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칙사랑 - 03. 숨겨진 기억

나비2004.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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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칙 사랑 - 03. 숨겨진 기억


명주 언니의 한마디로 내 마음은 굳게 닫히고 말았다. 관심도 없는 한 여직원과 창고에 갇힌다. 별로 호감이 느껴지지도 않는 여자다. 밤은 길고 할 일은 없다. 술을 마시며 즐겁게 떠든다. 하지만 다음 날 호감을 보이는 그녀는 부담되기만 한다. 그것이 그의 행동의 이유들이었던 것이다. 내 감정은 철저히 조롱당하고 만 것이었다.


‘나쁜 자식! 나도 널 철저히 무시해 주겠어.’


아픈 마음은 그에 대한 미움이 되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그와 한마디 대화도 없이 며칠이 흘러갔다. 꼭 해야 할 말을 할 때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말을 전하곤 했다. 그가 반가운 인사를 건넬 때도 무시하곤 했었다. 그에 대해서는 원망감만 들었고 평소처럼 대할 수 있는 여유가 내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사무실에선 팽팽한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이제 우린 망했어! 뱀새끼들 같으니라고. 남의 회사의 정보를 빼가다니 치사한 새끼들.”


다혈질인 이과장님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고, 과장님 이상 직책의 분들은 서류를 내팽겨치고 있는 과장님을 보고는 모른 척 나가버리셨다. 그들도 그만큼 속이 상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과장님처럼 소리를 지를 순 없었을 뿐이었다.


“그 쪽에선 뭐라고 합니까?”

“오히려 증거를 대라고 큰 소리를 치고 있다고. 이찬영씨!”

“예.”

“우리 얼마나 작업한 거지?”

“삼 개월 정도입니다.”

“삼 개월이나 작업 본 걸 간수를 그따위로 해서 회사에 이런 막대한 피해를 보게 해!”


찬영씨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인 채였다.


“과장님, 광고 시안이 잡지사에 넘어간 건가요?”


내가 물었다. 3개월이나 고생하며 제품 컨셉을 잡고 이름을 짓고 광고시안까지 끝난 제품에 대한 정보를 송두리째 뺏기게 된 것이었다. 우린 자금을 더 모으기 위해서 1개월 정도를 미룬 상태였고 그들이 먼저 광고를 하게 된다면 우린 처음부터 작업을 다시 봐야했다. 그것도 문제였지만 광고시안을 준 광고대행사에서도 아마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일단은 광고대행사의 피해를 보지 않게 하는 게 시급해보였다.


“그렇진 않아. 하지만 넘어간 거랑 다를 바가 없어. 어차피 우리 보다는 일찍 광고가 나가게 될 테니까.”

“일주일 만에 광고 시안까지 도용할 생각을 하다니 빠르군요, 정말.”

“우리가 치기 전에 칠 생각이었겠지. 우리 같은 작은 회사를 상대로, 정말 지독한 놈들이야.”

“우리 쪽 광고 대행사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그렇겠지. 그 쪽에서 우리를 고소한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상대 회사를 고소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 아이디어를 뺏긴 건 그 쪽도 마찬가지니까. 우린 아직 광고료를 지불하지도 않았고.”

“일단 하양주류 광고 대행사부터 가보겠습니다.”


찬영씨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찬영씨는 자리에 앉아요. 제가 가겠어요.”

“아닙니다. 제가 책임이 있는 일이니 제가 가겠습니다.”

“그러니까 보낼 수 없다는 거 아니에요. 당신을 믿을 수가 없잖아요. 자료가 나간 것도 당신 때문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분위기 몰라요! 예전부터 사람들을 당신을 의심하고 있었다구요! 이 일에 대해서 상관 말고 당신은 시말서 쓸 준비나 해요!”


지나친 비난에 사람들도 말을 잃고 있었다. 나도 말이 심한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의심되는 사람은 그였다. 여전히 말도 못한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를 뒤로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하지만 건물을 빠져나가기 전 그에게 어깨를 잡히고 말았다.


“홍주씨, 전 결백합니다!”

“그거야 밝혀지겠죠.”

“절 의심하시는 겁니까?”

“·······.”

“말해 봐요, 날 의심하는 거냐고요!”

“그래요, 당신이 제일 의심스러워요!”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전 홍주씨는 날 믿어줄 거라 생각했어요. 제 생각이 틀렸군요.”


