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누구도 원치 않았던 거야. 아니,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란 거지. 술김, 아니, 잠결에 벌어진 일일거야. 너무 추워서 그랬겠지. 서로 가깝게 가려다보니 생긴 일이라고!’
잠시 먼저 몸을 일으켜야 하나 아님 그가 먼저 깨도록 해야 하는 하나 망설이고 있었다. 그가 먼저 깬다면 모르는 척을 하면 그만이니까 그냥 이대로 있어도 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품에 안겨서는 숨도 내 마음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이러다간 호흡곤란으로 쓰러질 지경이었다. 하는 수 없이 조용히 몸을 빼보기로 했다.
아! 역시 그러기엔 아깝다. 바로 눈앞에 그가 있는데. 크지 않은 콧구멍, 도도한 눈썹 뼈, 붉고 선명한 입술. 전부터 마주하고 싶었던 얼굴이었다.
술이 머리를 마비시킨 걸까? 입맞춤을 하고 싶은 주책 맞은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술은 내게 점잖은 채는 송두리 가져가버리고 눈앞의 이익에 눈 먼 여자로 만들고 만 것이다. 그의 입술은 배고픈 아이 앞에 있는 찐빵과 같았다. 물리치기 힘든 유혹이었고, 뿌리칠 이유도 없는 먹잇감이었다. 숨을 죽이고 그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조준도 잘되어서 그의 입술에 정확히 내 입술이 닿았다. 만세. 도둑키스를 성공한 것이다. 도톰한 입체감이 살아있는 아주 부드러운 입술이었다. 이런 입술을 가진 남자가 내 곁에 있다니.
다행히 그는 깨지 않았다. 여전히 아쉬움이 남았지만 완전범죄를 위해 조심조심 몸을 밑으로 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팔은 생각보다 무거워 쉽지는 않았다. 거기에다 몸을 밀착시킨 채 계속 아래로 내려간다는 것은 처음치고는 너무 빠른 진전 같아 민망스럽기도 했다. 또 잠시 고민. 밑이 아니라 옆으로 빠져야겠는 걸. 그의 가슴팍에 손을 대고 천천히 밀기 시작했다. 생각대로 그의 몸과는 서서히 멀어졌다. 이제 성공인가?
“아앗!”
그는 마치 뒤통수를 갑작스레 맞은 사람처럼 눈을 떴고 우린 그런 자세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깜짝 놀란 나와 깜짝 놀란 그가 누운 채로 마주보고 있었다. 내 두 손은 그의 가슴에 올려진 채였다. 정확히 그의 가슴에 말이다. 완전 성추행으로 보일 정도로.
“일어나셨어요?”
“잘 잤어요?”
이상한 포즈로 어색한 인사를 나눈 우리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뒷머리는 새집모양이었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 눈은 팬더처럼 화장이 번진 채였다. 미숙한 화장술을 그렇게도 원망한 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서로의 실체를 보고만 것이었다.
“사람들이 출근할 시간이군요.”
그렇다. 밤은 끝났고 이제 어색함과 민망함만 남은 것이었다. 그도 민망했던지 서둘러 셔츠를 입었다.
“홍주씨, 몸은 괜찮아요?”
“어지러워요.”
“저 밖에 출근한 직원은 아마도 김 과장님일 거예요. 항상 제일 먼저 출근을 하시니까. 이렇게 합시다. 창고에는 저 혼자만 있던 거예요. 당신은 지금 나가자마자 집으로 가도록 해요. 김 과장님께는 제가 말씀을 잘 드리겠어요. 입이 무거운 분이시니까 비밀을 지켜주실 겁니다.”
어젯밤의 일을 아무도 모르게 묻어버리자는 말이었다. 그러는 게 좋겠어. 아무래도 회사 사람들 눈이 있으니까.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찬영씨는 문을 두들기며 갇힌 사실을 알렸다.
***
다음날 회사로 출근하는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와 친해졌다는 기쁨은 잠시 그에게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는 것이었다. 어제의 사건이 그냥 조금 더 친해진 것뿐인지 아니면 그가 보여줬던 친밀감만큼 날 특별하게 여기는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몸을 가깝게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컸다.
‘조금은 친해진 거야, 분명해. 근데 그런 상황이라면 서로 모른 척을 할 수도 없는 거니 그 정도 대화는 당연한 거 아닌가? 아니, 아니. 서로 가깝게 느낀 게 맞을 거야.’
