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단단한 이에 입술이 물려 있었다. 마치 입술이 물컹거리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것 같은 신비한 체험이었다. 첫 키스도 아니었다. 시린 겨울 강의실에서 술김을 내뿜는 키스를 받은 적도 있었고 더운 여름 남자친구의 집에서 거친 키스를 받아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이것과 그것이 함께 키스라 불려도 좋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의 입술을 마음껏 마신 다음에야 행인들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일단 들어갈까?”
“예.”
문을 넘어서자마자 다시 격렬한 키스가 시작되었다. 이 곳은 단순히 집이 아니라 오직 우리만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그의 머리칼은 거칠었지만 그것이 기분을 더욱 야릇하게 만들었고 뭔가를 원하는 소리가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한참 후 되어서야 떨어진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사랑이 담겨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바로 애인의 존재였지만 그 단어는 이 순간을 깨버릴 단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암묵적으로 말해선 안 되는 단어. 그녀는 누구일까?
“너 너무 늦지 않았어?”
습기 있는 그의 손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괜찮아요. 아직은.”
“이리로 앉아.”
침대에 기대어 앉은 그는 옆자리로 오라고 말했다. 바로 그의 옆자리가 내 자리라니. 그런 작은 사실조차 기쁨이었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본 풍경은 촌스러운 파란색 꽃무늬 벽지였지만 그 꽃들 하나하나 생명이 깃든 것처럼 보였으며 경쾌하게 춤추고 있는 것 같았다.
***
그 후 일주일동안 우리는 완벽한 연인으로서의 시간을 보냈다. 매일 퇴근길을 함께 했고 늘 저녁도 함께했다. 그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집에 바래다주었으며 작별 키스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있었다. 다른 여자의 흔적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늘 함께해주는 찬영이었지만 문득 생각나는 그녀의 존재는 나를 괴롭혔던 것이다.
그가 친구의 예식장에 가버린 토요일. 일주일 만에 혼자 있게 된 시간을 주체할줄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예식장에 간다고 하면서 혹시 애인이라도 만나러 간 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전화로 물을 용기까지는 없었다. 행여 그게 진실이라면 어쩌지, 라는 생각으로 내내 괴로운 주말을 보내야 했다. 잡념을 없애기 위해 부지런히 옷을 다리고 머리를 매만지고 화장품을 정리했다. 드디어 월요일 다른 날 보다 더 신경을 쓰고는 회사로 향했다.
“놀랐어. 우리 홍주보다 더 귀여운 여자가 걸어 들어오길래 봤더니 너더라.”
“그래서 실망이야?”
“아니, 귀여워, 정말.”
대변신한 모습에 그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야하, 귀여운 치마를 보니까 아이스케키가 하고 싶어지는 걸.”
“그런 상상을 하다니 갑자기 징그럽게 보인다.”
“왜 부끄러워?”
“부끄러운 게 아니라 사상이 의심스러워.”
“아니야. 정상적인 남자라면 다 나 같은 생각을 한다고. 내가 정상이 아니었음 좋겠어?”
“진짜 남자는 그런 생각을 해?”
“당연하지. 그러니까 그런 귀여운 옷은 입지 마. 자극 받으면 일하기 곤란하니까.”
“그런 모습 좀 봤으면 좋겠다. 자기는 일에 너무 열심히야. 오늘도 늦게 끝나?”
“아니. 주말에 못 봤으니까 데이트해야지. 가고 싶은 곳 있어? 없으면 내가 아는 곳 가자. 좋은 바가 있어.”
그가 안내한 곳은 은은한 재즈가 흐르는 흔한 바였다. 분위기는 좋았지만 다른 곳보다 훨씬 좋은 곳은 아니었다.
“맘에 들어?”
“응. 좋아.”
“난 여기 풍경이 마음에 들어.”
그가 마음에 든다는 풍경은 도시가 아름답게 보이는 야경이 아니었다. 우리가 앉은 자리는 바로 건너편에 있는 큰 건물이 자주 가깝게 보이는 곳이었다. 이상스러울 만큼 창문도 없는 큰 회색 건물은 대형 스크린처럼 그들의 시야를 꽉 채우고 있었다.
“벽과 마주하고 있는 바는 흔치 않지. 난 이 풍경이 좋아.”
“풍경이라고 말할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아니야. 가만히 들여다 봐봐.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아. 아득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회색 건물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처음에는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다가 그의 말대로 아득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좀 그런 것도 같네.”
“웬 줄 알아?”
“글쎄.”
