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리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몸의 떨림이 멈추고 나서야 자신이 한 마디 공격도 못한 채 당하고만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저런 싸가지한테 당하고만 있었다니!”
나는 주먹으로 핸들을 내리쳤다.
“면전에서 재수 없다고 하는데 멍청히 입 다물고 있었어! 그깟 회사가 뭐라고 성질을 죽이고 살아야 되는 건데! 내가 우습게 보였을 거야! 회사로 돌아갈 테니까 혼자 일처리를 하라고 말해야 한 건 나였다고. 멍청했어, 아주 멍청했어.”
하지만 일을 되돌리기는 너무 늦어버려서 잔뜩 화가 난 채로 거래처로 향했다. 그 순간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음악 소리가 차 안 가득 메운 것은 찬영씨 때문이었다.
“예.”
[대리님, 이찬영입니다.]
“알고 있어요.”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외근을 나가셨더라구요.]
“그런데요?”
[회사 다시 들어오시나요? 뵙고 싶은데.]
“그냥 바로 퇴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난 그와 통화를 하는 건지 혼자 말을 하는 건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 도대체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한 거지? 억울한 감정이 날 지배하고 있었다.
[웬만하면 다시 오시죠.]
“여보세요. 이찬영씨! 내가 당신이 들어오라면 들어가야 하는 사람인가요?”
[무슨 일이에요?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데.]
“당신이 신경 쓸 일 아니에요! 제가 한가한 사람인 줄 착각하나 본데요, 당신이 만나자면 만날 사람이 아니에요, 알아들어요?”
[지금 운전 중입니까? 당장 차 세워요.]
“당신이 뭔데 차를 세우라 마라에요?”
[흥분 상태로 운전하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구 그래요. 당신 문제는 금방 흥분해버리는 거라고요. 차 세워요, 당장!]
“싫어요! 당신도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어요!”
[가는 곳이 화곡동 거래처 맞죠?]
“일일이 보고를 하라는 건가요? 기분 나쁘군요. 이만 끊겠어요.”
‘나 참 기막혀서. 이번 신입사원들은 날 뭘로 보는 거야? 다 지들이 알아서 하네.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올 테면 와보라고 해. 안 만나면 그만이니까.’
찬영씨의 일방적인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 찬영이 자신을 염려한 행동이었다고 깨달은 것은 거래처에 도착해 화가 누그러진 다음이었다.
***
“키 주세요.”
거래처에서 나오자 차 앞에 찬영이 서 있었다. 괜한 화풀이를 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순순히 차키를 내주었다. 운전석에 앉은 찬영씨는 차분한 음악이 나오는 라디오에 주파수를 맞추고 말했다.
“누가 기분을 상하게 한겁니까? 운전하다가 싸웠어요?”
“아니에요. 아까는 죄송했어요. 찬영씨한테 화를 내는 게 아니었는데.”
“흥분을 잘 하는 성격인가봐요?”
“제가요?”
“네. 예전에 창고에 있을 때도 계속 흥분하는 바람에 제가 애 먹었죠.”
창고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꼈다.
“그 날 일은 잊고 싶어요.”
“왜요?”
찬영은 홍주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좋은 기억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도둑들이 들었고 회사에 피해가 있었으니.”
“그 덕분에 우리가 친해졌으니 하나는 건진 셈이죠. 그것도 나쁜 기억인가요?”
단둘이 있을 때의 그에게선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난 긴장한 탓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홍주씨는 클래식 좋아하죠? 누구를 좋아해요?”
“바하요. 특히 골든베르그 변주곡을 좋아해요.”
“예상대로네요.”
“예상했었다고요?”
“쉽잖아요. 옷은 검은 옷을 즐겨 입고 커피는 설탕과 프림을 넣지 않은 블랙을 좋아하고 클래식을 좋아하며 바하를 즐겨듣는다.”
“아니요. 설탕은 좋아해요.”
“커피엔 설탕을 넣지 않잖아요.”
“그렇긴 해요. 그런데 그 세 가지가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글쎄요. 상관이 없나? 아무튼 노랑색 옷을 입어도 블랙 커피를 마시고 바하를 들을 거잖아요.”
“그렇긴 하죠.”
귀엽고 통통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찬영씨에게 그런 느낌으로 보였다는 것이 즐거운 사실은 아니었다.