병가로 처리됐던 어제, 왼쪽으로 갔던 시계추가 오른쪽을 향하는 것처럼 지겨울 만큼 했던 생각들이었다. 그 생각은 지하철을 이용하는 출근길까지 이어졌고 급기야 두 정거장을 지나치고 말았다.
‘일단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하자. 그의 반응도 보면 알겠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사람들이 눈치재지 못하게 하는 게 중요한 거야, 지금은!’
회사 앞에서 심호흡을 세 번이나 하고서야 문을 열 수 있었다. 이미 출근시간 10분이나 넘긴 시간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내 모습을 보자마자 사촌언니 명주가 호들갑을 떨며 다가왔다.
“홍주야! 어제 아팠어? 그거 할 때도 아니잖아? 어디가 아팠는데?”
“머리가. 이젠 괜찮아.”
“너 그거 모르지? 어제 우리 회사 도둑 들었어.”
모를 리가 있나. 대면까지 했는데. 직원들 입단속은 확실히 된 모양이었다.
“도둑? 뭘 훔쳐갔는데?”
도난피해상황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나는 연기 반, 진짜 호기심 반으로 다소 높은 목소리로 물었다.
“특별히 가져간 건 없다고 하더라. 여러 서류 파일들이 흩어져 있긴 했지만 가져간 건 없고, 유리씨는 서랍에 mp3도 들어있었는데 그대로 있었대.”
“서랍을 잠가 두었겠지.”
“아니래. 열려 있었다던데. 성대리는 결혼반지가 거추장스러워서 잠깐 빼놓은 걸 잊고 서랍에 넣고 그냥 갔는데도 그대로 있었대더라.”
“그럼 피해 본 게 아무것도 없는 거야?”
“아니. 이상한 건 이찬영씨 컴퓨터만 없어진 거야. 통째로.”
“자료야 백업 받으면 되지 그걸 통째로 가져가? 그럼 목적이 컴퓨터였던 거야?”
“노트북도 아닌 걸 선까지 곱게 빼서 가져간 거 보면 이상하잖아. 그리고 컴퓨터라면 더 좋은 것도 많지. 찬영씨 꺼는 2년도 더 된 건데. 노트북들도 몇 대 있는데 굳이 컴퓨터를 가져간 이유가 뭘까? 도둑이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화제지만 그 미스터리 추측이 한창이야.”
쉽게 추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 명이나 침입한 이유가 찬영씨의 컴퓨터 때문이었다니 뭔가 중요한 문제가 얽혀있을 것만 같았다.
“찬영씨가 뭐 스파이쯤으로 몰리는 분위기야?”
“그렇게 추측하는 사람도 있지. 혼자 쇼한 거 아니냐는 반응들도 많아.”
“창고에 갇혀있던 건 찬영씨였잖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 아빠한테 들었어.”
언니는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상하긴 하잖아. 그 사람 컴퓨터만 도난당했다는 게.”
“언니두. 그 사람이 마음먹었으면 자료는 얼마든지 빼나갈 수 있지. 일부러 그런 쇼를 벌일 이유가 없잖아.”
“너도 생각이 짧다. 그렇게 해야 나중에 책임 회피가 되지. 가장 아닌 듯하게 보이려고 벌인 쇼. 말 되지 않아? 사람들 의견이 그렇게 모아지는 중이야.”
그가 벌인 짓? 그래서 도둑이 들었는데도 그렇게 태연할 수 있었나? 아니다. 나는 그를 믿고 싶다.
밀린 업무를 바쁘게 처리하다보니 어느새 오후 3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대충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 명주가 홍주를 보며 부지런히 턱을 문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건 커피타임을 가지자는 그녀의 신호였다.
“일이 그렇게 좋냐? 아무리 신호를 해도 못 보더라. 턱을 백만 번은 문질렀을 걸.”
“미안. 정신이 없더라고.”
“홍주야!”
“응?”
“너 찬영씨 아직도 좋아해?”
회사에선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명주를 친언니이상으로 따랐기에 그에 대한 호감을 예전에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갑자기 그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뭘까?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걸까? 나는 천천히 종이컵에서 입을 떼며 물었다.
“그건 왜 물어?”
“그냥 돕고 싶어서 그래. 사람 보니까 나쁘지 않은 거 같고. 여자 문제도 깨끗한 거 같고. 어때 도와줘?”
언니가 도와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될 분위기라고. 하지만 큰 지원이 될 것도 같아 고민스러웠다.
“어떻게 도와줄 건데?”
“티 나는 건 좋지 않으니까 어떤 여자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알아다 줄게. 어때?”