“내 생각엔 우리가 회색 벽에 익숙해있기 때문인 것 같아. 늘 벽을 마주보고 있으니까 이젠 익숙해진 거지. 난 이 자리가 편해. 꼭 너에게 알려주고 싶었어.”
이해하긴 힘들지만 그와 함께 공유한다는 것은 기분이 좋았다. 칵테일 몇 잔으로 붕 뜬 기분이 된 나는 묻고 싶었던 질문을 생각해냈다.
“우리 그 창고에 있던 날 왜 뿌리치지 않았어?”
“나를 안고 있는 것 같지 않았어. 큰 나무를 안고 있는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 나무가 되는 기분도 나쁘지 않던데.”
“나무가 아니라 남자였어.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였겠지. 너 나 좋아하잖아.”
“대책 없이 당당하다. 못 말려.”
그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 속으로 들어왔다. 깍지를 낀 그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말리지 말아죠. 그냥 당당하게 있고 싶으니까.”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그가 늘 당당하길 바랐다. 창문에 투명 얼룩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리는 비는 회색 건물을 얼룩지게 만들었고 마음이 더 포근해 지는 듯 했다. 그 마음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집 앞에 그의 차가 서서히 속도를 낮추며 멈추어 섰다. 차안에서 나는 10분만 있다가 내리겠다는 말을 벌써 세 번째 반복하고 있었다. 그와 헤어지고 방안에 들어서면 늘 애인이란 거대한 그림자가 맞이했던 것이다. 애인이 있어도 괜찮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나였고 그렇기에 감수해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를 누군가와 공유해야한다는 사실은 참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가 곁에 있을 때는 잠시마나 잊을 수 있었기에 그와의 이별은 하루하루 더 힘겨워지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면 꼭 전화해.”
“알았어. 도착하는 대로 전화할게.”
그가 집에 가는 30분 동안 전화기를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행여 다른 곳으로 가는 건 아닌지 내심 불안했고, 그에게 전화가 오고 나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데!”
하지만 그와의 통화가 끝난 다음엔 억울한 감정이 들어 핸드폰을 침대에 거칠게 던져버렸다. 그리고 침대에 엎드려서는 급기야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회사에 들어선 나는 남색바지에 하늘색 가디건 차림이었다. 오전 근무가 대충 마무리된 후에 커피를 타와 자리에 앉아서는 아직도 잠이 깨지 않는 듯 머리를 흔들어댔고 작은 손거울 속에 비치는 얼굴은 유난히 거칠어 보였다.
“정홍주대리!”
이부장이 화난 듯한 목소리로 불렀다.
“예!”
“재고 파악 제대로 한 거야? 장부엔 분명 두견주 2박스라고 되어 있잖아! 그런데 창고에 반 박스밖에 없다고.”
“그래요?”
“그래요라니? 일 진짜 설렁설렁 할 거야? 지금 매장에 두 박스 보내기로 할 건데 어떻게 할 거야?”
“공장에 물품 있나 알아보겠습니다.”
“공장에야 물품이 당연히 있겠지. 지금 공장에서 직접 물건을 보내면 시간이 몇 시인 줄 알아? 왜 기본적인 걸 못해? 홍주씨가 사장님 얼굴에 먹칠 하는 거 아나?”
아버지까지 들먹일 일은 아니었는데 이부장은 다른 때보다도 화가 많이 난 듯 보였고 전적으로 내 잘못이었기에 고개를 숙인 채 말을 듣고 있었다. 풀죽어 있는 나에게 잠시 나가자고 손짓을 한 건 사촌 언니, 명주였다.
“너 요즘 왜 그래? 혼자 베시시 웃질 않나, 정신 나간 사람처럼 갑자기 멍하게 있질 않나. 고민 있는 거야?”
“아니야.”
“그럼 회사 생활 슬럼프야?”
“요즘 내가 실수가 잦지?”
“응. 그런 것 같네. 일이 적성에 안 맞아? 아님 사람들 부대끼는 게 어려워?”
“어디가나 사람들 문제는 있잖아.”
“나도 사장님 조카라고 은근히 시선 받는 거 신경 쓰이는데 넌 오죽하겠냐? 부장님도 그래. 잘못해서 거래처라도 끊기면 곤란해지니까 너한테 책임 전가하려고 더 화내시는 거란 말이야. 일을 잘해도 칭찬은 없고 다들 지 회사려니 하고 잘못하면 욕만 먹고. 항상 본전도 못 찾잖아.”
“사람이랑 일 문제 아니래두.”
“아니긴. 너 귀민이 때문에 그러는 거지?”
“귀민씨?”
“신경 안 쓰였어? 난 그거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귀민씨가 왜?”
“너에 대해서 좋지 않은 소문들을 내고 있나봐.”
