리를 망치로 내려치는 것만큼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사실은 겁이 났던 것이다. 그에게 소리라도 치지 않으면 이가 소리가 날 정도로 부딪쳐 그와 단둘이 있는 이 적막감을 깨버리고 나의 약함이 드러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필 이 남자라니. 하긴 하필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 때문에 공연한 야근을 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아직도 소리가 들려요.”


가능한 그와는 멀리 떨어지기 위해 창고 문에 붙어 소리에 귀를 기울었다.


“몇 명이었죠?”


내가 물었다.


“세 명이요. 일단 여기 박스 위에 앉아요. 얌전한 도둑들 같으니 안심해도 되요.”

“얌전한 건 당신이죠! 처음에 핸드폰을 뺏기고 창고에 갇혔을 때 난 야근을 같이 하고 있는 당신이 생각났고, 당신이 구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주 얌전히, 저항도 하지 않고 창고로 걸어 들어오더군요!”

“내가 다치기 바라는 겁니까? 내가 멀쩡하게 있는 게 화가 나요?”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그런 것을 바랄 리가 없잖아.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다치는 걸 바라는 여자는 없다고. 민속주를 만드는 아빠의 회사에서 근무한지 일년이 되던 달, 새로 입사한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호감을 느꼈다.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채 5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내게 관심은커녕 시선조차 주지 않는 그를 잊어보자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와 단둘이 창고에 갇혔다는 사실만으로도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도둑들이 들었다는 급박한 상황인 줄 알면서도 그와 함께 갇혔다는 사실에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난 그런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그를 더욱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래도 당신은 너무 순순하게 들어왔다고요, 마치 저들과 한 패인 것처럼!”

“제발 소리 좀 지르지 말아요!”


그는 화가 난 듯 팔을 잡고 흔들었다. 어찌나 힘을 꽉 주던지 피가 통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힘은 세군.


“아, 아파요.”

“놓아주면 얌전히 있을 겁니까?”


그의 입술이 이마에 닿을 듯 가까이에 있었다.


“알았어요. 일단 놔주세요.”


피가 통하면서 시원한 느낌을 갖게 된 순간 그는 갑자기 화가 났는지 오히려 자기가 소리를 쳤다.


“당신이 위험해질 수 있단 말이에요! 만에 하나 내가 반항을 했더라면 그리고 실패했더라면 어땠을까요? 나만 다칠 것 같아요? 아마 당신도 꽁꽁 묶었거나 아니면 우리 둘 다 크게 다쳤을 지도 모른다고요!”

“미안해요. 이젠 얌전히 있을게요.”

“서 있지 말고 앉아요. 돈을 노리고 온 도둑은 아닌 것 같아요. 그랬다면 홍주씨 목걸이랑 반지도 뺏었을 겁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사람이 다치진 않았으니 일단은 다행이지. 난 찬영씨 곁에 놓인 박스에 걸터앉았다. 아차! 순간 당황스러웠다. 긴 다리 때문이기도 했지만 고등학교 때 산 옛 스타일의 짧은 치마 때문에 허벅지가 반 이상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럼 뭘 노리고 온 걸까요?”


치마를 손으로 내리며 말했다.


“아마도 자료를 빼돌리러 온 놈들 같아요. 일단은 우리가 다치지 않은 것에 만족합시다.”


‘이사람 이 회사가 우리 아버지 회사인 줄 알면서 말하는 걸까? 자기야 손해 볼 게 없다는 거겠지. 만약 지갑이라도 털렸어봐. 죽이려고 들었을 걸.’


“이제 나갔나 보군요.”

“그런가요?”


찬영씨의 말대로 더 이상 밖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순간 안도감이 밀려왔지만 갇혀있다는 사실에 더 집중을 하게 됐다.


“찬영씨, 우리는 직원들이 출근하는 시간이 되어서야 나갈 수 있겠죠?”

“그렇겠죠.”

“내가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전화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밤늦게라도 아빠가 회사로 찾아왔을 거예요.”

“홍주씨도 당직실에서 잘 생각이었어요?”

“예.”

“나도 오늘 당직실에서 자려고 했었는데.”