“괜찮을까?”
“괜찮지 않을 이유가 뭐야? 자연스런 기회를 만들어 이상형은 어떤 스타일이에요, 살짝 묻기만 하는 건데.”
“고마워, 언니. 언니밖에 없다, 진짜.”
하늘이 그와 연결을 해주려 돕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5달 동안 아무 진전 없던 우리 사이에 가까워질 일만 생길 수는 없다. 하늘아, 도와라. 연예 한 번 해보자!
일이 잘 풀릴 거라는 기대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것은 내 몸체보다 몇 배는 더 큰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날 매달고 당장 하늘이라도 날 것 같은 기세였다. 그가 결혼을 하자면 어쩌지? 내 상상은 앞서 나갔고 그런 생각은 즐거운 것이었다.
그와 단둘이 마주치게 된 것은 퇴근 시간이 다 된 사무실 복도에서였다. 넥타이를 매지 않은 채 단추가 한 개 풀어놓아 목선이 드러나 있었다. 목걸이를 해도 잘 어울릴 것 같은 목이었다.
“어제는 잘 쉬셨어요? 피곤하셨을 텐데.”
조신한 목소리로 건넨 인사에 그는 “네.”라고 말하며 목례만 하고는 나를 지나쳐갔다. 서로 안부를 물을 만큼 친해진 게 아니었나? 갑자기 하룻밤 놀다가 팽개친 여자가 된 모욕감이 들었다.
“이찬영씨!”
그가 돌아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예?”
“저 혹시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 건 아니겠죠? 어제 일 사람들이 알게 되면 곤란하니까요.”
“부장님만 알고 계시니 걱정 안하셔도 될 겁니다.”
또 돌아서 가는 그.
“이찬영씨! 상사가 말하는데 먼저 등 돌리는 건 어디 예의죠?”
“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입단속이 제대로 된 거냐고 묻잖아요!”
“그건 부장님이 약속하셨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어제 일을 이야기하면서도 어떤 감정이 없다는 저 태도. 그 태도에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다.
“전 부장님을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찬영씨를 어떻게 믿죠?”
“믿지 않으신다면 할 수 없죠.”
기분이 상했다는 식의 말투와 표정. 하지만 내 기분도 상해있었다.
“믿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어떻게 믿을 수가 있냐는 거예요. 구두로 약속하는 건 못 믿겠으니까 문서로 작성을 해주시던가 해야 하는 거 아니냐구요.”
“마음대로 하시죠. 공증이라도 받아야겠다면 그렇게 하시던가요.”
화난 채로 돌아서는 그를 보자 내 질문의 유치함을 깨달은 나는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홍주, 문서는 무슨 문서야? 먼저 보호해주려 했던 건 그 사람인데!’
벽에 머리를 찧어 보았지만 막막한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
우울했던 그날 밤 몇 번이나 명주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언니와 기분 좋게 수다를 떨 기분도 아니었고 그에게 많이 쏠려버린 내 마음을 들키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한동안 담그고 나니 기분이 조금은 부드러워졌고 그제서야 명주언니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전화를 걸었다.
“너 뭐야? 말도 안하고 먼저 퇴근하고 전화도 안받고.”
“미안. 깜박 잠이 들었었나봐. 몸이 좋지 않더라고.”
“여하튼 알아냈어.”
“뭘?”
“찬영씨 이상형.”
자존심이 상했지만 궁금했다.
“그래?”
“어째 반응이 시큰둥하다. 말하지 말까?”
“아니야. 언니. 말해줘.”
“글쎄 나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긴 했어. 굳이 궁금한 거 아니면 듣지 않는 게 나을 지도 모르겠다.”
“뭔데 뭔데?”
명주 언니는 자신의 알아온 정보의 가격을 높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키 작고 귀여운 스타일이 좋대.”
“키 작고 귀여운, 그럼 난 아니네.”
“솔직히 넌 아니지. 넌 키 크고 섹시한 스타일이니까.”
그런 것이었다. 나는 그의 이상형과는 아주 거리가 먼 여자였다. 그가 싫어할 지도 모르는 타입의 여자. 그의 냉정함의 이유를 알 게 된 것이었다.
‘역시 그는 날 좋아하지 않아. 그렇다면 그날의 다정함은 뭐였지? 우리가 꼬옥 안고 있었던 것, 그건 내가 덮친 거란 말이야?’