그는 처진 어깨를 보이며 뒤돌아섰고, 난 주저 없이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를 믿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친절하던 당신이 갑자기 냉담해졌잖아요. 당신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죠? 흔들리는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 상대 광고회사의 담당자는 생각보다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예. 무슨 일이시죠? 송진주류라면 다른 광고 대행사를 쓰시는 걸로 아는데요.”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난 그동안의 일들을 상대회사의 이미지에 손상이 가지 않는 범위로 축소시켜 말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오해라면 저희가 잘 못 알고 왔다는 건가요? 저희는 분명 광고 시안도 갖고 있다고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저도 이런 우연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쪽에서 그 광고 시안을 맡은 지는 한 달 이상이 지났고 시안이 최종적으로 나온 것은 이주정도 지났습니다.”

“예?”

“회사 정보가 없어진 것이 일주일 됐다고 하셨잖습니까? 우리 시안이 나온 것은 이주가 넘었고요 그러니 그 일과는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 증거라면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찬영씨는 이일과 상관이 없다는 말? 애초에 그는 컴퓨터만 잃어버렸을 뿐 일과 관계있다는 증거는 없었다. 그런 그를 난 마치 범인처럼 몰아세운 것이다. 마치 현장범을 잡은 것처럼 굴었으니까. 난 이성을 잃고 저번의 일과 이번의 일을 혼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개인적인 감정으로 그를 믿지 않았던 것이다. 좀 더 냉정하게 생각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결백하다고 외치던, 나만은 그를 믿어줄지 알았다는 그의 말이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예. 조심히 가십시요.”

“협조 감사드립니다.”


건물을 나서는 다리에 점점 힘이 풀리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미심쩍은 것은 있지만 일단은 우연이라고 생각하기로 한 듯 했다. 사람들도 자기 컴퓨터를 통째로 훔치는 멍청한 도둑은 없을 거라는 결론으로 이제 찬영씨를 의심하지 않았다. 모두 정상으로 돌아간 가운데 나와 그만 어색한 관계가 계속되고 있었다.


“홍주야, 너 찬영씨랑 화해 안할 거야?”

“화해라니? 화해하고 말 일이 있나?”

“아까 같이 밥 먹을 때 가관이던데. 서로 쏘아보는 눈빛들이 정상이야? 살기가 느껴지더라. 둘 사이가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해. 이제 오해도 풀렸으니 화해하지 그래? 어차피 네가 잘못한 거잖아.”

“오해는 나만 했나? 다들 오해했잖아.”

“그래두 넌 심했지.”

“나도 미안하게 생각해. 그래두 특별히 사과할 일은 아닌 것 같아. 불편하면 지가 먼저 숙이고 오겠지, 뭐.”

“그래도 네가 먼저······.”

“그 얘기라면 그만하자, 언니.”


난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버렸다. 언니는 너무 과민하다는 반응이었지만 내 마음은 내 의지대로 움직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매일 밤 그에게 사과해야 할 방법을 연구하고 있던 건 나였다. 하지만 친절했던 그가 단 하루 만에 냉담해진 진 것을 보며 관심이 없다는 것, 따뜻한 인사도 건네지 않던 것에 내게 신경조차 쓰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차피 그는 날 싫어하는데, 라는 마음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나만은 그를 믿어줄 거라는 말은 뭐였을까? 그건 자기편을 만들려는 말에 불과해. 내가 자길 좋아하는 사실을 안다는 거겠지. 자존심 상해.’


마음을 굳히고 책상에 앉아 메일을 확인할 때였다.


‘맨 광고 메일이군.’


메일을 보지도 않고 휴지통으로 보내는 것은 일주일쯤 한 번하는 의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다 눈에 띄는 메일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이찬영. 발신일 4월 13일? 창고에 있던 다음 날이잖아.’


[지금쯤 집에서 주무시고 있겠네요.

걱정이 됩니다. 많이 놀라셨을 텐데.

사실 저도 꽤 놀랐답니다. 하지만 정대리님이 있어서 내색은 못했죠.

회사 피해는 있었지만 서로에 대해 알게 되고 가까워진 것 같아서 전 좋은데요, 대리님은요?

이것 참 쑥스럽군요. 어릴 때 연애편지 쓰는 연습을 좀 할 것 그랬습니다.


놀랐을 때 저희 이모가 끓어주시던 게 있었어요.

밀가루대추죽이요.

그것 먹고 자니 가슴도 진정되고 효과가 있었는데

갑자기 그 생각이 나 이모에게 전화를 해 물어봤습니다.

만들기 쉽더라구요. 일단 요리법을 남깁니다.

오늘 꼭 이 메일 보시고 드시고 주무셨으면 좋겠네요. 저도 먹을 생각이랍니다.

······.

