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칙사랑 - 12. 수신 불가 상태

나비2004.12.02
조회2,627

** 반칙사랑 - 12. 수신 불가 상태


“홍주씨는 귀여운 것보다 섹시한 옷이 잘 어울리겠어요? 그쵸?”

“눈에 보이시는 대로죠.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감사한 걸요.”


얼마 전 귀여운 여자가 되어보겠다는 여자는 섹시하단 칭찬이 슬펐다.


‘내 모습이 좋다는 거잖아. 슬퍼할 일 아니야. 억지로 귀여운 척 하는 거 보다는 낫잖아.’


마음을 위로하며 마신 커피에서 쓴 맛이 났지만 웃음을 잃지는 않았다.


“저희 아버지는 공무원이시죠.”

“영기씨 아버님 일은 궁금하지 않은데요. 전 영기씨가 마음에 들었어요.”

“아, 궁금해 하실 거라고 생각했죠. 그럼 무슨 얘기를 할까요?”

“영기씨에 관해서요. 취미는 뭔지 평소엔 어떤 걸 즐기시는지.”

“한국에서는 취미생활을 즐기기가 좋지 않아요. 파티도 그래요. 외국에서 공부할 땐 파티 가는 걸 좋아했었는데 여긴 진정한 하이클래스 파티가 드물어요. 아무리 좋은 곳에서 한다고 해도 어중이떠중이 다 몰려들거든요. 홍주씨도 아시죠?”

“아뇨. 전 파티는 여태껏 가본 적이 없어요.”

“잘 하셨어요. 볼 것 없거든요. 주로 홍보 파티들이 많아서 청바지를 입은 기자들이 오지 않나 정말 꼴불견들을 많이 보게 되요. 요즘은 선별해주는 친구가 있어서 그나마 분위기가 나은 곳만 다니죠. 언제 한 번 같이 가실래요?”

“좋아요. 흥미로운 걸요.”


준지는 나가서 통화를 하는지 좀처럼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색하거나 하진 않았다. 말투와 사고가 좀 재수 없긴 해도 즐거운 연예상대가 될 것 같았다. 준지가 돌아오고 잠시 후에 우린 술을 마시러 가기위해 일어섰다. 그가 계산을 하는 동안 준지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너 정말 대단하다. 저 오빠가 마음에 들어?”

“응. 괜찮은데. 매너도 좋고 얼굴도 깔끔하고. 왜?”

“난 너 화풀이 소개팅이라 저 오빠 데리고 온 건데. 네가 질색할 줄 알았거든. 어차피 한 번 보고는 아직 연예할 때가 아닌가봐, 볼 멘 소리를 할 것 같아서 그랬지.”

“영기씨가 왜 어때서?”

“좀 재수 없지 않아? 돈 많다고 다 저러는 건 아니라고. 저 오빤 완전 상류층에 피해의식 있는 사람이라 잘난 척이 심하잖아.”

“그것도 마음에 들어.”

“너 대단하다. 남자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다른 남자가 쏙 들어와? 죽도록 사랑했다고 할 땐 언제고.”

“준지야, 난 말야. 사랑이 진짜 있는 것 같아. 그런데 없다고 믿기로 했어. 그게 살기 편할 것 같더라. 이젠 돈 많고 매너 좋은 남자 아니면 돈 없고 매너 없는 남자 두 가지만 보여. 너희도 왜 능력 있는 남자 타령하잖아.”

“갑자기 이러니까 무서운 거야. 아무튼 조심해. 저 오빠 여자 밝히기로 유명하니까. 저 오빠랑 만나는 건 무조건 반대야.”

“알았어. 조심할게.”


나는 준지의 말대로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꼬냑 몇 잔만 마시고 집에 들어왔지만 그의 애프터를 거절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집에 데려다 준 그는 ‘다음에는 단 둘이 만나죠’ 라는 문자를 보냈고 너무 쉽지 않게 보이기 위해 그저 ‘오늘 즐거웠어요’ 라고 간단한 문자를 보냈다.


‘남자가 재수 없어서 다행이었어. 절대 사랑에 빠질 수 없는 남자야.’