아무리 생각해도 귀민의 지나친 적개심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걸까? 이유를 좀 더 생각해보려 해도 찬영에 대한 생각만으로 용량 초과 지경인 머리로는 별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더욱 껄끄러워진 귀민과 마주치게 된 것은 편의점에 들렸다가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였다.
“어, 대리님!”
반가워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나는 가볍게 목례만 하고는 4층을 눌렀다.
“대리님, 스타킹이 나갔네요.”
귀민의 말대로 발등에 가는 줄이 나 있었다.
‘젠장.’
“고마워요. 몰랐네요.”
“요즘 정신이 통 없어 보여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데 그녀의 손이 홍주의 머리로 뻗쳐왔다. 홍주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피했고 귀민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의 손에 들린 흰 실밥을 들어보였다.
“어, 미안해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나봐요.”
이번에는 그 편에서 대답이 없었다. 그 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었다.
“귀민씨, 운전할 줄 알죠?”
“그런데요?”
“화곡동 매장에 이강주 다섯 병만 가져다 달래요. 그것 좀 부탁할게요.”
“매장이 어딘 지 모르는데요.”
“이따 내 자리로 와요. 매장 번호랑 위치 알려 줄게요.”
“알았어요.”
엘리베이터가 멈추자마자 귀민이 재빨리 나가버렸다. 나는 어지러움을 느끼고 벽을 잡았다.
‘잠이 부족했나봐. 오늘은 집에 일찍 가야겠어.’
오늘은 그를 만나지 않을 각오를 굳게 했지만 어느새 그가 집에 데려다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한테 익숙해지지 말아야해. 퇴근 시간이 되어 나는 차를 두고 택시를 이용할 생각으로 사무실을 나서려 하고 있었다. 컴퓨터를 끄고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날카로운 이부장의 목소리가 또 다시 나를 불렀다.
“정대리!”
“예.”
“화곡동 매장에서 왜 물건 안 가져 오냐고 난리야! 오늘 대체 왜 이래? 나 물 먹이려 하는 거야?”
** 반칙사랑 - 08. 어지러운 하루
** 반칙 사랑 - 08. 어지러운 하루
그의 단단한 이에 입술이 물려 있었다. 마치 입술이 물컹거리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것 같은 신비한 체험이었다. 첫 키스도 아니었다. 시린 겨울 강의실에서 술김을 내뿜는 키스를 받은 적도 있었고 더운 여름 남자친구의 집에서 거친 키스를 받아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이것과 그것이 함께 키스라 불려도 좋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의 입술을 마음껏 마신 다음에야 행인들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일단 들어갈까?”
“예.”
문을 넘어서자마자 다시 격렬한 키스가 시작되었다. 이 곳은 단순히 집이 아니라 오직 우리만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그의 머리칼은 거칠었지만 그것이 기분을 더욱 야릇하게 만들었고 뭔가를 원하는 소리가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한참 후 되어서야 떨어진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사랑이 담겨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바로 애인의 존재였지만 그 단어는 이 순간을 깨버릴 단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암묵적으로 말해선 안 되는 단어. 그녀는 누구일까?
“너 너무 늦지 않았어?”
습기 있는 그의 손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괜찮아요. 아직은.”
“이리로 앉아.”
침대에 기대어 앉은 그는 옆자리로 오라고 말했다. 바로 그의 옆자리가 내 자리라니. 그런 작은 사실조차 기쁨이었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본 풍경은 촌스러운 파란색 꽃무늬 벽지였지만 그 꽃들 하나하나 생명이 깃든 것처럼 보였으며 경쾌하게 춤추고 있는 것 같았다.
***
그 후 일주일동안 우리는 완벽한 연인으로서의 시간을 보냈다. 매일 퇴근길을 함께 했고 늘 저녁도 함께했다. 그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집에 바래다주었으며 작별 키스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있었다. 다른 여자의 흔적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늘 함께해주는 찬영이었지만 문득 생각나는 그녀의 존재는 나를 괴롭혔던 것이다.
그가 친구의 예식장에 가버린 토요일. 일주일 만에 혼자 있게 된 시간을 주체할줄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예식장에 간다고 하면서 혹시 애인이라도 만나러 간 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전화로 물을 용기까지는 없었다. 행여 그게 진실이라면 어쩌지, 라는 생각으로 내내 괴로운 주말을 보내야 했다. 잡념을 없애기 위해 부지런히 옷을 다리고 머리를 매만지고 화장품을 정리했다. 드디어 월요일 다른 날 보다 더 신경을 쓰고는 회사로 향했다.