** 반칙사랑 - 02. 그의 이상형은?
** 반칙사랑 - 제 2 편 :
‘이건 누구도 원치 않았던 거야. 아니,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란 거지. 술김, 아니, 잠결에 벌어진 일일거야. 너무 추워서 그랬겠지. 서로 가깝게 가려다보니 생긴 일이라고!’
잠시 먼저 몸을 일으켜야 하나 아님 그가 먼저 깨도록 해야 하는 하나 망설이고 있었다. 그가 먼저 깬다면 모르는 척을 하면 그만이니까 그냥 이대로 있어도 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품에 안겨서는 숨도 내 마음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이러다간 호흡곤란으로 쓰러질 지경이었다. 하는 수 없이 조용히 몸을 빼보기로 했다.
아! 역시 그러기엔 아깝다. 바로 눈앞에 그가 있는데. 크지 않은 콧구멍, 도도한 눈썹 뼈, 붉고 선명한 입술. 전부터 마주하고 싶었던 얼굴이었다.
술이 머리를 마비시킨 걸까? 입맞춤을 하고 싶은 주책 맞은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술은 내게 점잖은 채는 송두리 가져가버리고 눈앞의 이익에 눈 먼 여자로 만들고 만 것이다. 그의 입술은 배고픈 아이 앞에 있는 찐빵과 같았다. 물리치기 힘든 유혹이었고, 뿌리칠 이유도 없는 먹잇감이었다. 숨을 죽이고 그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조준도 잘되어서 그의 입술에 정확히 내 입술이 닿았다. 만세. 도둑키스를 성공한 것이다. 도톰한 입체감이 살아있는 아주 부드러운 입술이었다. 이런 입술을 가진 남자가 내 곁에 있다니.
다행히 그는 깨지 않았다. 여전히 아쉬움이 남았지만 완전범죄를 위해 조심조심 몸을 밑으로 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팔은 생각보다 무거워 쉽지는 않았다. 거기에다 몸을 밀착시킨 채 계속 아래로 내려간다는 것은 처음치고는 너무 빠른 진전 같아 민망스럽기도 했다. 또 잠시 고민. 밑이 아니라 옆으로 빠져야겠는 걸. 그의 가슴팍에 손을 대고 천천히 밀기 시작했다. 생각대로 그의 몸과는 서서히 멀어졌다. 이제 성공인가?
“아앗!”
그는 마치 뒤통수를 갑작스레 맞은 사람처럼 눈을 떴고 우린 그런 자세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깜짝 놀란 나와 깜짝 놀란 그가 누운 채로 마주보고 있었다. 내 두 손은 그의 가슴에 올려진 채였다. 정확히 그의 가슴에 말이다. 완전 성추행으로 보일 정도로.
“일어나셨어요?”
“잘 잤어요?”
이상한 포즈로 어색한 인사를 나눈 우리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뒷머리는 새집모양이었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 눈은 팬더처럼 화장이 번진 채였다. 미숙한 화장술을 그렇게도 원망한 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서로의 실체를 보고만 것이었다.
“사람들이 출근할 시간이군요.”
그렇다. 밤은 끝났고 이제 어색함과 민망함만 남은 것이었다. 그도 민망했던지 서둘러 셔츠를 입었다.
“홍주씨, 몸은 괜찮아요?”
“어지러워요.”
“저 밖에 출근한 직원은 아마도 김 과장님일 거예요. 항상 제일 먼저 출근을 하시니까. 이렇게 합시다. 창고에는 저 혼자만 있던 거예요. 당신은 지금 나가자마자 집으로 가도록 해요. 김 과장님께는 제가 말씀을 잘 드리겠어요. 입이 무거운 분이시니까 비밀을 지켜주실 겁니다.”
어젯밤의 일을 아무도 모르게 묻어버리자는 말이었다. 그러는 게 좋겠어. 아무래도 회사 사람들 눈이 있으니까.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찬영씨는 문을 두들기며 갇힌 사실을 알렸다.
***
다음날 회사로 출근하는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와 친해졌다는 기쁨은 잠시 그에게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는 것이었다. 어제의 사건이 그냥 조금 더 친해진 것뿐인지 아니면 그가 보여줬던 친밀감만큼 날 특별하게 여기는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몸을 가깝게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컸다.
‘조금은 친해진 거야, 분명해. 근데 그런 상황이라면 서로 모른 척을 할 수도 없는 거니 그 정도 대화는 당연한 거 아닌가? 아니, 아니. 서로 가깝게 느낀 게 맞을 거야.’