스타킹을 벗어서 바닥에 던져 놓고는 화장을 지우지도 않은 채 침대에 누워 한참 천장만 바라보았다. 아주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이었다. 찬영씨가 있고 없고에 따라 세상이 달라보이다니. 가슴이 꽉 찬 듯 먹먹했지만 허전하기도 했다. 입술에 그에 대한 그리움이 몰려와 거칠게 문지르고 화장을 지우기 위해 방을 나섰다.


“홍주야! 왜 거실에서 잤어?”


이십년 넘게 들어온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쩌렁쩌렁 울렸을 때 덜 외롭단 느낌이 들어 좋았다.


“방에서 자기 싫더라고.”

“얘가 점점 왜 저래? 어제 술 마셨어? 니 아버지 닮아 술을 좋아하니까 하는 짓도 닮는구나. 지긋지긋한 술. 술을 뭐가 좋다고 마시는 지 몰라.”


가끔 아버지가 거실에서 주무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것들이 싫어서 낯선 곳에서 잠이 들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고 눈을 떴을 때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딱딱한 바닥에서 잔 탓에 몸이 찌뿌둥했다. 기지개를 몇 번 펴고 식사 준비를 돕고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다 되어갔다.


‘회사 가기 싫다. 아예 그만 둬 버릴까?’


그와의 대면은 날마다 더 힘겨워지고 있었다. 잊기는커녕 눈을 감아도 그가 보일 지경이었다. 출근시간마다 가기 싫은 마음과 싸워야 했고 그것에 지쳐가고 있었다.


출근 시간이 조금 지나고 연미에게 문자가 왔다.


[투명인간 놀이는 잘 하고 있는가? 난 이제 퇴근. 죽을 맛이네.]


하루 종일 그를 의식하면서 모른 척 하는 것을 연미는 투명인간 놀이라고 불렀다. 나에게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그를 무시하는 일은 서툴기만 했고 우연히 마주칠 때는 가끔 그를 멍하니 바라보는 실수를 할 때도 있었다.


[그럭저럭. 잘 자, 친구. 새남친 생겼으니 잘 되겠지.]

[그 재수남?]

[재수남 아니네. 잠이나 자셔. 피부 뒤집어지겠다]


연미에게 문자를 몇 번 교환하던 중에 그에게도 문자가 왔다.


[좋은 아침! 오늘은 더 예뻐 보인다.]


뒤돌아보니 그가 책상에 앉아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난 그가 보는 앞에서 핸드폰 배터리를 빼버렸다. 왼손엔 핸드폰을 쥐고 오른손엔 배터리를 쥔 채 그를 노려보았다.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말라는 뜻이었다.


‘보내주는 문자에 익숙하게 만들지 말란 말이야! 네 눈빛 하나에도 기대하게 되는 내게 무슨 짓이야!’


더 이상 핸드폰은 문자를 수신할 수 없을 것이다. 나도 핸드폰처럼 내 몸의 일부를 도려내 그의 슬픈 저 감정의 덩어리를 받을 수 없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더는 받고 싶지 않았다. 그의 반쪽짜리 사랑. 나를 아프게 할뿐이니까.


“얘기 좀 해!”

“회사에서 무슨 짓이에요!”


화장실에서 나오길 기다린 그가 손목을 낚아챘다.


“얘기 좀 하자고. 이런 방법이 아니면 기회도 주지 않잖아!”

“놔요, 이거.”

“소리 지르려면 질러. 사람들 앞에서도 나 얘기할 수 있어.”

“그렇게 당당해? 애인은 따로 있는데 날 좋아하고 있다는 게 자랑이야?”

“나가서 얘기해!”


그는 나를 비상계단으로 끌고 갔다.


“너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지? 나한텐 말도 안하고!”

“그래. 그게 뭐 어때서? 당신이 애인이 있었다고 미리 말한 것처럼 나도 한 달 후에 헤어질 거라고 미리 말했어야 했나?”

“한 달 전이었어? 결심한 게?”

“그래. 한 달 전이야. 한 달 전이 아니라 더 일찍이었어야 했다고 후회하고 있어!”