싱글 침대가 두개 놓인 작은 방에서 찬영씨와 함께 자야할 상황을 상상하자 얼마나 어색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이것도 그것에 못지않지. 갑자기 더욱 어색해져버린 나는 지독히도 짧은 치마를 애써 끌어내렸다.


“홍주씨는 키가 몇이에요?”

“지금 그게 여기서 할 질문인가요?”

“그럼 어떤 질문을 해야 하죠? 밤은 길고 할 것은 없는데.”


무지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치마를 밑으로 당기며 대답했다.


“169에요.”

“난 170이 넘는 줄 알았는데.”

“정확히 말하면 169.8 이에요.”

“170이군요.”

“169.8이요.”


또박또박 말을 하고서는 일어섰다가 치마를 최대한 내리고 다시 앉아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허벅지가 반쯤은 드러나 보였다.


“그거 안할 수는 없어요?”

“예?”

“치마 내리는 거.”

“그럼 올라간 채로 두라는 건가요?”

“아니, 신경이 쓰여서 그래요.”

“저도 신경이 쓰인다고요.”


찬영의 시선이 다리에 머무른 것이 느껴졌고 곧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이런 모습이 남자의 호흡을 가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영화에서 봐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4.5평도 채 되지 않은 공간이었고, 각종 민속주 박스로 피할 수 있는 곳도 없었다. 그리고 두려운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를 더 자극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연해자, 태연해. 오늘따라 이 고물 치마를 입다니.’


“찬영씨는 어디 살아요?”


정말 한심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세 번째 셔츠 단추를 풀고 있었다. 가슴은 반 이상 드러나 있었고 진한 갈색의 젖꼭지도 보였다.


“지,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홍주씨가 계속 치마를 끌어내리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내 셔츠로 그 기다란 다리를 가리는 게 나을까요? 당신이 선택해요.”

“······.”


잠시 고민에 빠졌다. 수작이야 아니면 진짜 배려를 해주는 거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잠시 고민하는 사이 그가 파랗고 가는 줄무늬 셔츠를 벗어 건넸다. 평소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지 근육들이 보기 좋게 잡혀있는 몸매였다.


“고마워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말하고는 셔츠로 다리를 가렸다. 덥지도 않은 4월의 날씨에 땀을 흘렸는지 약간은 축축해진 셔츠였다.


“아니에요. 내가 고마워요. 더운 참이었으니까.”

“운동하시나 봐요?”


이런! 잠깐 사이에 그를 몸을 면밀히 관찰했다는 것을 내 입으로 말하다니. 하지만 관찰당하는 것보다는 관찰하는 편이 낫다 싶었다. 그는 노골적인 시선에 쑥스러워졌는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두리번대기 시작했다.


‘쑥스러워 하긴. 여긴 술 박스 밖에 없는데 뭘 찾고 난리야?’


그는 성큼성큼 걸어 박스가 세워진 뒷편으로 가더니 빈박스를 두어장 들고 나와 바닥에 깔더니 편한 자세를 취했다.


“아무래도 장시간 나가지 못할 것 같아서요. 홍주씨도 이리 내려오시죠.”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그럼 전 좀 눕겠습니다.”


거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박스위에 긴 몸을 눕히더니 팔로 눈을 가려버렸다. 마치 이곳에 혼자 있는 것처럼. 무례한 그의 태도에 어이가 없긴 했지만 대신 그의 몸을 천천히 훑어볼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조금은 마른 듯한 체구였지만 탄탄해 보였고, 너무 하얗지도, 검지도 않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찬영은 그대로 자려는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도 할 수 없이 자야하는 건가 박스에 기대어 눈을 감았지만 오히려 그의 몸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이었다. 오히려 눈을 뜨고 있을 때가 마음이 안정되었다.


“저기, 잘 건가요?”

“······?”


찬영이 눈을 뜨고 그녀를 보았다.


“잠이 올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혼자 있기는 무서워요. 그러니 정 피곤한 거 아니면 얘기를 나누는 게 어때요?”

“대화를 원치 않는 걸로 알았는데요. 아까 옷을 벗을 때 마치 짐승을 쳐다보는 눈으로 쳐다보더군요. 평소 내 행동이 어땠나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건 죄송해요. 하지만 놀랄 수밖에 없었어요. 여긴 우리 둘 뿐이고, 도망칠 수도 없으니까.”

“하하하하.”