병가로 처리됐던 어제, 왼쪽으로 갔던 시계추가 오른쪽을 향하는 것처럼 지겨울 만큼 했던 생각들이었다. 그 생각은 지하철을 이용하는 출근길까지 이어졌고 급기야 두 정거장을 지나치고 말았다.
‘일단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하자. 그의 반응도 보면 알겠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사람들이 눈치재지 못하게 하는 게 중요한 거야, 지금은!’
회사 앞에서 심호흡을 세 번이나 하고서야 문을 열 수 있었다. 이미 출근시간 10분이나 넘긴 시간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내 모습을 보자마자 사촌언니 명주가 호들갑을 떨며 다가왔다.
“홍주야! 어제 아팠어? 그거 할 때도 아니잖아? 어디가 아팠는데?”
“머리가. 이젠 괜찮아.”
“너 그거 모르지? 어제 우리 회사 도둑 들었어.”
모를 리가 있나. 대면까지 했는데. 직원들 입단속은 확실히 된 모양이었다.
“도둑? 뭘 훔쳐갔는데?”
도난피해상황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나는 연기 반, 진짜 호기심 반으로 다소 높은 목소리로 물었다.
“특별히 가져간 건 없다고 하더라. 여러 서류 파일들이 흩어져 있긴 했지만 가져간 건 없고, 유리씨는 서랍에 mp3도 들어있었는데 그대로 있었대.”
“서랍을 잠가 두었겠지.”
“아니래. 열려 있었다던데. 성대리는 결혼반지가 거추장스러워서 잠깐 빼놓은 걸 잊고 서랍에 넣고 그냥 갔는데도 그대로 있었대더라.”
“그럼 피해 본 게 아무것도 없는 거야?”
“아니. 이상한 건 이찬영씨 컴퓨터만 없어진 거야. 통째로.”
“자료야 백업 받으면 되지 그걸 통째로 가져가? 그럼 목적이 컴퓨터였던 거야?”
“노트북도 아닌 걸 선까지 곱게 빼서 가져간 거 보면 이상하잖아. 그리고 컴퓨터라면 더 좋은 것도 많지. 찬영씨 꺼는 2년도 더 된 건데. 노트북들도 몇 대 있는데 굳이 컴퓨터를 가져간 이유가 뭘까? 도둑이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화제지만 그 미스터리 추측이 한창이야.”
쉽게 추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 명이나 침입한 이유가 찬영씨의 컴퓨터 때문이었다니 뭔가 중요한 문제가 얽혀있을 것만 같았다.
“찬영씨가 뭐 스파이쯤으로 몰리는 분위기야?”
“그렇게 추측하는 사람도 있지. 혼자 쇼한 거 아니냐는 반응들도 많아.”
“창고에 갇혀있던 건 찬영씨였잖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 아빠한테 들었어.”
언니는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상하긴 하잖아. 그 사람 컴퓨터만 도난당했다는 게.”
“언니두. 그 사람이 마음먹었으면 자료는 얼마든지 빼나갈 수 있지. 일부러 그런 쇼를 벌일 이유가 없잖아.”
“너도 생각이 짧다. 그렇게 해야 나중에 책임 회피가 되지. 가장 아닌 듯하게 보이려고 벌인 쇼. 말 되지 않아? 사람들 의견이 그렇게 모아지는 중이야.”
그가 벌인 짓? 그래서 도둑이 들었는데도 그렇게 태연할 수 있었나? 아니다. 나는 그를 믿고 싶다.
밀린 업무를 바쁘게 처리하다보니 어느새 오후 3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대충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 명주가 홍주를 보며 부지런히 턱을 문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건 커피타임을 가지자는 그녀의 신호였다.
“일이 그렇게 좋냐? 아무리 신호를 해도 못 보더라. 턱을 백만 번은 문질렀을 걸.”
“미안. 정신이 없더라고.”
“홍주야!”
“응?”
“너 찬영씨 아직도 좋아해?”
회사에선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명주를 친언니이상으로 따랐기에 그에 대한 호감을 예전에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갑자기 그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뭘까?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걸까? 나는 천천히 종이컵에서 입을 떼며 물었다.
“그건 왜 물어?”
“그냥 돕고 싶어서 그래. 사람 보니까 나쁘지 않은 거 같고. 여자 문제도 깨끗한 거 같고. 어때 도와줘?”
언니가 도와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될 분위기라고. 하지만 큰 지원이 될 것도 같아 고민스러웠다.
“어떻게 도와줄 건데?”