“놀랐어. 우리 홍주보다 더 귀여운 여자가 걸어 들어오길래 봤더니 너더라.”
“그래서 실망이야?”
“아니, 귀여워, 정말.”
대변신한 모습에 그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야하, 귀여운 치마를 보니까 아이스케키가 하고 싶어지는 걸.”
“그런 상상을 하다니 갑자기 징그럽게 보인다.”
“왜 부끄러워?”
“부끄러운 게 아니라 사상이 의심스러워.”
“아니야. 정상적인 남자라면 다 나 같은 생각을 한다고. 내가 정상이 아니었음 좋겠어?”
“진짜 남자는 그런 생각을 해?”
“당연하지. 그러니까 그런 귀여운 옷은 입지 마. 자극 받으면 일하기 곤란하니까.”
“그런 모습 좀 봤으면 좋겠다. 자기는 일에 너무 열심히야. 오늘도 늦게 끝나?”
“아니. 주말에 못 봤으니까 데이트해야지. 가고 싶은 곳 있어? 없으면 내가 아는 곳 가자. 좋은 바가 있어.”
그가 안내한 곳은 은은한 재즈가 흐르는 흔한 바였다. 분위기는 좋았지만 다른 곳보다 훨씬 좋은 곳은 아니었다.
“맘에 들어?”
“응. 좋아.”
“난 여기 풍경이 마음에 들어.”
그가 마음에 든다는 풍경은 도시가 아름답게 보이는 야경이 아니었다. 우리가 앉은 자리는 바로 건너편에 있는 큰 건물이 자주 가깝게 보이는 곳이었다. 이상스러울 만큼 창문도 없는 큰 회색 건물은 대형 스크린처럼 그들의 시야를 꽉 채우고 있었다.
“벽과 마주하고 있는 바는 흔치 않지. 난 이 풍경이 좋아.”
“풍경이라고 말할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아니야. 가만히 들여다 봐봐.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아. 아득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회색 건물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처음에는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다가 그의 말대로 아득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좀 그런 것도 같네.”
“웬 줄 알아?”
“글쎄.”
“내 생각엔 우리가 회색 벽에 익숙해있기 때문인 것 같아. 늘 벽을 마주보고 있으니까 이젠 익숙해진 거지. 난 이 자리가 편해. 꼭 너에게 알려주고 싶었어.”
이해하긴 힘들지만 그와 함께 공유한다는 것은 기분이 좋았다. 칵테일 몇 잔으로 붕 뜬 기분이 된 나는 묻고 싶었던 질문을 생각해냈다.
“우리 그 창고에 있던 날 왜 뿌리치지 않았어?”
“나를 안고 있는 것 같지 않았어. 큰 나무를 안고 있는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 나무가 되는 기분도 나쁘지 않던데.”
“나무가 아니라 남자였어.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였겠지. 너 나 좋아하잖아.”
“대책 없이 당당하다. 못 말려.”
그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 속으로 들어왔다. 깍지를 낀 그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말리지 말아죠. 그냥 당당하게 있고 싶으니까.”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그가 늘 당당하길 바랐다. 창문에 투명 얼룩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리는 비는 회색 건물을 얼룩지게 만들었고 마음이 더 포근해 지는 듯 했다. 그 마음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집 앞에 그의 차가 서서히 속도를 낮추며 멈추어 섰다. 차안에서 나는 10분만 있다가 내리겠다는 말을 벌써 세 번째 반복하고 있었다. 그와 헤어지고 방안에 들어서면 늘 애인이란 거대한 그림자가 맞이했던 것이다. 애인이 있어도 괜찮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나였고 그렇기에 감수해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를 누군가와 공유해야한다는 사실은 참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가 곁에 있을 때는 잠시마나 잊을 수 있었기에 그와의 이별은 하루하루 더 힘겨워지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면 꼭 전화해.”
“알았어. 도착하는 대로 전화할게.”
그가 집에 가는 30분 동안 전화기를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행여 다른 곳으로 가는 건 아닌지 내심 불안했고, 그에게 전화가 오고 나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데!”
하지만 그와의 통화가 끝난 다음엔 억울한 감정이 들어 핸드폰을 침대에 거칠게 던져버렸다. 그리고 침대에 엎드려서는 급기야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회사에 들어선 나는 남색바지에 하늘색 가디건 차림이었다. 오전 근무가 대충 마무리된 후에 커피를 타와 자리에 앉아서는 아직도 잠이 깨지 않는 듯 머리를 흔들어댔고 작은 손거울 속에 비치는 얼굴은 유난히 거칠어 보였다.
“정홍주대리!”
이부장이 화난 듯한 목소리로 불렀다.