‘나 당신 때문에 바뀌고 있는 거 알아요? 아직 당신에게 소리부터 지르는 나쁜 여자지만 당신 앞에서 귀여운 여자가 되고 싶다고요. 이런 마음 당신 알아요?’
마음의 검은 물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연한 베이지색으로 물드는 것 같았다. 싸움과 미움으로 얼룩져 있던 내 마음이 단 한 사람에 의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어디로 가나요?”
운전을 하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홍주씨 옷 사러 갑니다. 그래야 옷 입는 것에 참견할 권리를 얻는다면서요?”
그가 골라준 옷은 진한 핑크색 원피스였다. 뒤에 리본이 달린 여성스러운 원피스. 옷을 사준 며칠 뒤 용기를 내어 그 옷을 입었고 좋은 기분으로 출근을 했다. 하지만 그 기분은 명주 언니의 몇 마디 말로 그야말로 엉망이 되고 말았다. 명주언니에게도 그와 만나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었다. 언니는 그것을 모른 채였다.
“찬영씨 여자 친구 있다더라.”
“그런 소문이 돌아?”
“아니. 내가 직접 물어봤어. 소개팅이나 할래요, 하고 떠봤지. 사귄지 3년쯤 된 애인이 있다고 하더라고. 잘됐지, 뭐냐. 아직 네가 좋아하는 건 모를 테니까. 물어보길 잘했지?”
‘애인? 3년이 된 애인?’
명주 언니와 함께 화장을 고치고 있던 손이 힘을 잃고 떨어져 버렸다. 두 손은 진홍색 원피스 위에 놓여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문득 멀었던 그, 자주 만나면서도 사귀자는 정식 프러포즈가 없던 것. 그래서였어? 당신한테 딴 여자가 있는 거야?
“누군지는 물어봤어?”
말을 간신히 뱉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러고 있으면 눈물을 잠시는 참을 수 있다.
“누구냐고 물어보다니?”
“어, 어떤 여자인지는 물어봤냐고.”
“너 내 생각보다 심각했구나! 홍주야, 그 남자가 죽도록 좋아? 그런 건 아니지?”
“아니야, 언니.”
“그럼 잊어. 여자 있는 남자를 만나는 건 아니잖아. 홍주, 너 괜찮은 거야? 떨고 있잖아.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네. 잊자, 잊어.”
언니는 내 두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내가 소개팅 해줄게. 그 놈아 보다 멋진 남자로. 아직 시작도 안 된 사이인데 미련 버려. 다른 남자 만나면 곧 잊게 될 거야.”
나는 소개팅을 해준다는 언니의 말보다 자존심이 으깨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잊어야겠지, 그런 사람은. 애인이 있는 남자를 좋아할 순 없는 거니까.”
당장 원피스를 벗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지워지지 않는 그에 대한 마음처럼 벗어낼 수는 없었다. 그 날 그에게 먼저 만나자고 한 건 나였다. 내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는 웃으며 날 맞았다.
“오늘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카페로 오라고 하셨군요. 다음에 가도록 하죠. 옷이 잘 어울려요. 귀여운데요.”
다음? 베시시 웃고 있는 그의 얼굴에 원피스를 벗어 던지고 싶어졌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뵙자고 했어요. 오늘 찬영씨에게 애인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틀린 말 아니군요. 사실입니다.”
믿고 싶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분명히 나온 말이었다. 난 그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그게 더 자존심이 상하는 일 같아 그만두었다. 떨리는 손으로 물 컵을 잡았을 때 그가 말했다.
“그게 우리가 만나는 일에 상관이 있는 건가요?”
“상관이 없을 수도 있겠죠. 개인적인 질문을 해서도 안 되는 관계라 해도 이상할 건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방금 물을 마셨는데도 마른 침이 삼켜졌다.
“저는 상관이 있었네요. 죄송합니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 볼게요.”
그가 따라 나왔지만 무시하고 차에 올랐다. 급하게 출발을 시키자 그도 차를 타고 내 바로 뒤를 따라왔다. 그가 전화를 하고 신호를 보냈지만 계속 무시하면서 집으로 향했다. 거의 동시에 우린 집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무시할 거야, 당신!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갈 거라고. 하지만 그는 대문을 여는 내 손을 잡아챘다.
“얘기 좀 해요. 그렇게 가버리는 게 어디 있어요!”
“할 말이 없네요. 아무 얘기도 듣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내가 화난 상태로 운전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왜 내 말을 듣지 않는 겁니까!”