“티 나는 건 좋지 않으니까 어떤 여자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알아다 줄게. 어때?”
“괜찮을까?”
“괜찮지 않을 이유가 뭐야? 자연스런 기회를 만들어 이상형은 어떤 스타일이에요, 살짝 묻기만 하는 건데.”
“고마워, 언니. 언니밖에 없다, 진짜.”
하늘이 그와 연결을 해주려 돕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5달 동안 아무 진전 없던 우리 사이에 가까워질 일만 생길 수는 없다. 하늘아, 도와라. 연예 한 번 해보자!
일이 잘 풀릴 거라는 기대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것은 내 몸체보다 몇 배는 더 큰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날 매달고 당장 하늘이라도 날 것 같은 기세였다. 그가 결혼을 하자면 어쩌지? 내 상상은 앞서 나갔고 그런 생각은 즐거운 것이었다.
그와 단둘이 마주치게 된 것은 퇴근 시간이 다 된 사무실 복도에서였다. 넥타이를 매지 않은 채 단추가 한 개 풀어놓아 목선이 드러나 있었다. 목걸이를 해도 잘 어울릴 것 같은 목이었다.
“어제는 잘 쉬셨어요? 피곤하셨을 텐데.”
조신한 목소리로 건넨 인사에 그는 “네.”라고 말하며 목례만 하고는 나를 지나쳐갔다. 서로 안부를 물을 만큼 친해진 게 아니었나? 갑자기 하룻밤 놀다가 팽개친 여자가 된 모욕감이 들었다.
“이찬영씨!”
그가 돌아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예?”
“저 혹시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 건 아니겠죠? 어제 일 사람들이 알게 되면 곤란하니까요.”
“부장님만 알고 계시니 걱정 안하셔도 될 겁니다.”
또 돌아서 가는 그.
“이찬영씨! 상사가 말하는데 먼저 등 돌리는 건 어디 예의죠?”
“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입단속이 제대로 된 거냐고 묻잖아요!”
“그건 부장님이 약속하셨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어제 일을 이야기하면서도 어떤 감정이 없다는 저 태도. 그 태도에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다.
“전 부장님을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찬영씨를 어떻게 믿죠?”
“믿지 않으신다면 할 수 없죠.”
기분이 상했다는 식의 말투와 표정. 하지만 내 기분도 상해있었다.
“믿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어떻게 믿을 수가 있냐는 거예요. 구두로 약속하는 건 못 믿겠으니까 문서로 작성을 해주시던가 해야 하는 거 아니냐구요.”
“마음대로 하시죠. 공증이라도 받아야겠다면 그렇게 하시던가요.”
화난 채로 돌아서는 그를 보자 내 질문의 유치함을 깨달은 나는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홍주, 문서는 무슨 문서야? 먼저 보호해주려 했던 건 그 사람인데!’
벽에 머리를 찧어 보았지만 막막한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
우울했던 그날 밤 몇 번이나 명주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언니와 기분 좋게 수다를 떨 기분도 아니었고 그에게 많이 쏠려버린 내 마음을 들키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한동안 담그고 나니 기분이 조금은 부드러워졌고 그제서야 명주언니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전화를 걸었다.
“너 뭐야? 말도 안하고 먼저 퇴근하고 전화도 안받고.”
“미안. 깜박 잠이 들었었나봐. 몸이 좋지 않더라고.”
“여하튼 알아냈어.”
“뭘?”
“찬영씨 이상형.”
자존심이 상했지만 궁금했다.
“그래?”
“어째 반응이 시큰둥하다. 말하지 말까?”
“아니야. 언니. 말해줘.”
“글쎄 나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긴 했어. 굳이 궁금한 거 아니면 듣지 않는 게 나을 지도 모르겠다.”
“뭔데 뭔데?”
명주 언니는 자신의 알아온 정보의 가격을 높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키 작고 귀여운 스타일이 좋대.”
“키 작고 귀여운, 그럼 난 아니네.”
“솔직히 넌 아니지. 넌 키 크고 섹시한 스타일이니까.”
그런 것이었다. 나는 그의 이상형과는 아주 거리가 먼 여자였다. 그가 싫어할 지도 모르는 타입의 여자. 그의 냉정함의 이유를 알 게 된 것이었다.
‘역시 그는 날 좋아하지 않아. 그렇다면 그날의 다정함은 뭐였지? 우리가 꼬옥 안고 있었던 것, 그건 내가 덮친 거란 말이야?’
홍주의 진한 알콜의 맛이 뱃속으로부터 느껴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