찬영의 웃음소리가 퍼졌다.


“도망칠 수 없다니 정말 우습네요. 얘기하도록 하죠. 말은 먼저 꺼내겠죠?”


그는 몸을 일으켜 여전히 바닥에 앉은 채 상자에 기대어 자리를 잡았다. 그의 근육들이 멋지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다시 부끄러운 상상에 빠졌다.


‘어디서부터 해야 하지? 먼저 말을 해야 하는데 반라로 알짱대고 있으니까 말이 나오지 않잖아.’


“우리는 대화를 나눠본 적이 한 번도 없군요. 음. 찬영씨는 꽤 좋은 대학을 나왔지요. 굳이 이렇게 작은 회사에 들어올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취조를 당하는 거 같군요. 대화를 하자는 줄 알았는데.”

“이것도 대화에요.”

“난 당신 아버지를 존경해요. 내가 맛본 술중에 최고죠. 그 분을 도와 술을 만들고 싶었어요. 더 좋은 술을 만드는 게 욕심이고요.”


아버지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맞아요. 아버지 술은 최고에요. 다른 술보다 맑은 맛이 나고, 숙취도 없죠.”

“저는 무엇보다 마음을 맑게 해주는 것 같아요.”

“그런가요? 아무튼 아버지 술중엔 두견주가 최고죠.”

“두견주도 좋지만 전 홍주를 더 좋아합니다.”


마치 자신을 좋아한다고 얘기를 들은 기분이 들어 가슴이 설레었다. 순간 어색해진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 어려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도 홍주 좋아해요.”

“아름답지만 독하죠. 방심하고 먹다간 깜짝 놀랄 정도로. 처음에 제가 그랬어요. 와인이나 흔한 과실주로 생각하고 벌컥 마셨다가 속에서 불이 나 난리를 쳤었습니다.”


홍주는 빛깔은 투명하고 곱지만 도수가 40도에 이르는 술이었다. 그것을 벌컥 마셨다면 아무리 애주가라도 된통 혼이 날 일이었다.


“하하. 전 아버지에게 술을 배워서 그런 재미있는 일화는 없어요.”


내가 이 남자와 마주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 유머 있고 대화도 잘 이끄는 모습이 더욱 매력을 느끼게 했다. 늘 안녕하세요, 과장님이 찾던데요, 같은 말을 할 기회도 없었기에 그에 대해서 알 시간은 없었다. 이제 우린 한 단계 전진이야! 마음속에 웃음이 넘쳤지만 냉정을 유지하기 위해 진땀이 흘렀다.


“말이 나온 참에 한 잔 할까요? 한 병 정도는 꺼내도 괜찮겠죠?”


찬영씨는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보내더니 박스를 뜯어 유리병에 담긴 홍주를 한 병 꺼내왔다. 안주도 없는 아주 덩그러니한 술상이었다.


“잔이 없네요.”

“어쩔 수 없죠. 번갈아 마시는 수밖에.”


그는 술병을 흔들며 어쩔 수 없다는 시늉을 했다. 나도 그것이 싫지는 않았다. 간접키스! 그리고 단 둘이 술을 마시는 기회! 내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크. 정말 독해요, 홍주는. 자, 홍주씨도.”


또 자신을 부르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술병을 받았다. 술병은 작은 입구여서 그가 입을 댄 곳을 피한다는 건 무리였다. 조심스레 술병을 들어 마셨다.


“크으.”


목을 태우듯 내려간 홍주는 허기진 배에 이르자 온 몸을 짜릿짜릿하게 만들었다. 안주를 대신해 열심히 대화에 열중했다. 그렇게 술병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불편하지 않아요? 이리 내려오지 그래요?”


그가 마련한 자리에 앉았다. 단 10cm도 떨어지지 않아서 팔을 움직일 때는 그의 팔이 스치기도 하는 것이었다. 독한 홍주보다도 그와의 접촉이 더 아찔했다.


‘이 남자는 내게 관심이 전혀 없었던 걸까?’


바로 그때 찬영씨가 질문을 해왔다.


“홍주씨는 왜 남자친구를 안 사귀어요? 일 때문에?”


관심이 없는 척 하면서 별 걸 다 알고 있군. 항상 정대리라고 깍듯이 부르던 그가 이름을 불러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별 걸 다 아시네요. 아직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을 뿐이에요.”