“충고 고맙네요. 다행이 화나지 않았어요. 그냥 당신과 대면하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우리 싸워야 하는 겁니까? 그냥 평소처럼 지내면 안 되는 거냐고요.”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서 그래요? 내 입으로 꼭 말해줘야 하는 거냐고요! 그래요. 나 당신 좋아했어요. 그런데 애인이 있다는 말 듣고 싫어졌어요. 당신이랑 밥 먹기도 싫고 웃고 떠드는 것도 싫어요! 얼굴 보기도 싫다고요. 대체 왜 나한테 잘 해준 거예요? 사람 오해하게 왜 그따위로 행동해요!”
“그렇게 하고 싶어서 했습니다. 지금도 홍주씨랑 불편하게 지내고 싶지 않아서 따라온 거구요.”
좋아한다는 내 말과 다르다. 그는 그저 불편함이 싫은 것뿐이다.
“자, 당신이 원하는 게 그거죠? 감정 없이 나랑 친하게 지내는 거. 당신 같이 잘난 사람이 왜 나랑 친하게 지내려는지 모르겠군요. 아, 그건가요? 내가 사장 딸이라서? 이거 좋은 감투였네. 몰랐어요. 당신 원하는 대로 해줄게요. 나도 아빠 회사 사람이랑 불편하게 지내고 싶지 않으니까.”
“왜 이리 사람이 꼬여 있어요! 그 말이 아니잖아요. 당신이랑 잘 지내고 싶다고요. 나도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잘 되지 않아요. 어느 순간 보면 당신과 웃고 있어요. 그게 즐겁고. 그냥 그 걸로는 안 되겠습니까? 서로 만나면 즐거운데 만나면 안 되는 가냐구요.”
“당신 뜻대로 해준다고 했잖아요. 그만 가요. 나 피곤해요. 소리치고 싶지도 않아요.”
난 그를 버려두고 돌아서 대문을 열었다. 집에 가면 마음껏 울 수 있을 것이다. 어서 들어가고 싶었지만 눈앞이 흐려져 열쇠는 구멍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 반칙사랑 - 06. 베이지로 물드는 마음
** 반칙사랑 - 06. 베이지로 물드는 마음
정신을 차리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몸의 떨림이 멈추고 나서야 자신이 한 마디 공격도 못한 채 당하고만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저런 싸가지한테 당하고만 있었다니!”
나는 주먹으로 핸들을 내리쳤다.
“면전에서 재수 없다고 하는데 멍청히 입 다물고 있었어! 그깟 회사가 뭐라고 성질을 죽이고 살아야 되는 건데! 내가 우습게 보였을 거야! 회사로 돌아갈 테니까 혼자 일처리를 하라고 말해야 한 건 나였다고. 멍청했어, 아주 멍청했어.”
하지만 일을 되돌리기는 너무 늦어버려서 잔뜩 화가 난 채로 거래처로 향했다. 그 순간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음악 소리가 차 안 가득 메운 것은 찬영씨 때문이었다.
“예.”
[대리님, 이찬영입니다.]
“알고 있어요.”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외근을 나가셨더라구요.]
“그런데요?”
[회사 다시 들어오시나요? 뵙고 싶은데.]
“그냥 바로 퇴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난 그와 통화를 하는 건지 혼자 말을 하는 건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 도대체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한 거지? 억울한 감정이 날 지배하고 있었다.
[웬만하면 다시 오시죠.]
“여보세요. 이찬영씨! 내가 당신이 들어오라면 들어가야 하는 사람인가요?”
[무슨 일이에요?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데.]
“당신이 신경 쓸 일 아니에요! 제가 한가한 사람인 줄 착각하나 본데요, 당신이 만나자면 만날 사람이 아니에요, 알아들어요?”
[지금 운전 중입니까? 당장 차 세워요.]
“당신이 뭔데 차를 세우라 마라에요?”
[흥분 상태로 운전하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구 그래요. 당신 문제는 금방 흥분해버리는 거라고요. 차 세워요, 당장!]
“싫어요! 당신도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어요!”
[가는 곳이 화곡동 거래처 맞죠?]
“일일이 보고를 하라는 건가요? 기분 나쁘군요. 이만 끊겠어요.”
‘나 참 기막혀서. 이번 신입사원들은 날 뭘로 보는 거야? 다 지들이 알아서 하네.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올 테면 와보라고 해. 안 만나면 그만이니까.’