이만 적겠습니다. 역시 이런 것은 익숙치않네요.

다음에 우리 반갑게 인사할 수 있겠지요. 정말 좋은 시간이었답니다. 편히 주무세요.]


‘이런!’


내가 집에 가고 난 후에 그는 친절히 내 안부를 물으며 메일을 보냈는데 난 그 사실을 모르고 오해하며 그를 바보처럼 원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때 그 냉랭함은 뭐야? 아니, 쑥스러워서? 쑥스러워 인사를 못한 거야?’


멍청한 자신이 한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직 희망은 있는 거야. 그가 날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고. 피식 피식 웃으며 한참을 메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 어서 사과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늦지 않은 거면 좋겠어. 그에게 가는 게 너무 늦지 않았으면.


“이찬영씨!”

“······.”


화장실을 가는 그를 따라나와 기다렸건만 그는 못 본 척 지나치려 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대답도 하지 않고 돌아서는 그. 가까이서 보니 얼굴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며칠 전까지 보드랍던 피부는 간데없고 까칠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거뭇거뭇 수염도 나있었다. 


“찬영씨, 잠시만요!”

“절 기다린 겁니까?”

“이따 회사 밖에서 뵜으면 좋겠어요.”

“무슨 용건이신지 그냥 이곳에서 말하시죠.”


정 없이 말하는 그를 보자 나도 모르게 내 말투도 굳어갔다.


“참 삐딱하게 구시네요. 좀 마음 넓게 행동하실 수 없어요? 그리고 수염은 뭐예요? 회사 오면서 면도는 하고 다니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용건이 그겁니까? 용모 단정?”


이게 아닌데. 나 역시 삐딱하게 굴고 있다. 당신한테 사과하고 싶단 말이에요! 하지만 이곳은 적절치 못하다. 정식으로 사과가 하고 싶었다.


“절 믿지 못하시겠다는 분이 은밀히 하실 말씀이라도 있는 겁니까?”

“믿지 못해서 이러는 거예요! 저번에 있었던 일 말하고 다니는 것 아니겠죠?”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는 찬영씨. 나도 내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기막히긴 마찬가지였다.


“그야 모르죠.”

“모르다니요? 역시 안 되겠군요. 문서로 작성을 해야겠어요. 당신을 믿을 수 없으니까. 그러니 퇴근 후에 만나요. 안 나오면 알죠! 요 앞 카페에서 기다릴 테니 꼭 나와요!”


반 협박으로 그와 약속을 잡아버리고 퇴근 후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는 내가 도착한 후 20분 정도 되어서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전히 까칠해보였지만 면도는 어디서 하고 온 모양이었다.


‘용모단정이란 말에 면도를 하고 온 거야? 좀 미안해지네.’


미안하긴 했지만 그런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샤프함이 넘치는 그의 모습에 잠시 당황하다 말문을 열었다.


“여기까지 오시라고 해서 죄송해요. 사실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알고 있습니다. 문서는 어디 있죠? 서명만 하면 되는 겁니까?”

“문서는 없어요.”

“없다뇨? 그 정도는 미리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럼 이걸 읽고 서명하시죠.”


그는 서류봉투에서 몇 장의 서류를 꺼냈다.


“이게 뭐예요? 서명이라니.”

“저도 홍주씨를 어떻게 믿습니까? 그 일이 밝혀지면 홍주씨만 피해볼 것 같아요? 저도 문서화했습니다. 읽어 보시죠.”


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가 내민 서류를 바라보았다. 치사한 인간! 진짜 문서를 작성해와? 나는 사과하러 온 사람이라고!


“어디 봐요.”


그의 서류를 거칠게 뺏어들어 읽기 시작했다.


[정홍주(이하 을)은 4월 14일 밤10시에서 4월 15일 아침 8시에 벌어진 일에 대해 발설하지 않는다. ······. 을은 술에 취한 행동으로 갑을 난처하게 만든 책임도 크다. ······.]


“술에 취한 행동이라뇨? 당신을 난처하게 만들었다는 말이 무슨 말이죠?”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겁니까?”

“모르니까 묻는 거 아니에요!”

“당신이 춥다고 내 품을 파고들었잖아요. 안아달라고 울던 거 기억나지 않아요? 어쩐지. 다음 날 기억에 없는 사람처럼 굴더니만. 정말 기억 안나요? 그럼 술 마신 기억은 납니까?”


그래서 내가 그의 품에 안겨있었고, 화장은 다 번져 있었던 거야? 감춰졌던 사건을 알게 된 나는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짐을 느꼈다. 맙소사!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