“너 정말······.”


고개를 떨군 그는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담배 피우지 마! 할 얘기나 해.”

“우리 다시 만나.”

“싫어! 왜 그 쪽 애인이 헤어지재? 그래서 한가해졌어?”

“소모적으로 싸우지 말자. 난 정말 너랑 다시 시작하고 싶어. 나도 잘못이 많았지. 지금 후회하고 있다고. 잘못을 바로 잡을 시간을 줘. 이따 퇴근하고 만나자. 할 얘기들이 많아.”

“싫어. 지금 해. 애인이랑 헤어졌어?”

“이따 얘기 하자.”

“대답을 못하는 군. 그래. 좋아. 만나. 헤어졌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나도 애인이 생겼어. 그래도 괜찮다면 만나. 나도 이제 내 마음 반쪽밖에 줄 수가 없어. 어때?”

“정홍주! 사랑하면 믿어야 하잖아. 너 어떻게 날 한 번도 믿질 못하니?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정말 네 멋대로 구나. 애인이 생겼어? 헤어진 지 3일 만에? 그래. 그 애인 만나라. 사정한 내가 잘못한 것 같다.”


그는 들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내치고는 발로 밟았다. 황색의 입자들이 지저분하게 흩어져있었다. 그걸 보는데 마치 내 마음이 밟힌 것 같아서 나 자신이 가여워졌고 결국은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


‘나쁜 자식! 다신 너 때문에 울지 않을 거라고 맹세했는데. 너 이제 싫어. 아주 미워할 거야!’


담뱃잎 위로 내 눈물이 떨어졌다. 젖은 담뱃잎들은 담배의 기능을 하지 못한 채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귀민씨! 이리 와봐요.”

“어머, 대리님 우셨어요? 아까 찬영씨랑 같이 나가는 것 같던데.”

“귀민씨가 신경 쓸 일 아니잖아요. 기껏 밥 몇 번 먹은 남자 못 잊어서 뒤쫓고 있었어요? 그럴 시간에 업체 명단 전화번호나 정리해놓지. 이 번호 옛날 거잖아. 어제 하루 종일 이거 작업 본 거 맞아요?”

“속상했나 봐요. 괜히 저한테 짜증을 내시고. 그러시면 안 되는 거죠.”

“되고 안 되고는 내가 판단하니까 가봐요.”


귀민과의 사이는 여전했다. 그녀는 내 신경을 못 긁어서 안달이었고 이젠 익숙해져서 기분이 별로 상하지도 않았다. 그저 말투겠거니, 하고 넘기게 되었고 태연한 모습에 귀민이 약올라하는 것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돌아볼 매장이 있어서 외근을 나가려던 순간 영기씨에게 전화가 왔다.


[홍주씨! 오늘 바빠요?]

“지금 외근 나가려던 중인데. 언제 일이 끝날지 모르겠어요.”

[아쉽네요. 오늘 꼭 모시고 가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저도 아쉬운데요. 오늘은 힘들지만 다음에 꼭 봬요. 사실 지금 옷이 엉망이에요.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서요. 이해해 주실 거죠?”

[알겠습니다. 예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것 좋은 의미로 알고 있을게요. 저녁에 전화해도 되죠?]

“그럼요. 기다릴게요.”


생각보다 남자를 만나는 일은 쉬운 것 같았다. 마음에 없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거절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음에 만날 여지만 남겨주면 남자들은 미끼에 걸린 물고기처럼 움직였다. 확 당겨서는 안 되고 당겼다가 풀어주었다가를 반복하면서 낚으면 되는 것이다. 너무 큰 욕심만 없다면 세상을 재미있게 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외근을 하면서도 내내 핸드폰에 신경이 쓰였다. 이따 퇴근 후 보자는 그의 말에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하지만 끝내 전화는 오지 않았다.


‘영기씨나 만날 것 그랬나봐.’


약속을 잡지 않고 그를 기다린 미련스러움을 원망하며 집으로 핸들을 돌렸다. 빨리 방 천장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익숙한 곳으로의 도피는 도심의 꽉 막힌 차량들로 점점 늦어져 갔다.