찬영씨의 일방적인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 찬영이 자신을 염려한 행동이었다고 깨달은 것은 거래처에 도착해 화가 누그러진 다음이었다.
***
“키 주세요.”
거래처에서 나오자 차 앞에 찬영이 서 있었다. 괜한 화풀이를 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순순히 차키를 내주었다. 운전석에 앉은 찬영씨는 차분한 음악이 나오는 라디오에 주파수를 맞추고 말했다.
“누가 기분을 상하게 한겁니까? 운전하다가 싸웠어요?”
“아니에요. 아까는 죄송했어요. 찬영씨한테 화를 내는 게 아니었는데.”
“흥분을 잘 하는 성격인가봐요?”
“제가요?”
“네. 예전에 창고에 있을 때도 계속 흥분하는 바람에 제가 애 먹었죠.”
창고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꼈다.
“그 날 일은 잊고 싶어요.”
“왜요?”
찬영은 홍주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좋은 기억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도둑들이 들었고 회사에 피해가 있었으니.”
“그 덕분에 우리가 친해졌으니 하나는 건진 셈이죠. 그것도 나쁜 기억인가요?”
단둘이 있을 때의 그에게선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난 긴장한 탓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홍주씨는 클래식 좋아하죠? 누구를 좋아해요?”
“바하요. 특히 골든베르그 변주곡을 좋아해요.”
“예상대로네요.”
“예상했었다고요?”
“쉽잖아요. 옷은 검은 옷을 즐겨 입고 커피는 설탕과 프림을 넣지 않은 블랙을 좋아하고 클래식을 좋아하며 바하를 즐겨듣는다.”
“아니요. 설탕은 좋아해요.”
“커피엔 설탕을 넣지 않잖아요.”
“그렇긴 해요. 그런데 그 세 가지가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글쎄요. 상관이 없나? 아무튼 노랑색 옷을 입어도 블랙 커피를 마시고 바하를 들을 거잖아요.”
“그렇긴 하죠.”
귀엽고 통통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찬영씨에게 그런 느낌으로 보였다는 것이 즐거운 사실은 아니었다.
‘나 당신 때문에 바뀌고 있는 거 알아요? 아직 당신에게 소리부터 지르는 나쁜 여자지만 당신 앞에서 귀여운 여자가 되고 싶다고요. 이런 마음 당신 알아요?’
마음의 검은 물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연한 베이지색으로 물드는 것 같았다. 싸움과 미움으로 얼룩져 있던 내 마음이 단 한 사람에 의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어디로 가나요?”
운전을 하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홍주씨 옷 사러 갑니다. 그래야 옷 입는 것에 참견할 권리를 얻는다면서요?”
그가 골라준 옷은 진한 핑크색 원피스였다. 뒤에 리본이 달린 여성스러운 원피스. 옷을 사준 며칠 뒤 용기를 내어 그 옷을 입었고 좋은 기분으로 출근을 했다. 하지만 그 기분은 명주 언니의 몇 마디 말로 그야말로 엉망이 되고 말았다. 명주언니에게도 그와 만나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었다. 언니는 그것을 모른 채였다.
“찬영씨 여자 친구 있다더라.”
“그런 소문이 돌아?”
“아니. 내가 직접 물어봤어. 소개팅이나 할래요, 하고 떠봤지. 사귄지 3년쯤 된 애인이 있다고 하더라고. 잘됐지, 뭐냐. 아직 네가 좋아하는 건 모를 테니까. 물어보길 잘했지?”
‘애인? 3년이 된 애인?’
명주 언니와 함께 화장을 고치고 있던 손이 힘을 잃고 떨어져 버렸다. 두 손은 진홍색 원피스 위에 놓여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문득 멀었던 그, 자주 만나면서도 사귀자는 정식 프러포즈가 없던 것. 그래서였어? 당신한테 딴 여자가 있는 거야?
“누군지는 물어봤어?”
말을 간신히 뱉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러고 있으면 눈물을 잠시는 참을 수 있다.
“누구냐고 물어보다니?”
“어, 어떤 여자인지는 물어봤냐고.”
“너 내 생각보다 심각했구나! 홍주야, 그 남자가 죽도록 좋아? 그런 건 아니지?”
“아니야, 언니.”