“예!”
“재고 파악 제대로 한 거야? 장부엔 분명 두견주 2박스라고 되어 있잖아! 그런데 창고에 반 박스밖에 없다고.”
“그래요?”
“그래요라니? 일 진짜 설렁설렁 할 거야? 지금 매장에 두 박스 보내기로 할 건데 어떻게 할 거야?”
“공장에 물품 있나 알아보겠습니다.”
“공장에야 물품이 당연히 있겠지. 지금 공장에서 직접 물건을 보내면 시간이 몇 시인 줄 알아? 왜 기본적인 걸 못해? 홍주씨가 사장님 얼굴에 먹칠 하는 거 아나?”
아버지까지 들먹일 일은 아니었는데 이부장은 다른 때보다도 화가 많이 난 듯 보였고 전적으로 내 잘못이었기에 고개를 숙인 채 말을 듣고 있었다. 풀죽어 있는 나에게 잠시 나가자고 손짓을 한 건 사촌 언니, 명주였다.
“너 요즘 왜 그래? 혼자 베시시 웃질 않나, 정신 나간 사람처럼 갑자기 멍하게 있질 않나. 고민 있는 거야?”
“아니야.”
“그럼 회사 생활 슬럼프야?”
“요즘 내가 실수가 잦지?”
“응. 그런 것 같네. 일이 적성에 안 맞아? 아님 사람들 부대끼는 게 어려워?”
“어디가나 사람들 문제는 있잖아.”
“나도 사장님 조카라고 은근히 시선 받는 거 신경 쓰이는데 넌 오죽하겠냐? 부장님도 그래. 잘못해서 거래처라도 끊기면 곤란해지니까 너한테 책임 전가하려고 더 화내시는 거란 말이야. 일을 잘해도 칭찬은 없고 다들 지 회사려니 하고 잘못하면 욕만 먹고. 항상 본전도 못 찾잖아.”
“사람이랑 일 문제 아니래두.”
“아니긴. 너 귀민이 때문에 그러는 거지?”
“귀민씨?”
“신경 안 쓰였어? 난 그거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귀민씨가 왜?”
“너에 대해서 좋지 않은 소문들을 내고 있나봐.”
아무리 생각해도 귀민의 지나친 적개심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걸까? 이유를 좀 더 생각해보려 해도 찬영에 대한 생각만으로 용량 초과 지경인 머리로는 별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더욱 껄끄러워진 귀민과 마주치게 된 것은 편의점에 들렸다가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였다.
“어, 대리님!”
반가워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나는 가볍게 목례만 하고는 4층을 눌렀다.
“대리님, 스타킹이 나갔네요.”
귀민의 말대로 발등에 가는 줄이 나 있었다.
‘젠장.’
“고마워요. 몰랐네요.”
“요즘 정신이 통 없어 보여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데 그녀의 손이 홍주의 머리로 뻗쳐왔다. 홍주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피했고 귀민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의 손에 들린 흰 실밥을 들어보였다.
“어, 미안해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나봐요.”
이번에는 그 편에서 대답이 없었다. 그 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었다.
“귀민씨, 운전할 줄 알죠?”
“그런데요?”
“화곡동 매장에 이강주 다섯 병만 가져다 달래요. 그것 좀 부탁할게요.”
“매장이 어딘 지 모르는데요.”
“이따 내 자리로 와요. 매장 번호랑 위치 알려 줄게요.”
“알았어요.”
엘리베이터가 멈추자마자 귀민이 재빨리 나가버렸다. 나는 어지러움을 느끼고 벽을 잡았다.
‘잠이 부족했나봐. 오늘은 집에 일찍 가야겠어.’
오늘은 그를 만나지 않을 각오를 굳게 했지만 어느새 그가 집에 데려다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한테 익숙해지지 말아야해. 퇴근 시간이 되어 나는 차를 두고 택시를 이용할 생각으로 사무실을 나서려 하고 있었다. 컴퓨터를 끄고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날카로운 이부장의 목소리가 또 다시 나를 불렀다.
“정대리!”
“예.”
“화곡동 매장에서 왜 물건 안 가져 오냐고 난리야! 오늘 대체 왜 이래? 나 물 먹이려 하는 거야?”
“그건 귀민씨를 보냈는데요.”
“귀민씨!”
“예?”
“귀민씨가 화곡동 매장 가기로 했나?”
“아니요.”
“정대리가 귀민씨가 갈 거라고 했는데 누구 말이 맞는 거야?”
“전 분명히 들은 적이 없습니다. 대리님이 제게 지시한 일이 없어요.”
“정대리!”
나는 어지럽고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