그에게 여자 친구가 있냐고 물으려다 그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이 지금의 승리감을 반감시킬 것 같아 묻지 않았다. 그 때 찬영이 물었다.


“술을 마시면 왜 취하는지 아세요?”

“그야 알코올 때문이죠. 정확히 말하면 알코올이 우리 몸에 들어가면 간에서 알코올 분해하죠. 그래서 아세트알데하이드라는 물질을 만들어요. 이게 숙취의 원인 물질이에요. 이게  아세테이트로 전환이 되어야 하는데 전환되는 것보다 더 많이 마시면 취하게 되는 거예요. 어렵나요? 쉽게 말해서 뇌로 들어간 알코올이 신경세포 사이의 정보 교환을 방해하는 거예요. 제일 먼저 대뇌, 소뇌, 뇌간 순서에요.”

“틀렸어요. 홍주씨 말은.”

“예?”

“그건 술을 마시니까 취하는 거예요.”


찬영씨가 달큰하게 취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야. 웃는 모습도 상당히 귀여운데. 이런 기회가 내게 왔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며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렌즈를 낀 눈이 뻑뻑하게 느껴졌다. 렌즈 때문인지 술에 취해서인지 시야가 흐려지고 있었다.

술은 정말 마력을 지닌 듯 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그의 시시한 농담에 배를 잡고 웃게 되었고, 웃을 때 움직이는 그의 가슴이 너무 멋지게만 보였다.


‘이 남자 이제 나한테 데이트 신청을 할 게 분명해. 그렇게 우리가 사귀게 되는 건가?’


“술에 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여자는 처음 봐요. 와인에 관해 어느 정도 아는 여자들은 봤지만 민속주에 관해서 잘 아는 여자는 없었어요.”

“다 아버지 덕분이지요, 뭐.”

“저보다도 많이 아시네요. 술의 역사와 알려지지 않은 일화까지요.”


칭찬하는 그의 눈빛이 빛나고 있는 듯 느껴졌다.


‘역시 그도 감정을 감추고 있었던 것뿐이야. 기회가 만들어지니까 놓치지 않고 친해지려하는 것 좀 봐.’


“지금 몇 시죠?”


도둑들이 빼앗아간 핸드폰을 떠올리며 물었다.


“글쎄요.”

“바보! 여기 시계 있잖아요.”


술김에 아무 생각 없이 그의 손목을 덥썩 잡아 시계를 보았다. 너무 세게 손목을 당긴 탓에 그의 몸이 나를 향해 틀어졌고 졸지에 그의 팔 안으로 들어간 꼴이 되었다. 그의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랬으니까. 바로 자신의 눈앞에 맨살로 드러난 그의 가슴이 있었다.


“다섯 시네요. 조만간 날이 밝겠어요.”


그녀는 다시 그의 팔을 원위치 시켰지만 그는 다시 몸을 틀지 않고 홍주를 바라본 채였다.


‘난 몰라. 내가 그를 자극시켰나봐.’


40도가 넘는 홍주로 가득 찼던 병이 빈병으로 나뒹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세상에 저걸 다 마셨단 말이야? 갑자기 어지러움이 몰려오는 듯했다. 이미 술에 취한 그가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가슴이 뛰었다.


“저는 좀 자야겠어요. 그래도 되겠죠?”

“예.”


찬영씨는 주춤하더니 누울만한 자리를 마련해주었고 자신은 그대로 앉은 채로 있었다. 아무리 친해졌다고 해도 내 옆에 눕지는 않겠지? 나는 마음을 놓고 자리에 누웠다. 박스 밑에서 냉기가 올라오는 것 같아 조금 추웠지만 그런대로 견딜만하다고 여기면서.


***


“으.”


눈을 뜨자마자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마치 눈을 감자마자 뜬 것처럼 너무나 피곤했다. 그러나 곧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왜 이 남자 품에 안겨있는 거야?’


내 팔은 찬영씨의 목을 다정스럽게 두른 채였고, 그의 팔은 내 허리께에 올려져 있었다. 아주 다정한 연인처럼. 밤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입을 벌리며 곤히 자고 있는 그의 얼굴은 불과 한 뼘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키스를 할 수 있는 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