“그럼 잊어. 여자 있는 남자를 만나는 건 아니잖아. 홍주, 너 괜찮은 거야? 떨고 있잖아.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네. 잊자, 잊어.”
언니는 내 두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내가 소개팅 해줄게. 그 놈아 보다 멋진 남자로. 아직 시작도 안 된 사이인데 미련 버려. 다른 남자 만나면 곧 잊게 될 거야.”
나는 소개팅을 해준다는 언니의 말보다 자존심이 으깨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잊어야겠지, 그런 사람은. 애인이 있는 남자를 좋아할 순 없는 거니까.”
당장 원피스를 벗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지워지지 않는 그에 대한 마음처럼 벗어낼 수는 없었다. 그 날 그에게 먼저 만나자고 한 건 나였다. 내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는 웃으며 날 맞았다.
“오늘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카페로 오라고 하셨군요. 다음에 가도록 하죠. 옷이 잘 어울려요. 귀여운데요.”
다음? 베시시 웃고 있는 그의 얼굴에 원피스를 벗어 던지고 싶어졌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뵙자고 했어요. 오늘 찬영씨에게 애인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틀린 말 아니군요. 사실입니다.”
믿고 싶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분명히 나온 말이었다. 난 그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그게 더 자존심이 상하는 일 같아 그만두었다. 떨리는 손으로 물 컵을 잡았을 때 그가 말했다.
“그게 우리가 만나는 일에 상관이 있는 건가요?”
“상관이 없을 수도 있겠죠. 개인적인 질문을 해서도 안 되는 관계라 해도 이상할 건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방금 물을 마셨는데도 마른 침이 삼켜졌다.
“저는 상관이 있었네요. 죄송합니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 볼게요.”
그가 따라 나왔지만 무시하고 차에 올랐다. 급하게 출발을 시키자 그도 차를 타고 내 바로 뒤를 따라왔다. 그가 전화를 하고 신호를 보냈지만 계속 무시하면서 집으로 향했다. 거의 동시에 우린 집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무시할 거야, 당신!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갈 거라고. 하지만 그는 대문을 여는 내 손을 잡아챘다.
“얘기 좀 해요. 그렇게 가버리는 게 어디 있어요!”
“할 말이 없네요. 아무 얘기도 듣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내가 화난 상태로 운전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왜 내 말을 듣지 않는 겁니까!”
“충고 고맙네요. 다행이 화나지 않았어요. 그냥 당신과 대면하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우리 싸워야 하는 겁니까? 그냥 평소처럼 지내면 안 되는 거냐고요.”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서 그래요? 내 입으로 꼭 말해줘야 하는 거냐고요! 그래요. 나 당신 좋아했어요. 그런데 애인이 있다는 말 듣고 싫어졌어요. 당신이랑 밥 먹기도 싫고 웃고 떠드는 것도 싫어요! 얼굴 보기도 싫다고요. 대체 왜 나한테 잘 해준 거예요? 사람 오해하게 왜 그따위로 행동해요!”
“그렇게 하고 싶어서 했습니다. 지금도 홍주씨랑 불편하게 지내고 싶지 않아서 따라온 거구요.”
좋아한다는 내 말과 다르다. 그는 그저 불편함이 싫은 것뿐이다.
“자, 당신이 원하는 게 그거죠? 감정 없이 나랑 친하게 지내는 거. 당신 같이 잘난 사람이 왜 나랑 친하게 지내려는지 모르겠군요. 아, 그건가요? 내가 사장 딸이라서? 이거 좋은 감투였네. 몰랐어요. 당신 원하는 대로 해줄게요. 나도 아빠 회사 사람이랑 불편하게 지내고 싶지 않으니까.”
“왜 이리 사람이 꼬여 있어요! 그 말이 아니잖아요. 당신이랑 잘 지내고 싶다고요. 나도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잘 되지 않아요. 어느 순간 보면 당신과 웃고 있어요. 그게 즐겁고. 그냥 그 걸로는 안 되겠습니까? 서로 만나면 즐거운데 만나면 안 되는 가냐구요.”
“당신 뜻대로 해준다고 했잖아요. 그만 가요. 나 피곤해요. 소리치고 싶지도 않아요.”
난 그를 버려두고 돌아서 대문을 열었다. 집에 가면 마음껏 울 수 있을 것이다. 어서 들어가고 싶었지만 눈앞이 흐려져 열쇠는 구멍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